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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강해1)
에무나(בֶּאֱמוּנָתֹו)(1)
230827낮 (합2:1-4)
<1)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아멘
김지찬의 책, 6가지 질문의 일부를 참조하여 이번 주와 다음 주 두주에 걸쳐서 하박국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박국 강해라고 이해하셔도 좋고, 하박국의 핵심인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 대한 강해라고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한 주에 말씀드리기는 너무 길어서 두 주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3장 밖에 안 되는 짧은 성경이니까... 꼭 읽어보시기 바라고, 다음 주에 꼭 읽어 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성경을 꼭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정말 그렇게 믿습니까?
정말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믿습니까?
나는 자녀를 위해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는데...내 자식은 좋은 대학도 못 들어가고, 취직도 못하는데... 믿지도 않는 아무개 자식은 명문대 들어가고 좋은 직장 취직이 되었는데도요.....?
나는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봉사도 했는데... 남편 잘못만나 죽어라 고생하는데, 아무개 집사는 설렁설렁 신앙생활 하는데도 남편 잘 만나 사모님 소리 들어가며 호의호식 하는 데도요?
누구는 돈 많다고 장로가 되고, 나는 그보다 교회도 더 오래 섬기고 열심히 했는데 장로가 안 되었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공평하십니까? 이런 경우 어떤 분은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고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똑 같은 목사인데 누구는 도시에서 큰 교회에 담임으로 잘 옮겨 다니고, 누구는 기도 많이 하고 열심히 섬기는데 여전히 시골 작은 교회에서 발버둥치고 있어도요....? 그래도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일까요....?
‘나’라는 시를 쓴 송명희 시인 아시죠..? 뇌성마비로 사지가 비틀려 제 몸조차 스스로 가누지 못하는데,,, 그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시를 썼어요...
그가 과연 쉽게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이 시가 나오게 된 배경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차례 반복되는 이사와 찢어지게 가난한 자신을 보면서 나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 때 하나님은 “말하는 대로 써라”고 하셨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가진 지식 없으나’ 난 왼손에 토막 연필을 쥐고서 울먹이며 받아 적기 시작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쓰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엉뚱한 말씀에 나는 울며 소리쳤다. ‘아니오, 못쓰겠어요. 공평해 보이지 않아요. 내겐 아무것도 없어요..내 모습을 봐요..이게 공평한 거예요’. 하나님은 ‘시키는 대로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써라’고 하셨고, 나는 못쓰겠다고 하고 공방전이 이어지다가 결국 하나님의 고집이 이겼다. 그렇게 해서 ‘나’라고 하는 시가 나오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래 저런 사람들도 있는데... 감사하며 살아야지.. 나는 훨씬 좋은 조건에 있는데...불평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그러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위로가 얼마 못 간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남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우리가 믿음생활 하는 이 환경,.... 결코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공평하다고하면 불신앙적일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불공평하다고 하소연하는 것이 꼭 불신앙적이기만 할까요?
기원전 6세기의 선지자 하박국 역시 하나님께 불공평하다고 불평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박국 선지자도 불신앙적일까요? 하나님께 불공평하다고 하소연 하는 것이 꼭 불신앙적이지는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합1:2-4절입니다.
<2)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박국서는 하나님께 불평하고 이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박국서는 하나님과 하박국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박국의 불평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왜(why )이고, 다른 하나는 얼마나 오랫동안(how long)입니다.
(1) 의인이 불의한 자에게 핍박을 당하는데 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십니까? 어찌하여 악인이 번창하게 내버려 두십니까?
(2) 언제까지(how long) 의인이 고통당하는 것을 두고만 보실 것입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악인들은 자기 힘을 의지하고 욕심을 부려 땅을 넓히며 부당한 이득으로 배불리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십니까? 교회 안까지 죄가 들어와 횡행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못 보신 척 하십니까? 신실히 하나님을 섬기려는 성도가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신앙보다는 돈과 권력과 학벌이 존중 받고 있는 교회 현실을 왜 보고만 계십니까?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단지 이 시대의 고민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집요하게 따라 다니는 문제입니다.
욥기의 저자도 동일한 의인의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하박국서는 욥기와 마찬가지로 의인이 당하는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박국의 불평에 대해 하나님은 하박국의 상상을 뛰어넘는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뜻밖의 일에 놀라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합1:5절입니다.
<5)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도대체 어떤 일이 있을 것이기에 들어도 믿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이방인인 갈대아를 동원해서 하나님 백성인 유다를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게 할 것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합1:6-10절입니다.
<6)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7)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8)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9)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10)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무서운 갈대아 군대를 불러서 유다의 성을 무너뜨리고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는 의혹이 풀리기는커녕 불평이 더 커졌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징벌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자기 백성을 심판하기 위해 더 악한 이방 갈대아의 손에 포로로 넘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가운데 있는 사악한 자를 벌하기 위해 신실한 백성까지 고통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당하는 핍박과 괴로움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13절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13절입니다.
