【김예진(金禮鎭) (1896∼1950)】 "1926년 상하이 일본영사관 폭탄 투척으로 복역"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출신으로 1898년 9월 5일 태어났다. 강서군(江西郡) 성태면(星台面) 성삼리(星三里) 출생으로 나오는 기록도 있다. 본관은 충주, 자는 두칠(斗七), 호는 정계(正溪)라 불렀다. 1915년 12월 23일 한도신(韓道信)과 결혼하였다.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을 졸업한 뒤 숭실대학 재학 중 1919년 3월 1일 평양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신병으로 5개월 만에 풀려난 뒤, 중화군(中和郡)·강서군·대동군 일대를 무대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이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20년 3월 29일 평양에 들어와 ‘독립만세 운동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나라의 운명과 오등(吾等)의 운명이 같다’라는 제목의 격문을 등사하여 숭실중학 기숙사에 있는 최봉민·박성식 등과 배포하였다. 그 해 5월에는 상하이에서 온 김석황(金錫璜)과 평양 기흘병원에서 평양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한 ‘대한민국 의용대(義勇隊) 평양지단’을 결성하였고, 서무부장에 선임되었다. 이에 앞서 상하이에서도 손정도(孫貞道)를 중심으로 의용단이 조직되어 김석황을 총무로 선임하였는데, 김정목·김공식 등과 같이 단원이 되었다. 김석황과 함께 국내에 침투하여 국내 독립운동세력과 연계를 시도하였다.
평안도 일대를 무대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이던 중, 1920년 5월 17일 군자금 모집원 이춘성(李春成)과 대동군 용산면(龍山面) 하리(下里) 최정식(崔貞植)의 집에 일시 머물렀는데, 압록강 대안에 본부를 둔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 제2부 외무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강진석(康晋錫)이 찾아와 의용단에 참여키로 하였다. 이후 ‘7월 20일 진남포에서 선편으로 상하이로 갈 예정’이라고 하면서 그곳을 떠났다.
1920년 6월 강서군 성태면 각지의 청년단을 조직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강서군 반석면(班石面)에 있는 김경하의 집에 청년 대표들을 모아놓고, “지금 조선 상황을 보면 우리들 청년들은 수수방관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는 먼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 우리들은 2천만 동포의 의무로서 반드시 이 사업을 지원해야 한다”고 하여, 새로운 단체로 대한독립일신청년단(大韓獨立日新靑年團)의 결성을 이끌어냈다.
이 무렵 최봉주(崔奉周)·조형신(曹亨信) 등에게 대한독립여자청년단 조직을 권유하고, 다시 두 사람을 시켜 안인대(安仁大)·최영반(崔靈磐)·고유순(高有順) 등을 포함시켜, 남자부와 대등하게 이왕의 향촌회(鄕村會) 여자부 회원들을 토대로 여자부 청년단을 독립적으로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 불온문서 배포, 반일사상 선전 등의 활동을 전개하도록 이끌었다. 대외 명칭은 ‘대한일신청년회(大韓日新靑年會)’를 사용키로 하였는데, 일제 기관은 그를 이 단체의 ‘고문’으로 파악하였다.
1920년 7월에는 장혜근·장인갑 등 12명과 미국 국회의원단의 방한에 맞추어 평안남도 제3부 청사·평양경찰서 청사·평양부 청사에 폭탄을 던지기로 결정하였다.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그 해 8월 3일 밤 9시경 3대로 나누어, 문일민(文一民)·우덕선(禹德善)·김효록(金孝錄)과 함께 평안남도 제3부 청사에, 장덕진(張德震)·안경신(安敬信)은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평안남도 제3부 청사의 외벽 일부와 유리창이 파손되고, 평양부청과 평양경찰서에 던진 폭탄은 불발되었다. 일행과 함께 현장을 빠져나와 평양 칠성문 밖에서 마주친 순사를 저격해 부상을 입힌 뒤 피신하였다. 이후 안경신이 체포되었으나, 무사히 상하이로 건너갔다.
