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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요한복음 1장-
요한복음의 주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며(20:30-31) 1장에서 이 주장을 증명하고 있다. 이 놀라운 장을 읽으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그의 이름과, 이루신 일들과, 그를 개인적으로 아는 증인들에 의해서 알게 되지 않을 수 없다.
1.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그리스도의 이름들
그는 말씀이시다(1:1-3/1:14)-사람의 말이 그의 생각과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보여주신다. “나를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니“(요 14:9). 말은 문자들로 구성되어 지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는 알파요 오메가(헬라어의 처음과 마지막 글자)이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 골로새서 1장 16절과 베드로후서 3장 5절은 이 말씀이 곧 그리스도이심을 시사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인간의 가르침과 교훈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자신을 알리시지만,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완전하게 알리신다(히 1:1-2).
말씀으로서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를 가져오지만 인간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동일한 말씀은 곧 진노와 심판을 가져온다(계 19:13).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빛이시다(1:4-13)-창세기 1장에서의 하나님의 첫번째 창조적 행위는 빛을 만드신 것이었는데, 이는 생명이 빛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참 빛이시며, 모든 빛이 그 근원으로 하는 원래의 빛이시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빛(하나님, 영원한 생명)과 어두움(차단, 영원한 죽음)간의 투쟁을 보게 된다. 1장 5절에서 시사하고 있는 바, 직역하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고(현재시제) 어두움은 빛을 쫓아내지도, 붙잡지도 못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3:19-21/8:12/12:46 참조). 고린도후서 4장 3-6절은 구원을 죄인의 어두운 마음에 빛이 드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1:15-18/1:30-34/1:49)-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핍박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주장이다(10:30-36).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른 사람이 여섯 명이 있다. 즉, 세례(침례)요한과 나다나엘(1:34/1:49), 베드로(6:69), 치유된 소경(9:35-38), 마르다(11:27), 그리고 도마(20:28)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가 없다(8:24)
그는 그리스도이시다(1:19-28/1:35-42)-이 말은 메시야,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기를 기대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요한에게 메시야인가를 물었다. 사마리아인들조차 메시야를 갈망하고 있었다(4:25/4:42).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유대인들은 누구이거나 간에 회당에서 출회되었다(9:22).
그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1:29/1:35-36)-요한의 선포는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는 이삭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창 22:8).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양과 이사야 53장의 어린 양은 그리스도를 향한 길을 지적하였다. 구약의 어린 양들은 단지 죄를 덮어 가리울 뿐이지만(히 10:1-4) 그리스도는 죄를 담당하셨다. 또한 구약의 어린 양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었으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다(1:43-49)-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에 시달렸고 한 왕을 원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먹이셨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으로 왕을 삼으려 하였으나(6:15), 그리스도는 떠나셨다. 12장 12-19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그들의 왕으로 제공하셨으나, 그를 환영하였던 바로 그 군중들이 후에는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 !“고 소리쳤다.
그는 인자(인간의 아들)이시다(1:50-51)-이 명칭은 다니엘 7장 13-14절에서 온 것으로서, 모든 유대인들은 그것이 신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2장 34절에서의 유대인의 질문에 주목하자). 그리스도는 여기서 창세기 28장 10-17절의 “야곱의 사닥다리“를 언급하신다. 그리스도는 땅과 하늘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사닥다리“로서, 하나님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며 인간을 하나님께로 데려가신다."
2.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는 그리스도의 행적
그는 세상을 창조하셨다(1:1-4)-태초에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던 신성한 대리자였다.
그는 인간을 구원하셨다(1:9-13)-그는 자기 땅에 오셨고, 자기 백성(유대인)에게서 거부당하셨다. 구원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할 때에 받게 되는 값없는 선물이다.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은 같은 일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탄생은 혈과 육으로, 또는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그는 하나님을 계시하신다(1:15-18)-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신다. 모세는 죄와 정죄를 나타내는 율법을 주었으나, 그리스도는 구속의 진리를 계시하셨다.
그는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주신다(1:33)-우리는 여기에서 성부(1:14/1:18)와 성자와(1:14/1:18), 성령(1:32-34)의 삼위일체를 본다. 성령이 내려왔던 것은 요한에게 그리스도를 확인시키기 위함이었는데, 오늘날도 성령이 눈을 열어 주기까지는 참되게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사람들에 대해 정통한 지식을 가지셨다(1:42/1:47-48)-그는 베드로와 나다나엘을 그 자신들이 아는 것보다도 더 잘 알고 계셨다(2:23-25).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알 수 있으시다.
그는 죄를 용서하신다(1:29)-이 땅에 사는 그 어느 누구도 인간의 죄를 제거할 수 없다.
