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28일 온고을교회 주일 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너구리의 피난처 》
시 104:18
<성경의 레토릭>
성경을 읽다가 “너구리의 피난처”라는 대목에 제가 딱 꽂혔습니다.
제가 책을 쓰는 목사이다 보니 문학적으로 빼어난 표현을 보면 눈길이 딱 멈춥니다.
이게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니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은사를 주셔서 “너구리의 피난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게 하십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어떤 주제어를 검색하면 쭈르륵 뜹니다.
“너구리의 피난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신 목사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가 처음으로 “너구리의 피난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는 것이 아닌가싶습니다.
“너구리의 피난처”라는 대목에 제가 꽂힌 이유가 뭘까요?
성경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경전입니다.
종교의 경전 속에 “너구리의 피난처”라는 말이 있습니다.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읽어보지는 못 했지만 거기에 이런 표현이 있을까요?
천도교 경전에, 증산교 경전에, 유교 서책에, 호랑게교에 이런 레토릭이 나올까요?
아마 없겠지요?
저는 설교 원고를 우리교회 카페에 모두 탑재를 합니다.
인터넷으로 제 설교를 읽으신 분 중에 “여기에도 있습니다!”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가 사랑하는 성경책에 이렇게 “너구리의 피난처”가 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_ 이런 설교 누가 합니까? 이렇게 설교하는 목사 없습니다.
_ 저는 온고을교회에서만 들을 수 있는 설교를 추구합니다.
_ 잘 들으시고 은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성경에 이 표현이 있다는 것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은혜’는 무궁무진합니다.
<1. 하나님 성품의 ‘자상하심’>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첫 번째 은혜는 “하나님의 자상하심”입니다.
본문이 속해있는 시편 104편은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얼마나 자상하신 분인지 드러납니다.
(18절)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의 모습을 보십시오!
지구상에는 산이 많습니다. 산중에 낮은 산 높은 산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높은 산을 만드신 여러 가지 이유중 하나가 “산양을 위함”이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으로 뽑은 “너구리의 피난처” 어디입니까? ~ 바위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면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_ 오늘날 컴퓨터, 어마어마한 능력을 탑재하고 있습니다.
_ 요즘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왔습니까?
_ 젊어서 돌아가신 아버지, 음성녹음 파일 10초 분량만 있으면 현재의 음성을 재생합니다.
_ 젊었을 때 사진 한 장만 있으면 10년, 20년이 지난 오늘날의 동영상으로 재생합니다.
_ 얼마 전 유가족들이 그 동영상을 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하나님의 자상하심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수많은 생명체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생명체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생태계를 창조하셨습니다.
먹이사슬, 자연도태, 적자생존, 이런 원칙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입니다.
이러한 창조섭리가 작동하면서 지구상에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자상하심이 이 땅 육신의 아버지를 능가합니다.
육신의 아버지? 자상하십니다. 그러나 낳아주신 아버지의 자상하심은 길어야 10년입니다.
하나님의 자상하심은요? ~ 태초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자상하심입니다.
너구리의 피난처까지 만드신 분이니, 더 이상 말해 뭐하겠습니까?
“너구리의 피난처” 여기서 받을 첫 번째 은혜는 “하나님 성품의 자상하심”입니다.
<2. 하나님 창조의 ‘완전하심’>
“너구리의 피난처” 첫 번째 은혜는? 1. 하나님 성품의 ‘자상하심’
“너구리의 파난처” 두 번째 은혜는? 2. 하나님 창조의 ‘완전하심’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높은 산”과 “바위”가 나옵니다. 그리고 “산양” “너구리”가 나오지요!
“높은 산”과 “바위”는 자연입니다. “산양” “너구리”는 짐승입니다.
하나님은 엿새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엿새창조의 놀라움과 경탄을 시로 지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의 창조 중에 “높은 산” “바위” 그리소 “산양” “너구리”도 지었습니다.
“높은 산”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천지 창조때 이미 높은 산까지 지었습니다.
오늘날 과학에서 이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높은 산은 어떻게 만들어진다고 설명합니까?
지구 표층의 지각운동으로 산이 생성된다고 합니다.
풍화작용에 의하여 대 홍수에 의하여 산이 생긴다고 합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높은 산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지창조 때에 이미 높은 산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야 산양이 살지요!
☞ 오늘날 우리가 이 믿음 갖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믿음이 희박해지면, 약화되면, 유신진화론으로 빠져버립니다.
유신진화론은 “하나님이 천지창조 때에 진화의 방법을 사용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뭐가 아쉬워서 진화의 방식을 쓰시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눈앞에 있는 것, 이대로 지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타협하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을 진화론과 절충하면 믿음이 아닙니다. 불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되, 온전한 믿음 갖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믿음가지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 언덕을 만들고, 그 언덕이 진화하여 큰 산이 되게 하겠습니까?
전능하심으로 기왕에 만들려면 완벽하게 “높은 산” “바위” “산양” “너구리”를 만들지요!
“너구리의 피난처”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첫 번째 은혜 1. 하나님 성품의 ‘자상하심’ 두 번째 은혜 2. 하나님 창조의 ‘완전하심’
그냥 수사학적으로, 레토릭으로 “너구리의 피난처”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이렇게 깊고 심오한 하나님의 은총이 스며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캐내어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3. 하나님 말씀의 ‘탁월하심’>
성경은 인류의 지식과 지혜를 뛰어넘는 문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시편 104편 18절 한 구절로 “너구리의 피난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너구리의 피난처” 이 한마디에,
[하나님 성품의 자상하심] [하나님 창조의 완전하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는 [하나님 말씀의 탁월하심]입니다.
