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얀 찐장이 먹고 싶어요.'
글이 카페에 올랐다.
무척이나 정감이 있고, 서민적인 적인 이야기가 떠올려지는 글, 잘 쓴 내용이기에 내가 아랫처럼 빠르게 댓글 달았다.
'저도 고교시절에 찐빵 먹었지요.
충남 대전시 대흥동(대전여중, 성당) 교문 앞 부근에는 중국빵집이 있었지요. 중국인들. 마나님은 전족해서 발을 기우뚱 기우뚱거리며 걸었고.. 저는 돈 별로 없는 학생이라서 이따금 먹었지요. 심부름도 하고. 그 빵 맛이 어땠는지는 기억 못합니다.
아마도 엄청나게 맛이 있었겠지요. 늘 배고픈 학생이었기에.
하도 오래된 기억이라서 그 빵맛이 어땠을까.. 기억이 안 나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빵. 팥 앙꼬가 든 빵이 맛이 있지요. 지금도.. 한 번 사 먹어서 맛 좀 봥야겠습니다.
글 좋아서 꾸욱!'
지나간 것들은 모두 아름다운 것일까?
글감 하나가 떠올랐다.
내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1960년부터 내가 초중고시절을 보냈던 대전 중교통에서 서쪽으로 300m 쯤 걸으면 대흥동에 있는 대흥성당(그 당시 이름은 기억 안 남)건물이 보이고, 도로 건너편에는 대전여중학교가 있었다.
이 근처에 채 못가서는 중국사람이 장사하는 작은 찐빵가게도 있었다.
커다랗고 시꺼먼 무쇠솥이 두서너 개. 끊임없이 허연 수중기가 빵집 안을 가득 채웠다. 특히나 찐빵을 꺼낼 때에는 솥단지에서 수중기가 뜨겁게 솟아올랐다.
허름한 나무로 된 사각탁자 위에 올려놓은 양푼 양재기 그릇 속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방.
무척이나 탐스럽고 먹음직스러웠다. 두 손 안에 쏘옥 들어올만큼 알맞은 크기는 동그스럼했고, 희뿌여한 색깔로도 코를 벌름거리게끔 자극했다. 두 손으로 잡고는 힘을 주어 반으로 쪼개면 팥앙꼬가 잔뜩 보였고, 달짝지근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뜨거운데도 한 입 베어물면 달콤한 맛이 입안에도, 이빨에도 가득 배었고, 목젓으로 넘어갔다.
적은 돈으로도 배불리 먹고,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찐빵. 주인의 중국사람이었다.
이들이 무어라고 말하는지를 전혀 알아듣을 수도 없지만 그래도 빵값이 얼마여요? 물으면 빵값이 얼마라는 말을 서로 나눌 수는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빙빙 돌려서 머리에 얹고는 긴 비녀로 찔렀고, 검은 옷을 입었던 중국인 할머니는 제대로 걷지 못했다. 어린시절 발이 자라지 못하도록 헝겊으로 찬찬히 동여매서 크지 못하도록 했기에 발뼈와 발가락이 뒤틀린 병신이었다. 기우뚱 기우뚱 왼쪽으로 솔리고 오른쪽으로 기울면서 천천히 걸었던 중국인. 전족(纏足)의 여인네였다.
위 중국빵집에서도 찐빵 삶은 솥단지 뚜껑을 열어제끼었을 때면 허얀 수중기가 부엌천장을 가렸고.,
위 성당에서도 옥수수죽을 퍼내던 무쇠솥 안에서도 달작한 냄새가 밴 수증기가 번졌다.
내 오래된 기억 속에는 시골에서 도회지로 전학 온 가난한 촌이악, 학생이 들어 있다.
뙈국사람, 중국사람이 긴 옷을 입고 밀가루를 반죽하여 똥글똥글한 빵을 만들고, 솥에 넣고는 찌고, 전족한 중국여자가 넘어질 듯 스릿스릿하며 천천히 걷던 모습도 떠오른다. 이국적인 뽀족건물, 성당 안 마당에서 허름한 사람들이 양푼이나 바께스를 들고 강냉이죽을 얻으려고 줄 섰던 모습도 기억이 난다. 그 틈에서 어린 아이가 어릿거린다.
수십 년이 지난 뒤인 2017년 12월인 지금.
그곳도 무척이나 변했을 것 같다.
내가 대전을 떠난 지가 1977년 말이니 벌써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오래 전 중국사람들도 모두 저너머의 세계로 떠났을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가난한 학생, 촌놈이었기에 그 빵집에 많이 가지는 못했다. 이따금 없는 용돈을 모아서... 가끔가다가 심부름으로 빵을 사러 갔어도...
대전 대흥동. 대전여중 교문 길 건너편에 있던 대흥성당은 촌아이의 눈에는 무척이나 크고 우람했다.
