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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주인공 예수님과 복음으로 생겨나는 주의 제자들
요한복음 1:45-51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였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그는 하나님께서 지난 4천년 동안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주셨던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였습니다.
[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2 …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요 1:29, 32-34)
이렇게 공식적으로 나사렛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한 세례 요한은 그 다음 날에 두 제자와 함께 섰다가 예수님을 보더니 또 다시 외쳤습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35-36).
지금 세례 요한의 이 외침은 그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을 따라가서 주의 제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40절에 보니 안드레입니다. 그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입니다. 그러면 다른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세베대의 아들 요한입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내에서 사도 요한은 자신을 익명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세례 요한은 그의 두 제자 안드레와 요한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며 그들로 예수님을 따르게 합니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은 쇠하여지고 주를 흥하게 하려는 진정한 겸손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37절은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따른다”는 표현은 “제자가 된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당시 배경 속에서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은 그를 향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즉,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기 위해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생이던 세례 요한의 말을 믿고 이제는 세례 요한 대신 예수님을 그들의 선생으로 모시고 제자로 헌신하고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이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여기서 ‘구한다’는 뜻은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뜻입니다. 이에 두 제자는 예수님의 질문에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묻습니다. ‘랍비’는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른 것은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어디든지 따라가겠노라고 결정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29절)이라 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34절)이라는 증언하였기에 당장 메시야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랍비'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두 제자가 물은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질문은 그 당시 제자가 스승과 함께 살며 배우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살며 많은 시간을 그분과 보내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두 제자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질문함으로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와서 보라.”
이는 예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고 그가 거하시는 곳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에 그 두 제자는 예수께서 거하시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날 예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이 사건은 기독교 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처음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장소와 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소는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이고 시간은 오전 10시였습니다. 즉, 예수께서 안드레와 요한을 제자로 얻으신 것은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오전 10시에 얻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이 장소와 시간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랍비’로 모시고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 세례 요한의 증언과 바람에 따라 곧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최초로 새언약의 기독교 교회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자, 이렇게 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된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41절을 보니 안드레가 그의 형 베드로를 만나 예수님을 전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어”(요 1:41).
이 말은 우리가 찾던 메시야를 발견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기다려오던 대망의 메시야를 만나고서 곧바로 그 놀라운 소식을 시몬 베드로에게 전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안드레와 요한입니다. 이 두 사람의 증언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께로 가보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두 제자는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께로 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십니다. 그때 예수께서 시몬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 1:42).
아람어 게바는 헬라어로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 그 뜻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장차 네가 게바라 하리라”는 예언의 말씀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성취됩니다.
[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5-18)
또한 그 두 제자 중 익명의 제자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은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공식 사도가 되었고 교회의 터와 기둥이 되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또 기둥 같이 여기는 … 게바와 요한도 (있도다)”(갈 2:9).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우리는 본문 1장 35-42절에서 기독교 교회의 시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독교 교회의 시작은 매우 연약한 두 제자로 시작하였습니다. 그 두 제자는 원래 구약을 대표하는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예수님의 교회가 원만하게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는 세례 요한의 증언 덕분이었습니다. 그 증언은 작은 씨앗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증언은 엄청난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알려주는 이 간단한 선언은 기독교 교회의 모든 시대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알려주며 그리스도를 전할 때,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높일 때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죄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린 숫양의 뿔 나팔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가장 미련해 보이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숫양의 뿔 나팔은 가장 견고한 가나안 땅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주께 순종하고 숫양의 뿔 나팔을 불며 함성을 외칠 때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여리고 성을 지진으로 무너뜨리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알려주는 이 간단한 선언은 인간들의 마음 속에 높이 쌓여있는 철통 요새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한 증언은 모든 시대에 택한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금 이 시대까지 증명해 왔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들은 세례 요한과 같이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만을 증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보라, 교회를 보라, 행사를 보라, 멋진 의식과 예식을 보라”고 외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셔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세례 요한처럼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그리스도를 높여야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반복되는 세례 요한의 선포를 듣고 주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실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보려면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계속 선언해야 합니다. 은혜의 복음을 반복해서 들려주어야 합니다. 단 한 번의 말씀 선포와 권유로 영혼 구원의 열매가 거두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오직 끊임없이 반복되는 은혜의 강만이 수많은 강퍅한 마음을 씻어 무너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0-11).
