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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38) 병자성사
환자에게 위로와 용기, 치유의 은혜 주는 성사
병자성사는 중병이나 노쇠의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죽을 위험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며, 주님의 뜻에 따라 치유의 은혜도 주는 성사입니다.
병자성사의 성경적 근거
초기 사도 공동체는 병자를 위해 봉사하는 특별한 의미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그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3)
병자성사의 대상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성인이 받는 성사입니다. 아직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나 태어날 때부터 심한 지적장애가 있어 세례 후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꼭 병자성사를 집전할 이유가 없습니다.
병으로 죽을 위험이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형수나 죽을 위험이 있는 군인은 이 성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앞둔 고령자는 이 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의 예식
병자성사는 사제가 집전합니다. 주요 예식은 병자의 이마와 양손에 성유를 바르고, 병자에게 필요한 은혜를 청하는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주소서. 아멘.”
예식 후 병자성사 대상자가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는 상태면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병자성사의 효과
병자성사를 합당하게 받으려면 먼저 고해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 트리엔트 공의회를 인용하며 병자성사 효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이 성사는 성령의 은혜인 것으로서, 그 성령의 도유는 아직도 속죄해야 할 어떤 죄가 있다면 그 죄의 결과를 씻어주어, 병자의 영혼을 거뜬하게 해주며 견고하게 하여 그에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를 일으켜 줌으로써 병자로 하여금 그 도움을 받아 병고와 고생스러움을 더 쉽게 참으며 영혼의 도움이 될 경우에는 육신의 건강까지도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병자성사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동참해 그리스도인답게 병고를 이겨내고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또 치유의 은혜를 간구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더 큰 희망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병자 영성체(봉성체)
죽음의 위험에 있는 사람이나 거동할 수 없는 병자, 성당에 와서 미사에 참여해 성체를 모실 수 없는 처지의 그리스도인에게 사제가 공식적·사적으로 성체를 모셔가 영해주는 것입니다. 공복제를 지키지 않아도 되며 필요에 따라 여러 번 행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성당에 올 형편이 안 되는 환자는 미사 참여 의무가 면제되며, 고해성사할 것이 없으면 성사 없이 성체를 영할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는 원칙적으로 한 번밖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병자성사를 받은 다음 병이 완치돼 생활하다가 다른 병으로 또 위험을 겪을 때는 두 번, 세 번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병이라도 완치돼 건강을 회복해 생활하다가 재발했을 때 다시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46) 아멘
모든 기도의 끝에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성경의 끝도 아멘이며, 사도신경의 끝도 아멘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부와 함께 기초적인 교리 지식에 대한 문해력을 높이고자 했던 이 연재의 마지막 주제도 아멘입니다.
히브리어의 아멘은 견고함, 신뢰성, 성실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과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를 의미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2항).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참된 행복을 약속하여 주신 하느님께서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당신의 계획을 하느님께서 반드시 완성하시는 성실하신 분이시며, 우리들은 하느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아멘이라는 말 안에 담아 고백하며 기도를 마칩니다. 신앙고백의 끝을 아멘으로 맺는 것은 신앙고백의 첫 구절인 “저는 믿나이다” 를 되풀이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모든 신앙의 핵심, 결정적 ‘아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5항). 우리를 위한 성부의 사랑에 대한 확실함을 드러내시는 그 자체이시며, 그분을 향한 믿음 그 자체를 보여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대로’ 이루어졌으며 우리는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모든 확신을 얻게 됩니다.
흔히들 신흥 종교에서 가장 포섭하기 쉬운 대상이 천주교 신자라고들 합니다. 개신교 신자들에 비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얕고, 교리 지식 또한 예비자 교리 이후 그다지 깊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세상은 우리의 신앙 자체를 부정하고, 종교는 세상일에 간섭하지 말라며 교회의 가르침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극심한 경쟁과 분열 속에 위로와 안정의 공간을 찾지 못한 이들을 현혹하는 온갖 사이비들은 오히려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이런 가운데 갖가지 그릇된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세상의 온갖 위협에 맞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내가 가진 신앙에 대한 분명한 지식과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올바른 교회 가르침에 대한 굳은 확인 속에 “아멘”을 말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46회라는 길다면 길고, 한정된 지면 탓에 전해드려야 할 내용들을 매번 압축할 수밖에 없어 짧다면 짧았던 여정이었습니다. 이 글을 열심히 읽어오신 모든 교우분들에게 부족한 제 글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힘을 기르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어지러운 이 세상 속에서 복음 선포자로 살아가는데 작은 원동력이 되었길 희망합니다.
