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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9, 20일 루체른 페스티벌 실황 / 123분 / 한글자막>
=== 프로덕션 노트 ===
말러 <교향곡 제5번> & <소년의 이상한 뿔피리> 중 발췌
마티아스 괴르네(바리톤) /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 안드리스 넬손스 지휘
스위스에서 펼쳐진 환상적인 말러의 밤
2015년 8월 19일과 20일, 안드리스 넬손스는 세 번째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는데, 이 오케스트라로서는 재 창설자이자 음악적 지도자였던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세상을 떠난 뒤 맞는 두 번째 여름이었다. 전반부에서는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가 출연하여 가곡집 <소년의 이상한 뿔피리> 가운데에서 7곡을 발췌하여 불렀다. 그의 따뜻한 온도감과 강도 높은 표현력, 어둡지만 섬세한 음색이 빛을 발하며 KKL 콘서트 홀의 분위기를 완전히 압도해버리는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한편 대단히 독특한 말러 사운드를 자랑하는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진가는 후반부에 연주된 말러 교향곡 5번에서 드러난다. 2004년 아바도의 바톤 하에 동 작품을 연주한 바 있는 만큼 완벽한 연주를 들려준다. 특히 넬손스의 장송행진곡은 마치 아바도를 기리는 듯한 느낌마저 전달해 준다. 화질과 음질 모두 완벽에 가깝다.
=== 작품 해설 === <2011년 8월 15일 네이버캐스트 / 최은규 글>
말러, 교향곡 제5번
4악장 '아다지에토'는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삽입되어 유명세를 탔다
1915년 완성, 1904년 10월 18일 쾰른에서 초연
말러에게 있어 [교향곡 5번]은 새로운 출발이다. 불혹을 넘긴 그는 새로운 기악 교향곡의 첫 작품인 [교향곡 5번]에서 고도로 세련된 작곡기법을 구사함과 동시에 전통적인 교향곡의 구성을 살짝 비틀어 특유의 음악적 풍자와 냉소를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드러냈다. 자신의 삶과 음악을 밀접하게 관련시키곤 했던 말러는 [교향곡 5번]에서도 그가 경험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교향곡 5번]에 착수하던 1901년에 말러는 심각한 장출혈로 위기를 겪은데 이어 교향곡을 완성하던 1902년에는 미모의 알마 신틀러와 결혼하면서 지옥과 천국을 오갔다.
뒤섞여 있는 비극적 음악과 환희의 음악
비록 그 자신은 [교향곡 5번]에 어떠한 표제도 붙이지 않았지만, 비극적인 장송행진곡으로 시작해 유난히 밝고 경쾌한 5악장으로 마무리되는 [교향곡 5번]은 죽음의 위기와 결혼의 행복이라는 두 가지 사건을 나타내는 듯하다. 비극적인 음악에서 환희의 음악으로 마무리되는 전개 방식은 ‘어둠에서 광명으로’ 향하는 전통적인 독일 교향곡의 구성과 닮았지만, 말러는 이 교향곡 곳곳에 자신의 가곡에서 따온 선율을 암시하며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말러가 [교향곡 5번]에서 이뤄낸 가장 놀라운 업적은 작곡기법적 성취가 아닐까 싶다. 말러의 [교향곡 5번]에선 그 어떤 선율도 단순하게 등장하는 법이 없다. 하나의 주제가 또 다른 주제와 동시에 제시되는가 하면 조그만 반주 음형이 거대하게 자라나 전체 음악을 압도하기도 한다. 1, 3악장에선 트럼펫과 호른이 마치 협주곡의 솔리스트인양 전면에 드러나고, 3, 5악장에선 여러 악기들이 매우 정교한 ‘폴리포니’(polyphony)를 만들어내며, 2, 5악장 마지막 부분에선 금관악기들이 통쾌한 코랄(choral)을 연주한다. 물론 [교향곡 5번]에서 가장 유명한 악장인 4악장 ‘아다지에토’의 아름다운 음악은 영화음악으로 사용될 정도로 로맨틱한 감성으로 가득하다.
말러가 [교향곡 5번]에서 그토록 다양하고 세련된 작곡기법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말러가 J.S. 바흐의 작품을 깊이 연구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01년 3월 경, 말러는 바흐의 악보 전집을 들여놓고 틈날 때마다 들여다봤으며 여름 휴가 때도 바흐가 사용했던 코랄에 다양하게 화성을 붙이며 하루 일과를 보내곤 했다. 바흐 음악을 통해 새로운 작곡 기법에 눈을 뜬 말러는 [교향곡 5번]을 작곡하면서 “초보자처럼 새롭게 곡을 썼다”고 증언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교향곡 5번은 그의 초기 교향곡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음악이다.