<13)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박국 질문의 초점은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 잠잠하실 것입니까?”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 것은 하나님 속성상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설득력 있는 질문이죠? 하박국은 자기의 질문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실지 자못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성루에서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합2:1절입니다.
<1)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하박국은 성루에서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의 기대대로 하나님은 드디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박국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 주의를 주셨습니다.
합2:2절입니다.
<2)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하나님의 주의 사항이 무엇입니까?
판에 새겨서 달려가는 사람이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필히 알아야 할 중요성을 가진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달려가면서도 볼 수 있도록 크고 정확하게 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실 말씀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하박국의 질문에 답합니다.
합2:3절입니다.
<3)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의 질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묵시는 반드시 실행될 것이다“고 먼저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묵시란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그 성취되는 때가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성취의 시점을 향해 날아가며 100%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화살과 같습니다. 활을 떠난 화살은 언젠가 과녁에 도달합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과녁에 들어가 맞기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늦는 것처럼 보여도 언젠가는 과녁에 도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 번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면 언젠가는 그 정한 때에 반드시 성취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약속은 그 종점을 향해 날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정한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한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의 관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까지,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라”
지금까지 기다리다 지쳐서 “언제까지입니까?”라고 부르짖었건만, 하나님은 “내가 당장 개입하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더디게 보일지라도 끝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기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지만, 그 응답이 너무 더디게 실현될 때, 과연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릴 수 있습니까?
하박국이 처한 상황이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살 수 있는지에 대해 답을 주셨습니다.
본문으로 읽은 합2:4절입니다.
<4)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그의 마음’은 악인의 마음입니다. 악인은 교만하여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라는 응답입니다. 악인의 특징은 교만입니다. 악인은 교만하기 때문에 자기의 힘과 능력을 믿을 것이고, 얼마동안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지도 모르나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을 받을 것이고, 그 믿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지체되어 하루속히 실현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성품에 기초한 언약을 믿고, 참고 인내하는 믿음이 있다면, 의인은 어떠한 환란과 역경과 고통과 재난가운데서도 살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갈대아인과 이스라엘 선민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갈대아인은 악인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의인이라고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모든 인류를 두 계급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즉, “믿음 있는 자”와 “믿음 없는 자” 두 계급만 존재합니다.
이 세상은 인간을 피부로 나눕니다. 백인과 흑인과 황인으로/
이세상은 인간을 재산의 차이로 나눕니다. 가진 자와 못가진자/
학벌로 구분합니다. 많이 배 운자 못 배운 자/
이세상은 인간을 외모로 나눕니다. 잘 생긴 자와 못 생긴 자/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이런 기준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든 아니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교역자이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평신도든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진정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비록 더디게 실현되더라도 언약을 믿고 참고 기다리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 혹은 악인,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하박국처럼 더 의롭고, 덜 의롭고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박국은 악인이 자기보다 더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 왜 하나님은 잠잠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의인에는 정도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든지 아니면 악인이든지 둘 중하나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결국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번창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살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 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악인이 번창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의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인용한 것이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한 종교개혁의 근본 원리기에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바울은 신약의 세 곳에서 하박국의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롬1:17절입니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갈3:11절입니다.
<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히10:38절입니다.
<38)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성경 본문을 근거하여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강조하였고, 로마 카톨릭의 철옹성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이 본문을 너무 쉽게 지나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본문은 그렇게 쉬운 본문이 아닙니다. 그저 입술로 주를 시인하고 고백하면 나중에 천국갈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약속이 성취되지 않고, 악인이 번성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과연 “참 생명을 얻을 수 있을지”의 문제를 진지하게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 심각하게 믿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바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해야 “죽지 않고, 살 수 있는지”를 이야기 하는 심각한 말씀인 것입니다.
합2:4절에서 세 개의 핵심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 ‘믿음’, ‘살리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를 집중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믿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에무나/ בֶּאֱמוּנָתֹו 입니다.
히브리어 에무나/ בֶּאֱמוּנָתֹו 의 기본적인 의미는 “견고하다” 또는 “강하게 버티다”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에무나’/ בֶּאֱמוּנָתֹו 는 모두 49번 사용되었는데, 거의 모두 신실함(faithful)으로 번역되었는데...믿음(faith)으로 번역된 본문은 오직 하박국 2:4절 뿐입니다.
영어 번역자들이 하박국2:4절만 믿음으로 번역한 것은 바울이 이 본문을 인용할 때 “믿음”이라고 번역한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에무나/ בֶּאֱמוּנָתֹו 를 1차적으로 “견고함” 또는 “버팀”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박국 2:4절은 “오직 의인은 그의 견고함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그의 버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을 자주 들었기 때문에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믿음이란 어떤 사실에 대한 지적인 동의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과연 믿음이 단순히 지적인 동의일까요?