“신경은 여러분에게 거울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는다고 고백한 모든 것을 정말 여러분이 믿고 있는지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여러분의 믿음 안에서 기뻐하십시오.”(아우구스티노, 설교집, 58, 11, 13)
[생활교리]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2025년 가톨릭교회는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자유와 해방 그리고 용서(레위 25,1-10; 이사 61,1-2; 루카 4,18-19 참조)의 메시지가 담긴 희년(Jubilee)을 온 세상에 선포했다.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번 희년의 공식 주제를 ‘희망의 순례자’로 발표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희망의 빛이신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을 통해 무뎌지고 무너진 희망을 되살리는 희망의 순례자가 되기를 당부하고 초대했다(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이하 『희망』) 1 참조).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전해지는 주님은 당신 홀로 따로 한 곳에 가만히 정착하여 고립되어 있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 백성과 함께 머물고, 동행하며 순례하는 분이셨다. 실제로 구약에서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하신 이들, 곧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이사악, 야곱, 모세 그리고 엘리야 등이 나그네처럼 이곳저곳을 유랑할 때, 그들과 함께 떠돌며 동반하셨다. 예수님 역시도 평생을 “머리를 기댈 곳조차”(마태 8,20) 없이 사셨고, 그분의 제자들 또한 온갖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희망의 복음을 선포하는 순례의 길을 걸었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단번에 목적지에 도달하는 100m 달리기가 아니라 끝은 있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순례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걷는 순례의 여정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일례로 동방박사들이 밤하늘에 떠 있는 ‘별’ 하나에 의지해 아기 예수님을 찾아 나서는 험난한 여정을 떠올려보라. 깜깜한 밤에 별이 반짝반짝 빛나 신바람 속에 길을 찾기도 했겠지만, 때로는 사람 마음만큼 쉽게 바뀌는 날씨의 변화로 길을 헤매거나 잃기도 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시작한 길을 마지막까지 걸었고, 끝내 주님을 만날 수 있었다. 왜, 동방박사들은 만남을 빼앗아가는 서두름과 조급함을 내려놓고 주님의 약속을 인내 속에 믿고 따르는 희망의 순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희망”(1티모 1,1)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완전한 끝’인 십자가 죽음을 겪으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시작’을 알리셨다. 그러니 이 신앙을 기반으로 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사탕발림식의 ‘희망 고문’이나 혹은 ‘시간이 흐르면 잘 되겠지’라며 인간의 태도에 기초를 두는 “순진한 낙천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모두가 ‘다 끝났다, 이제 소용없다’라고 여겨지는 깊은 절망의 상황에서조차 다시 일어서고 시작할 수 있는 “은총의 선물”(『희망』 24)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속이지도 실망시키지도 않는다”(『희망』 3). 왜,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고 밝혀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로마 8,35-39 참조). 곧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에게 한번 쏟아진 하느님 사랑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 놀라움과 확신 속에 우리는 소설 속 돈키호테의 고백처럼 “아무리 희망이 없어도, 아무리 길이 멀어도, 아무리 조롱당하고 상처 입어도” 주님이 약속하고 이루어주실 복된 희망을 잃지 않고, 빼앗기지 않고, 도둑맞지 말자. 결국, 우리는 그 희망으로 살고, 구원받을 것이니까!
[빛과 소금] 믿음 · 희망 · 사랑 : 희망의 촛불 밝히기 (2) 인물 편
2025년, 우리는 모두 희망의 희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희망을 뿌리 깊이 심고 싹틔우기 위해,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간 성경 속 인물들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인물은, 여러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버틴 인물,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편애와 꿈 해몽 때문에 형제들에게 미운털이 박혀 배신당하고,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가 감옥에 갇히는 등 갖은 역경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향한 꿈을 품고 나아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파라오의 헌작 시종장의 꿈 해몽을 통해 재상까지 오르게 됩니다. 결국 헤어졌던 형제들과 아버지를 만나게 되지요.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창세 50,24-25)
요셉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조상들로부터 대물림받은 ‘희망’을 죽을 때까지 품고 있었지요. 희망이 있었기에 형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50,20)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인물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바빌론 유배 시절 중 종살이하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의 끝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인들에게 희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희망은 ‘바라’(bara)의 하느님, 곧 창조의 하느님입니다.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당시 절망 속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에 다른 이야기는 들어오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창조의 하느님’만은 희망이 되었음을 성경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유배지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 희망을 붙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지요.