말러의 [교향곡 5번]은 교향곡 5, 6, 7번으로 구성된 ‘중기 3부작’의 새 시대를 연 작품이다. 이 세 교향곡은 순수 기악곡으로, 일종의 ‘교향악적 칸타타’라고 할 수 있는 교향곡 2, 3, 4번과는 완전히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 새로운 3부작은 가사도 가수도 합창도 없이 진행된다. 또한 교향곡에 자신의 가곡을 인용하곤 했던 말러는 [교향곡 5번]에서는 단지 ‘암시’만 할 뿐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중기 3부작 교향곡의 새 시대를 연 작품
새로운 3부작을 여는 [교향곡 5번]은 악장 구조 역시 독특하다. 모두 5악장으로 이루어졌으나, 1악장은 마치 2악장의 서주와 같은 역할을 하며 제1부를 구성하고, 3악장은 제2부, 그리고 4, 5악장이 연결되어 제3부를 구성한다. 제1부는 인상적인 트럼펫 팡파르로 시작한다. 곧 이어 마치 고통스러운 발걸음처럼 무겁고 침통한 장송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팡파르와 행진곡으로 이루어진 두 가지 악상은 곧이어 폭발적인 슬픔으로 중단되며 극단적인 대비를 이룬다. 팡파르와 행진곡, 슬픔의 폭발이 교대되는 동안 이 음악을 듣는 이들 역시 감정적인 고양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1악장 말미에 터져 나오는 탄식의 울부짖음에서 절정에 달할 것이다.
이어지는 2악장은 1악장과 몇 가지 악상을 공유하고 있어 사실상 1악장에 연결되는 음악이라 할 수 있다. 소나타 형식으로 구성된 이 악장은 격렬한 분노를 담은 제1주제와 평화를 갈망하는 듯한 제2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2악장의 핵심은 이 악장 말미에 금관악기들이 연주하는 통쾌한 ‘코랄’이지만 이는 오래지 않아 불협화음과 반음계적인 추락 모티브들로 좌절되면서 쓸쓸한 결말에 이른다.
제1부가 장송행진곡과 분노의 폭발이라면, 스케르초로 된 제2부는 일종의 춤곡이다. 시골풍의 거친 ‘랜틀러’와 도시 풍의 세련된 ‘왈츠’가 교대되는 이 스케르초는 말러 자신이 표현대로 "우리는 삶의 한 가운데서도 죽음 속에 존재한다"(media vita in morte sumus)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겉으로는 행복한 삶을 누리는 듯하지만 시시각각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집요한 시간의 추적이 ‘♪♪♩♩’의 반복되는 리듬과 광포한 춤곡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결코 삶에 대한 확신이 아니다. 온갖 모티브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거대한 폴리포니를 이루고 있는 이 음악은 죽음의 추격에 쫓기며 우왕좌왕하는 인간의 혼란스러운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3악장의 난폭한 죽음의 춤을 거쳐 제3부의 첫 악장인 ‘아다지에토’에 이르면 지극히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음악이 현악기만으로 연주된다. 어떤 이들은 이 음악을 “알마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이 악장의 마지막 부분의 베이스 파트에 암시된 음악은 말러의 뤼케르트 시에 의한 가곡 ‘나는 세상에서 잊혀지고’라는 가곡이다. 이 곡은 말러가 “이 곡은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가곡이긴 하지만 사랑을 노래한 음악에 왜 이런 쓸쓸한 노래를 인용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는다.
