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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9일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후 다섯째 주일)
부르심: “작은 자”에서 “큰 자”로
사6:1~8; 고전15:1~11; 눅5:1~11
오늘 읽은 세 본문에서 우리는 공통된 주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명”, 즉 부르심Calling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서6장의 본문은 8세기 예언자 이사야가 소명 받는(부름 받는) 유명한 장면이지요. 또한 누가복음 본문은 게네사렛 호수에서 고기 잡던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장면이며, 부활장이라고 이름 붙어진 고린도전서15장 앞부분은 발신자인 사도바울이 사도로 부름 받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사도로 불릴만한 자격도 없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사도”인 자신을 주님께서 불러 주셨다고 소개하고 있지요.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소명” 혹은 부르심(Calling)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받았다면, 여러분은 소명을 받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 예언자 이사야나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 또 사도바울까지,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인물들과는 달리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소명을 받고 살고 있는 것일까요? 소명은 어디 큰일들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것이고 우리는 특별한 부르심을 받지 못한 것일까요?
파커 파머는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소명의 참된 의미는 ‘Vocation’이라는 단어 안에 숨겨져 있다. 소명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로 ‘목소리’(voice의 어원인 vocatio)이다. 소명은 내가 추구해야 할 목표를 의미하지 않는다. 소명은 내가 들어야 할 내면의 부름의 소리이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가면서 이루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말하기에 앞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내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vocation이나 Calling이 모두 “목소리”, “부르다”라는 말에서 왔다는 것은 “소명”이라고 하면 뭔가 평생에 이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역할을 말하는 것 같은데, 이 두 말을 “부르심”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맡을 역할”이라기보다는 “성장해야 할 존재”라는 의미로 받게 됩니다.
파커 파머에게, 소명(부르심)이란 나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라고 ‘저쪽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닙니다.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이 불러내서 “큰 일”을 할 임무를 맡겨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선적으로 받고 있는 부름은, 본래 타고난 그 사람이 되어,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본연의 자기를 완성하라는 ‘여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입니다. 저는 이것을 역할에 한정된 “작은 자”에서 본연의 자기를 완성하는 “큰 자”로의 부르심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주인공들, 이사야나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그리고 사도 바울이 받은 소명, 부르심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받은 부르심의 공통점은 “작은 자”에서 “큰 자”로의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자신을 “넘어서라”는 부르심입니다. 여기서 “큰 자”로의 부르심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내십시오. 당신을 최고로 만들어 가십시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작은 나”를 넘어 “큰 나”를 사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성장하라는 부르심이고, 세상 사는 동안 진정 행복하게 살라는 부르심입니다.
오늘 이사야의 부름 받는 장면은 일종의 누미노제의 경험을 보여줍니다. 지극히 거룩한 곳, 천상의 회의에 이사야가 참석해 있고, 거기서 부름을 받게 됩니다. 이사야가 부름 받는 때가 “웃시야가 죽던 해”라고 합니다. 웃시야(아사랴)는 유다를 50년 동안이나 통치했는데, 긴 통치기간이 말해주듯, 강력하고 안정적으로 유다를 이끈 왕이었습니다. 그가 말년에 피부병(나병)으로 인해 그 아들 요담이 섭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웃시야는 “백성들의 영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요하네스 페더슨; 고대 이스라엘의 삶에 관한 저명한 권위자) 왕이었습니다. “생명을 전달하는 수액이 한 나무의 가지들을 타고 흐르듯이 축복과 힘은 왕으로부터 나와 온 나라를 타고 흘렀습니다.”(버나드 앤더슨) 그러므로 웃시야의 죽음은 백성들로 하여금 “영혼의 중심”을 잃어버린 느낌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특히 그의 아들 요담은 무력하였고 강대국 앗시리아의 위협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때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 즉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봅니다. 스랍들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그 우렁찬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며,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완전히 누미노제의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거룩함과 신비 앞에서 완전히 압도당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반응은 이것이었습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주님을 만나 뵙다니!”
