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집 안철수 원고 (6편)
새순
죽은 줄 알았던 나무에
연둣빛 새순이 돋을 때 보았다
저 생명의 힘—
결코, 단단하지 않은
저 보드라움이
쇠붙이보다 더 강하다는 걸
혹한을 이겨내고
썩어 문드러지지 않으려
밤새 뒤척였던 거야
말라 비뚤어져 죽은 듯 서 있는
제 둥치에 기대어
파릇파릇 불끈 돋아난
저 놀라운 자태—
죽은 듯 서 있던,
아니, 서 있지만 이미 죽은
눈감지 못한 제 아비
가랑이를 붙잡고
꼼지락꼼지락 일어선 거야,
오, 저 생명의 힘, 새순
마음을 그리다
초등학교 앞을 지나다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본다
교문을 사이에 두고
엄마와 아이가 꼭 쥔 손을 놓는 순간—
잠시의 이별이지만,
세상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다
아이에게 새로운 삶을 가르치는
거룩한 시간,
서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점점 멀어지며 손을 흔든다
잡은 손을 놓고
잠시 떨어져야 하는 그 시간이
그들에겐 긴 이별처럼
마냥 두렵다
이별이 두려움을 만들고,
허공에 두려운 마음을 그린다
떼어내려는 엄마의 손,
놓치지 않으려는 아이의 손—
그 짧은 순간의 풍경 속에서
시스티나성당 ‘천지창조’ 한 장면을 본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그 끈끈함이
세상을 만들고 태초의 문을 연다.
오래된 비밀
마음을 비워내는 일은 간단치 않다
다 비워내고도 남아있는 비밀들이
가끔은 고개를 들고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한다
누구나 비밀 몇 가닥 마음속에 두고 산다
살아오면서 가슴속에 간직한 비밀들이 점점 늘어나
꽉 찬 생각의 주머니가 버겁다
마음속에 간직한, 오래된 비밀들을
예리한 칼로 도려내 흐르는 강물 위에 버린다
도려낸 비밀도 모양과 크기가 서로 다르다
어떤 비밀은 무거워 그 자리에 가라앉고
어떤 비밀은 가벼워 가라앉지 않고
강물을 따라 흘러가며 물결이 된다
오래 간직한 것은 버리는 게 아니다
밤사이 빠져나간 비밀의 흔적을 움켜잡고
등이 휜 채 잠에서 깬다
품속이 허전하다
비밀을 버리고 돌아와 뒤척이며 잠들지 못한 밤
불안이 생각을 헤집고 강물처럼 불어나
강에 나가 내 비밀의 안부를 묻는다
그대의 비밀은 안전하게 잘 있다고
썩지 않고 잘 자라고 있다고 강이 말한다
다만 물결에 휩쓸려간 비밀은 소식을 모른다고
데리고 간 물결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강에 버린 비밀들이 썩지 않고 잘 자라고 있다니
또 물결에 쓸려간 비밀들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
그 강물은 흐르고 흘러 언젠가는 바다를 만나
생을 마감하며 유언처럼 재잘재잘 내 비밀들을 불지도 몰라
아무래도 바다에 닿기 전에 그 강물을 찾아야겠다
칼로 비밀을 도려낸 마음이 덧나서 쓰리고 아프다
간직한 비밀을 버리려고 마음에 아픈 상처를 냈다
비밀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는 것인데
소중한 것을 강물에 버리다니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멈춤의 흔적
지나는 시간 속에서
멈춤의 흔적을 본다
잠시 머문 것들의 흔적
흔적을 꿰맨 생각의 옷
유년의 기억을 꺼내 입는다
마당에 누워 바라본
유년의 하늘은 맑았던가
아니면 흐렸든가
우물에 빠져 올려다본 하늘,
감나무 사이로 보이던 그 하늘에
구름이 있었던가
구름은 있다가도 사라지는 것
하늘이 푸르다는 것은
지워지지 않은 기억 때문
기억을 끌어당겨 들춰보면
그 아래 납작 엎드린 것들이 보여
떠나지 않고 흔적으로 남은 그것들
사라진 것들은 언제나 투명하지
토막 난 기억의 해진 상처를
마름질해 옷을 입혀보면 보일걸
기억을 더듬어보면 보여
잠시 멈춘 흔적은
이미 사라진 것 위에
기억으로 남아있지.
폐가
지붕 한쪽 모퉁이가 무너진 집도
버티고 서있는 동안엔
따뜻한 인정을 부르던 집이었다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던 처마 아래
온기를 나누던 안방
그 벽에 걸린 달력이 해를 넘겨 멈춰있고
작은방 창문 아래 재봉틀에는
어머니의 손길이 거미줄 속에 얌전히 갇혀 있다
냉기를 잃어버린 냉장고는
문 하나 열지 못한 채 세월을 견디고,
밥그릇과 사기그릇은
누군가의 허기와 위안을
끝내 놓지 못한 표정으로
찬장에 기댄 자개 소반 위에서
마지막 밥상의 온도를 기억하고 있다
이 무너지는 집도
기둥이 버티고 서있을 땐 집이었다
가족을 이룬 지아비 지어미가
둘러앉은 어린 자식들과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며
따뜻함을 서로 나누던 집이었다
세월이 흘러
노부부만 남은 집,
객지에 나간 자식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버지의 굽은 어깨 너머로,
저녁마다 문턱을 쓸며
하루의 먼지를 털어내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겹쳐보인다
기둥이 버티고 서 있을땐
이 집도 온기를 나누며
아침을 열고 하루를 닫던
따뜻한 집이었다
기둥을 무너트려 지붕이 내려앉자
집은 먼저 떠난 사람들 처럼
희미하게 남은 인정마저 조용히 사라졌다
무너진 지붕과 담장이 땅속 깊이 묻히고
흔적도없이 사라진 집터는
경계도 없는 공터가 되었다
발길마저 뜸해져
지번(地番)으로만 남은 자리,
집 없는 공터에는
온종일
잡풀들만 다투듯 무성하다.
참말 아닌 거짓말
살겠다는 말 보다
더 많이
입에 달고 사는 말,
죽겠다는 말
좋아 죽겠다
바빠 죽겠다
아파 죽겠다
신나 죽겠다
더워도, 추워도
죽겠고
미워도, 졸려도
죽겠다면
넌 예뻐도 죽겠다
배가
고파도,불러도,아파도
죽겠다면
정말 힘들어 죽겠다
행복해도 죽겠다
심심해도,피곤해도
귀찮아도 죽겠다면
난 짜증나 죽겠다
죽고 싶다가 아닌
버릇처럼 튀어나온
참말 아닌 거짓말,
죽겠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