에무나/ בֶּאֱמוּנָתֹו 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출17:12절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의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 아말렉족속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가 팔을 들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모세가 팔을 내리면 전쟁에서 패하는 일이 생깁니다. 이에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들어 올림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12)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손이 해가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를 지역하면 그 손이 해가 지도록 “견고한지라”, “강하게 버틴지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쓰인 단어가 바로 “에무나” בֶּאֱמוּנָתֹו 입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여 버틸 수 없을 때, 돌을 가져다가 아론과 훌이 옆에서 팔을 붙들어 올려서 모세의 팔이 강하게 버티게 된 것을 ‘에무나’/ בֶּאֱמוּנָתֹו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에무나/ בֶּאֱמוּנָתֹו 는 물리적으로 ‘버티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피곤해 지친 팔을 끝까지 들고 버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이암아 살리라‘는 하박국 본문은 ”오직 의인은 그의 버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무엇을 믿고 버티는 것입니까?
이것을 알기위해 <누가 의인인가?>부터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봅시다.
창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그리하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로 복이 되게 할지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러나 8-9년쯤 지난 창15장에서 하나님이 “나는 너의 큰 상급이요 방패”라고 위로 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다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창15:4-5) 이 약속을 받고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었고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6절)
창15:6절입니다.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약속이 주어졌을 뿐, 아직 약속이 성취되지 않은 중간 단계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하나님을 믿은 것을 하나님은 의롭게 여기신 것입니다. 의인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그의 버팀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아 힘들더라도 강하게 버티면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하게 버틸 때에야 비로소 의인은 지금 여기서 진정한 삶을, 참 생명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 24장16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 버티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믿음은 버티는 것입니다. 의인은 버팀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 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너무 더디게 이루어져서 낙심되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때... 버티라는 것입니다. 능력 있고, 실력 있어서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아서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쓰러질 지경입니다. 더 이상 못 견디는 상황입니다. 다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럴 때 버티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그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불공평한 현실에서 하나님께 불공평하다고 왜 침묵하시느냐고? 왜 아무 일도 안하시냐고? 왜 내가 이렇게 힘든데 하나님은 도와주시지 않고 가만히 계시냐고? 너무 억울해서 못 견디겠는데....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하나님 섬겨왔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든 고난의 연속이냐고? 어떻게 좀 해보시라고?.... 그러면 그러냐? 네가 정말 힘들었구나? 알았다 하시고 당장 해결해주시고, 하나님이 고쳐주시고, 하나님이 역사해주시면 헷갈렸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명쾌해지고, 속 시원히 다 해결될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시고, 더디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진다... 내 말은 반드시 정한 때에 성취될 것이다. 그러니 더 버텨라!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 바로 이 순간에 버티는 것이다. 참아내는 것이다. 살아내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 면서도 버티지 못하면 그것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눅18:8절에서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믿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가짜 믿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3장은 종말에 관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에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말의 때에 미혹의 영이 판을 칩니다.(5절)
그런데 누가 미혹의 영에 사로잡혀 미혹합니까?
12절입니다.
<12)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형제가, 부모가, 자식이 미혹의 영의 도구가 되어 마귀에게 넘어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전혀 모르는 자가 아닙니다. 가깝게 지내는 교인이 그럽니다. 가까운 부모형제가 그럽니다. 심지어는 목회자가 그럽니다. 미혹에 영에 속아 넘어가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영분별을 못하니 넘어집니다.
마귀를 ‘디아볼로’라고 말합니다. 디아볼로는 ‘이간질하는 자’란 뜻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자녀와의 관계를 이간질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목회자의 성도를 이간질 합니다. 성도와 성도를 이간질 합니다. 그래서 불신하게 만듭니다. 신앙생활에 병이 들거나 미혹의 영을 따라 갑니다. 이 이간질에 믿음 흔들리고 미혹의 영에 휘둘리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 종말에 일어나는 모습들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환란의 시대, 재난의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절)
계시록에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를 “이기는 자”라고 표현을 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금은 흔들릴 때가 아닙니다.
교만할 때가 아닙니다.
자기 안 알아준다고 응석부릴 때가 아닙니다.
아무리 힘들고, 환란이 오고, 마귀가 미혹해도 끝까지 믿음 지켜야할 때입니다. 내 믿음 누가 지켜주지 않습니다. 내가 지켜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치열한 영적 전쟁 한 복판에 있습니다. 전쟁에서 누가 나를 지켜주기를 바래서는 안됩니다. 내가 나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남아야 합니다. 버텨야 합니다. 끝까지 주님 붙들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버텨야 합니다. 아무리 그럴 듯하게 미혹해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에무나( הנוםא )! 버티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직 의인은 그의 버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