4악장에 곧바로 이어지는 5악장은 지나치게 밝고 경쾌한 음악이다. 5악장에서는 2악장 말미에 잠시 등장했던 코랄이 완전한 승리로 끝나고 있어 "삶에 대한 강한 긍정"을 보여주는 음악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5악장 도입부에서 목관악기들이 연주하는 선율의 단편들 중에 클라리넷이 연주하는 멜로디를 잘 분석해보면 놀랍게도 그 성스럽고 장엄한 코랄 선율임이 드러난다. 5악장 도입부에서 툭 내던져지듯이 연주되는 선율의 단편이 교향곡 5번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성스러운 코랄의 단편이라는 사실은 어쩐지 신성모독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5악장 도입부에서 연주되는 바순의 상행 모티브는 말러의 뿔피리 가곡집 중에서 '높은 지성의 찬가'(Lob des hohen verstands)에서 따온 것으로 그 내용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이 가곡에서 당나귀는 귀가 크다는 이유로 뻐꾸기와 나이팅게일의 노래 경연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초청된다. 그는 단순하게 두 음만 반복하는 뻐꾸기의 노래가 더 훌륭하다고 판정한다. 이는 나이팅게일의 멋진 노래와도 같은 말러의 훌륭한 작품이 당나귀와 같은 당대 비평가들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말러의 자조인 듯 느껴진다. 말러의 냉소적인 풍자는 계속된다. 말러는 4악장에서 그토록 간절하고 안타깝게 표현했던 아름다운 사랑의 주제를 5악장의 제2주제로 가져와 지나치게 가볍고 경쾌한 음악으로 바꿔놓으면서 진실한 사랑을 회피하려는 듯하다. 이것 역시 코랄의 신성모독 못지않은 충격을 전해준다. 과연 말러가 [교향곡 5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지만, 말러가 이 교향곡에서 표현한 그 현란한 폴리포니와 화려한 기교는 오늘날의 음악애호가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 작품 해설 === <말러와 그의 가곡 / 이경숙 지음 / 삶과 꿈 출판사> 79 ~ 117쪽
어린이의 요술뿔피리 10곡의 오케스트라 가곡 Des Knaben Wunderhorn (1892~1899)
(1)
구스타프 말러(1860~1911)는 다섯 살 때 "장차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물음에 놀랍게도 "순교자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심포니와 가곡의 작곡가로, 또 오페라와 심포니 지휘자로 길이 기억될 이름이지만 그의 비극적인 운명을 생각하면 이런 표현이 이해될 성싶다. 그는 외롭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생활은 불화의 연속이었고, 형제 중 8명이 죽었으니, 말러의 삶이 얼마나 암담하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다. 더구나 중유럽의 유대인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말러는 운명적으로 여러 세기에 걸친 유대인 박해, 망명, 학살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말러가 빈에서 궁정오페라 총감독으로 취임한 1897년경에 빈의 문학, 사상, 의학계에서는 카프카, 슈니츨러, 츠바이크, 호프만스탈, 비트겐슈타인, 프로이드 등이 군림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유대인 또는 유대계 인물들이고, 또 빈 금융계를 주름잡는 이들도 역시 같은 혈통이었다. 이와 같이 유대인은 우수한 능력과 강인한 생명력으로 크리스트교 사회에 침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빈 시민들은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10년의 고군분투 끝에 말러는 오페라극장을 떠나야 했고 그로부터 한 세대 뒤에 빈은 가장 나치적인 도시가 됐다.
유대인의 숙명을 짊어지고 어려움을 겪은 말러가 가장 독일 정신을 표출하고 있는 독일민요시집 <어린이의 요술 뿔피리>에 심취되어 20여년을 그 작곡에 보냈음은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그는 그의 심포니에도 이 가곡을 전용하고 있다. 즉, 제2심포니 - 3악장 '물고기에 설교하는 파두바의 성 안토니우스', 4악장 '원광(原光)', 제3심포니 - 전곡이 '천상의 삶'의 주제로 이뤄짐, 3악장 '여름새의 이별', 5악장 합창 '세 천사가 노래하네', 제4심포니 '우리는 천상의 평화를 누리리' 등이다.
말러의 <어린이의 요술뿔피리 가곡집>은 1899년에 출판됐는데 같은 이름의 민요시집에서 가사를 따 10곡을 수록하였다. 말러는 그 뒤 같은 시집에서 가사를 딴 '죽은 북치기', '소년 북치기'를 작곡했고 오늘날에는 '세 천사가 노래하네 Es sungen drei Engel'와 '원광 Urlicht' 외 2곡을 포함하여 14곡이 연주되는 경우가 많고, 또 <말러 전집>에도 이와 같이 출판되어 있다.
독일 로만주의 문학의 전성기에 민요는 상상력의 깊은 원천이라고 여겼고, 말러의 시대에도 유럽 각국에서는 민족적 근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역사상 거의 모든 문화가 선대의 유산을 숭앙하였지만, 이 시기는 그런 관심과 연구에 대한 열의가 더 높았다. 따라서 슈베르트, 베토벤, 멘델스존이 <뿔피리> 시집의 풍요로운 민속적 서정성에 민감치 못하였음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슈만은 4곡, 브람스는 6곡을 그 시집의 시로 작곡했다. 그 뒤 볼프, 슈트라우스, 쇤베르크가 이 시집에서 가사를 쓰고 있으나 말러는 단순히 가사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몽상적 지향성, 비변증법적인 음악 기법에 결정적인 영감을 받았다. 이 가곡들은 실로 말러의 대표적인 걸작이요, 독일 가곡사에 그 독특한 존재를 자랑할 만한 훌륭한 예술작품이다.
