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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꽃망울을 터뜨린 탄천변의 버들강아지를 그저께서야 겨우 보았던듯 한데 공주 계룡산을 향한 느림보 리무진이 질주하는
고속도로 주변의 풍광은 이미 봄기운이 완연하다.
동학사 주차장을 목전에 둔 장군봉을 향한 들머리에서 대부분의 느림보님들이 하차를 하여 잠시 행장을 단단히 꾸려 보곤 이내
장군봉을 향한 껄떡고개를 초반부터 헥헥 거리며 오른다.
한 주 내내 퍼 마신 주독이 얼굴과 등줄기를 비롯하여 온 몸을 타고 흘러 내리는 힘든 여정을 감내하노라니 허이구머니나 반가운
능선이 살며시 보이기 시작한다.
능선에 올라 불어 오는 봄바람을 맞으며 잠시 숨을 돌리노라니 산아래 어느곳에서 징과 꽹과리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올라 온다.
아마 어느 분이 입춘 대길을 기대하며 거창하게 운맞이 굿을 펼치는 가 본다.
계룡산 인근은 소문에 듣던 대로 여러 갈래의 종교 단체들이 많기는 많은 가 보다.
태조 이 성계의 왕사였던 무학은 한양으로, 삼봉 정 도전은 계룡산 인근 신도안으로 천도를 각각 주장하다 결국엔 한양이 낙점되었지만
아직도 이곳 계룡산 인근은 여러 신령스런 소문이 많이 도는 길지 중의 길지라고들 한다.
우리나라에서 음택(묘지) 중에서 최상의 명당 자리는 단연 여주에 있는 영릉(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풍수를 공부하는 분들이 가장 먼저 찾아 보는 곳이 이곳 영릉인데 영릉은 본디 지금의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의 서쪽에
있다가 이곳 여주로 천장을 하게 되는데 상당히 의미있는 설화가 있다.
역사적으로 왕릉은 자주 이장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러가지 사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정치적인 사유의 대표적인 것은 우선
흉흉한 민심을 왕릉 이장으로 다스려 보고져 함과 둘째는 왕릉을 이장케 되면 뜻하지 않은 임시 벼슬 자리가 여러개가 나오게 됨인데
지금의 여주 영릉 자리는 인근의 토호 세력이었던 안동 권씨 후손들이 유명한 풍수를 초빙하여 간신히 얻은 자리였는데 이 풍수가 권씨
들에게 명심해야 할 주의 사항 한가지를 일러 주면서 잊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한다.
며칠 뒤 장례일날 이곳에 무덤을 쓰면서 절대로 차일(천막)을 드리 우거나 불을 피지 말라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장례날 억수 같은 비가
쏟아 지면서 날씨가 추워 지니 얼결에 차일을 치고 뜨거운 국물이나 먹을 요량으로 불을 피우게 되니 인근을 배회하면서 왕릉 자리를
골르던 왕실 관리들이 피어 오르는 연기를 보곤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몰려 와서 묫자리를 보곤 눈이 둥그래 진다.
명당 중의 명당인데 다만 한가지 멀리 바라 보이는 앞산에 약간 삐져 나온 바위 덩어리가 옥의 티라고 막 생각을 하는 순간 천지를 진동
하는 뇌성벽력이 치면서 한순간에 그 문제의 바위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면서 권씨 후손들은 자신들 조상의 묫자리를 왕실에 못내
빼앗겨 버리게 된다.
오늘의 영릉이 바로 이곳인데 이러한 설화는 명당 자리에 조상의 뼈를 묻어서 발복을 한다는 풍수의 기본 논리와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설화에서 보는 대로 명당에 들어 갈 수 있는 인물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상의 산소를 잘 쓰면 그 후손들이 반드시 발복을 하는냐? 이 또한 분명 아니다.
명당만 골라서 산소를 썼던 이씨 왕가 후손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칼부림이 한 두번의 일이 었으며 이씨 왕실의 마지막 몰락 또한
참으로 비통하다.
또 하나 명당에 자리를 잡았지만 결국엔 멸문지화를 하게 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다름 아닌 친일파의 대두로 불리우는 이 완용의 무덤이다.
본디 역사란 것은 바라 보는 자의 눈길에 따라 그 차이가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는 쉽게 난다.