주변의 불신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그의 가까운 친구들, 매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우리 교회에서 예배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어요, 우리 교회에 오시면 당신도 예배 가운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요”라고 하며 교회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교회에 오면 단 한번에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 거듭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할 때 안드레와 사도 요한이 주의 제자가 된 것처럼, 여러 차례 교회에 와서 복음의 설교를 듣다 보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모든 지체들은 안드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이 시대의 노아의 방주가 될 것입니다. 친구를 만나서 복잡한 신학 교리를 가르치며 신학 논쟁을 한다고 하여 주의 제자가 더하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그리스도를 만난 사실을 알려주며 그가 예수님을 어디서 만났는지 그곳으로 그 친구를 인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많은 영혼들이 교회에 와 볼 것이며 그래서 여러 차례 와 보다 보면 그들도 예배 가운데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많은 제자들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 주 안에서 신자가 된 주의 제자들과 교회의 사명이요 책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여 더 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시기를 기도합시다. 안드레는 어린 제자였습니다. 그는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유명한 랍비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반석이 되는 베드로를 주님의 제자로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방법은 “내가 메시야를 만났어. 형도 그를 만나보지 않겠소”라는 간단한 고백과 권면이었습니다.
이제 43절부터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친히 빌립을 제자로 삼고 그를 통해 나다나엘을 제자로 삼는 것을 보게 됩니다
43을 보니, 안드레와 요한과 베드로가 주의 제자가 된 그 이튿날 예수께서는 갈릴리고 올라가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직접 사람을 불러 그의 제자로 만드십니다. 그 대상은 빌립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인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멀지 않은 벳새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주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빌립 역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직후 곧바로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나다나엘은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을 잘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고향은 갈릴리 가나였으며(21:2) 예수를 만날 때에는 벳세다에 살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톨마니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있던 바돌로매와 동일인입니다. 즉, 바돌로매 나다나엘입니다. 이는 시몬 베드로가 '바요나(요나의 아들) 시몬'(마 16:17)이라고 불리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그가 잘 아는 구약 성경이 가리키는 메시야를 우리가 만났는데 그 메시야는 다름 아닌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빌립은 예수께서 직접 만나서 “나를 따르라”하심으로 만든 제자였는데, 제자가 된 빌립 역시 곧바로 그의 절친인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알려준 것입니다. 이들은 모세와 선지자, 즉 구약 전체가 메시야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래서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계시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39, 45-46).
한편, 빌립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를 말하는데 사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이 역시 구약의 이사야의 예언인 “한 싹의 뿌리에서 나오는 한 가지(네체르)”의 성취입니다. 여기서 이사야 11장 1절의 “한 가지”는 히브리어로는 (네체르)지만 헬라어로는 (나조라이오스), 즉 나사렛 사람을 뜻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나 헤롯이 그를 찾아 죽이려 함으로 애굽으로 피신하였다가 갈릴리로 돌아와서 살면서 나사렛 사람이 된 것입니다(참조, 마 2:21-23).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럼으로 구약 성경을 잘 아는 나다나엘도 빌립의 말을 듣고는 곧바로 반론을 제기하였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그는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었기에 메시야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미5:2).
이때 빌립이 말합니다.
“와서 보라”(요 1:46).