말러는 민요에 대해, 특히 <뿔피리>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그의 어린 시절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말러는 1860년 7월 7일 지금의 체코령인 프라하와 빈 중간 지역인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국경지방인 이글라우 근처 칼리슈트에서 14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이 유대인 지역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란츠 카프카, 슈테판 츠바이크 등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버지 베른하르트는 유대인이면서도 유대교보다 카톨릭에 친근감을 가졌고 또 독일문화에 동화되기를 가아게 바라고 있어 아이들도 독일적으로 교육시켰다. 이 영향으로 말러는 보헤미아, 이글라우의 음악적인 분위기와 다양한 음악, 근대음악 민요, 유행가 등과 접촉이 가능했다. 또한 도시가 설화와 민속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글라우에서 말러는 거리악사의 손풍금 음악, 군악대의 행진곡, 신호나팔, 유모와 아버지의 고용인들이 읊조리는 여러 지방의 민요곡을 들으며 자랐다. 또 집시들의 강려한 슬라브 음악과 춤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말러의 민요시집 <뿔피리>와의 만남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부인 알마에 따르면 말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 시집을 알게 됐음을 시인했다 한다.
말러는 <뿔피리> 가곡을 작곡하려고 많은 시도를 하였다. 그가 이 민요집을 바탕으로 작곡을 한 기간은 거의 20년이나 되고, 1887년에서 1892년 사이에는 특히 강렬한 욕구에 사로 잡혀 많은 가곡을 썼다. 말러의 <뿔피리> 작곡의 연대를 살펴보면, 민요에서 시작하여 교향악장으로 변형해 가는 3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 초기의 성부와 피아노를 위한 작곡, (2) 성부와 오케스트라, 그리고 (3)오케스트라 가곡이 심포니의 악장으로 사용되는 시기이다.
여기서는 제2기의 작품인 성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가곡집을 검토하고자 한다. 말러는 이 가곡집에서 피아노 대신 여러 편성의 오케스트라를 반주로 사용하였고 가사는 독일 전래의 민요를 선택했으며 선율과 리듬도 민요풍의 소박한 것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경향은 분열과 붕괴의 바로 앞까지 다다른 세기말에 이른 그 당시의 예술가로서는 유일한 피난처였을지 모르나, 그것은 무엇보다 보편적이고 전 인류적인 음악을 창조하려는 말러의 의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2)
<뿔피리> 시집은 독일의 독특한 민요 설화집이다. 1806년과 1808년 사이에 출판된 이 시집은 클레멘스 브렌타노(Clemens Brentano)와 아힘 폰 아르님(Achim von Arnim)의 합작으로 이뤄졌다. 나폴레옹 전쟁의 폐허에서 19세기초에 독일인의 결속을 부르짖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출판된 <뿔피리> 시집의 출현은 문학적인 사건일 뿐 아니라 동시에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독일문화 사상 가장 중대한 전기를 마련했다. 이 두 권의 시집은 하나의 문화유산으로서 독일인에게 또 후세의 문화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02년의 뤼네빌 조약은 독일인의 자존심에 치명적인 모욕을 안겨준 것으로 국민정신의 각성의 계기가 됐다. 문학은 지난날의 독일의 영광을 환기시키는 친화력으로 그들의 과거와 뿌리를 찾는 운동을 정화시켰다. 쉴러, 티크, 노바리스 등이 독일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을 부활시키는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Danton, 1913:137). <뿔피리> 시집은 아르님과 브렌타노 두 사람의 로만적인 기질, 민속설화에 대한 관심과 문학적인 재능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
아르님(1781~1831)은 프러시아의 귀족으로 베를린에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에서 살며 1811년 유명한 브렌타노의 여동생 베티나와 결혼했다. 브렌타노(1778~1842)는 라인 지방에 사는 이태리 태생의 프랑크부르트 상인의 아들이었다. 그는 중세학의 전문가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다.
아르님과 브렌타노는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정처없이 방랑했기 때문에 민요설화를 수집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적극적이어서 나폴레옹의 위협하에서도 독일의 단결을 호소하고 주장했다. 그들의 만남은 18세기말 할레에서 독일 로만파 문학사상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동지들과 더불어 이른바 '제2의 독일로만파운동'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여러 형태의 구전시뿐 아니라 고대의 기도문, 잡지 ,캘린더 및 많은 서적을 수집햇다. <뿔피리> 제1집은 1806년 가을에 출간되어 괴테에게 헌정되었다. 괴테는 두 저자의 노고를 치하하는 긴 폰평을 썼다. 이 출간은 역사성 때문에 무엇보다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1806년 예나에서의 패전은 독일제국의 종말을 가져온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낙망하고 동요하는 독일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1808년에 <뿔피리> 제2집이 출간됐는데 그것은 제1집보다 더 애국적인 행위로 새로운 로만주의운동의 선언문이 됐다.