그는 하늘로 가는 길을 여신다(1:50-51)-창세기 28장 10-17절에서의 야곱처럼, 죄인들은 집을 떠나 죄의 어두움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늘의 영광을 보이시며 그리로 들어가도록 하늘을 여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사다리“이시다."
3.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는 증인들
요한복음에는 종종 “증거“라는 말이 사용되어 있다(1:7-8/1:15/3:26/3:28 /5:31-37/8:18/10:25/15:27/18-23). 이 증인들은 믿을만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접촉했던 사람들이며,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함으로써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또한 그들이 거짓말을 하였다는 증거도 없다. 그들의 증거는 오늘날의 어떠한 법정에서도 설 수 있는 것이다.
세례(침례)요한(1:7/1:15/1:29/ 5:35)
사도 요한(1:14/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
구약 선지자들(1:23/1:45)-나다나엘은 빌립이 그를 찾아냈을 때에 모세 오경을 읽고 있었다.성경(1:33-34)
안드레(1:41)-그는 구령자(전도자)였으며, 그 일을 자기의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가 베드로에게 조용히 증거하여 그리스도께로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오순절 사건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빌립(1:45)-빌립은 그의 증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후원하였는데, 이는 현명한 방법이다.
나다나엘(1:49)-요한과 안드레는 한 설교자, 곧 세례(침례) 요한을 통하여 구원받았는데, 베드로는 안드레의 개인적인 사역으로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다. 빌립은 그리스도에 의해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말씀과 빌립의 증언으로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데에 각기 다른 사람과 각기 다른 환경들을 사용하신다."
요
▣ 그리스도의 첫기적-요한복음 2장-
어떤 교회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였을 때 기적들을 행하셨다고 거짓되게 가르친다. 그러나, 요한복음 2장 11절은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한 것이 그의 기적들 가운데 최초의 것이었다고 명백히 진술한다. 요한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고 사람들이 그를 밀어 구원받게 하기 위해 이 표적들을 기록했다는 것을 명심하자(요 20:30-31).
우리는 이 첫기적의 세 가지 면을 연구함으로 경륜적 교훈(이스라엘의 실패상)과 교리적 교훈(죄인을 구원하는 방법), 실천적 교훈(그리스도를 섬기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경륜적 교훈-이스라엘의 실패
1. 경륜적 교훈-이스라엘의 실패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의 메시야에 대해 무지하였다.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못하는 한 분이 계시다“라고 요한복음 1장 26절에서 세례(침례)요한은 말하였다.
이 혼인잔치는 이스라엘의 한 상징이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처럼 그들의 공급은 비어 있었으나 그들의 메시야는 그들을 돕기 위해 그 곳에 계셨다. 여섯 개의 돌항아리는 결례를 위해 사용되었다(막 7:3). 그러나 그 유대 의식이 도울 수는 없었다. 나라는 영적으로 파산되어 기쁨도 희망도 없었다(포도주는 성경에서 기쁨의 상징이다/ 시 104:15/삿 7:13). 그들은 외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내적으로 만족시킬 것이 전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그를 왕으로 받아들일 어느 날 이스라엘에게 다시 기쁨을 가져오실 것이다. 잔치가 “세째 날“에(2:1) 있었던 것을 주목하자. 역사는 이제 “이틀 동안“을 흘러 왔다(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루와 같다/ 벧후 3:8).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세째 날“이 밝아올 때 되돌아 오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다시 자기의 하나님과 결혼하게 될 것이고(사 54장/ 호 2:1-), 기쁨의 포도주가 값없이 넘칠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요 2:11).
그 날이 오기까지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요 2:4)라고 물으셔야만 한다. 그 민족이 그를 거절하였으며, 그들은 주님께서 영광과 능력으로 되돌아 오실 날까지 그를 영접하지 않을 것이다."
교리적 교훈들-죄인이 구원받는 방 방법
앞의 요한복음 서론을 참조하면 일곱 가지 표적들이 죄인이 구원받는 법과, 그 결과가 그의 일생에 어떠한가를 보여 주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첫기적은 우리에게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온다는 것을 가르친다. 상징들에 사용된 것들을 눈여겨 보자.
목마른 사람들 - 이것은 오늘날 잃어버린 세상의 모습이 아닌가? 그들은 죄로부터 오는 쾌락을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만족하지 못하며 쾌락들은 마침내 다 비워지게 된다. 성경은 목마른 죄인들이 구원과 만족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오도록 초청한다(요 4:13-14/요 7:37/사 55:1/계 22:17).
빈 항아리 - 돌같이 굳으며 비어 있는 인간의 마음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토기에 비유하신다(고후 4:7/딤후 2:20-21). 죄인의 생활은 외면적으로는 사랑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비어 있고 딱딱하며 하나님의 신적인 기적없이는 희망이 없다고 보신다.