그는 엄청난 “거룩” 앞에서 자신의 “부정함”을 깨닫습니다. 이것은 너무 “큰 것”이 압도당해 자신의 “작음”을 보게 된 자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름은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였는데, 이사야의 대답은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였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제가 보기엔, 이제 “작은 자”에서 “큰 자”로 자라겠다는, “작은 자”에서 “큰 자”로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여기서 “큰 자”와 “작은 자”는 무슨 역할이나 직업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아시겠지요? 자신이 어디까지 성장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그 동료들의 부름 받음도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능숙한 어부였던 이들은 게네사렛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려 밤새도록 애를 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그들은 허탈한 마음으로 조업을 끝내려고 그물을 씻고 있었을 때 예수님이 베드로의 빈 배에 오르시고, 뭍에서 배를 조금 떼어놓으라고 하시고는, 배에 앉아 무리를 가르치십니다. 아무 것도 잡지 못해 비어 있는 배와 예수님의 올라타셔서 말씀으로 풍성해진 배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 다른 배에서 조업하던 동료들에게까지 도움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잡은 고기는 두 배에 가득 차서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시몬의 반응을 보십시오. 시몬은 놀라고 두려워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떠나주시기를 빌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작음”을 본 것입니다. 앞에서 이사야가 압도되었던 것과 비슷한, 소위 누미노제의 놀랍고 두려운 감정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받은 부름은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던 데서 사람을 낚으라는 것은 “큰 사람”이 되라는 요청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배를 뭍에 댄 후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던 일을 내버려두고 새로운 일과 역할로 옮겨갔다는 말보다는, “자신이 들어야 할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자신의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는 말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을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자신이 보는 “작은 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부름 받았을 때, 그는 “자신 안에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큰 자”)를 보게 되고,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신다”고 알게 되었고, 이 본질적인 깨달음이 그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 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성장하라고 부르시는 내면의 소리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를 향한 일차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부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화하라는, 성장하라는, 큰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가슴 뛰는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갖 피조물을 불러내시는 부름의 목소리입니다.
“천상과 지상을 지나고, 우리의 심장과 살아있는 모든 것의 심장을 지나며 불어대는 거대한 숨, 강한 외침Cry이 있다 ―우리는 그 외침을 신God이라고 부른다. 식물들은 고인 물 옆에서 미동 없이 계속 잠자고 싶어 했지만, 그 외침이 그 안에서 솟구쳐 격렬하게 뿌리를 흔들어 댔다. ‘떠나라, 땅에서 일어나 걸어가라!’
만약 나무가 생각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었다면, ‘싫어요, 나더러 도대체 뭘 하라는 거예요? 불가능한 걸 요구하고 있어요!’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외침은 동정하지 않고, 계속 뿌리를 흔들어대며 소리쳤다: ‘가거라. 땅을 떠나 걸어가라!’ 이렇게 외침은 몇 억겁 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보라, 열망과 몸부림의 결과로, 움직이지 않던 나무를 벗어나 생명은 자유롭게 되었다.
동물들이 나타났다 ― 벌레들은 물과 진흙 속에 둥지를 틀었다. ‘여기가 제일 좋아’ 그들이 말했다. ‘평화롭고 안전한 걸, 꼼짝하지 않을래.’
하지만 맹렬한 외침은 그들의 급소를 가차 없이 내리쳤다. ‘진흙을 떠나, 일어서서, 더 좋은 너를 낳아라!’ ‘싫어요! 할 수 없어요!’ ‘너희들은 못해도, 나는 할 수 있다! 일어나라!’
그런데 보라! 몇 억겁의 시간이 흐른 후에 아직 굳지도 않은 다리를 후들거리며 인간이 나타났다.