<어린이의 요술 뿔피리>라는 이름은 단순히 그 시집의 첫 시로 프랑스에서 전래된 작은 발라드의 제목에서 온다. 시집 안의 시의 형식과 내용은 매우 다양하여 단순한 어린이의 자장가에서 로망스, 발라드, 이별의 노래, 사랑노래, 살인이야기, 기적의 전설, 풍자 등이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은 풍자적인 얘기와 슬픈 얘기로 가득 차 있다. 민요는 민중의 서정성의 한 부분이고 뿌리이다. <뿔피리> 시집의 민요는 설화적이면서도 극적이고 형식은 서정적이어서 그 표현이 직접적이고도 단순하여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다. 그것은 지난날의 독일인들의 생활 전반을 묘사하고 자연, 초자연, 비극, 희극, 과장, 풍자로 뒤섞여 있다. 아르님과 브렌타노는 그들이 수집한 자료를 고치는 데 주저치 않았고 시는 축소 또는 확대되었으며 어휘가 바뀌기도 했다.
하이네는 이 시집을 일컬어 "이 노래에서 우리는 독일인의 심장이 고동 치는 소리를 느낄 수 있다. 독일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민요집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말러의 단순에 대한 깊은 동경, 어린이와 성인(聖人)의 무구한 신앙심, 중세 독일의 잃어버린 천국에 대한 그리움 등이 이 시집과 놀라운 평행선을 이뤘다. 왜냐하면 그것은 19세기초의 자연과 단순에의 복귀, 민중의 영혼에 대한 탐구 노력이 이 시집에 자연스럽게 시작(詩作)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러의 음악적 창의성은 <뿔피리>의 주제에서 많이 정화됐는데 그것은 자연의 아름다움, 어린 시절의 순진무구, 군인, 귀신, 영웅, 성자(聖者)들이 그와 이미 친숙햇고, 이 시가 그리는 죽음, 반란, 망향, 이별과 같은 감정이 또한 그와 친숙햇기 때문이다.
말러는 사색적이고 독서광이었다. 이런 시절 그는문학작품에 파묻혀 현실을 잊고 지내는 때가 많았다. 또 그는 문학적 재능, 특히 시작(詩作)에 능했다. 그의 문학 스타일은 호프만(Hoffman, Ernst Theodor Amadeus), 장 폴의 영향을 받았다(Newlin, 1978:119). 그러나 가장 큰 영향은 의심할 나위 없이 <뿔피리> 시집에서 받았다. 그는 시인으로도 우수하여 자작시에 여러 곡을 붙였다. 말러는 <뿔피리>를 바탕으로 가곡집을 작곡하면서 원시를 생략 또는 결합하거나 적절하고 절묘하게 손질을 하여 자신의 음악을 표현했다. 따라서 이 가곡집에서 말러의 음악과 가사는 가장 놀라운 관계를 가지고 잘 조화되어 있다. 말러의 작곡법의 극적 진실성이 이 가곡집을 문학적으로나 음악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게 했다.
오케스트라 가곡집 <어린이의 요술 뿔피리>는 큰 교향적 가곡으로 말러의 제2, 제3심포니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곡이 피아노로 반주되면 그 진가가 감소된다. 이 가곡집은 연가곡이 아니지만, 시, 주제, 분위기, 스타일에서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 스타일은 슈베르트나 뢰베의 발라드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말러는 이 위대하고 독특한 가곡집에서 순진과 천진함을 더욱 느끼게 하고, 또 해학적이고 동시에 비극적인 인간의 숙명에 대한 철학적이고 신비로운 메시지를 표현하고 있다.
(3)
오케스트라 가곡집 <어린이의 요술 뿔피리>는 큰 교향적 가곡으로 말러의 제2, 제3심포니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곡이 피아노로 반주되면 그 진가가 감소된다. 이 가곡집은 연가곡이 아니지만, 시, 주제, 분위기, 스타일에서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 스타일은 슈베르트나 뢰베의 발라드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말러는 이 위대하고 독특한 가곡집에서 순진과 천진함을 더욱 느끼게 하고, 또 해학적이고 동시에 비극적인 인간의 숙명에 대한 철학적이고 신비로운 메시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 가곡집은 남녀 두 사람의 중창으로 노래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4곡이 대화체로 되어 있는 것에 연유하지만, 본시 그렇게 연주되도록 작곡된 것은 아니다. 이 10곡의 오케스트라 가곡집은 앞서 작곡한 <피아노와 성부를 위한 가곡>에서의 분위기나 스타일이 더욱 원숙해졌고 새롭고 생생하게 묘사적인 악기편성에 의한 오케스트라 법으로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작은 오케스트라는 표현에 따라 하나의 목관악기와 호른에서 2개의 목관과 네 개의 호른으로, 하나나 둘의 트럼펫과 팀파니로 무거운 금관악기는 사용하지 않았으나 때에 따라서는 군대타악기 등이 동원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그것은 언제나 실내악 스타일로 사용되었고 각 파트는 마치 조각품의 한 획이나 선같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주제는 친근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어서 리하르트 슈페히트(Richard Specht)가 "이런 노래는 옛날에 작은 시골 시장 동네에서 군인, 양치기 또는 농부들이 노래했음직하다"라고 얘기했듯이 쉽고도 심금을 울리는 페이소스가 있다.