매국노의 대표적인 인물로 지칭되는 이 완용이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 완용이가 심오한 사색을 즐기는 선비이며 친미와 친러를 거쳐
결국엔 친일로 돌아 섰지만 일본말은 한마디도 할 줄을 몰랐으며 일본 관리들과의 대화는 영어로만 소통을 했다고 하면서 은근히 야릇한
운을 떼는 가 하면 황헌이 쓴 매천야록에는 이 완용이가 장남인 이 승구의 아내인 천하일색이었던 임 걸귀와 정을 통하고 이를 알게 된
아들 이 승구는 결국엔 자살을 하게 되고 며느리 임 걸귀는 이 완용의 애첩으로 평생을 함께 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면서 다시 한번 더
이 완용을 패륜아로 몰아 가게 되는네 이 완용이가 죽자 그 장례 규모가 임금의 예우를 뛰어 넘었다고 하니 그 무덤 또한 당대 최고의
길지를 얻었음이 틀림 없을 터이다.
장례날 길에서 산소까지 오르는 통로에 천을 깔아서 성대하게 장례를 치룬 이 완용의 무덤은 전북 익산군 낭산면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낭산면장을 하였고 오랫동안 풍수를 연구하였던 이곡 김 용식이란 분의 저서에 보면 조상의 잘못된 행적 때문에 도무지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없었던 이 완용의 증손자가 어느 날 이 완용의 무덤을 파묘를 하곤 그 유골을 화장을 하여 낭산천에 뿌려 버렸다고 하는데
후작 이공 무어라고 적혀 있던 이 완용의 관 뚜껑을 인근 주민이 우연히 습득하여 보관하다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기증을 하게 되는데
어쩌면 역사적으로 보아 참으로 소중한 유물이 될 수도 있었던 이 문제의 관 뚜껑이 어느 날 소리 소문도 없이 한줌의 재로 변하고야 마는
참으로 기묘한 사태가 벌어 진다.
지금 이 일대는 채석장으로 바뀌어서 이 완용 무덤은 흔적 조차 찾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어째서 명당 자리가 이처럼 궁색하게 되었느냐고
반문을 하니 풍수를 하는 어떤 작자의 궤변은 그 일대에 도로가 나면서 채석장이 들어 서게 되어 그 형세가 바뀌어서 어쩌고 저쩌고 인데
형세가 바뀌어서 악터로 변할 지경이면 애초에 명당 자리는 분명 아니련만.
원광대를 찾아 가서 이 완용의 관 뚜껑을 회수하여 불 태워 버린 인물은 역사학자이자 서울대 교수를 거쳐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셨던
두계 이 병도인데 이 분은 우리나라 실증사학의 대두인 분이다.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는 일제 식민사학을 뿌리 내린 인물이라고, 흔히들 말하는 민족사학을 하는
신진 역사학자들로 부터 갖은 공격을 당하는 두계 이 병도의 실증사학은 한마디로 객관적인 근거에 의해서만 역사를 기술하여야 한다는
역사 이론인데 좌우간 친일파로 분류가 되긴 하지만 이분의 손자이신 후일 문화재청장을 역임하셨던 이 건무님의 주장에 따르면 두계는
결코 창씨개명 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명한 화가 장 욱진 선생은 두계 이 병도의 사위가 되는데 묘하게도 두계의 본관은 우봉이다.
이 완용과 동성 동본인지라 엄청난 곤욕을 치르게 되는데 후손들의 말에 의하면 이 완용과는 약 17~18대조 할아버지 형제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하니 약 500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이미 남남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주장과는 달리 두계는 상당한 위험 부담을
안고 원광대로 찾아 가서 전혀 남남이라고 하는 분의 관 뚜껑을 회수하여 그 흔적을 없애 버리게 되는데 이런 사실에 대한 그 후손들의
궤변 또한 참으로 묘하다.
친일을 한 이 완용의 관 뚜껑인지라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당연히 없애 버려야 그 정의가 선다나.
함께 점심을 먹을려고 동행을 하던 친구 산적과 어느 봉우리에서 강 대장님을 비롯한 여러 후미 미인군단을 눈이 빠지게 기다려도
도무지 나타 나질 않아 대전에서 오셨다는 두 여성분이 마악 올라 오시기에 우리 일행들을 물어 보니 이미 아랫쪽에서 라면을 끓여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낙담을 하곤 산적과 단둘이서 오붓하게 싸서 간 문어를 초고추장에 푸욱 찍어서 소주 한잔 곁들이니 왕후 장상이 부럽지 않다.
깜짝쑈에 가끔 나오는 지남철 인간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가슴팍이나 배에 숟가락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다리미 같은 큼직한 철물을 척 척 붙이는 묘한 사람들이 있는데 내 친구 산적은 이런
지남철 인간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묘한 기술을 연마한 이력이 있는 인물이다.
남자들이 싸우나를 하고 나와선 의례 면타올로 얼굴과 머리를 털고 이어서 몸통의 물기를 훔치고 나면 자연스레 목에다 타올을 걸고는
면봉을 쑤시기도 하고 돌아 댕기다 체중을 달기도 하는데 내 친구 산적은 물기가 묻어서 제법은 무거운 타올을 아랫배 쪽에 처억 붙이는
기술의 달인이다.
