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13. 죄와 전쟁의 상관성을 믿습니다! 》
미 4:3
〈 자유의지와 갈등 〉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이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따르는 존재로 짓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따를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피조물 중 유일하게 사람에게 허락한 이것을 “자유의지”라 합니다.
사람은 그래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든지, 거역하든지, 선택할 수 있는 존재는 사람이 유일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하지 않을 자유가 보장된 상태에서 사랑할 때, 그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거부할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는 “사랑”이 싹트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아담 하와는 자유의지로서 에덴동산의 생명과나 선악과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 하와는 생명과를 외면하고 선악과를 선택했습니다.
선악과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창 2:17)입니다.
이 열매를 먹으면 선악에 대한 개념을 갖게되어 각자가 선악을 판단하게 됩니다.
아담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그때부터 인류는 각자가 선악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선악(가치)을 결정하자!” 그리고, “우리 책임으로 살자!”
이것이 매력 있게 보여, 아담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아담 하와가 결정한 것 3가지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첫째, “생식기는 감추자!”(창 3:7) 그래서 무화과나무 이파리로 생식기를 가렸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나타나면 숨기자!”(창 3:10) 동산 나무 뒤로 몸을 숨겼습니다.
셋째, “책임은 전가하자!”(창 3:13) 아담은 하와에게 책임을 미룹니다.
선악과 직후 “① 감추자 ② 숨기자 ③ 전가하자”였으니 싹수가 노랗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저마다 가치를 정하고, 선과 악을 결정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의견일치가 되면 좋겠지만, 의견이 상치되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 선악과를 따 먹은 인류에게 닥친 것은 “갈등”입니다.
〈 신을 떠난 인간의 모순 〉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합니다. 필연적으로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맨처음 가족 공동체, 낳아주신 부모님을 의지하고 형제간 우애를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갈등”이 그냥 두지 않습니다. 갈등이 관계를 깨뜨리고 불화를 초래합니다.
① “개인 간의 갈등” ~ 나와 너, 너와 나 사이의 갈등입니다.
② “가족과 가족 간의 갈등” ~ 우리집과 이웃집 간 갈등입니다.
③ “공동체와 공동체와의 갈등” 가족간 갈등이 확산 된 양상입니다.
④ “국가와 국가와의 갈등” 국제적 갈등입니다.
☞ 오늘 설교 제목을 봅니다.
《 13. 죄와 전쟁의 상관성을 믿습니다! 》
다섯 번째 갈등 즉 “국가와 국가와의 갈등”이 커져 터지는 것이 전쟁입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쟁이 없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 중입니다.
☞ 여기서 우리는 2가지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첫째, 전쟁은 “선악과 후유증”이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사람이 저마다 선악결정을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저마다 선악을 결정하다보니, 갈등이 일어납니다.
갈등은 ① 개인 ② 가족 ③ 공동체 ④ 국가 간의 갈등으로 확산됩니다.
국가 간의 갈등으로 발발하는 것이 전쟁입니다.
“전쟁은 선악과의 후유증입니다!”
둘째, 선악과는 “죄의 출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각자가 선과 악을 결정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죄로 귀결됩니다.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이후 “① 가리자 ② 숨자 ③ 전가하자”를 선택했습니다.
감추고, 숨기고, 전가하는 것, 죄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는 “죄의 출발”이고 “전쟁은 선악과의 후유증입니다!”
이 둘을 뭉뚱그리면, “전쟁은 인간의 죄로 인한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 13. 죄와 전쟁의 상관성을 믿습니다! 》
〈 신을 떠날 결심과 갈등 4단계 〉
죄는 선악과에서 출발했습니다!
전쟁은 죄악의 산물입니다! 이 두 가지 진리가 믿어지십니까?
사람이 태어나 한 평생 사는 중에 “갈등의 4단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① 개인 갈등 ② 가족 갈등 ③ 공동체 갈등 ④ 국가 갈등입니다.
이 “갈등의 4단계”는 인류 역사의 근간이 되어왔습니다.
또 사람이 태어나 자라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남자들은 20세가 되면 군대에 징집됩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하고자 하는 것은 “갈등의 4단계와 신”입니다.
아담하와는 하나님의 간섭이 싫어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신이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신을 떠나 사람들끼리 살겠다면서 떠났습니다.
신을 떠나서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책임지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의 “신을 떠날 결심” 그후 세상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신을 떠나겠다고 했는데, 신을 다시 불러들인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가족의 안녕과 가문의 번영을 위하여 수호신을 만들었습니다.
☞ 야곱의 아내 ‘라헬’ 그는 친정을 떠날 때 친정집 수호신 ‘드라빔’을 훔쳤습니다.
참 눈물겹지요? 친정집보다는 ‘우리집’의 번영이 더 급했던가봅니다.
추격해 온 친정아버지에게 드라빔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말에서 내리지 않습니다.(창 31:30~)
한국의 어머니들도 그렇습니다.
때마다 철마다 천지신명께 빌고 빌었습니다.
☞ “침 뱉은 우물물 다시 마시게 된다” 우리 속담입니다.
다시 볼 일 없을 테니 “퇴퇴”하고 떠났지만, 다시 찾게 되는 것이 인생사입니다.
신의 간섭없이 우리끼리 살겠다고 떠났습니다. 그 신을 언제 다시 찾습니까?
“갈등의 4단계” 개인간의 갈등에서는 신을 찾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② 단계 ‘가족 갈등’ 여기서부터 어머니들은 신의 개입을 요청합니다. 아이러닙니다.
〈 신이여 개입하여 주소서 〉
개인 갈등에서야 신을 찾는 일이 없지만, 가족, 가정의 문제부터 신이 소환됩니다.