삶을 살아가다 보면 희망을 잃고 잠시 멈추어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요셉의 희망,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바라’(bara)의 하느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바라’는 하느님의 창조에만 사용되는 단어로, ‘하느님’만이 주어로 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하실 때 아무 재료도 없이 지어내셨습니다. 우리를 빚어 만드시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며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하느님을 믿으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밑바닥’, ‘나락’ 등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가 있게 됩니다. 절망이 있는 자리에서도 끝까지 절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희망의 끈을 끝까지 붙들 이유,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만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예물 준비(Praeparatio donorum)
미사 때 말씀 전례가 끝나면 성찬 전례가 이어집니다. 성찬 전례의 시작은 ‘예물 준비’입니다. 이는 제사를 드릴 때 제사상을 차리듯, 제대 위에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 놓는 예식입니다.
초기의 예물 준비는 신자들이 가져온 빵과 포도주와 물을 부제나 사제가 받아 제대에 올려놓는 매우 단순한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4세기부터 신자들이 많아지면서 예물과 그 종류가 다양해졌고, 이에 따라 행렬도 길어졌습니다. 그리고 긴 행렬 동안 침묵 대신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1세기부터는 화폐 제도가 확산되면서 예물이 현금으로 바뀌고, 그 영향으로 중세 후기에는 4대 축일에만 행렬을 하는 것으로 축소되었습니다. 트렌토 공의회(1545~1563) 이후에는 이런 행렬마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 전례 운동이 일어나면서 신자들이 예물을 가져오는 행렬 예식이 되살아났고,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완전히 복구되었습니다.
예물 준비와 관련하여 용어상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미사 중 하느님께 봉헌되는 본 제물은 교우들이 바치는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기에, 이 예식의 명칭도 어디까지나 ‘예물 준비’일 뿐 ‘제물 봉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미사 통상문」의 예규도 사제가 성반과 성작을 ‘봉헌하고’가 아니라 “조금 높이 받쳐 들고”라고 규정합니다. 또한 이때 부르는 성가 역시 봉헌 성가가 아니라 ‘예물 준비 성가’가 정확한 명칭입니다.
예물 준비 예식은 크게 [제대와 예물 준비]-[예물 준비 기도]-[예물기도]로 구성됩니다.
여기서 ‘예물 준비 기도’는
① 빵 축복기도,
② 포도주에 물을 섞으며 바치는 기도,
③ 잔 축복기도,
④ 예물을 받아주시기를 청하는 기도, (*분향)
⑤ 손을 씻으면서 바치는 기도,
⑥ 예물을 받아주시기를 청하는 두 번째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한편, 대축일 등 장엄미사에서는 손 씻는 예식 전, 예물과 제대에 향을 피워 올립니다. 이러한 분향은 사제를 통해 바치는 예물과 기도가 연기처럼 하느님께 올라가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또한 사제와 교우들에게도 분향하는데, 앞으로 바치게 될 감사 기도(Prex Eucharistica)의 준비로서 그들을 축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물 기도’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구원 업적을 표현하는 호칭과 공동체의 간청으로 구성되며, 다른 고유 기도문, 곧 본기도와 영성체 후 기도에 비해 문체가 자유로운 편입니다. 기도 내용은 전례 시기나 축일의 의미와 함께 주님께서 제대에 놓인 예물을 기꺼이 성화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청원의 내용입니다. 이에 신자들은 “아멘”으로 응답하며 사제가 바치는 예물 기도에 동의를 표합니다.
