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중 유럽으로 넘어와서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큰 핍박이 있어서 베뢰아까지 도망쳤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거기까지 쫓아와서 홀로 도망간 곳이 아덴이다.
동료들을 기다리며 아덴의 시내를 돌아보다가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분노가 일었다. 아테네의 인구가 2만 명이었는데 우상이 3만 개다. 당시 아테네는 문화와 철학의 도시인데 실제로는 우상의 도시였다. 바울이 분노했다는 것은 안타까웠다는 것이다(1).
정치 수도가 로마였지만 공용어가 헬라어였을 정도로 문화적으로 압도했던 곳이 아테네다. 부와 권력과 지식을 가졌던 사람들, 당시 상위 5%의 지성인들이 모인 곳이다. 아덴에 우상이 많았던 이유는 지식인들이 내면이 비어 있어 답답함을 채울 수 없었기 때문에.
에피쿠로스학파가 처음엔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했으나 이후에는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우연으로 보는 허무주의적인 사람들이다. 스토아학파는 운명론자들로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우리의 이성과 지성과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극단적인 이성주의다. 학문이 내면을 채우지 못했다. 창시자인 제논도 그의 제자도 자살했다. 갈 데까지 가도 없다. 발버둥의 산물이 육체와 감정으로 가는 것이 에피쿠로스, 이성으로 가는 것이 스토아다. 결국은 목마르다는 것.
어거스틴은 "인간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절대 공간이 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아무리 집어넣어 봐야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공허한 사람들이 자꾸 밥을 먹는다. 하나님 대신 밥으로 채우려 한다. 하나님으로 내면화되지 않으면 공허, 허무, 외로움들이 넘쳐 난다. 운동, 취미, 여행에 빠진 것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주는 정답이다. 우리의 근원적인 질문이 두 가지가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아테네 사람들이 얼마나 답답했는지 신을 3만 개나 만들고도 답을 못 찾으니 나중에는 알지 못하는 신까지 만든다(23).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믿음의 시작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것(24).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이 말씀 하나 붙들면 그때부터 풀리기 시작한다.
창세기의 일차 독자는 출애굽 백성이다. 애굽의 학정 가운데 있었고, 광야의 어려움이 있었으며, 가나안에 들어갔더니 철옹성들이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게 문제투성인데,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면 지금의 어려움은 문제 될 것이 없다. 애굽에서 건져주시고, 광야의 어려움이라는 시험을 통과하게 하시고, 가나안의 철옹성도, 대적들도 나의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능히 이길 수 있다.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창조주 하나님이다(롬4:17). 무엇을 기도할지 모르고, 마음이 답답하고,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나를 지으시고 만드신 분인데 걱정할 것이 없다. 그게 믿음의 출발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방관하지 않으시고 관리하신다. 우린 이것을 ‘섭리’라고 한다(providence). 우리를 이끄시고 돌보시고 붙들어 주신다. 이것의 반대가 이신론(deism).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상관하지 않으신다는 기계적 세계관.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분이다.
또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시다(The great giver). 근원적인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우리에게 주신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돌보시고 주시는 분이시다(24,25). 그러므로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체험해야 한다. 그래서 안식일은 일을 중단하고 말씀을 내면화시키는 시간이다. 거기서 새 힘과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얻는다. 그래서 말씀이 들어가면 씨 뿌리는 비유처럼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얻는 것, 이게 말씀의 내면화다.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28).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바울이 구원자 예수님과 부활을 증거하고 그 후 심판과 죽음이 있음을 설명한다(31). 천하는 영원하지 않다. 인생은 죽음이 끝이 아니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히9:27). 그런데 우리는 오래 살 거라고 착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은 다 아는데 내가 죽을 것은 생각 안 한다. 병이 들고 막판에 가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항상 운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교통사고도 안 나고 암도 안 걸리고 어려움도 안 당할 거로 생각한다. 나는 예외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여지없이 온다.
생명도 호흡도 만물도 돈도 하나님이 주신 것. 다 지나간다. 있을 때 잘 쓰자. 죽음이 끝이 아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죽은 게 아니라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과 천국은 연속돼 있다. 이 신앙이 있으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성경이 약속한다. 이보다 훨씬 나은 세상이 있다고. 슬픔과 눈물과 고통이 없는 세상이 온다.
예수 믿는 게 중요하다. 오늘도 말씀이 마음 가운데 다가오는 사람들은 이 말씀 붙들고 두려움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 지금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대처할 수 없다. 믿음만이 죽음을 예비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서는 힘이 된다. 복음의 독특함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 지금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신다. 십자가만이 구원이다. 부활과 심판이 있다.
바울이 설교를 다 끝냈더니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다. 언제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갈라진다. 영접하는 사람도 있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다시 듣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32-34)
아테네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아 더 이상 들을 기회가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었을 때 미루지 말고 즉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어떤 환경도 이겨낼 수 있는 하나님 종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