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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올라가서 거하라
창 35: 1
우리가 살다보면 크고 작은 위기를 만납니다. 늘 좋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평탄한 인생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위기라는 파도가 밀려옵니다. 나의 실수로 인한 파도이던지 다른 사람의 실수로 인한 파도이던지, 물질의 파도이던지 건강의 파도이던지, 자녀의 파도이던지 인간관계의 파도이던지, 우리의 삶에 계속해서 파도가 밀려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파도에 휩쓸려버려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바다에서 서핑보드를 가지고 파도 타기하는 선수처럼 그 위기의 파도를 잘 넘기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위기의 파도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것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위기의 파도를 극복할 수 있는가’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어떻게 하면 끊임없이 몰려오는 인생의 파도를 극복할 수 있는 살펴보기 원합니다.
야곱의 생애를 보면 그는 크고 작은 위기의 파도를 수도 없이 만났습니다. 그는 세 번에 걸쳐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교묘하게 받은 후,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갈 때가 그의 첫 번째 위기였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몰래 도망을 치다가 삼촌 라반의 추격을 당할 때가 두 번째 위기였습니다. 세 번째의 위기는 바로 하나밖에 없는 디나로 말미암아 발생한 큰 위기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 장인 34장에 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세겜 지역에 머무를 때에 그의 사랑하는 딸 디나가 그 지역의 권세자였던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제로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의 아들들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복수를 합니다. 그런데 복수를 하는 방법이 비겁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디나를 강간했던 사건도 옳지 못한 일이지만, 그로인한 복수극은 더욱 더 잔인했습니다. 세겜만 죽였던 것이 아니라, 그의 아비 하몰과 그의 모든 가족을 죽이고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에 있는 모든 재물을 약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와 아내들을 포로로 끌고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자기 동족이 야곱의 아들들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가나안의 다른 부족들이 복수를 계획했습니다. 이제 야곱과 야곱의 가정은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집안이 완전히 멸망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 중에서 가장 심각한 위기를 만났습니다. 창세기 34장 30절을 보면, 야곱의 두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그러자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화를 냅니다. ‘동생을 강제로 욕보인 그들을 그대로 놔두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라고 아버지 야곱에게 따지며 묻습니다. 야곱은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딸이 수치를 당하고 나서부터 계속해서 밤잠을 설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들들이 말썽을 일으키고, 이제는 가나안 족속에게 온 가족이 몰살당할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언제나 야곱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개입하셨던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아, 딸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고 그러한 일을 당하게 했느냐, 어떻게 교육시켰길래, 아들들이 그 모양이냐? 너는 과거에 사기도 치고 못된 짓도 많이 했기 때문에 네 죄과를 받는 거야.”라고 야곱에게 야단을 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야곱을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개의 동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라’, ‘올라가라’, ‘거하라’입니다. 이 세 개의 동사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를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일어나라!
첫째로, ‘일어나라’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세겜 땅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품삯을 받지 못한 채 삼촌 라반에게 사기를 당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지라.”(창31:3)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어디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까? 세겜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끝까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33장 18절부터 20절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그는 중도에 세겜 땅에 눌러앉아 버렸습니다. 그곳은 살기에 참 좋은 곳이었습니다. 벧엘은 해발 800m가 넘는 높은 곳이지만, 세겜은 낮고 풍성한 목초지가 펼쳐져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번창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4장 1절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나갔다"고 했는데 그녀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다시 말하면 세겜은 휘황찬란한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외부적인 요소 때문에 야곱은 세겜 땅에 정착했던 것 같습니다. 80리만 더 가면 벧엘이고, 100리만 더 가면 아버지 이삭이 살고 있는 헤브론인데도 야곱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를 않고 세겜에서 땅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장막을 치고 약 10년간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겜 땅은 하나님의 사람 야곱이 거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정착하려고 하는 세겜 땅은 유혹의 장소였고,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세겜 땅은 결코 야곱이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세겜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그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급기야 그는 그곳에서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했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야곱의 아들들의 무자비한 복수극이 이어졌고, 그리고 뒤이어 사방에 있는 이방 민족들의 공격으로 인해 온 가족이 몰살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야곱이 세겜에 오래 머물러 있음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향해서 “일어나라! 세겜을 떠나라. 세겜은 네가 살 곳이 아니란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야곱처럼 세겜이 있을 수 있습니다. 떠나야 함을 잘 알지만 떠나지 못하고, 벗어나야지 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나만의 세겜이 우리 각자에게 존재합니다. 어떻게 보면 세겜은 우리에게 편한 곳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만족시켜 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겜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있어서는 안 될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위험한 곳입니다. 그곳에 오래 머물다가는 큰 낭패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자주 소개하는 갈매기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영국을 여행하던 한 여행객이 해안지방을 지나가다가 많은 갈매기들이 모래사장에 죽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다는 문제가 없었으며 갈매기들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에, 분명 갈매기들의 떼죽음은 예사 죽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행객은 죽은 갈매기들을 치우고 있는 청소부에게 갈매기들의 죽음의 원인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청소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곳에는 여행객들이 많이 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갈매기들에게 과자와 사탕 등 맛있는 먹이를 던져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갈매기들에겐 해로운 음식들입니다. 왜냐하면 갈매기들이 과자나 캔디 같은 것들을 받아먹다보면 나중에는 갈매기들이 먹어야 할 자연먹이에 대한 식욕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답니다. 관광 시즌이 지나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바다 속에 아무리 좋은 먹이가 널려 있어도, 갈매기들은 이처럼 굶어죽는답니다.”