[사회교리에서 희년을 보다] 북극곰과 벨루가
‘벨루가(Beluga)’를 아십니까? 흰고래입니다. 아주 귀여운 녀석이죠. 온순하고 호기심도 많아서 처음 본 사람하고도 곧잘 어울린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도 아주 인기가 많아요. 수족관에 가보면 벨루가 앞에는 늘 아이들이 넋을 잃고 앉아 있곤 하죠. 그런데 이 귀여운 친구가 지금 북극에서 아주 곤욕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벨루가를 괴롭히는 범인은 ‘북극곰’입니다. 콜라를 좋아할 것 같은 녀석인데 사실은 아주 힘이 센 맹수 중 하나이죠. 이 녀석이 지금 북극에서 호시탐탐 벨루가를 노리고 있다고 합니다. 동물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약육강식’은 당연하기에 북극곰이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죠. 그런데 우리가 짚어보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더군요. 원래 북극곰의 주 먹잇감은 물개와 물범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극곰이 이들을 사냥하기 위해선 발을 디딜 ‘땅’이 필요해요. 북극에서 그 땅은 ‘해빙’이죠. 그런데 이 해빙이 ‘지구 온난화’로 인해서 점점 작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보통 해빙이 없는 기간은 6주 정도인데 이 기간이 2개월로 늘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북극곰은 참 난처할 수밖에요. 배고프게 지내야 하는 시간이 6주에서 두 달로 늘었으니 말입니다. 어렵지만 벨루가라도 사냥하며 목숨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죠.
북극곰과 벨루가 사이에 이와 같은 묘한 긴장 관계를 불러일으킨 것은 결국 ‘지구 온난화’ 현상입니다. 지구 온난화란 아시다시피 지구 대기권의 기온이 상승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리고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가 지난 2021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 현상의 원인은 자연이 아닌 ‘오직’ 인간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북극곰과 벨루가 사이를 망쳐 놓은 셈인 것이죠.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우리들은 희년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하느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자연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희년은 환경보전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레위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저절로 자란 곡식을 기두어서도 안 되며, 저절로 열린 포도를 따서도 안 된다. 이 하는 희년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해다 너희 밭에서 그냥 나는 것만을 먹어야 한다”(레위 25.:1-12).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분부하시어 이처럼 희년에는 땅에 ‘휴식’을 주려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 필요한 것도 바로 휴식입니다. 급격한 기술의 발달은 자연을 혹사시켰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피로는 재앙으로 바뀌어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지요. 그렇기에 희년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에 휴식을 선물하기 위해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기(利己)로 인해 북극곰과 벨루가 사이가 더는 나빠져선 안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의 언어] Amature(아마추어)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한때 인기 있던 개그 프로그램에 등장했던 유행어입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뭔가 미숙한 상태나 뛰어나지 못한 일처리 또는 능력이 부족할 때, ‘아마추어 같다!’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능력이나 상태에 있어서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일 때는 ‘프로 같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모든 면에서 ‘프로’처럼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프로’처럼 잘하는 것도 있겠지만, ‘아마추어’ 같은 모습을 보이는 일들이 훨씬 많을 겁니다. 여기서 아마추어라는 말은 단순히 부족함이나 미숙함을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아마추어’(Amature)라는 단어는 “좋아하다.”, “사랑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Amare”에서 왔습니다. 따라서 ‘아마추어’는 어떤 일을 직업이나 의무감이 아닌 사랑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완벽하지 않고, 그래서 실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하는 그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기쁘게 자신의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삶의 많은 부분들에서 ‘아마추어’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사랑으로 행한다면 ‘아마추어’ 같아도 괜찮습니다.

첫댓글 주님은 당신 홀로 따로 한 곳에 가만히 정착하여 고립되어 있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 백성과 함께 머물고, 동행하며 순례하는 분이셨다.
실제로 구약에서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하신 이들, 곧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이사악, 야곱, 모세 그리고 엘리야 등이 나그네처럼 이곳저곳을 유랑할 때, 그들과 함께 떠돌며 동반하셨다.
예수님 역시도 평생을 “머리를 기댈 곳조차”(마태 8,20) 없이 사셨고, 그분의 제자들 또한 온갖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희망의 복음을 선포하는 순례의 길을 걸었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단번에 목적지에 도달하는 100m 달리기가 아니라 끝은 있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순례이다.
“우리의 희망”(1티모 1,1)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완전한 끝’인 십자가 죽음을 겪으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시작’을 알리셨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