물로 채워짐 - 성경에서 깨끗케 하는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엡 5:26/요 15:3). 종들이 해야 할 일이란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믿지 않는 자들의 빈 마음을 말씀으로 채우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일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사람들에게 주어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기적을 행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물이 포도주가 됨 - 죄인의 마음이 말씀으로 채워졌을 때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변화시키고 기적을 가져오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 사도행전 8장 26-40절에서 빌립은 말씀으로 구스(이디오피아) 내시를 채웠고, 그 사람이 믿었을 때 구원의 기적이 일어났으며, 그 구스인은 기뻐하며 자기의 길을 갔다. 요한복음 1장 17절을 주목하여 보자. 율법은 모세로부터 왔고 구약성경에서 변화되는 최초의 기적 중 하나는 물이 피가 되는 것이었다(출 7:19). 그것은 진노와 심판을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은혜와 기쁨을 뜻하는 것으로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세째날 - 이것은 항상 부활을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세째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주일(主日)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 1장 19절-2장 11절을 주의깊게 읽어 보면 8일간의 일이 적혀 있다. 1장 19- 28절은 첫째날, 29-34절은 둘째날, 35-39절은 세째날, 40-42절은 안드레가 베드로를 그리스도께 인도한 네째날이며, 43-51절은다섯째날이고, 3일 후 또는 여덟째날에 혼인 잔치가 열렸다. 이것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말하고 있다(고후 5:17).
기적들의 시작 - 구원은 기적들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구원받은 후에야 하나님은 그를 위해 또다른 기적들을 수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체험한 기적들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실천적인 교훈들 - 그리스도를 섬기는 방법
3. 실천적인 교훈들 - 그리스도를 섬기는 방법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2:5)는 마리아의 말은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앞세워야만 할 것이다. 종들이 그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둔한 것들을 사용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전 1:27). 만일 우리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순종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야만 한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여흥이나 오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몫을 다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 나머지의 일을 하실 것이다.
종들은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 알았지만 그 연회장의 주빈들은 알지 못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섬길 때 그는 하나님의 비밀을 배운다(암 3:7).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들이며 친구이다(요 15:15). 그는 우리에게 그가 하고 계신 일을 알리신다. 성대한 잔치의 주인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의 겸손한 종이 되어 그의 기적들에 참여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모든 기회를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사용하여야 한다.
▣ 부가적 사항
예수께서는 2장 4절에서 마리아에게 무례하지 않다. “여자여“는 인사말에서의 존칭어였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때“를 추적해 보자(2:4/7:30/8:10/12:23/12:27/16:32/17: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사셨고 누구도 그의 때가 오기 전에 그를 손대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은 술(알코올)을 사용하는 일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성경에는 순수한 포도즙으로부터 취하게 하는 독주에 이르기까지 “포도주“에 대한 여러 가지의 말씀들이 있다. 이것들을 구별하기란 늘 쉽지만은 않다.구약과 신약은 둘 다 금주를 높이고 있다. 나실인이 술마시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며, 사무엘과 세례(침례)요한도 그 가운데에 포함된다. 성경은 술마시는 것이 악함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적당한 절제가 아니라 전적인 금주를 가르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사람을 술꾼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첫번째의 한 잔이기 때문이다."
요 3:1-5
▣ 거듭남(중생)-요한복음 3장-
이 장은 아마도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장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이 거듭남을 주제로서 다루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제도들은 이 문제를 아주 혼란시켰기 때문에 거리의 평범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니고데모 같은 종교 지도자들조차 다시 태어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1. 중생의 필요성(3:1-5)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3절)-니고데모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이었으며, 유대인 가운데 우수한 선생들(관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거듭남에 대한 진리를 알지 못했다. 오늘날 신학의 “학위“를 가지고 있는 수 많은 “신학교 졸업생“들도 이와 똑같다. 영적 진리는 죄인의 육적인 마음으로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고전 2:10-14).
니고데모는 “밤에“ 왔는데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징이다. 그는 영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있었다(엡 4:18/고후 4:3-6).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는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즉, 위로부터 태어나야만 한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처럼 니고데모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혼동하고 있었다(4절). 그는 육적인 탄생의 개념으로 생각한 반면에, 그리스도는 영적인 탄생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합당치 못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첫번째 태어남“은 우리를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가 진노의 자녀이며 불순종의 자녀인 것을 의미한다(엡 2:1-3). 어떤 정도의 교육이나 깨끗케 함이나, 훈련이나 종교적인 활동도 우리가 가진 옛 성품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보거나 들어갈 수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성품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5절)-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 왕국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서 이 나라를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사람이 다시 태어날 때 그는 즉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리고 어느 날 낙원에 들어갈 것이며 영원한 나라에서 분깃을 나눌 것이다.