갈매기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것을 너무 좋아하거나 집착하다보면, 영적인 감각을 상실해 버릴 수 있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가 세겜에서 행복을 찾으려다가 쫄딱 망해버릴 위기에 처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세겜 땅에 눌러 살았던 야곱처럼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새로운 2005년이 시작된 지 3주가 되었음에도 아직도 세겜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라. 세겜을 떠나라. 세겜은 네가 살 곳이 아니란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세겜에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일어나라’는 것이 세겜 땅에서의 분리를 의미한다면,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은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고 새롭게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첫 사랑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야곱은 지난날 아버지 이삭의 눈을 속여 형 에서가 누려야 할 장자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에 가로챘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형 에서가 그를 죽이려고 하자, 그는 자기의 방패막이가 되시던 사랑하는 어머니를 떠났습니다. 그 앞에는 형 에서의 살해 위협과 보장되지 않는 캄캄한 미래만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형을 피해 도망을 치다가 저녁이 되어 돌 베게를 하고 들판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꿈속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3~15) 야곱이 가장 어렵고 힘들고 연약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가 범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그를 인도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야곱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주시면, 하나님께 단을 쌓고 하나님을 섬기고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노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30년 전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야곱이 그 약속을 잊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약속한대로 벧엘로 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기는 커녕, 음란과 방탕과 죄악이 들끓고 있는 세겜 땅에 머무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첫사랑의 장소로 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감격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벧엘로 부르십니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주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그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처음 뉴질랜드에 도착 한 후, 예배당에 앉아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눈물이 나오고 찬양만 부르면 감동이 되었던 그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선교 가서 주님 앞으로 수많은 영혼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평생 동안 선교하며 살겠다고 작정했던 그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여러분, 만약 신앙생활에 비극이 있다면, 저는 이 벧엘을 망각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서 주님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순수한 내 신앙의 출발을 잊어버리는 것이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유머집에 <건망증>에 대한 유머가 실렸습니다. 몇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건망증 환자가 회사에서 '이것만은 잊지 말자'고 마음먹고 그 표시로 손에 밴드를 붙이고 퇴근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 밴드를 붙인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 2시가 되었는데도 자기 손목에 밴드를 붙인 이유를 생각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포기하고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그제 서야 생각이 났습니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고 밴드를 붙였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은 예배 후에 금방 웃으신 분들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또 <건망증>에 대한 유머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연세가 지긋이 드신 한 노인이 전번 어느 결혼식에 갔을 때, 봉투에 '축 결혼'이라고만 쓰고 자기 이름을 빼놓은 것이 후회가 돼 이번에는 이름 석자를 분명히 적어 안 주머니에 집어넣고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그리고 "공군 회관으로 갑시다."라고 택시 기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노인이 한참 가다가 자기가 어디로 가자고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앞에 있는 기사에게 물었습니다. "기사 양반, 내가 좀 전에 어디로 가자고 했죠?" 그랬더니 이 기사 양반 뒤돌아보며 대답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아니 손님, 언제 타셨죠?"