이것은 가곡집 같은 연관이 있는 곡들을 모은 것은 아니고 다만 민요시집의 가곡을 모은 것으로 병사의 노래, 사랑의 노래, 이별의 노래, 대화의 노래, 전설 등 다양하다.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와 비교할 때 음악 내용이나 작곡기법에서 이미 원숙한 대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고 말러 가곡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도 여럿 들어 있다. 더욱이 한곡 한곡 독특한 표현으로 가사 내용을 잘 표출하고 있어서, 한 사람의 작곡가가 작곡한 작품들이라는 점에는 경탄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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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의 제자인 지휘자 브루노 발터는 말러가 <어린이의 요술 뿔피리>에서 자기 영혼의 모든 갈구를 발견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민요시의 그럴 수 없는 천진성이 그를 이끌었고, 또 그의 폭발하기 쉬운 기질이 이 시집의 다양한 주제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가곡집의 노래들은 비극적인 군인의 죽음부터 뻐꾹새와 꾀꼬리의 노래시합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또 제8곡 <탑에 갇힌 죄수의 노래>는 자유를 부르짖는 정치범을 그리고 있다. 이들 노래에서 말러의 군대음악에 대한 선호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이 밝고 씩씩하고 생동적인 것이 아니라 어둡고 침울하고 때로는 무섭기까지 한 것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에 집 앞 병사에서 흘러나오는 신호나팔, 행진곡 등은 말러에게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또는 사랑을 위협하는 어떤 힘으로 연상되었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불행을 예감했는지 모른다. 군대 배경의 노래이면서도 제9곡 <아름다운 트럼펫 소리가 울리는 곳>은 야상곡적인 신비한 아름다움으로 안식을 찾는 영혼을 그리고 있다.
이와는 정반대로 제3곡 <불행할 때의 위안>, 제7곡 <라인의 전설>, 제10곡 <높은 지성의 찬미> 등은 경쾌하고 밝은 유머로 미소짓게 한다. 제2곡 <헛수고>와 제4곡 <누가 이 노래를 만들었을까>에는 민속적인 유연한 아름다움, 제7곡 <물고기에 설교하는 파두바의 성안토니우스>는 재치있고 섬세한 해학이 담겨 있어 가사 해석을 치밀하게 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또 거질고 불안한 제5곡 <지상의 삶>은 상징적이고 비통한 노래이다.
말러의 작품에서는 자연의 소리가 많이 들린다. 물소리, 바람소리, 뻐꾹새 울음, 당나귀 울음 소리, 폭풍우… 등, 말러에게 자연은 모방의 대상이 아니요 만물을 태어나게 하는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이었다. 도날드 미첼도 지적하듯 말러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 안에 담긴 자연과 그 소리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자기 망각과 대자연에의 귀의'라는 로만파 음악가들의 동경이 그로 하여금 자연의 소리가 자신의 근원적 갈구를 충족시켜줄 것을 바라게 했을 것이다. 친구인 나타리 바우어 레히너에게 말러는 자신의 자연관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이글라우 숲 속에서 울려나오는 자연의 음향에 몹시 감동하고 강한 감명을 받았다. 그 자연의 폴리포니(다성음악)는 소음 속에서도 무수한 새들의 지저귐 속에서도, 폭풍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파도의 소리에서도 아주 분명히 들려왔다. 모든 주제란 전연 다른 방향에서 이와 같이 출현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주제는 리듬도 선율도 전연 다른 것이어야 한다. 음악의 폴리포니와 자연의 폴리포니의 유일한 상이점은 예술가가 그들에게 질서와 통일을 주어 하나의 조화된 전체를 만드는 것이다."
말러 음악의 아름다움은 우선 선율의 소박함과 단순성에 있고, 행진곡이나 랜틀러 등의 친숙한 리듬을 쓰는 면도 있는 반면 형식, 조성, 기법의 규범에서의 일탈이라는 데서도 연유한다. 이와 같은 음악성은 그의 양극단의 우울증과 사생관, 또 그의 성격에 관계된다고 생각한다. 말러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아버지 베른하르트는 출세욕이 강하고 독선적이었고, 어머니 마리는 병약하고 착하여 서로 불과 물처럼 맞지 않는 내외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횡포에 눈물짓는 불쌍한 어머니를 보면서 말러는 언제나 가슴아파했다.