니고데모는 그의 동료들처럼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과 율법대로 산 것이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린 것으로 생각했다(마 3:7-12/요 8:33-39).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범죄한 이래, 많은 사람은 낙원 밖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오직 거듭남으로써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요 3:6-13
2. 중생의 특성(3:6-13)
영적인 탄생(6-7절)-육신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옛 성품으로 정죄된 것이다. 영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새 성품이며(벧후 1:4), 영원한 것이다. 육체적인 수단들로써는 영적인 탄생을 얻을 수 없다.
5절에서의 “물로 태어남“은 문자적인 뜻으로의 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세례(침례)가 물이라는 하나의 물질이 육체에 적용되는 것이므로 결코 영적 탄생을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이다(요 1:11-13/요 6:63 참조). “물로 태어나는 것“은 결코 물세례(침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성경에서 “세례“(침례)란 탄생이 아니라 죽음을 뜻한다(롬 6:1-).
-구약에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가 없게 된다. 구약 시대에는 세례(침례)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닌데(엡 2:8-10), 세례(침례)는 인간적인 행위이다.
-그리스도는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세례(침례)를 주지 않으셨다(요 4:2).
중생은 다만 영적인 수단으로 이루어진다. 영적인 수단이란 곧 하나님의 성령(요 3:6/6:63)과 하나님의 말씀(벧전 1:23/약 1:18)이다. 5절에서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낸다(엡 5:26/딛 3:5- “중생의 씻음“). 사람은 믿음을 산출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할 때 거듭나며, 그 사람이 믿을 때에 새 성품이 부여된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신자들을 사용하지만, 오직 성령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다(고전 4:15).
신비로운 탄생(8-10절)-어떤 사람도 바람을 설명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성령의 일을 설명할 수 없다. 성령은 여기서 바람에 비유된다(행 2장). 니고데모가 구약의 가르침을 받았다면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일의 진리를 알았을 것이다. 에스겔 37장에서 바람은 이스라엘의 마른 뼈들에게 생명을 준다. 우리가 중생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다음에서 다루신다.
참된 탄생(11-13절)-많은 것이 신비롭지만 그러나 여전히 참되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은 학설이 아니라 실제라고 확언하신다. 만일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만 믿고 그를 영접한다면 그는 중생이 얼마나 참되며 놀라운 것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요 3:14-21
3. 중생의 토대(3:14-21)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만 했다(14-17절)-그리스도는 다시 니고데모에게 구약을 참조하여 민수기 21장의 놋뱀 이야기를 언급하셨다. 그 뱀은 유대인을 죽이고 있었다. 그 문제의 기이한 해결은 모세가 놋뱀을 만드는 것이었다. 믿음으로 놋뱀을 바라본즉 치료가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죄가 되셨다. 왜냐하면 우리를 죽이고 있는 것은 바로 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보자마자 구원받았다.
놋뱀은 심판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들리셨을 때 우리의 심판을 경험하셨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기 전에 죽으셔야만 했다. 그의 죽음은 생명을 가져온다.
죄인은 그를 믿어야만 한다(18-21절)-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수단이다. 하나님께서 민수기 21장에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은 그가 뱀을 죽이고 상처에 고약을 바르거나 유대인을 보호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리고,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보지 않는 것이 정죄를 의미하나, 믿음은 구원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장 4-13절의 빛과 생명, 어두움과 죽음의 상징을 여기서 다시 회고해 보자. 죄인들은 어두움 가운데서 살 뿐만 아니라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드러나고 용서될 그 빛으로 오기를 거절한다.
요 3:22-26
4. 중생에 대한 갈등(3:22-26)
가장 좋은 번역판들은 25절을 “요한의 제자들과 한 유대인 사이에 의식적인 결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고 번역한다. 우리는 이 유대인이 니고데모였을 것이며 여전히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다고 믿는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처럼 니고데모는 세례(침례)와 종교의식에 대해 혼돈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는 물로 태어남이 세례(침례) 또는 유대의 결례의식이라고 생각했다. 세례(침례)요한이 유대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방법을 눈여겨보자. 만일 세례(침례)가 구원에 필요하다면 이 부분이야말로 성경이 그렇게 말할 장소이다. 그러나, 아무 말도 없다! 그 대신, 믿는 것에 강조를 두고 있다(36절).
니고데모가 어둠으로부터 나와서 마침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여기 요한복음 3장에서 우리는 니고데모가 혼란의 어두움 속에 있는 것을 보지만 7장 45-53절에서는 그가 확신의 새벽녘에 있는 것을 본다. 그는그리스도의 말씀을 공평하게 들어 주려고 한다. 그리고 19장 38-42절에서는 니고데모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고백의 대낮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