인간은 켄타우로스와 같아, 말발굽은 땅에 박혀있지만 가슴에서 머리까지 온 몸은 무자비한 외침으로 인해 애쓰며 고통 받고 있다. 다시 몇 억겁 동안 인간은 동물의 껍데기에서 벗어나려고 싸워왔다. 그리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이제는 인간의 껍데기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몸부림이다. 절망 속에서 인간은 외친다.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꼭대기까지 왔는데, 그 너머는 심연이야.’ 그때 외침이 대답한다, ‘내가 그 너머다. 일어서라!’”
여러분, 부르심의 핵심에는 “더 큰 자기”가 되라는 내면의 소리가 있습니다. 진정한 너 자신이 되고, 너 자신을 넘어서 너를 낳으라는 부름이 있습니다. 진화하라는, 성장하고 그래서 마침내 거룩해지고(신화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는 부름이 있습니다.
지금 40대, 50대, 60대, 이제 인생을 갈무리해야 하는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는 당혹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소명이나 필생의 할 일을 생각해야 하나? 내가 무슨 일을 더 하겠나? 그러나 이런 생각도 우리가 할 일의 크기나 목표를 맞추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생각입니다. 파커 파머의 말대로, 소명이 나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라고 ‘저쪽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 타고난 그 사람이 되어,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본연의 자기를 완성하라는 ‘여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온다면, 우리는 우리의 나이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외치고Cry 계십니다. 마음을 넓히라고, 사랑하는 데까지 자라라고! 이것은 어떤 행위로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품으로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부르심에 앞서 우리의 한계와 약점을 보는, 우리의 “작음”을 보는 지난한 시간이 있습니다. “작음”은 우리를 초라하게 하고 두렵고 떨리게 합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나의 이 한계와 약함은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 때문이라고! 나의 초라함과 취약함은 내가 원하는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못한 때문이라고!
우리의 “작음”을 제대로 보는 것이 부르심의 시작입니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되 판단하지 않고 보는 것입니다. “작은 자”에서 “큰 자”로 성장하라고 할 때, 우리가 받는 인상은 빨리 “작은 자”를 탈출해야 한다는 강박입니다. 더 이상 “작음”에, 한계와 약점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소리로 듣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리는 대부분 에고의 소리입니다. 어서 속히 큰 사람(에고가 상상하는)으로 달라져야지 하는 에고의 목소리입니다. “하나님에게 어서 불림을 받아 큰 사람으로 쓰임 받았으면...!” 하는 생각은 에고의 목소리입니다.
자신의 작음에, 한계와 약점에, 깊은 연민을 갖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붙어잡고 자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 어려우면, “그럼 내가 그렇지 뭐, 내가 예수님이나 성인이라도 되나?” 그러면서 깔깔 웃어주기라도(비웃음이 아니라) 하십시오.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비웃거나 조롱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마디를 했습니다.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우리의 약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냥 다시 해보는 것입니다. “운동도 해보고, 기도도 해보고, 잘 대해주려 해보고, 성장하려 해보고, 잘 해보려 했는데, 아무 쓸데없더라.” 나가 자빠지지 않고, “밤새도록 애를 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는데,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이런 담백한 태도로 자신의 삶을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과정이지 어떤 결과가 아닙니다. 과정 과정 자체가 우리의 삶입니다. 단 맛만 우리의 귀한 삶이 아니라 쓴 맛도 우리의 귀한 삶입니다.
카잔차키스의 시가 말해주듯이,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가 나를 넘어간다는 것에는 늘 고통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편안하고 익숙한 것들을 떠나 다시 낯설고 어찌될지 모르는 위험에 자신을 맡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가 제일 좋아, 평화롭고 안전한 걸, 꼼짝하지 않을래.”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이때 우리가 다시금 “밤새도록 애를 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는데,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다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라는 마음가짐입니다. 우리의 성장은, 우리의 부르심의 응답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사도바울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바울이 소위 성공을 한 자리에서 이 말이 나온 줄 압니다. 지금은 사도바울이 대단한 인물처럼 여겨질지 모르나, 당시 사도바울은 “나는 약함 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굶고 매맞고 온갖 위협을 당하면서 고통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리에서도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어떤 외관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큰 사람”으로 되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