1922년 말 작성된 일제 자료에서는 인성학교(仁成學校)의 통신연락처가 ‘김예진(百爾里, 厚康里)’으로 되어 있고, 당시 인성학교의 직원은 ‘안창호와 조상섭 등 15명’으로 파악되어 있다. 인성학교 운영과 관련하여 적지않은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듬해 초 일제 상해총영사 명의로 작성된 ‘상하이 난징 지역에 거주하는 불령선인(不逞鮮人) 중 유력자 명단’에도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1923년 여름 대홍수로 국내에 많은 수재민이 발생하자, 상하이 한인사회에서는 ‘재상해내지동포수재구제회 총간사 김승학(金承學)’ 명의로 의연금을 동아일보사에 기부하였는데, 이때 의연금을 출연하였다. 1925년 6월 실시된 교민단 선거에서 안공근·김두봉·박창세·최석순·송병조 등과 같이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독립운동을 빙자하여 거주 한인을 대상으로 금품 갈취 강도 사건 등이 빈발하자, 1925년 6월 13일에는 임시정부 내무차장 나창헌, 경무국 참사 강창제, 고준택 및 박창세·유창준·김정근·박규명 등과 프랑스조계 임시정부 사무실에 모여 “일부 불량배가 민족의 체면을 훼손시키고 독립운동자의 위신을 더럽히며, 신성한 광복운동자단체 명의를 도용하여 학자금을 강요하거나 상인의 돈을 갈취하고 있다.”고 지적한 다음, “이후 임시정부의 양해 없이 독립을 표방하여 동포의 금품을 강탈하는 자는 경무국에서 엄벌한다.”고 경고하며, 경무국 활동을 지원하는 단체로서 정위단(正衛團)의 조직을 선언하였다.
1925년 12월 정위단원 박창세·김창건·강창제·고준택·김광선·박규명 등과 강력한 단체를 조직하여 다른 단체에 대항하고, 놀랄만한 계획을 실행하여 세인의 이목을 놀라게 한다는 목적으로 1926년 1월 1일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였다.
1926년 3월 상하이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던졌다는 이유로 5월 14일 붙잡혔다. 조사 과정에서 이전 평안남도청 폭탄 투척 의거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평양으로 압송되어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과 폭발물 취체 벌칙 위반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평안남도청 폭파 혐의 입증 불충분과 혐의 사실 부인 등으로 예심기간만 1년 이상 걸렸다. 결국 “상해 황포탄(黃浦灘) 하류를 통과하던 기선 안에서 권총과 폭탄을 휴대한 조선 청년 4명이 상해 세관 관리에게 피착(被捉)되었다 함은 별항과 같거니와, 그들은 평안북도 선천 출생의 이모(李某) 외 3명으로 요전에 상해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던진 김예진의 일파”라는 보도 기사처럼 ‘상해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던진 혐의’는 끝내 입증되지 않았다.
1927년 12월 10일 재판에서 평안남도청 폭파 혐의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받고, 대한일신청년단 결성과 3·1운동 1주년 기념 문건 배포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후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이른바 ‘은사(恩赦)’ 조처로 잔여형기 23일의 감형을 받아 1928년 12월 2일 풀려났다.
1929년 12월 9일 신간회 평양지회 발의로 열린 차가지임감하운동협의회(借家地賃減下運動協議會)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결성된 평양차가인동맹(平壤借家人同盟)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2월 13일 평양차가인동맹 집행위원회에서 상무집행위원 겸 서무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0년부터 기독교계에서 적극 활동하며 1931년 평양신학교에 진학, 1938년 졸업하여 안주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평원, 용천, 만주 펑황성(鳳凰城) 등지에서 목회를 한 바 있고, 해방 이후 후암교회 목사와 대한신학교 교수 등으로 활동하다가 1950년 8월 10일 6·25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