우리가 잊어버려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상관없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것은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벧엘로 돌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처음 사랑했을 때의 그 첫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제 주님께 대한 첫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동해서 펑펑 눈물 흘리던 그 눈물이 우리의 눈에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만나는 그 날까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겠다고 헌신했던 그 결단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남은 인생을 사랑하며 용서하며 섬기며 살겠다고 굳게 맹세하던 그 맹세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벧엘로 올라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거하라!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벧엘로 올라가면 다시 세겜으로 내려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번 믿음으로 살기로 작정했다면 계속해서 믿음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고민은 변하는데 있습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는 세상 것들을 다 버리고 새롭게 살겠다고 결심하지만, 예배당을 나가는 순간 그 결심이 무너지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금요집회에 나와 성령으로 충만할 때는 태산도 옮길 것 같은 믿음이 생겼다가도, 성냥갑만한 문제를 만나도 좌절하고 낙심에 빠지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말고 믿음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국 LA 다저스 야구팀에서 활동하던 박찬호선수가, 3년 전 거액의 연봉을 받기로 하고 텍사스 레인저스 야구팀으로 옮겼지만, 3년 동안의 성적이 형편없이 나빴습니다. 그 이유는 투구 폼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허리를 다쳐 팔로만 던지다보니 투구 폼이 완전히 무너져서 볼 스피드가 시속 140Km 초반으로 뚝 떨어졌고, 볼 컨트롤이 나빠져서 포볼을 남발하면서 3류 배팅 볼 투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경기에 나갔다하면 수많은 포볼과 안타를 내주면서 구단으로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3년 동안 받았습니다. 그런데 박찬호선수가 허리를 완전히 치료한 후부터는 과거 전성기 때의 투구 폼으로 돌아오고, 작년 시즌 말에는 옛날처럼 시속 150~155Km 정도의 빠른 직구를 던지면서 올해에는 재기의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 2003년 56개의 홈런으로 아시아 최다홈런 신기록을 세운 이승엽선수이지만, 작년에 일본 프로 야구에 진출한 후 실망스러운 성적을 남겼습니다. 전문가들의 진단으로는 한국과 일본 팬들의 관심으로 인한 중압감과 생소한 일본투수들의 투구습관, 그리고 돔구장에 대한 적응, 등의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타격 폼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이 흐르듯이 부드럽게 휘두르는 이승엽선수의 특유의 타격 폼이 흐트러지면서 맥없는 스윙을 하다보니, 나갔다 하면 삼진 아웃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박찬호선수와 이승엽선수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폼의 중요성입니다. 투구 폼이나 타격 폼이 흔들리지 않아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지속성은 더 중요합니다. 본문 1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30년 전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처럼,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또 다시 세겜 땅으로 내려가지 말고 계속해서 벧엘에 거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결심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결심에 따라 우리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심이 얼마 있지 않아 변한다면 우리의 삶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2004년을 보내고 2005년을 새롭게 맞이하는 송구영신 예배에서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과거를 정리하고, 달려야 할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변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미 세겜에서 벧엘로 나왔다면 또 다시 세겜으로 내려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길이 때로는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길이라 할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벧엘 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세겜의 삶은 저주의 삶인 반면, 벧엘의 삶은 축복의 삶임을 기억하며 벧엘에서 인생의 승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세겜이 유혹해 온다할지라도, 변하지 않고 벧엘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연어를 배워야 합니다. 연어는 원래 민물에서 태어나 민물에서 자랍니다. 그러나 손가락 크기의 치어로 자란 다음에는 반드시 바다로 내려가 삽니다. 바다에서 짜디짠 물을 먹고 그들의 뼈가 자라고 살이 자랍니다. 그들은 넓고 깊은 바다를 마음껏 휘저으며 삽니다. 3~4년을 이렇게 살고 나면 산란할 때가 되어 반드시 본능적으로 자기가 알에서 부화되어 태어난 고향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연어는 강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어느 어류 학자가 연어를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원래 나이아가라 폭포에선 연어가 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학자가 미시시피 강으로 산란하러 올라오는 연어를 잡아다가, 나이아가라 폭포 위쪽에 알을 낳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연어 치어가 태어났고 그 치어들이 손가락만한 크기가 되었을 때 강에 방류하자, 나이아가라 폭포를 내려가 대서양으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어류학자의 관심은 대서양으로 간 그 연어 들이 과연 나이아가라 폭포 위쪽으로 올라오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연어의 회귀본능이 얼마만큼 인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몇 년 후 그 연어들은 산란의 때가 되자 어김없이 나이아가라 폭포 밑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 폭포 위로 점프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세차고 거대한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에 연어들이 도전했던 것입니다. 어떤 연어는 폭포를 올라가기 위해 수없이 점프를 하다가 실패해 주둥이가 깨지고, 아가미가 터져 피가 철철 나기도 했지만, 연어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피로 물든 몸으로 도전하여 마침내 연어들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거슬러 올라갔다고 합니다.
