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새벽
(마 28:1-10)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5장에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서 아버지는 큰 잔치를 베풀며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며 기뻐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게 된 것을 가리켜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고, 아버지는 잃은 아들을 다시 얻었다고 말합니다. 아들은 죽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떠난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목숨은 잠시 연장할 수 있으나 생명의 희망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우리 신앙에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이 싫어 하나님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내 생각, 내 뜻대로 살면 좋은 것을 얻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고통과 근심뿐입니다. 살아갈 희망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때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시고, 아버지 집에는 부족한 것이 없는데 아버지를 떠나 굶어 죽게 되었다고 후회합니다. 후회한다고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물론 돌아간다고 좋아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약속은 없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아들은 생각합니다.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는 일은 염치없는 일이니 ‘종’으로 받아주시면 굶어 죽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생각한 대로 아버지께 돌아가 죄를 고백하고 종으로 받아주시기를 청합니다. 그가 고백할 때 뜻밖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받아주시며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시고, 아들을 찾았다며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순간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이미 용서하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서지 않으면 용서받은 것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도 알지 못하고 두려움 속에 지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성경 말씀을 요약하면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보지 않고도 외울 수 있습니까? 외우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신앙은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요즘 의대 정원을 늘리는 문제로 의사단체와 정부의 갈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갈등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는 것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생명이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듯이 힘을 가진 두 집단이 충돌하면서 환자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정부나 의사단체 모두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물러설 수 없다고 하는데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모두 정치적 이익이나 경제적 이익을 기대하고, 또 지키려고 국민을 고통 속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집단으로 진료를 멈추고 병원을 떠나는 일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사건입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보면서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의사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당당하게 면허를 반납하고 떠나든지, 환자 곁으로 돌아오든지 결단을 해야 그들의 진정성을 믿을 수 있습니다. 정부가 정책을 포기하고 굴복하면 돌아오겠다는 것은 환자들을 인질로 삼는 협박범, 테러범일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들이 환자들의 병을 치료하지만, 자기 이익에 손해를 볼 때는 환자를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의사들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탐욕입니다. 교만입니다. 아들도 자기 몫을 챙겨 더 많은 재산을 얻으려고 집을 떠납니다.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겠지요. 욕심과 교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욕심과 교만이 생기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고집이 생기고 옳고 좋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도 욕심과 교만이 있고, 내 뜻대로 하려는 고집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받습니다.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돌아서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은 그 어떤 두려움, 걱정, 좌절에도 꺾이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유혹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의 새벽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예수님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 삶은 슬픔과 두려움, 고통의 삶입니다. 힘든 시기를 흔히 ‘밤, 어둠’에 비유합니다. 밤에 여인들은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부활을 기대한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주님 곁에 잠시라도 머물고 싶었고, 다른 복음에서는 시신에 바를 향품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사랑의 힘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힘이 강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여인들은 무덤으로 향하며 걱정합니다. ‘무덤 문을 누가 열어줄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우리가 사랑할 때 장애물이 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 같은 것이 되겠지요. 그래서 끝까지, 무조건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인들은 주님을 사랑하지만, 걱정과 두려움을 완전히 벗어버리지는 못합니다. 아직은 신앙의 어둠에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며 신앙생활을 하지만, 세상 근심,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이기심과 교만과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그때 주님은 부활하십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여인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전하라고 합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뵙고 공경의 의미로 발을 잡고 경배를 드립니다. 여인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을 동시에 느낍니다. (8절) 불신앙, 의심과 믿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할 때 누구나 ‘두려움과 기쁨’을 같이 느끼게 됩니다. 두려움은 주님을 의심하고, 그 말씀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오지만, 자기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두려움과 죄책감을 가집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믿음 없이 살았던 삶을 고백하며 죄책감과 두려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을 뵙고, 그 말씀을 들으며 사랑을 회복한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신앙과 불신앙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과 기쁨이라는 신앙의 갈등을 겪을 때 신앙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도 못했지만 주님을 사랑하였기에 용기를 냈고, 어둠과 무덤이라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고 안아주며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었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말 잘 듣고, 성실하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사랑할만한 조건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받기 위해 애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랑받을만한 조건이 있다면 사랑하지 않는 이유도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사랑의 조건이나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평안하냐?’(9절) 그때 여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경배합니다. 평안, 평화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의심, 걱정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과 사랑만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믿음이 없으면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 주님의 생명을 우리가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성찬 때 우리는 떡을 받아 ‘주님의 몸을 우리 가운데 모신다’고 하고, 하나의 떡을 우리 모두가 나누어 먹음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고,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된 것을 고백합니다. 주님을 우리 삶 가운데 모시고 살 때 우리는 두려움 없이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이기심과 탐욕, 교만을 버리고 주님을 본받아 겸손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너무 많아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분노하게 만듭니다. 전쟁과 가난, 질병, 미움과 증오, 차별이 세상의 생명을 위협하며 고통에 빠뜨립니다. 사람이 악하고, 세상이 험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사람이 주님 없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을 듣기 싫어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무덤에 장사하고 나서 내 맘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십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주님을 모시고 어둠에서 빛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무덤 문처럼 주님을 만날 수 없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교만과 욕심이 우리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장애물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을 열꼬’(막 16:3) 탄식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 신앙을 방해하는 수많은 장애물이 계속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용기를 내서 주님을 사랑하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얻게 하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 믿음이 약하고 부족해도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은 부활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