말러는 아버지의 독선으로 숨막힐 듯한 분위기에서 모든 것을 잊기 위해 피아노연습에 열중하거나 독서에 몰두했다. 그리고 이글라우의 숲속을 헤매며 위안을 얻었다. 또 연이은 동생들의 죽음은 그를 극도로 우울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깊은 절망과 갈등은 헨리 A. 리도 지적하듯, 유대계 보헤미안이 갖는 숙명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말러 자신도 이렇게 회상했다. "나에게는 고향이 따로 없다. 나는 오스트리아인 사이에서는 보헤미아 인이고, 독일인 사이에서는 오스트리아 인이고, 또 세계 속에서는 유대인으로서 어디서나 침입자였고 환영해 주는 곳이란 아무 데도 없었다."
빈 오페라의 총감독이 된 말러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오토 클렘페러의 말처럼 말러는 전형적인 반종교인이었다. 방황하는 유대인의 운명을 짊어진 말러는 서로 상반된 문화상황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 흔히 그렇듯 정신의 불안정, 지나친 자의식, 불안감, 권태 등으로 괴로워하면서 끝없이 위기적인 상황에서 살았다(로버트 E. 파크).또 창작가로서 말러는 언제나 영원한 것을 꿈꾸었고 그것으로 인해 불안과 절망으로 방황하는 로만주의자였다.
말러는 그가 죽기 바로 한 해 전인 1910년 여름에 부인 알마와 건축가 그로피우스의 연문으로 고민하였고, 또 악화된 건강과 계속된 불면증으로 시달렸다. 그는 많은 망설임 끝에 드디어 네덜란드의 라이덴으로 프로이트를 찾아가 정신분석을 받는다. 프로이트는 많은 시간 동안 주로 말러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분석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말다툼 끝에 어머니를 구타하여 어머니가 비참히 우는 모습을 본 말러는 결딘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집안의 참담한 비극과는 달리 집밖에서는 거리의 악대가 <사랑하는 아우구스틴>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말러는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말러의 음악은 심각하고 장중한 음악이 계속되다가 돌연히 너무나 이질적이고 때로는 대비되는 가볍고, 상냥하며, 유머에 차 있다. 프로이트는 말러의 증세를 진단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함께 하고 있는 이 상황을 어머니 이름을 따서 '마리 콤플렉스'라고 이름지었다. 프로이트는 말러의 즐겁고, 아무 걱정 없이 부드럽고 서정적인 멜로디 부분이 '마리 콤플렉스'이고, 이것을 파괴하려는 이상한 부친적인 부분이 말러 음악에 있다고 진단했다. 당당하고 대담한 행진곡풍의 오스티나토는 아버지를 상징하는 부분인 것 같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와의 유아체험이 말러의 잠재의식 속에 차 있다고 지적했다. 프로이트와의 만남을 통해 말러는 많이 치유가 되었지만 그 뒤로 작곡을 할 수는 없었다. 말러는 부인 알라 마리도 '알마'라고 부르기보다는 '마리'라고 부르기를 좋아했고, 장녀도 '마리아'로 이름지어 애지중지했는데 그 딸을 잃고는 깊은 상실감과 절망에 빠졌다.
말러의 작품의 미학적 목적과 그 성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역사적 위치와 예술관, 인생관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19세기말 빈에서 생활한 시간들은 말러의 음악과 예술에서 새 시대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는 로만주의 시대의 끝에서 20세기 시작까지 살았다.
그러나 말러는 과도기의 작곡가는 아니었고, 그의 작품은 정확히 말하여 후기 로만파에 속한다.
1880년에 작곡한 첫 가곡 <봄에 Lm Lenz>부터 그의 마지막 가곡 교향곡인 1908년 이후에 완성된 <대지의 노래 Das Lied von der Erde>에 이르는 28년간 말러는 59개의 성악곡을 창작하였다(한 해에 약 두 곡). 이 수치는 슈베르트, 슈만, 또는 브람스의 가곡 수와 비교하면 적은 수치이다. 그러나 전환기에 작곡된 말러의 가곡은 선대의 가곡 작곡가의 작품과 20세기의 새 스타일의 독일 예술 가곡에서 중요한 고리구실을 한다. 브람스는 1896년에 그의 마지막 작품 <네 개의 엄숙한 노래 Vier erenste Gesa:nge>를 작곡했고, 쇤베르크는 1908년에 20세기 가곡의 스타일을 확립한 가곡집 <공중 정원의 책 Das Buch der Ha:ngenden> Op.15를 작곡하기 시작했다(Mcshane:149).
