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교구의 '제2 성지'라 불리는 여산 성지는 1868년 무진박해 당시 여산군의 속읍지였던 고산, 금산, 진산 등의 심산 유곡(深山幽谷)에 숨어 살다 이곳 여산 관아로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당한 순교지이다.
충청도와 전라도, 즉 충남과 전북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 여산 땅은 학문과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어 천주교 전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앞섰다. 일찍 복음을 전해 받은 반면 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 길었던 탓으로 일정한 형장이 없이 마구 처형이 자행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박해가 한창이던 조선 교구가 독립을 한 것은 1831년 9월 9일, 그 안에서도 조선인에 의한 자치가 최초로 실시된 곳은 1931년 전주 교구였다. 조선 교구 설정 1백주년을 맞아 전주 교구를 방인 자치 교구로 선물받았던 것이다. 이는 전주 지방의 신앙이 지닌 깊은 뿌리를 말해 주는 것이다.
호남 최대의 신앙 산맥을 이루는 것은 대둔산과 천호산을 기점으로 한다. 일찍이 복음은 이 두 산의 줄기인 금산(錦山), 진산(珍山), 고산(高山)에 전해져 수많은 교우촌들이 산골짜기마다 형성됐다.
병인박해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교우들을 혹독한 박해의 칼날 아래로 내몰았다. 비록 조그마한 고을이었지만 여산에는 사법권을 지닌 부사와 영장이 있었기 때문에 교우들을 마구잡이로 처형시킬 수 있었다.
"치명 일기"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2명에 이르는 여산은 특히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가혹한 처형 방법으로 유명하다. 여산 동헌에 잡혀 온 신자들은 참수, 교수는 물론, 백지 사형(白紙死刑)으로도 죽임을 당했다.
백지 사형이란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사 시키는 처형 방법이었다. 지금도 동헌 앞마당에 백지사 터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처형장에서는 얼굴에 달라붙은 백지로 인해 숨을 헐떡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천국 영복을 그리며 천주 신앙을 고백한 선조들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 오는 듯하다.
여산이 품고 있는 성지는 동헌과 옥 터, 여산 숲정이와 배다리, 뒷말 치명 터 등 곳곳에 널려 있어 어찌 보면 여산 전체가 하나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동헌은 당시 사법권을 비롯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고을을 다스리던 곳으로 지금은 경로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동헌 자리 주위에는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고목들이 남아 있어 유적을 돋보이게 한다. 특히 동헌 마당에는 옛 부사들의 선정비(善政碑)나 불망비(不忘碑)들과 함께 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가 서 있다.
여산 동헌은 현재 전라 북도 유형 문화재 제93호로 지정돼 있고 맞은편 여산 초등 학교 종합 학습장으로 변해 버린 여산옥 터는 옥에 갇혀 있던 신자들이 굶주림에 못 이겨 옷 속에 있는 솜을 뽑아 먹다가 처형지로 끌려 나오자 풀까지 뜯어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장날이 되면 공개 처형장으로 변했던 '배다리'와 '뒷말 치명 터'는 하사관 학교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데 배다리에서 참수된 시신은 배다리 옆 미나리꽝에 버려졌고 뒷말 치명 터에서는 신자들을 정자나무에 목매달아 죽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사진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
여산이 품고 있는 순교 성지들
여산 숲정이 성지
여산 숲정이는 천주교가 전래되어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한 전주교구 제2의 성지입니다. 지금은 논과 밭 가장자리가 되었습니다만 박해 당시에는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숲정이 성지로 유래되어 오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순교하신 분들 가운데 10분의 시신은 지금 고산 천호 성지에 묻혀 계십니다.
이 곳 숲정이 터에서 우리 순교 조상들이 순교하기 전에 옥중에 갇혀 있는 동안 모진 형벌과 혹독한 굶주림의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 사형이 집행된 때는 늦가을이었는데, 구전으로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칼을 쓴 죄인들은 형장인 숲정이 풀밭에 와서야 칼을 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칼을 풀어놓자마자 옥중에서 얼마나 굶주렸던지 이 곳 숲정이 풀밭의 풀을 짐승처럼 뜯어먹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렇게 풀을 뜯어먹었겠습니까? 이와 같이 옥에 갇힌 신도 죄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무엇보다 굶주림이었습니다.
순교자 김성첨은 혹형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며 신음하는 신도들에게 위로하기를 "우리가 이 때를 기다려왔으니 천당진복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이만한 괴로움도 이겨내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 받자!" 하며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동헌 백지사 터 성지
(동헌은 부사의 행정 집무실이고 백지사 터는 부사의 집터. 현재 동헌은 경로당으로 쓰고 있고 백지사 터는 우리 교회에서 매입하여 순교성지로 보존해 오고 있습니다)
동헌 아래 마당에서는 백지사 형으로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백지사형이란 "동헌 마당에 나무 말뚝을 박고 교우를 평좌시킨 다음 말뚝에 묶은 후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품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시키는 사형 방법이었습니다"(일명 도모지사형(途毛紙死刑) 이라고도 함).
백지사형은 얼굴에 종이를 여러겹 바르니 죽고 사는 것이 캄캄하다는 뜻의 도모지사형(途毛紙死刑)이라고도 불리는데 현대 표기 도무지도 여기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동헌 아랫마당 백지사 터에서는 신도의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발라서 질식시키는 백지사(白紙死, 일명 도모지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전하는 목격담에 의하면 교우의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붙이고 또 물을 뿜으니 질식하여 죽는데 아주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기금터(연못과 누각이 있어 원님이 놀이하던 곳, 지금은 연못자리에 집이 있음, 현재 : 주차장 옆)
이곳에서는 화살로 쏘아 맞히는 사형법을 썼으며 여자들은 연못에 넣어서 죽였다고 합니다.
옥터(현재 여산초등학교)
이곳에서 옥사를 했고, 옥에서도 신덕 높은 교우들은 배교하려는 교우들을 권면하여 참회시키는 기도장소였다고 합니다.
배다리 및 뒷말 치명터(우시장, 현재 군인 아파트 앞 정자나무 있는 곳과 시장 안)
배다리에서 참수된 시신은 배다리 옆 미나리꽝에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신도들이 야음을 틈타 순교자들의 시신을 건져내어 순교자들의 옷을 벗겨보니 솜을 두텁게 넣어 입었던 옷 속에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배가 하도 고파서 솜을 다 뽑아 먹었던 것입니다.
뒷말 치명터에서는 장날을(현 1, 6일장) 골라 신자들을 정자나무 가지를 늘어 뜨려 목에 건다음 가지를 놓아서 교우들을 목졸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참혹하게 죽였습니다. 그 당시 신도들의 처형 일을 장날로 삼은 것은 천주교를 믿으면 이렇게 참혹하게 죽게 된다는 것을 장꾼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곳 여산 숲정이에서 치명한 이들 가운데 10명의 시신은 신도들이 몰래 숨어 있다가 자루에 담아서 야음에 천호산으로 짊어지고 와서 안장시켰다고 합니다. 천호 성지에 가보시면 성인들 묘소아래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순교자들 모두가 이 곳 여산에서 순교한 분들입니다. 따라서 이곳 여산 성지와 천호 성지는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입니다.
이와 같이 여산의 성지는 숲정이, 동헌과 기금터. 옥터. 뒷말 치명터와 배다리등 곳곳에 널려있어 어찌 보면 여산 전체가 하나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곳 여산 성당은 이들 순교자를 기념하여 그 정신을 따르기 위해서 1958년 10월에 세워졌습니다. [출처 : 한기호 신부, 여산 성당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