빌립은 나다나엘과 신학 논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와서 만나 보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빌립을 따라 예수님을 만나보러 갑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지금 이 장면은 예수께서 나다나엘의 인격을 통찰하는 그의 신성을 나타내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하시며 그에게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내면의 할례를 받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가운데 그 마음에 속임수나 간계함이 없는 진실한 신자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깜짝 놀란 나다나엘이 대답합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요 1:48).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
이 말씀은 깊습니다. 이 말씀을 원어로 보면 (프로 투 세 빌리폰 포네사이 온타 후포 텐 수켄 에이돈 세)라고 하여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의 원어는 (온타)인데 (온타)는 현재형 분사로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나는 너를 보았다. 그때까지 너는 무화과 나무 아래에 계속 있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릅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지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나다나엘은 빌립에 의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성경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소개할 때 언제나 빌립 다음에 나다나엘, 즉 바돌로매를 둡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 10:2-4).
아무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나다나엘에게 예수께서 묻습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너는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십니다(요 1:50). 여기서 큰 일은 비교급으로 되어 있고 초자연적인 사건을 의미합니다. 즉, 더 크고 놀라운 일을 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보았다”라고 말한 것은 일종의 초자연적인 기적으로서 나다나엘로 하여금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한 사건이라는 뜻이요, 예수께서는 장차 이 사건보다 훨씬 더 큰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 말씀을 하신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과 권능들을 나타내셨고,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초자연적인 역사를 보이셨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에서 속량하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후에 하늘로 승천하신 사건입니다. 이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건으로서 하늘이 열리고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신자들이 보게 되는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의 죗값을 속량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주의 백성들을 위한 영원한 중보자가 되심으로 하늘이 열렸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바울은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고 말하였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는 말씀은 어떤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보았다는 것은 알았다는 뜻입니다. 즉,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고 너를 알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이 왜 나다나엘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초자연 사건이 된 것입니까?
우리는 이미 (온타)라는 원어로 나다나엘은 빌립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던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계속 무엇을 한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께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계속 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은 왜 그 자체로 초자연적인 사건입니까?
이를 알기 위해 저는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단어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총 39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성경에서 어떤 목적으로 쓰였는지 확인해 보았습니다.
일단 창세기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행위 언약을 깨뜨린 후에 너무나 큰 수치를 느끼면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그들의 수치를 감추고자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시고 은혜 언약을 맺으십니다. 아무튼 첫 사람과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한 그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아래에 숨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을 보니 무화과나무 아래는 평안한 삶을 나타내는 것을 봅니다.
“솔로몬이 그 강 건너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그 강 건너편의 왕을 모두 다스리므로 그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를 누렸으니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왕상 4:24-25).
물론 이스라엘에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우리 나라의 배 나무와 사과나무처럼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지내는 것을 평안과 만족으로 표현하는 것은 특이합니다. 이는 솔로몬 왕국이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때 무화과나무는 결코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죄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을 대항하는 애굽에 대한 심판을 언급하실 때 신기하게도 그들의 평안과 기쁨을 앗아가는 것을 무화과 나무를 치셨다고 표현합니다.
“비 대신 우박을 내리시며 그들의 땅에 화염을 내리셨도다 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그들의 지경에 있는 나무를 찍으셨도다”(시 105:32-33).
하나님께 대적하는 이스라엘과 유다 집에 대한 주의 심판이 나타날 때도 무화과나무 열매가 사라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5: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이 내게 심히 반역하였느니라. …
14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
15 … 보라 내가 한 나라를 먼 곳에서 너희에게로 오게 하리니 곧 강하고 오랜 민족이라 그 나라 말을 네가 알지 못하며 그 말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16 그 화살통은 열린 무덤이요 그 사람들은 다 용사라
17 그들이 네 자녀들이 먹을 …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8:13 …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렘 5:11, 14-17; 렘 8:13)
또한 하나님께서 온 나라를 심판하심으로 세상을 무너뜨리시는 것도 무화과나무의 마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
1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 …
2 대저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군을 향하여 분내사 그들을 진멸하시며 살륙 당하게 하셨은즉
3 그 살륙 당한 자는 내던진 바 되며 그 사체의 악취가 솟아오르고 그 피에 산들이 녹을 것이며
4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
](사 34:1-4)
그리고 소선지서로 넘어가면 이제는 가장 분명하게 메시야의 등장 및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무화과나무 아래”가 언급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가 4장을 보면, 메시야의 등장을 “무화과나무 아래”와 연결시킵니다.