“너구리의 피난처”라는 한 마디,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이 표현을 썼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서 시편 기자가 “너구리의 피난처”라는 일곱 글자에 담아냈습니다.
[하나님 성품의 자상하심] [하나님 창조의 완전하심] [하나님 말씀의 탁월하심]
☞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을 매우 곡해하고 있습니다.
☞ 특히 창세기는 거의 신화라고 이해하고 주장합니다.
☞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 엿새창조 등을 신화라고 가르치고 설교도 합니다.
☞ 성경의 첫 부분을 신화라고 하면 성경 전체가 신화가 됩니다.
☞ 성경은 전체가 하나인 책입니다. 신화와 신화 아닌 부분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경계해야 합니다.
믿음을 이렇게 타협하다가는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든지, 아니면 아예 안 믿든지 해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 “너구리의 피난처” 이 한 마디가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_ 하나님은 태초에 너구리를 만드셨다. 지금 우리가 보는 너구리다.
_ 이 너구리는 수천년 간 진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그대로다.
_ 왜 그렇습니까? 바위를 보세요! 우리가 지금 보는 바위가 진화의 산물입니까?
_ 하나님이 창조하신 바위, 세월이 흐르면서 풍우에 씻기고 깨어졌지만,
_ 바위는 다시 만들어집니다. 다시 만들어지면서 바위가 진화를 합니까? 아닙니다.
_ 너구리,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너구리가 번식을 합니다.
_ 번식을 하면서 진화를 했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_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나 지금이나 “너구리의 피난처는 바위”입니다. 한결같습니다.
_ 바위틈에 집을 짓다가 지금은 물속이나 나무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_ 창조 때의 너구리가 바위를 피신처로 삼듯이 지금도 똑같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너구리의 피난처” 이 한 마디가 지금 이렇게 웅변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너구리의 피난처”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랑>
[1 하나님 성품의 자상하심]
[2 하나님 창조의 완전하심]
[3 하나님 말씀의 탁월하심]
시편 104편 18절의 “너구리의 피난처” 이 한 마디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피조물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너구리를 창조하실 때, 허허벌판에 ‘네 멋대로 살아가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너구리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너구리는 그저 야생하는 동물입니다.
그 너구리,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자라서, 어떻게 새끼를 낳고, 어디서 살아가나?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한 평생 살아가는 중에 ‘너구리’라는 짐승을 한 번도 못 보고 죽는 이도 많을 겁니다.
그러면 너구리는 누가 돌봅니까? 너구리는 누가 사랑해 줍니까? 너구리는 누가 먹여줍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이 무엇일까요? ~ “너구리의 피난처”라는 한 마디가 대답합니다.
너구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너구리는 바위를 피난처로 생존합니다.
위험이 닥치면 재빠르게 바위 틈으로 기어들어갑니다. 그러면 안전합니다. 목숨을 건집니다!
누가 이렇게 너구리의 삶을 설계하고 너구리를 먹이십니까?
하나님입니다.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_ 저는 이 설교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
_ 설교 제목으로 “너구리의 피난처”로 정하고, 설교원고를 인터넷에 탑재합니다.
_ 오늘 이후부터 포털사이트 DAUM에서 “너구리의 피난처” 검색하면 이 설교가 뜰 겁니다.
_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_ 사실 “너구리의 피난처”라는 이 한 마디의 지적 소유권은 성경 시편에 있습니다.
_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이렇게 선포할 수 있는 책은 성경뿐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피난처로다!>
하나님이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이 한 마디에
[1. 하나님 성품의 자상하심]
[2. 하나님 창조의 완전하심]
[3. 성경의 문학적 탁월하심]이 들어있습니다.
여러 마디 한다고, 길게 말한다고 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짧게 한 말씀하시지만, 그 속에 이렇게 ‘몽땅’ 다 담을 수 있습니다.
☞ 이쯤 설교하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위가 너구리의 피난처라 했는데, 그럼 나의 피난처는 어디지?’
혹시 여러분에게는 피난처가 필요없으신가요?
만일 여러분에게도 피난처가 있어야 한다면, 여러분의 피난처는 어딥니까?
어려서는 어머니의 품이 피난처입니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어머니,
가족을 이루고 나서는 가정이 나의 피난처입니다.
아내가 남편이 나의 피난처입니다. ☻ 정말 그렇습니까? “아이구, 웬수~~~”
어머니는 나보다 일찍 돌아가십니다. 남편 아내 잠깐입니다.
가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뿔뿔이 흩어집니다. 자식들 제 짝을 찾아 떠납니다.
어디가 나의 피난처일까? 사람들의 피난처는 어디일까? 어디일까요?
“바로, 바로, 바로!!! 교회입니다!” 할렐루야~
너구리의 피난처는 바위 하나로 충분합니다. 평생 바위가 변함없이 피난처가 되어줍니다.
인간들, 죄가 많습니다. 어머니 품 하나로는 불충분합니다.
남편, 아내도 피난처로 오래 못 갑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교회’를 피난처로 주시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피난처로다!”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이 한 마디에
[하나님 성품의 자상하심] [하나님 창조의 완전하심] [하나님 말씀의 탁월하심] 이 셋이
들어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피난처로다!” 이 한 마디에도 똑같이 세 가지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해 주십니다.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교회는 사람들의 피난처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