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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우리 각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의 호흡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또 공기와 물과 햇빛과 곡식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또 우리에게 있는 모든 재능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본래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아무나 깨달을 수 없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모든 공로를 인간에게 돌립니다. 윤리적인 사람은 부모나 조상의 은덕이라고 말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모든 공로를 자기 자신에게 돌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은혜 가운데서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은혜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아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1.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은혜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갓난아이 적에는 천진무구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악한 생각을 하고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나쁘다거나 또는 교육을 받지 못해서 범죄자가 되었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합니다. 다윗은 이 진리를 알았기에 (시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죄인은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6:23절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습니다. 사망이라 함은 육체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 영원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지옥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죄인은 역사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 죄인이 살길은 없는 것입니까? 죄인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인간들이 제 몸을 희생할 정도로 자선을 행할지라도 그것으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선량한 인간의 행위라도 그 속에 죄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사망에 처한 죄인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죄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인류의 죄를 다 담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독생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받고 의롭게 되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서 대속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인을 사망에서 건져내는 것을 가리켜 속량이라고 합니다. 속량이란 ‘노예의 값을 주고 사서 자유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 5:9절에는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는 성도들을 가리켜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도 다 죄와 사망과 마귀의 종된 자들이었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써 우리를 사셨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 1:12,13)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단순히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거듭난다고 합니다.
(고후 5:17)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하심으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요 천국 백성으로 새롭게 지음받은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를 청산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사랑과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2. 믿는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단순히 법적으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생명이신 예수님이 내안에 들어오심으로 거듭남 곧 중생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무슨 수로 거듭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거듭나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체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죄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 말씀을 듣고 자신이 죄인인 것과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 죄값을 다 지불하신 나의 구주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곧 죄인들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많은 차이점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거듭난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임재해 계시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임재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리고 (로마서 8:14-17)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몸을 성전 삼아 거하심을 믿으시면 “아멘”하십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나의 구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감화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된 것이 은혜입니다.
사람은 로빈슨 크루스처럼 외딴 섬에서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고 사회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좁게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나아가서는 직업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과 연관을 맺고 삽니다. 그 사람이 어떤 기관이나 단체에 소속되었느냐에 따라서 신분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권력 기관에 소속된 사람들은 어깨에 힘을 주고 으시댑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며,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그런즉 성도들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에 긍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체나 공동체는 잠시잠깐 있다가 사라질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들도 언젠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 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란 곧 지옥의 권세를 말합니다. 지옥의 권세가 감히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
또 성경은 교회를 일컬어 ‘어린양의 신부’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에 비유한 것은 교회가 그만큼 존귀하고 그리스도와 친밀한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가 된 사실에 대하여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세 가지 은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누구는 더 받고 누구는 덜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은혜가 결핍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차등 있게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대하는 우리 각자의 심령 상태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부모님의 은혜로 이 땅에 태어났고 장성하였지만 모든 자식이 하나같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자식은 부모의 은혜에 감사해서 효성을 다하는가 하면, 어떤 자식은 마치 저 혼자 태어나서 제 힘으로 장성한 것처럼 부모의 은혜를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모의 은혜에 차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녀들 각자가 부모의 은혜를 깨닫는 수준에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많이 깨달은 자식은 효도를 많이 하는 것이요, 적게 깨달은 사람은 적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와 같은 이유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데도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아는 것이야말로 축복 중에서도 가장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오늘 예배 시간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날따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깨달은 바가 많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새로운 은혜를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더 깊이 깨닫게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아는 성도는 어떻게 행하겠습니까?
1)은혜를 깨달은 성도는 자신을 겸손히 낮춥니다.
은혜받은 성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겸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면서도 자기 의를 주장하는 교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겸손하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반면에 교만해 지는 것은 그만큼 은혜가 떨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뵙기 전에는 세상적인 자랑이 매우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는 당대의 석학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고,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로마 세계의 삼대 도시에 속하는 다소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그만한 가문과 학문과 특권을 가진 사람도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딜 가나 당당하게 행동하고 할 말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의 눈을 뜨고 나서 보니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요,
지금까지 그에게 유익하던 것들이 이제 보니 그리스도를 아는 데 방해가 될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자신을 가리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소개했습니다. 또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런데 (엡 3:8)에서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고후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하였는가 하면, (딤전 1:15)“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보면 자신에게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약한 것과 미련한 것과 죄인 됨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헌신했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려면 얼마든지 내세울 것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소아시아는 물론이요, 마게도니아와 그리스에도 건너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중에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자신의 수고를 알아 달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신들의 별 것 아닌 공로를 과대 선전하는 자들의 입을 막기 위하여 한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진심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과연 귀한 믿음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더라도 그것이 내 지혜와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면 나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봉사는 아무나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성도들이라야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항상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교회와 이웃을 기쁨으로 섬기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은혜를 깨달은 성도는 감사생활에 힘씁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마음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지 못하므로 식물을 내지 못하는 황무지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감사 대신에 원망과 불평이 가득합니다. 쓴 물을 내는 샘과 같아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원망과 불평을 심어 줍니다. 그러기에 일본인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말하기를 “인간 최상의 저주는 마음속에 받은 은혜가 기억되지 않고 감사를 빼앗긴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아는 성도의 생활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감사가 충만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현대인의 병폐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감사를 모르는 것입니다. 풍성한 식탁을 대하고도 감사가 없습니다. 좋은 옷을 입어도 감사가 없습니다. 좋은 집을 가져도 감사가 없습니다. 당연하게 누릴 것을 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에게는 이만한 것을 누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이 땅에서 누리는 것 가운데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건강하게 사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매 끼니마다 음식을 대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세상에 당연히 누리는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4:7에는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감사한 것은 나를 구원해주신 구속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 그저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감사가 은혜받은 증거입니다.
3)은혜를 깨달은 성도는 주님의 일에 헌신합니다.
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지미 카터씨는 고향 조지아주의 시골교회에서 교회학교 교사로서 봉사하였다고 합니다. 퇴임 후 국민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이라는 칭송을 듣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은퇴 후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주일학교의 교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세계 최고 강대국의 대통령으로 있으면서도 그는 어린이와 장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회 교사의 사명을 귀한 일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를 보십시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그는 로마의 네로 황제가 기독교를 핍박할 때에 붙잡혀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고 합니다. 거꾸로 못 박힌 것은 자기가 감히 주님과 같이 똑바로 십자가에 달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처럼 자기 생명도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시몬 베드로가 주님의 은혜를 크게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대제사장이 보낸 군사들에게 붙잡히셨을 때 베드로는 비겁하게 도망쳤습니다. 또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여종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세 번째에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 그 때 새벽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통곡했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을 배신한 자신을 미워하고 학대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건만 예전과 같이 반가운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러한 베드로를 이해하시고 그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얼마 후에 주님께서 두 번째로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 이윽고 주님께서 세 번째 또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베드로가 근심하여 말했습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실패를 용납하시고 그의 배신을 사랑으로 품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생명을 주님을 위해 바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모인 곳에 서서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는가 하면, 주님을 위해 옥에 갇히기도 하고, 드디어는 순교의 제단에 자신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은혜입니다. 2.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3.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된 것이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말할 수 없이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답게 더 겸손해야 합니다. 더 감사해야 합니다. 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몸과 마음을 다하여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