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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의 오른손
시편 118:1~17
기독교를 가리켜 보통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 4장 8절에서 “하나님은 곧 사랑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가령,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같은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 만물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은 쉽게 우리의 눈으로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명랑한 아침 햇빛, 저 고운 저녁 노을, 밤에 은밀히 비치는 달빛, 영롱하게 반짝이는 별빛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범한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이 자연계는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지으신 자연계를 통해서 얼른 알아볼 수 있고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나타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여러 선지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모세와 같은 종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호소하는 소리를 친히 들으시고, 그 백성을 애굽의 폭정 가운데서 건져내실 뿐만 아니라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통해서 그들을 인도하게 하시고 마지막 약속의 땅 가나안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선지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줄로 끌어 보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선지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신 것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 주님의 말씀, 주님의 태도,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 주시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해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한 것입니까?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을 확실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대 자연계 우주만물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 나타낸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 나타낸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의 생활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준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신 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말씀이십니다. 이처럼 말씀이시요, 하나님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인류 전체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어떤 순교자가 진리를 위해 죽으면 그 순교가 얼마나 고귀한 죽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애국자가 자기의 민족과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초개같이 버릴 때 이와 같은 순국 열사의 죽음도 얼마나 숭고한지 말할 수 없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30대 청년으로 이 나라를 삼키려는 이등방문을 전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총 한 발에 쏘아 죽이고 당당히 붙들려 나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가 그때에 한 말이 “나는 개인의 몸으로 개인을 쏜 것이 아니다. 우리 2천만 전 민족의 이름으로 일본을 대하는 것이다.”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순교자의 죽음이 아닙니다.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운명을 위해 죽은 의사의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인류를 위해서, 인류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형편은 어떠하였습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자세히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나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경건치 않을 때에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거룩하지 못하고 선을 행하지 못하지만 이런 경건치 않은 무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더구나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의인들 위해서 죽기가 쉽지 아니합니다. 아마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을 위해서 혹시 죽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또 로마서 5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가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과 사실상 원수가 되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랑의 손길을 내미실 뿐더러, 자기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보내셔서 원수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심으로 그의 위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연약할 때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경건치 않을 때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죽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거룩한 사랑입니까?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 그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의 길이와 높이와 길이를 다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시편 117편은 가장 짧은 시편 중의 하나입니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1-4절까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우리를 광활한 곳에 세우십니다. 이 시인은 고통 중에 있었고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방이 그를 에워쌌습니다. 그를 밀쳐 넘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원수들이 이렇게 괴롭히고, 에워싸고, 밀쳐 넘어뜨리려 하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본문 13절을 같이 읽으십시다.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 이와 같은 간증을 바울에게서도 듣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 이하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합니다. 그러나 싸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합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버린 바 되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납니다.”
왜요? 우리는 질그릇같이 약하고 보잘 것 없으나 능력이 심히 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배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도 이렇게 사방에서 에워싸고 에워싸며 벌떼같이 에워쌌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밀쳐서 넘어뜨리려 하는 무리가 많지만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앞날이 어떠하리라고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어려움을 당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셔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본문 14-16절을 다같이 읽어보십시다.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여기 ‘여호와의 오른손’이란 말이 거듭 나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권능을 베푸시며, 우리를 높이 드시며 혹시 넘어지려 할 때도 하나님의 오른손이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민수기 11장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어떤 손입니까? 하나님의 손은 능력을 행하시는 손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29절에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우리를 보호하는 손입니다. 어떤 분이 자기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서 “목사님, 어째서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제자로 택하셨을까요? 정말 이상해요. 목사님 안 그렇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질문을 받고 목사님께서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하는 말이 “글쎄요, 저는 그것보다 더 이상한 것이 있어요.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나와 같은 사람을 왜 택하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반성할 때는 오직 자기는 죄 덩어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가 사실 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정말 이상합니다. 어떤 이는 눈이 동그래지면서 놀란 표정으로 “아니, 저런 사람이 다 교회에 나왔어요.” 하는데 사실은 그 말을 하는 사람 자신이 교회에 나오게 된 것부터 이상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같이 경험하게 되는 것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부족을 여실히 살펴볼 때는 과연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번은 이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합니다. “누가 능히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면서 탄식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뿐만 아니라 우리도 같은 탄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죄악된 것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낙심하기 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은 근본적으로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으리라” 그러면서 계속하신 말씀이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자세히 들으세요.
처음에는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했고, 그 다음에는 “아버지 손에서도 빼앗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서, 말하자면 하나님 아버지의 손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여러분, 어린애가 어떻게 자라납니까? 그냥 내버려두면 살 수 없는 핏덩어리가 세상에 나와서 어떻게 자라납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손이 이 핏덩어리를 거들어 주고, 젖꼭지를 갖다 물려주고, 옷을 입혀 주고, 목욕을 시켜 주고, 잠을 자도록 돌봐 주고, 대소변을 가려 주고 이렇게 모든 것을 보호해 줍니다.
