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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쉼터 스크랩 일본의 저력, 자포니즘(japonism)
보리 추천 0 조회 264 10.03.04 08:0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스포츠서울> 서병기의 대중문화 이야기

 

일본 문화상술의 저력

 

 

  일본에서는 한국 문화 열풍이 한창이다. "겨울연가" 신드롬으로 배용준은 일본 여성들의 우상이 됐다. 강우석 감독은 한국영화를 일본에 직접 배급하겠다고 나섰다. 강제규 감독은 한 술 더 떴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자심감을 얻자 할리우드 시장의 문을 열어제치겠다고 한다. 모두 좋다. 한국 대중문화의 활력을 증명하는 사례니까.

 한데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일본영화는 요즘 확실히 아이디어와 소재 고갈로 허덕이고 있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의 경쟁력은 우리보다 몇수 위다. 유민이라는 한국명으로 활동 중인 후에키 유코가 신인 시절 출연했던 영화 "신설국" 정도로 일본 영화의 수준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미국의 영화시장은 매우 폐쇄적이다. 자국 영화의 점유률이 항상 90%를 넘는다 . 우리가 갑자기 히트작 한편 냈다고 해서 할리우드의 높은 벽을 뚫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우선 문화가 전파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정지작업부터 해야 한다. 일본은 이런 일을 수십년,아니 수백년전부터 해왔다. 이 글은 일본 문화가 얼마나 미국 문화와 유럽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문화수출만이 살 길인 우리가 참고로 삼았으면 하는 뜻을 담고있다.

 할리우드는 일본 대중문화에 중독돼 있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문화 상품들에는 일본 문화의 "오마주"(경의)가 두드러진다. 철학의 패스트푸드점으로 불리는 "매트릭스"와 "킬 빌"은 일본 애니메이션과 액션영화의 영향을 그대로 드러낸다. 지난해 개봉한 "라스트 사무라이"를 보면 동양을 편향된 시각으로 그린 기존 서구영화들과 달리 사뭇 진지한 시각으로 일본을 바라본다. 서구 세계가 동양을 신비 아니면 야만으로 본다는 탈식민주의 이론의 거장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도 조금씩 수정해야 할 것같다. 신비하면서도 야만적인 동양을 정복한다는 가치관이 깔린 80년대의 "쇼군"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들이 숨어사는 산골마을의 정겨운 정취, 기모노와 일본 전통가옥의 단아한 멋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한자루 칼에 자신의 목숨을 건 사무라이들이 벌이는 처절한 싸움은 영화의 백미다. 다시 말해 일본 문화에 대해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묘한 동경심을 반영한 영화다. 그것은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남자다움"이 아닐까 싶다. 남자다움의 덕목으로 꼽히는 명예와 의리, 지도자와 부하들간의 끈끈한 사랑 같은 것들 말이다. 내가 "영웅본색"을 보고 생전 가보지도 못한 홍콩을 동경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로 서양인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저절로 일본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라스트 사무라이"의 감독 에드워드 즈윅과 주연인 톰 크루즈는 사무라이 정신에 매료됐다고 말한다. 즈윅 감독은 "7인의 사무라이"를 만든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통해 영화만들기를 배웠다고 할 정도다.즈윅 감독은 "전형적 사무라이인 카츠모토가 황제에게 굴종의 의미로 무릎을 꿇는다. 이때 등장하는 검도 의식은 무술 훈련인 동시에 우아한 춤이기도 하다. 겉으로 드러난 폭력과 죽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복종과 헌신... 그러한 이중성이야말로 일본 문화의 핵심 코드이자 이 영화의 언어다"라며 일본의 미학적 문화에 헌사를 바친다.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가 가장 존경하는 감독은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이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킬 빌"의 절정 장면에서 일본 노래를 선택했다.일본영화에서 봤던 동양적 가치를 얘기하는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 장면을 서양인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워쇼스키와 타란티노 감독은 일본의 탐미주의적인 폭력에 푹 빠져있다.진정한 사무라이는 스스로의 죽음을 감지하고,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한다. 두 감독은 할복자살하는 일본의 죽음 미학을 동경하는 듯하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일본 올 로케이션으로 제작했다. 그녀는 이 영화를 만든 이유가 도쿄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0년전만 해도 미국에 출시된 일본 영화 비디오는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에 불과했다. 이제는 고지라 시리즈와 자토이치 시리즈,미이케 다카시의 "후도",이시이 다카시의 "고닌" 등 온갖 일본의 대중영화들을 DVD로 구할 수 있다.