떠났던 신을 다시 찾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처음 신을 떠날 때, 그 신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신의 간섭없이 인간이 독자적으로 선악을 결정하고 책임지겠다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안되겠다싶어 다시 신을 찾을 때는 하나님이 아닌 엉뚱한 신을 찾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비극은 시작이 됩니다.
다시 찾아갈 때, 하나님에게 곧장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신을 찾는 길” 그 길을 망각했습니다.
“신을 찾는 길”을 잃고 엉뚱한 신을 찾아나섰습니다.
야곱을 따라 길을 나서는 아내 라헬, 깎아 만든 신, 드라빔을 훔쳤습니다.
드라빔이 가문의 영광을 지켜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어머니들도, 부뚜막에,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 놓았습니다.
신의 간섭이 싫다고 선악과를 따 먹었는데, 어머니들이 다시 신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가정의 안녕을 위하여 일찌감치 신을 소환했습니다.
그러면 남자들, 가장, 가문의 어르신, 공동체장들은 언제쯤 신을 찾아나섭니까?
아마 “갈등의 4단계”에서 세 번째 ④ 공동체 갈등쯤에서는 본격적으로 신을 찾아나섭니다.
고대시대 공동체간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추장들은 신에게 한바탕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서 전쟁에 나섭니다.
공동체국가시대에는 이미 공동체마다 공동체를 지키는 수호신이 있었습니다.
공동체국가시대를 지나 국가가 등장했습니다.
국가와 국가간의 갈등이 “갈등의 4단계”에서 마지막 단계입니다.
국가와 국가간의 갈등은 전쟁으로 비화됩니다.
고대에서 중세기 말까지 전쟁은 “신의 전쟁”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전쟁이 일어나면 보다 강한 신을 섬기는 나라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패한 원인은 그 나라의 수호신이 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신들의 전쟁”이라 하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웃기지 않습니까?
☞ 신의 간섭이 싫어서 신을 떠났는데, 다시 신을 찾습니다.
〈 인간의 어리석음 그리고 전쟁의 신 〉
신의 간섭없이 살겠다고 떠났다가 필요를 느끼고 다시 찾는 것은 피하지 못할 수순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은 독자적으로 홀로설 수 있는 존재로 지으시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사람은 서로 의지해야 하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사람은 가족 공동체를 비롯하여 모듬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면서 사회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선악과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고 다시 신을 찾고 있습니다.
신을 찾으려면 애초에 떠나왔던 창조주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인류는 “신이 오시는 길도, 신을 찾아가는 길”도 잃었습니다.
“문 밖에서 두드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도 잃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인류는 어떻게 했습니까?
저마다 신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만들어진 신”이 등장했습니다.
나라마다, 제국마다, “전쟁의 신”이 등장했습니다.
전쟁의 신은 어머니가 만든 신이 아닙니다. 아버지들이 만들었습니다.
전쟁을 주도하는 남자들이 만든 신이 “전쟁의 신”입니다.
어머니들은 부뚜막 신, 장독대 신을 만들었고, 아버지들은 “전쟁의 신”을 만들었습니다.
고대시대부터 이미 전쟁의 신들이 활개를 쳤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신들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로마신화에는 전쟁의 신 “아레스”가 등장합니다.
로마제국의 황제들이 전쟁의 신으로 섬긴 신은 “마르둑”입니다.
“마르둑”이라는 신은 바빌론의 전쟁신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집트의 전쟁 신은 “호루스”입니다.
중국의 전쟁 신은 “치우천황”이라는 신입니다. 일명 붉은악마입니다.
한국의 축구 응원단 이름이 “붉은악마”인데, 이는 치우천황의 애칭입니다.
일본의 전쟁 신은 “하치만”입니다.
한국의 전쟁 신은 “환웅”이 있었다고 합니다.
각 나라마다 전쟁의 신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옵니다.
☞ 여기서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전쟁의 신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신과 인간의 헤어짐”을 이야기했습니다.
☞ 최초로 신과의 헤어짐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아담과 하와입니다.
〈 창조주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스라엘 〉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인류는 하나님과 등졌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중에 인류에게는 신이 그리웠습니다.
어머니들이 먼저 가정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신을 찾았습니다.
아버지들이 전쟁을 하면서 전쟁의 신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찾은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만들어진 신입니다.
그 신들의 도움으로 전쟁을 했습니다. 승전하면 공을 신에게로 돌렸습니다.
이러한 신과 인간의 만남은 “잘못된 만남”입니다.
만들어진 신은 실상이 아닌 허상에 불과합니다. 헛된 신을 섬기면서 전쟁을 했습니다.
☞ 역사에서 한 민족만이 창조주 하나님과 다시 만납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창조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고 응답한 유일한 민족이었습니다.
아담 하와의 선악과로 인하여 결별했던,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했습니다.
고대 시대 창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유일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전쟁때 응당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께 답을 구했습니다.
참신 하나님을 예배한 민족 이스라엘에게 만일, 전쟁신이 있다면 누구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한 분입니다.
여기서 현대 역사가들, 종교학자들의 착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학문과 사상과 철학은 착각을 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전쟁 신은 여호와다!”
오늘날 종교학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폄훼합니다.
“여호와라는 신은 단지 이스라엘의 전쟁신일 뿐이다!”
현대의 학문과 사상과 철학, 특히 종교학자들, 종교가들이 모두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이 그리워 신을 만들었던 고대의 어머니, 아버지와 똑같이 혼돈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창조주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 인류는 선악과로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 갈등은 죄의 결과물입니다. 갈등은 “개인-가족-공동체-국가”의 4단계로 번졌습니다.
국가간의 갈등은 전쟁을 불러왔습니다. 전쟁의 결국 죄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고백합니다. 《 13. 죄와 전쟁의 상관성을 믿습니다! 》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