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숱한 기법들이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은 영적 유파의 중요한 측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돌파가 일어나는 순간은 '사토리'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일시적일 수도 있고 혹은 영구적인 깨달은 상태로 우세해질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됐든 간에, 그것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경험이지요.
누구든 자체의 틀을 갖춘 영적 단체에 가입할 필요 없이 명상을 잘 해낼 수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두 가지 방법을 명상 수행에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첫째는 주변 시야 수행과 같은 것입니다.
중심 초점은 어고, 그대신 선별하는 일 없이 우세한 상태와 전체적 조건들을 주시합니다.
이루어야 할 목표는 없지요, '득도 '와 같은 프로그램은 전부 내려놓습니다.
정신 작용 없이, 있는 전부임(All That Is)의 단순한 '있음'에 내막기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신의 전부임(Allness of God)이 드러나는데,
이는 참나의 본유적 측면으로서 의식의 앎으로 펼쳐집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심 시야 초점과 유사한 수행이 있지요,
정신작용과 정신 기능의 내용을 피하는 대신에, 역설적으로,
내용 및 형상의 특이성에 절대적이고 강도 높은 집중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닭을 붙잡는 선과 비슷합니다.
바늘 끝 같은 초점을 제외한 일체를 절대적으로 배제하는 것이지요,
전통적 명상 수행에서는 생각들을 무시하는 반면,
이 수행에서는 집중하기 위해 생각을 선택하며 그에 대한 저항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앎/관찰자와 관찰 대상 간의 분리가 해소되지요
정신 집중에 몰두하고 있는 어떤 '나'도 없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러므로 목격자는 목격되고 있는 그것입니다. 둘은 같은 것이지요,
이 두 가지 수행을 통해 결국 이원성은 초월되고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가공적 분리는 녹아 버립니다.
그리하여 실상의 하나임(Oneness of Reality)이 드러납니다.
일상생활에서나 약식 명상에서 초점을 맞춘 앎이나 주변적 앎의 수행을 하면
정신적 내용과 신념 체계를 우회하게 됩니다.
붉교나 기독교 등과 같은 이름표를 일체 거부하는명상 센터들이 있지요,
사람들은 그저 그곳에 가서 명상할 뿐입니다.
저절로 드러나는 진실은 보편적이며 모든 이름표 너머에 있습니다.
모든 명명은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이 기대는 그 다음에 제한, 장벽, 이루거나 얻어내야 할 환상적 목표들이 됩니다.
명상에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자'는 목표 혹은 '긴장을 풀기 위해 더 힘껏 노력하자'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선불교 전통의 공안(화두)이 갖는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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