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해안간첩선 격침작전서도 충무무공훈장
1월 타계한 오윤영 장군
평소 반공·충성 강조
[LA] “청렴결백하고 국가에 충성하라. 군인은 군인답게 살아야 한다.”
오윤영 장군(준장)이 평소 하던 말이다. 지난 1월 향년 96세로 로스엔젤리스에서 타계했다. 장군은 6.25 한국동란, 간첩토벌, 월남전 등에서 전공을 세워 충무무공 훈장을 2번 받았고 화랑무공, 보국, 은성, 미국유공자 표창등 16개의 훈장과 여러 개의 표창장을 받은, 뼈속까지 철저한 무인이었다.
23년 서울 종로구관철동에서 태어나 2살 때 부친이 별세하자 평양으로 이주했고 평양 숭인상고, 대동공전을 졸업했다. 사회정의에 관심이 컸던 그는 공산당에 대항하는 조만식 선생(독립운동가, 교육자)의 결사조직 ‘서북청년회’에 들어가 반공활동을 벌였다.
1946년 2월, 20세 때 자유를 찾아 월남한 후 경기도 경찰간부학교 시험을 거쳐 종로경찰서에서 근무했다. 한국정부가 수립되기 전 미군정 아래서 였다. 어느 날 군정에서 한국군 간부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2반에 입학했고 졸업과 동시 소위로 임관했다. 그의 군입대는 경찰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군은 49년1월 1사단 정보처보좌관(대위)로 근무중 한국동란을 맞았다. 50년 9월 서울 수복에 이어 평양 점령에 나섰다. 연합군은 평양 입성의 영광을 국군에게 건네 주었다. 때를 만난 그는 최초의 평양점령 국군으로 기록되고 이 전과로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소속된 작전부에서 그와 함께 일했다.
LA 거주 장녀 오명애씨(2010 이화여대 동문회장)씨는 최근 아버지에 대해서 말하면서 “아버지는 평소 ‘우리(국군 1 보병사단)가 30분만 일찍 도착했으면 김일성을 잡았는데 …”고 늘 한탄하셨다”고 전했다.
“아버지 말씀은 그때(1950. 10. 18) 그의 도주를 막았다면 지금까지 한반도 분단의 아픔은 면했을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하면서 장군은 마치 본인 실수인 것 처럼 후회를 뱉았다고 오씨는 말했다.
68년 1월21일 북한 무장게릴라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위해 서울에 침투하자 박 전 대통령은 군수참모부 기획과장이던 오장군에게 제주도 서귀포 해안간첩선 격침작전을 명령했다.
그는 합참 대간첩작전본부 작전과장이었다. 오장군은 격침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68년 8월20) 각 군 총장 배석하에 대통령에게 경과를 보고했다. 이로 인해 충무무공훈장을 받고 이듬해에는 마침내 별을 달았다.
이어서 1971년 월남전의 맹호 16호 작전에 부사단장으로 참여해 월맹 정규군 2연대와 12연대 병력 상당수를 섬멸하는 전공을 올려 또하나의 충무무공 훈장을 받았다.
1972년부터 75년까지 39사단 사단장으로 재임하다가 77년 1월31일 준장으로 전역했고 84년 미국으로 와서 장성들의 모임 성우회 회장을 맡았다. 평소 건강했고 늘 운동을 계속, 사망 2년 전인 94세에도 운전을 했다.
오장군은 2010년 LA 미주본사 한국일보와의 대담에서 “공산당의 행위를 잊어서는 안된다. 개인이나 나라가 힘 없고 실력이 없으면 무너진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LA에서 그는 틈만 있으면 한국동란의 교훈을 가족과 친지 이웃들에게 전했다.
장녀 오명애씨는 최근 “6.25동란 70주년을 몇 달 앞두고 돌아가신 아버님이 ‘지금이라도 조국이 부르면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러 가겠다’고 늘 말씀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장군의 유해는 지난 66년간 희로애락을 같이 한 부인 노근애씨의 유해와 함께 지난 2월1일 한국의 대전 현충원 묘지에 안장됐다.
슬하에 증손자까지 자손 20명을 두었다. 큰 외손자 박재영씨(로렌스)는 LA 퍼시픽 경찰서에서 경사(seargent)로 근무중이다.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koreatimes.net) --
05 May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