혹시 그러다가 병이 들면 잠을 못 자고 애타하며 돌봐주는 어머니의 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애가 자라납니다. 누가 어머니의 손에서 어린애를 빼앗을 수 있습니까? 어진 어머니는 차라리 자기의 생명을 바칠지언정 자기 아기를 내놓지를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어린 심령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어린 심령이, 아무런 힘없는 심령이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완성할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 분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우리의 어린 심령을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심령을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굶주린 우리 심령에 생명양식과 생명수로 먹여 주십니다.
원수가 밀어닥칠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원수의 공격을 막아 주십니다. 우리가 시험에 빠지려할 때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믿음을 지키고, 그래서 우리의 심령이 지금까지 멸망하는 곳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하늘나라까지 능히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한번은 예수님께서 밤중에 바다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은 유령인 줄 생각해서 깜짝 놀랐을 뿐만 아니라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마음은 안정이 되었습니다.
제자 중에 베드로는 너무 신기하고 감격스러워서 자신도 한번 예수님처럼 바다 위를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선생님, 저도 선생님처럼 물위로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허락해서 베드로는 물위로 감격한 가운데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 편에서 물결이 밀려오는데 주님은 보이지 않고 무서운 물결만이 달려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눈에는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고 높이 달려드는 물결만 보였습니다. “저 물결이 나를 삼키면 어떻게 하나?” 하고 두려운 생각을 하는 순간 베드로는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주여 제가 빠져 죽습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물에 빠져 죽게 된 베드로의 팔을 잡아 건져 주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예수님께서 손을 내미셨습니다. 물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서 건져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체험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는 이 죄악된 세상에 살아가면서 죄악의 물결이 무섭고 강해서 이 죄악의 물결에 휩싸여 빠져 들어갈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튼튼하신 오른손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지 아니하시면 아주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이와 같은 경험을 여러 번 하셨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18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토기장이의 집에 내려가서 구경을 하는데 녹로가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깨어지니까 다시 그것을 이겨서 토기장이의 마음대로 그릇을 만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파괴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그의 마음에 합한 대로 새로운 그릇을 만드십니다. 신령한 토기장이가 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고 죄악된 세상에서 우리의 심령이 깨어진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우리의 파괴된 심령을 고쳐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온전하고 쓰실 만한 그릇을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격의 한 모퉁이가 파손을 당했다고 해도, 우리의 신앙의 한 부분이 깨어졌다고 해도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손에 맡기세요. 하나님의 오른손이 다시 회복시켜 주실 줄을 믿습니다.
시편 37편 24절에 다윗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저가 넘어지나 아주 넘어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며 세상은 험하고 악해서 때로는 넘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오른손이 우리를 붙드시기 때문에 아주 넘어지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네가 하나님의 손을 붙들려 하지 말라. 왜냐 하면 너는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 손을 하나님의 오른손에 붙들리게 하라. 그러면 넘어질 염려가 없을 것이다.” 옳습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은 권능의 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오른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절대로 실패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우주를 주관하십니다.
멀리는 해왕성, 천왕성의 운행까지도 하나님의 오른손이 주장하십니다. 봄 동산의 어린 싹도 그 부드러운 하나님의 오른손이 어루만지십니다. 아침 이슬에 장미꽃 봉오리가 점점 벌어져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도 하나님의 오른손이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오른손은 옛날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파사 같은 큰 나라들의 흥망성쇠만 주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일 강변 갈대밭 사이에 버림받은 어린 모세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그 어린것을 친히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이십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에 팔려가 종살이하고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요셉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오른손은 죽지 않고 살아 보겠다고 멀리 애굽에 갔다가 불행을 만나서 남편을 잃고, 또 아들 형제 다 잃고 외로운 몸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의 발까지도 붙들어 주시는 손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자라도 거기에 미치고 아무리 낮은 사람이라도 그를 돌보시고 붙드시는 손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깊은 곳, 먼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죄악의 깊은 구덩이에 빠졌다고 해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이 거기까지 미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은 4000년 전 아브라함의 생활만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의 생활도 인도하셨고, 모세의 생활도 인도하셨고, 나오미의 생활을 인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생활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끝으로 에스라 7장 9절 말씀을 읽습니다.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이것은 에스라의 이야기입니다. 에스라가 멀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자기의 동포와 같이 정월 초하룻날 예루살렘을 향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머나먼 광야의 길입니다. 이 길에는 원수도 많습니다. 험악한 길입니다. 그런 어려운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그러니까 만 넉 달 걸려서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우리의 가는 길이 그렇습니다. 이 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는 위험한 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길을 갈 수가 있습니까? 이 길을 갈 수 있는 까닭은 꼭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손이, 그 선하신 손이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에 승리의 길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세상을 떠나실 때 그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아니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아버지 손에 부탁하십시다. 삶을 살아갈 때도 아버지의 손에,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도 아버지의 선하신 손에 부탁하십시다.