이리 저리 돌아 댕기는 산적을 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면으로 만든 타올이 아랫배 쪽에 붙어서 떨어 지지 않고 마치 옷걸이에
걸려 있듯이 처억 붙어 있는지 참으로 신기해 한다.
히 히. 타올 밑에는 무시 무시한 도깨비 방망이가 고개를 빠닥 빠닥하게 세우고선.
신선봉 후사면을 돌아 드는 음지는 아직도 제법 미끄러워 조심에 조심을 하며 천천히 걸으니 멀리 남매탑의 다정한 모습이 보인다.
남매탑은 5층과 7층의 쌍탑인데 본디 탑은 이사육팔장으로 조성하지 않고 반드시 홀수로 만드는데 아마도 그 모습이 우애 좋은 어느
오누이 처럼 보여서 남매탑이라 불리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남매탑의 설화의 주된 내용은 이곳에서 공부를 하시던 한 스님에게
묘령의 여인 나타나게 되었지만 남녀의 정을 끊고 남매처럼 함께 공부를 하여 한날 한시에 열반케 되자 이 쌍탑을 조성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와는 정반대의 설화가 바로 충주땅에 있는 달천 (달래강)의 설화이다.
어느 비가 부실 부실 내리는 날 두 남매가 함께 달천을 건너게 되었는데 앞서 가던 누나의 옷이 비에 젖어 그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
나자 이를 본 남동생이 음욕을 이기지 못하고 불두덩이가 되어 버린 도깨비 방망이 움켜 잡고는 쓸어져 버리자 놀란 누나가 고개를
돌리며 이 인간아 달래나 보지 그랬어 라고 던진 말이 달천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인데 불가에서 오욕이라고 하면 수면욕,식욕,
색욕(성욕),명예욕,재물욕인데 이 중에서도 만약에 색욕이란게 두개만 있었으면 부처 될 넘은 한 넘도 없어 지게 된다고 한다.
남매탑에서 상원암을 내려다 보며 여러 상념에 젖어 본다.
오욕 칠정에 푸욱 빠져 들었던 젊었던 날의 내 초상화를 애써 지우며 남매탑을 향하여 경건히 합장 인사를 올려 본다.
동학사 주차장으로 내려 오니 흐미 오늘의 뒷풀이는 감자탕이 지둘리고 있다.
선두로 앞서 갔던 친구 본즈가 여태 뒷풀이에 참석을 않고 우리를 기달리고 있다.
마냥 즐거운 순간이다.
탄천변에서 물수리 돌삐 인사 드립니다.
첨언 : 1975년도에 문화방송에서 방영된 집념이란 드라마가 있었다.
허준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인데 김 무생씨가 주연을 맡아 공전의 힛트를 치게 되자 시나리오를 썼던 극작가가 후일 소설 동의보감
이란 책을 출간하게 된다.
경북 예천 출신으로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이 은성이란 분이 문제의 작가이신데 이 소설 동의보감 이후로 앞에 소설이란 명칭을 붙인
많은 역사 소설이 봇물이 터진 듯 출간되는데 역사는 사실과 기록에 근거를 둔 두계 이 병도의 실증사학이 난 아무래도...
두계가 친일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역사는 소설과는 아무래도 그 맥락을 함께 할 수가 없을 터 일것인데 세상 일이란
무어가 무었인지 당체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니.
일본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으로 후일 이 승만 정권하에서 특무대장을 역임하면서 숙군 작업을 하며 여러 적을 만든 김 창룡씨가
원효로에서 출근길에 부하들이 쏜 권총에 즉사를 하게 되는데 이 김 창룡 특무대장은 친일파이자 백범 김구 선생님의 암살 배후로
지목 받는 인물인데 두계 이 병도가 이 김 창룡의 비문 또한 써서 올리는 이바구는 후일을 기약하면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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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전하십니다 그려~~~!
뒤풀이 감자탕~~~
똘삐님 플라스틱 의자에 한쪽 엉덩이 걸치고 쇠주마시는 모습니 눈에 선합니다.ㅎㅎ
으~~아!
역사 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돌삐님의 머리속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까요..
야사에 밝은 걸로 보아 수없이 많은 야그꺼리가
돌삐님 머리속에 가득할것입니다.
서서히 풀어 놓으셔요..ㅎ
형제탑 오누이탑에 대한 이야기는실히 알고 지나갑니다요
돌삐님의 친구 산적님이 이글을 보셨는지요 ?
그의 반응은 어떠하였는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