연어의 이 모습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한낱 미물인 물고기도 고향을 향한 향수심이 이렇게 대단한데, 오늘 우리에게 하늘 본향을 향한 향수심이 얼마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내려주신 가장 큰 복은 신령한 회귀본능, 즉 하나님을 향한 향수심입니다. 이것이 사라지면 그리스도인의 타락이 시작됩니다. 아무리 정직하고 바르게 살려고 해도, 천국보다 이 땅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강해지면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어있습니다. 야곱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세겜에서 세상의 쾌락을 즐겼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딸이 성폭행을 당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고 가문이 망하기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목숨 걸고 찾아가는 연어와 같은 인생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겜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신령한 연어인생이 되어 벧엘로 올라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번 믿음으로 살기로 작정했다면 변치 않고 계속해서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 35: 1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축복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야곱의 나그네 인생 길의 행로는 실로 험난하기만 했습니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피한 세월이 20년이 지났습니다.
밧단아람에서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한 야곱은 하나님의 지시로 인하여 고향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창31:3).
외삼촌 몰래 이주하던 야곱은 추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반에게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창31:24)고 간섭하셨기에 결국 외삼촌 라반과 화해하고 헤어질 수 있었습니다.
20여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형 에서와의 만남은 실로 극적이었습니다.
원한과 복수의 칼이 아닌 뜨거운 형제애의 사랑으로 서로 껴안고 입을 맞추며 고개를 어긋맞기고 눈물을 흘리는 재회의 시간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인생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렇게 고심했던 에서의 위기가 해결되자 야곱은 해이된 마음으로 숙곳과 세겜에서 지나치게 지체하다가 세겜에서 커다란 시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서원했던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으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그 곳에 도착한 야곱은 장막을 치고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일백개를 주고 그 땅을 구입하였습니다(창33:18-19).
그는 벧엘에서의 하나님과의 약속은 잊어버리고 세겜에 안주하려고 하였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으로 도망자 야곱이 외로움과 고독에 잠겨 있을 때 하나님을 뜨겁게 체험한 장소였고, 하나님께 서원했던 장소였습니다.
세겜은 하나님의 사람 야곱이 있을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정착하려고 하는 세겜은 우상과 거짓과 음란과 복술자들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 곳은 결코 벧엘이 아니었습니다.
성도가 있어야 할 위치에 있지 않을 때 무서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야곱은 세겜에 거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거주하다가 큰 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다가 그 곳의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창34:1-2).
이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그들을 속여 할례를 받게 하고 그 때를 이용해 그곳의 남자들을 다 죽이는 살인을 자행하게 되었습니다(창34:25-29).
이 일로 인하여 야곱은 후한이 두려워 깊은 탄식을 하였습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 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창34:30).
지금 야곱에게는 벧엘이 없습니다.
안일과 자기 만족과 영적 침체는 하나님의 뜻을 잊기에 충분한 것들이었습니다.
벧엘을 망각하고, 벧엘을 등지고 살던 야곱!
그는 불신앙의 세겜 사람들 틈에 끼여 슬픔과 위험과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불신 세상의 풍파에 멍들고, 깨지고, 찢기고, 피투성이 된 죄인된 우리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철저히 실패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마땅히 해야 될 사명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여기에 인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인생의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세겜에서의 실패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벧엘을 잊고 세겜(세상)에 심취해 있던 야곱을 한 사건을 통해서 각성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들을 때 우리 함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는 축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1. 첫 믿음을 찾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본문 1절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체 처절한 실패를 경험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일어나'라는 말은 현재의 불신앙과 절망의 자리, 실패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설 것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결코 넘어질 수가 없습니다. 아니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 성도의 특징입니다.
또한 '거기 거하며'는 세속적인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벧엘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성도는 그리스도안에 거할 때 참된 만족과 기쁨이 있고 참된 안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창28:14-22).