잠언 16장 3절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했습니다. 우리의 앞날을 여호와의 오른손에 맡기십시다. 아니 우리의 평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 형통하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시 118: 17)
[시118:17]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오늘 이렇게 영광스러운 은퇴 장로님들 내외분 모임에 초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덕택에 대 역사의 현장 등 가보지 못한 곳도 가보고 대단히 즐겁습니다. 현역 때보다 더욱 활기차고 건강하게 주의 일 많이 하셔서 처음보다 나중이 더 창대한 장로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는 자기 삶의 이유를 분명히 발견한 사람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이처럼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정답은 사명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지상의 사명을 다 완수해야 하기 때문에 더 건강해야 하고 더 잘 되어야 하고 더 용기 있게 분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면 우리 주님께서 저 높고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내려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셨을까요? 만약 오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명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사명자에게 큰 특권과 은혜를 주십니다.
그럼 사명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일까요?
1. 사명자에게 주시는 은혜는 주님을 뵙는 은혜입니다.
모세가 주님을 뵙는 은혜를 받았죠. 출33:11에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명자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주님은 누구와고도 만나시지만 사명자와는 더 특별히 만나십니다. 이런 성경구절이 있죠. 암3:7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신 말씀입니다. 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나면 우리 갈릴리에서 만나자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주님을 만나려면 갈릴리를 가야 만납니다. 십자가가 중요하지만 갈보리 언덕에서도, 무덤에서 부활하셨지만 동산의 무덤에서도, 성전도 중요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나자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갈릴리가 어떤 곳입니까? 주님의 사역의 무대입니다. 그러니까 사명을 감당할 때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에서 주님을 만나고, 찬송에서도 주님을 만나고, 십자가 진리를 통해서도 주님을 만나지만 사명을 감당할 때 주님을 더 깊이 만난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주님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하고 살았는데 이제 아무리 찾아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신 분 안 계십니까?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보고 부르짖어도 전과 다르십니까?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사명에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자기 사명 잘 감당할 때 그 은혜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사명 감당할 때 주님을 뵙는 능력을 받습니다.
2. 사명자에게 주시는 은혜는 평안한 은혜입니다.
요나 선지자를 아시죠?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는 말씀을 듣고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 만나 죽을 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왜 그런 어려움을 당했을까요? 사명 회피하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 피하면 더 큰 십자가가 있어요. 편하려고 혹은 힘들다고 느슨하게 십자가 지지 마세요. 아무리 이유 있어도 사명 회피하면 더 큰 어려움이 다가오고 맙니다.
제가 이곳에 와 한 교회에서 시무한지 10년이 넘었는데 처음에 여름 교육행사 때마다 비상이 걸렸습니다. 아이들이 자동차와 접촉사고가 나는 등 여러 사고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게 깨달음을 주시더군요. 아이들을 위해서 전교인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한 달간 전교인 기도의 달로 선포하고 전 교인이 힘을 모아 성경학교와 수련회를 치룹니다. 그 때마다 얼마나 애들이 변화 받고 교사들이 힘을 얻는지 모릅니다. 교사들이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때부터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올 여름 얼마나 폭우가 계속 되었습니까? 계속 되는 장마로 피해도 많이 보고 우중에 출입하는 성도들이 안타까워 강력하게 권유를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려운 일이 터지기 시작하더군요. 학생회 부장이 발을 다치지요. 또 무슨 일이 터지지요. 또 무슨 일이 터지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사명을 피하거나 느슨하게 십자가 지면 더 큰 어려움이 오고야 만다는 것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절대 편한 것이 편한 것 아닙니다. 요나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몸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사명 감당할 때 새 힘이 넘칩니다. 이것이 사명 감당자에게 주시는 평안의 은총입니다.
3. 사명자에게 주시는 은혜는 아무도 해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시91:10-11에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두 증인이 나오는데 그가 그 사명을 마치기까지는 아무도 그를 해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해하고자 하면 그 입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살라버렸습니다. 이것이 사명자의 특권입니다. 왜냐하면 사명은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자를 돕는 것은 주님을 돕는 것이요, 사명자를 해하려는 것은 주님을 해하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요13:20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만큼 사명자의 하는 일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4. 사명자에게 주시는 은혜는 죽음도 피하는 은혜입니다.
본문 시118:17에 “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했습니다. 사명 붙들면 죽지 않습니다. 그 사명 마치기까지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죽음도 피합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지만 사명이 있었기에 죽이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에서와 라반도 야곱을 죽이지 못하고 돕고 만 것도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명만 있다고 다 된 것 아니란 말입니다. 세상에 사명 없는 사람 어디 있어요? 모두 나름대로 다 사명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사명을 생명보다 더 귀히 여겨야 합니다. 진정 사명을 붙들면 죽음도 피해요. 또한 이것이 우리가 죽음을 거부해야 할 이유도 됩니다. 그래서 바울도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3-24)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 주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처럼 지상에 더 머물러야 할 이유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사명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지상에서 더 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사명 잘 감당하여 주님을 뵈옵고 늘 평안하며 특별한 하나님의 보호와 죽음도 피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성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