[
1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2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3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4 각 사람이 …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미 4:1-4)
여기서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의 이미와 아직 그림이 담겨 있는데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여 누릴 때의 모습을 “각 사람이 …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고 하며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특징인 평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스가랴서를 보아도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는 표현으로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며 그 나라에서 풍성함을 누리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6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증언하여 이르되
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슥 3:6-10)
이 모든 내용을 요약해 보면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한 일을 아셨다는 것인데 이는 그가 하나님 나라를 쉬지 않고 기다렸다는 것을 아시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계속 머물며 메시야의 오심과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쉬지 않고 기도하며 간구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구약 예언이 성취되기를 바라며 무화과나무 아래 있으면서 끝없이 메시야가 오시기를 바란 것을 예수께서 정확하게 아시고 그의 마음에 위로를 주시니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신성을 느끼며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이고, 구약 성경에서 바라는 다윗의 뒤를 잇는 하나님 나라의 왕, 곧 이스라엘의 임금인 사실을 확신하고 곧바로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구속을 바라던 구약의 남은 자들에게 큰 위로를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예수께서 탄생하신 후에 주의 부모가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을 하려고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전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눅 2:25-33)
시므온이 4천년의 구약 시대 동안 기다려온 메시야를 품에 안았을 때 그가 받은 위로와 감격은 어떠하였겠습니까?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여선지자가 예루살렘의 속량, 즉 메시야와 주의 나라를 앙망하고 있었습니다.
[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 2:36-38)
안나 여선지자 역시 77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메시야를 기다려 오다가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녀가 받은 위로와 행복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처럼 누구든지 참으로 구약의 예언 전체가 가리키는 메시야의 출현과 그분과 함께 임할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바라는 자들에게 우리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결코 실망을 주신 적이 없으십니다. 바로 그러한 기다림을 탁월하게 나타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나다나엘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 언급하신 것은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계속 있으면서 하나님 나라와 메시야를 앙망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빌립이 그를 부르기 전에 알았다고 한 것이고 이에 나다나엘은 깜짝 놀라며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곧바로 예수께서 메시야시며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나다나엘은 시므온과 안나, 그리고 다른 경건한 남은 자들처럼 오직 믿음으로 살았고, 약속된 메시야를 기다리며, 늘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에 깊어졌고 오직 메시야를 통한 은혜만이 줄 수 있는 정직한 마음과 간사함이 없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나다나엘을 특별하게 칭찬하며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하셨고 그가 숨어서 간절히 메시야와 하나님 나라를 기도하며 기다린 그의 숨겨진 삶을 다 아시고 칭찬하시니 그는 곧바로 나사렛 예수께서 메시야이신 것을 알고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은 여러분을 아시기를 어떤 빌립이 여러분에게 ‘와서 보라’고 말하기 전에 창세 전부터 아십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5-6).
이들은 우리 주님의 양들이고, 창세 전부터 예수께서 무한한 사랑 가운데 아시는 자들입니다.
[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3-6)
이처럼 영원 전부터 우리를 알고 사랑하신 분이 그리스도시며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셨고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으로 우리 몸 안에 와 계십니다. 이는 하늘이 열리고 우리가 인자 위에서 하늘과 땅으로 오르락 내리락 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당장 아무리 많은 죄가 있어도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인자 같은 분이 되신 대제사장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생이며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이 땅에서 누리는 엄청난 영광과 특권인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 하늘과 땅이 완전하게 통합되는 새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로부터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귀한 말씀을 받고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의지함으로 그분 안에 거하면서 항상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거룩하여지며 하나님을 뜻을 알아가며 더욱 철저하게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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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