에서의 칼을 피하여 외삼촌에게로 도망하던 중 벧엘에서 신비한 은혜 체험을 하면서 하나님께 서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28:20-22).
그러나 야곱은 이 모든 서원을 파기하고 지키지 않았습니다. 아마 더 좋은 환경이 될 때 서원을 지키겠다는 안일함에 빠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약속 이행보다는 육신의 안일함을 추구하였습니다.
형 에서와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야곱은 숙곳으로 가서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습니다(창33:17).
얼마 후에 세겜으로 가서 밭을 사고 장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곳에서 단을 쌓고 엘엘로헤이스라엘(전능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가 편한 대로 예배하는 야곱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겜에 있는 야곱을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세겜에서 벧엘까지는 약 50㎞의 오르막길이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도록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단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예배 생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중생 받은 영혼이 세겜에 살면서 온갖 세속적 습관과 살인과 부정으로 더럽혀지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 거하라',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2.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본문 2절에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비록 실패했던 야곱이었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줄 아는 야곱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 받은 자의 철저한 순종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즉각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비록 10여년의 세월을 방황하며 세겜에서 머뭇거렸으나 이제는 더 이상 지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이 체험한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었고,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3절)이었습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기에 앞서 가정의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① 이방 신상을 버리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야곱의 가정에 이방 신상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한 일었습니다. 이것은 곧 야곱의 묵인으로 인한 범죄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야곱의 가정이 상당히 세속화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헬이 하란에서 나올 때에도 그 아비의 드라빔을 훔쳐 온 일도 있었습니다.
4절에는 귀고리까지 야곱에게 가져 왔는데 이것은 단순한 장신용이 아니라 점치는 것 같은 미신적 행위에 사용된 것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 숭배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성도만이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② 자신을 정결케 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이방 풍속에 젖어 있는 불결한 삶을 청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성결 운동입니다. 불결에서 갈라지는 성결 운동입니다. 죄를 씻어 내는 정결 운동입니다.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밖에는 없습니다.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을 수가 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서 성결 작업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③ 의복을 바꾸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의복을 바꾸어 입는 것은 회개 운동의 본질적인 조건은 아니지만 회개를 공적으로 단행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의복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 줍니다.
그러므로 의복을 바꾸는 것은 현재의 죄인의 삶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에로의 결단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율법 시대에 깨끗한 옷을 입는 것은 성도들의 영적인 개혁과 의를 행하는 것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합당치 못한 삶은 모두 벗어버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어야(롬13:14) 할 것입니다.
신앙은 타협도, 공존도, 주저함도, 미련도 없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을 철저히 행하고 그들은 벧엘로 발행하였습니다(5절).
여기 '발행하였다'는 말씀은 세겜과 완전히 결별하고 행동으로 옮겨 그 자리를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이 세겜과 같은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의 삶속에서 매일 매일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3.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음성입니다.
본문 9절에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야곱과 그의 일행은 긴 여행길(약50Km)을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벧엘에 도착하였습니다(6절).
실로 약 30년 만에 다시 찾은 벧엘입니다.
회개를 촉구하시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동으로 옮긴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축복하셨습니다.
① 야곱을 이스라엘로 개명하였습니다(10절).
물론 이스라엘이란 개명은 창세기 32장 28절에 나타나지만 여기서는 그 개명의 확증이요 갱신입니다.
② 생육과 번성의 복입니다(11절).
자손의 번성은 육적 이스라엘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무수한 신자들이 일어날 것을 의미합니다.
③ 메시야의 복(왕들이 나옴)입니다(11절).
예수 그리스도는 후대 다윗의 계보를 따라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④ 기업을 얻는 복입니다(12절).
이 기업은 육적으로는 가나안 땅이요, 영적으로는 우리가 가야 될 하늘나라입니다.
이 모든 복은 야곱의 조부 아브라함 때부터 전승(傳承)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시고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이 음성은, 첫 믿음을 찾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은,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음성입니다.
음란과 살인과 공포의 비극이 쉬지 않는 세겜은 분명히 벧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 캄캄한 세겜의 죄악 세상에서 우리를 부르시며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실패한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십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 거하라! 거기서 단을 쌓으라!
이것은 실패와 허물로 얼룩진 인생에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음성입니다.
이 축복된 하나님의 음성 앞에 우리 모두 함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갑시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