서해안 시골마을에서 대전으로 전학 온 촌아이였던 나.
작은어머니가 양푼을 내주면서 이웃집 아주머니(철수 어머니)를 따라 가라기에 왜 그런지도 모르고 뒤따라갔다.
성당 마당에는 정말로 사람들이 득실거렸고, 마당 한 구석에는 커다란 무쇠솥에서 허연 김이 뿜어져 나왔다.
노르스름한 죽.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옥수수죽, 강냉이죽이라는 것을. 처음 맛본 밋밋한 죽이라니...
2.
예전 나는 시골에서 살았다.
충남 서해안 갯바람이 야트막한 산능선으로 넘어오는 곳,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산골마을에서 살던 때가 있었다.
키 작은 엄니, 학교배움이 전혀 없는 엄니는 밀가루에 물을 조금 붓고는 5일장 십리가 되는 장터에 나가서 장사꾼한테 사온 이스트를 조금 넣었다. 밀가루를 부풀리게 하는 발효균 이스트. 뜻뜻한 아랫목에 올려놓으면 밀가루 반죽은 발효되면서, 부글거리면서 부풀어 올랐다.
널다란 송판 판대기(도마)에 올려놓고는 두 손바악으로 꾹꾹 눌려서 치대기 시작했다. 이따금 물을 부어서 쫀득쫀득하게 이겨댔다. 어깨에 힘을 주면서 꾹꾹 짓이겨댔다. 상체 몸뚱이를 끄덕끄덕거리고.
잘 치대고 쫀득하게 짓이긴 밀가루 반죽을 양푼에 담았다. 작은 애기사과나 크기만큼이나 떼어서 두 손바박 위에 올려놓고는 동글동글하게 비볐다. 또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동그랗게, 동그스름하게 밀가루 반죽을 곱게 얉게 폈다. 그리고는 팥고물, 콩고물, 참깨고물을 몽당숟가락으로 조금씩 넣고는 다시 반죽 끝을 꾹꾹 눌렀다. 속에 든 고물들이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아구를 단단하게 눌렀다.
끄거운 김이 모락모락 뿜어오르는 물솥에 채반을 넣고는 그 위에 지금껏 만들었던 빵을 넣은 뒤에 솥뚜껑을 닫고는 다시 아궁이에 불을 괄하게 지피워 땠다. 뜨겁게 타오르는 장작불. 이따금 솥뚜껑을 열은 뒤에 쇠젓가락으로 찐빵 속을 찔러서 덜 익었는지 설었는지를 확인했다.
'다 됐다'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물기가 밴 채반을 '엇 뜨거' 하면서 건져냈다.
구수한 냄새, 맛있는 냄새, 먹음직스러운 빵이다.
찐빵을 먹는 날이면 추운 줄을 몰랐다.
송판으로 짜서 만든 부엌문 밖 너머 안마당에는 흰 눈이 펑펑 쏟아져내려도 찐빵 먹는 날에는 춥지 않았다.
마냥 배부르고 따습고, 즐겁기만 했다.
수십 년 전에는 그랬다.
그랬다.
그랬...
그...
...
없다, 이제는.
엄니도 없고, 하나뿐인 누나는 멀리 대전에서 살고.
나는, 이제는 그런 빵을 만들지 않는다.
옛일이 그리워지면 서울 송파구 잠실 새마을시장 안에 있는 찐빵집에나 한 번 들러서 찐빵 하나라도 사서 먹어야겠다.
내 어머니가 직접 만들던 엄니표 빵도 아니고, 내가 흉내면서 만들던 그런 빵도 없다.
그래도 재래시장에서 사는 빵, 허름한 장사꾼이 만든 빵이라도 입맛 다시면서 옛날이 된 그 동심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 봐야겠다. 추억 속으로, 기억 속으로, 그리움 속으로 나 혼자만이라도 기웃거려야겠다.
3.

위 사진은 다음 카페에서 임의로 퍼 왔다.
지적소유권의 침해이다. 불법행위이다.
'전족'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도록 퍼 온 것에 불과하다. 문제가 되면 즉시 삭제한다.
.
위 사진 고맙습니다. 꾸벅 꾸벅~
과거시대, 양반시대의 중국 남자들은 집안 여자를 구속하고 학대했다.
여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의 통제수단이었고, 밤에 잠자리의 엽기적인 도구였다.
전족. 발이 크지 못하도록 서너 살 계집아이때부터 헝겊으로 졸라매서 병신으로 만들었다
여성들은 하나의 재산(물건)에 불과했다.
대전 직할시 대흥동에 있는 성당을 검색하니 사진이 떴다.
대흥성당. 새로 단장한 건물이라도 옛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은 퍼 오지 않았다. 지적소유권의 침해이기에...
... 나중에 보완하면 그럴 듯한 산문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