 어느 새 일본 애니메이션은 미국 대중문화의 주류로 편입됐다. 1963년 "우주소년 아톰"을 시작으로 40년간 미국에서 방영된 일본 애니메이션은 서서히 미국 대중문화속에 침투해 나갔다.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의 북미 매출액은 일본 철강산업 수출총액의 4배에 달한다. 재작년 일본 애니메이션이 극장 수입과 DVD 판매,캐릭터 라이선스 등으로 미국에서 벌어들인 돈이 43억달러라고 하니 우리와는 게임이 되지 않는다. 가랑비에 속옷 젖은 격이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우리도 어떻게 할리우드에 접근해야 하는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문화적인 과정과 노력이 지속되었기에 미국이 일본문화를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본은 유럽 영화의 중심인 프랑스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예술영화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인상파 미술을 통한 간접적 방식이다. 19세기 중반 파리는 이른바 "자포니즘(Japonism)" 열풍에 휩싸였다. "차이나"가 도자기란 뜻으로 쓰이듯 브리태니커 사전은 "저패닝(Japanning)"이란 단어를 칠공예 기법의 하나로 전용표기하고 있다.

 일본이 최초의 유럽사절단을 보낸 5년뒤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첫선을 보인 일본의 상품은 온통 공예품이었다. 병풍 도자기 두루마리용품에다 판화가들에게 특별제작하도록 주문한 각종 미술문화상품은 호기심어린 유럽인에겐 먼 동양의 신기한 물건으로 여겨졌다. 일본은 박람회장에다 고유의 별장을 지어놓고 전통차를 마시게 했다. 한쪽에선 곡예단의 기예를 자랑했고 다른쪽에선 장인들이 공예품 제작을 실연했다. 이 박람회가 뒷날 일본붐을 조성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도 일본열풍을 앓았다. 이 열풍의 견인차는 바로 "우키요에(浮世繪)"였다. 우키요에는 에도(江戶) 시대에 덧없는 세속적 표정을 그린 그림 일반을 일컫는다. 가부키 배우,거리의 여인,명승풍경 등이 주소재가 됐다. 우키요에가 목판화로 제작보급되자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은 이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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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네는 아예 자신의 아내인 카미유에게 화려한 기모노를 입히고 일본 부채를 들게 해 "일본 여인"을 그렸는데 일본의 무슨 관광포스터 같다. 또 우키요에 작가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그린 "후지산36경"이 같은 장소를 연작화한 것임을 알아채고 해뜨는 광경 하나를 수십차례 그렸다.(야외에서 같은 대상을 놓고 시간에 따라 여러 차례 그리는 것은 인상파 화가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모네는 말년에 파리 근교 지베르니에 집을 짓고 연못에 일본식 다리가 놓인 정원을 가꾸기도 했다. 거기서 수련을 즐겨 그렸다.

 마네의 "부채와 여인"과 "에밀 졸라의 초상"은 일본 병풍과 우키요에를 배경에 깔고 있으며 고갱의 대표작 "천사와 싸우는 야곱"은 한귀퉁이에 일본 스모 장면을 빌려썼다. 드가도 "빨래하는 여인"을 그리면서 화면 중심에서 벗어난 우키요에 특유의 구도를 써먹었다. 쿠르베,휘슬러,스티븐스,르누아르 등도 자포니즘 취향을 보여준 화가다.

 

 

 고흐는 화상인 동생 테오와 함께 일본판화들을 수집했다. 우키요에의 화사한 색채와 간결함에 반해 베끼다시피 그린 "비 내리는 다리"와 "플럼꽃이 피는 나무"등 일련의 일본 시리즈를 보면 고흐의 일본 열병이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흐는 안도 히로시게의 목판화 "비"를 모사했으며 물감상인 "탕기영감의 초상"에선 배경을 우키요에 일색으로 그려넣었다. 물론 고흐의 성취는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끌어올려진 것이므로 어느 한편의 영향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곤란하다.