말러의 <어린이의 요술 뿔피리> 가곡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작곡상의 기법의 변화는 그다지 현저하지 않다. 말러의 조성은 로만주의에 사용된 장.단조에 바탕하고 있고, 그의 작곡 3기 동안 비교적 계속해서 전통적인 맥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민속 음악에 관심이 있고 보니 그의 가곡에 분명히 선법의 사용이 생긴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고, <원광>에서처럼, 더 소원한 화성 관계의 증가는 그의 증폭되는 표현상의 욕구에 연유한다. 형식상의 구조도 다른 작곡가에 비해서 독특한 방법으로 확정되어 갔다. 그러나 이런 모든 작곡상의 현사은 후기 로만주의 스타일의기본이기도 하다.
말러의 작품은 그의 생존시에는 냉대를 받았고 시대에 훨씬 앞선 작곡가로 인식되었다. 아론 코플런드는 <우리의 새 음악>에 서 말러의 업적을 정확히 논평하고 있다. 즉, 그의 음악 텍스처의 교묘한 대위법과 경이롭고 개성이 있는 관현악법에 대해 쇤베르크나 오네거, 쇼스타코비치, 또는 벤저민 브리튼의 작품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효과를 이미 갖고 있다고 평했다.
말러가 작곡가로 활동한 시대에 여러 나라에서는 그들의 생활과 예술을 반영하는 독특하고 동질적인 음악을 확립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어떤 나라에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적극적인 운동으로 자국의 자료나 민속음악만을 많이 음악속에 넣고자 시도했다. 말러의 음악은 이런 국민주의를 뛰어 넘어서 '민속'적인 요소를 더 국제적인 공감의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말러가 택한 가사에서는 언제나 삶의 신비에 대한 경외로움과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때로는 인생에 대한 깊은 절망을 그리고 있다. 그의 가사의 주제는 인간의 상황에 관계되는데, 한편으로는 기쁨으로 새로워지기도 하고, 때로는 실의의 비탄과 공허를 느끼게도 한다(Cooke, 1980:7).
이와 같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딜레마는 말러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말러는 원래 기민하고 생동적인 성격이었으나 동시에 성급하고 불안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정의로워 남의 고통에 민감했고 남을 도우려는 자애로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고민했고 부당한 사회의 모습에 가슴아파했다. 또 타협을 모느는 외곬의 집념이 있어서 일생 동안 지휘자와 작곡가로 생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브루노 발터도 이런 면을 회상하면서 순간 즐겁던 표정이 끝없는 절망으로 빠져가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의 비참이 그의 온 몸을 얼음같이 찬 파도로 휩싸이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발터, 1958:145).
말러의 이상적인 표현법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은 예술가곡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데 이르렀다. 피아노 반주의 한계를 깨달은 그는 그의 가곡의 반주로서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사용했다. 마침내 노래의 범위는 교향곡과 합쳐 새로운 장르나 가곡 심포니를 만들어냈다.
말러는 가사에 매우 민감했다.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낄 때, 또 다만 음악만이 그 가사의 뜻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다고 느꼈을 때에만 음악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말러는 성악 파트가 중요하고 지배적인 구실을 가져야 한다고 분명히 했는데, 그것은 모든 중요한 가사의 어휘가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말러는 연주회 연습 때 성악가에게 각별히 정확한 가사 전달을 강조했다(Blankopf, 1973:252). 말러는 언제나 음악적 이념을 표현하는 방편으로 '가사'에 의지할 때 자신의 의도가 이루어진다고 고백하고 있다(Mantner, 1979:212). 이것은 베토벤이 그의 제9심포니에 쉴러의 가사를 써야 했던 심정과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성부가 멜로디를 노래할 뿐 아니라 가사라는 중요한 요소를 나타내는데 그와 같이 반주 또한 다만 반주가 아니고 가사의 모든 뜻을 전달할 수 있는 전반적이고 특별한 분위기를 마련해야 한다. 노래에 서정성과 인간성을 불어넣기 위해 말러는 거장적인 청각적 통찰력으로 가사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반주를 창조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작업을 거쳐 이루어진 <어린이의 요술 뿔피리> 가곡집은 성악 문헌상에서 하나의 경이로운 보물이요 성악예술의 금자탑이다. 그러나 20세기 독일계 유대인이 겪은 무서운 운명을 생각하면 한 유대계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독일정신을 노래하는 걸작을 이룩했다는 데서 우리는 운명이라는 일말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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