 현대 미술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인상파 화가들이 우키요에에 심취한 이유가 있었다. 인상파 화가는 원래 선배들의 실내작업을 조롱하며 햇빛 내리쬐는 들판으로 나가길 즐겼다. 그들은 우키요에에서 보여지는 간결하게 생략된 형태와 구성,과감한 구도 그리고 탁월한 자연광의 묘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우키요에가 일찌감치 개항한 일본 수출품의 포장지로 쓰이면서 머나먼 프랑스에까지 흘러들어왔다 . 그러나 당시 파리에는 우키요에 판화를 파는 일본 상인들이 일찌감치 좌판을 벌여놓고 있었다. 물론 모네의 집을 일본식 정원으로 지어 준 것도 이들 상인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문화상술이 전세계 미술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다는 인상파 회화사에 기록됐다.

인상파 그림들이 전시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일본인들이 기세 등등하게 몰려 다니는 게 이해가 간다. 만약 고흐 같은 인상파 화가가 한국의 분청사기나 김홍도, 신윤복의 산수화와 풍속화를 대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궁금해진다. 문화 전파 기회의 확보에 무지했던 우리의 과거는 그렇다 치더라도 현재 우리는 세계 문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화 스타"를 만들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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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데 이 19세기 인상파 미술이 프랑스 영화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인상파 이념은 빛의 수렴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객관적 매체로서의 영화 카메라의 시선과 상통된다. 따라서 인상파 이념을 통해서 볼 때 인상파 미술의 영상적 경향은 필연적이었다.

 좀 쉽게 설명하겠다. 우리가 마치 그 장면은 프랑스 영화장면 같고 그들은 프랑스 영화장면처럼 헤어졌다고 이야기할 때 프랑스 영화장면이란 말은 이미 우리에게 일반화된 의미로서 수용된다. 여기서 일반화된 의미란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또는 신비한 시적 분위기를 말한다. 프랑스 영화를 인상주의 영화라는 용어로 분류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의미론적 맥락에서다.

 인상주의 미술은 영화촬영술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소프트 포커스와 필터의 사용,이중노출,극단적인 클로즈업,카메라 움직임의 중시,플리커 효과,슬로 모션과 패스트 모션,옵티컬 편집,다양한 카메라 앵글의 개발과 주관적 카메라 앵글 등이 인상파 미술이념에 따라 창출된 카메라 기법이다. 이러한 기법들에 의한 대상의 변용이 프랑스 영화를 서정적이고 신비적인 그러면서 낭만적인 분위기로 만들었다. 1920년대의 프랑스 인상주의 전위영화이론의 미학적 중심 논제들인 시각주의, 운동론과 리듬론, 포토제니론과 같은 이론에 기반을 둔 영화기법들에 일본문화가 깊숙이 개입됐다는 것이 기막히지 않은가.

 영화의 시각 양식이 정립된 1920년대에 프랑스 전위영화이론가나 감독들은 인상파 미술의 이념을 프랑스 영화의 근본방향으로 설정했다. 그들은 영화의 본질은 표현에 있다고 하면서 영화에서의 표현은 사실적 대상을 넘어선 내면적 진실로서의 감정이나 초자연적인 세계의 환기,인간 영혼의 영역을 표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1930년대 스튜디오 시스템을 갖춘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 영화계는 자국의 영화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에서 예술영화를 육성했는데,이 때에도 인상파 미술이 큰 힘이 됐다. 인상파 미술이 프랑스 영화의 미장센을 예술적으로 만드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셈이다. 이를 아는 일본인들은 프랑스 예술영화를 감상하며 친밀감 혹은 자부심 같은 걸 느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미국 영화와 프랑스 영화 모두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다. 서구인들은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외래문화를 받아들이지만 흡수한 외래문화는 그들의 몸에 익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처음에는 생선을 날 것으로 먹는다고 일본을 야만시했던 미국인들이 이젠 "스시"를 못먹으면 촌놈으로 간주하는 호들갑을 떨고 있다. 문화의 힘은 이렇게 무섭다.

 

2004/04/02

http://www.sportsseoul.com/special/expert/professional/culture/040402/2004040256167527000.htm

삽화 추가(by 사누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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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3.04 20:31

    첫댓글 문화의 힘은 무섭다~~~같은 의견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태도가 중요한 듯해요. 가랑비에 옷 젖고 수적천석이 무서운 결과를 낳는 것 같다는 좁은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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