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지난 해 남편을 저 하늘에 보내고, ‘인생 3막’의 문을 여는 해이다. 성장과 결혼, 천직이라 여긴 교사로서 정년퇴직까지의 삶을 인생 1막, 은퇴 후 많은 활동들을 접고 남편을 간병하며 깨달음으로 산 세월을 인생 2막이라 정의한다.
생경스러운 3막의 시작점, 홀로 살아갈 의지와 신체의 탄력정도를 시험하고 싶었다. 나에게 인생의 교훈과 체력근력을 키워준 것으로는 산(山)만한 게 없었다. 헛헛한 침잠우울을 이겨낼 심도 있는 산행을 은근히 갈망하고 있을 때, 고교 총동창 산악회가 추진하는 해발 1,458m의 발왕산 산행이 거대한 날갯짓의 신호를 보내왔다.
1월 19일 일요일 아침, 오랜만에 설국산행 준비로 아이젠과 스패치, 스틱과 뜨거운 물 등을 챙겨 넣은 묵직한 배낭이 가볍기만 하다. 정든 강변역 테크노마트 앞의 하얀 버스(제로쿨버스)와 그 옛날 기사님이 알아보고 친정식구인양 반가워하신다. 선후배들도 앞 다투어 환영해주니, 동문들 밀물의 정에 코끝이 찡하도록 젖는다.
산 입구는 등산객보다 용평스키장을 이용하려는 여행객들로 붐볐다. 선후배 동문들은 오색 등산복의 화려한 꽃을 피우며, 발걸음산행 A코스와 케이블카 B코스의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아, 동기 친구들이 아무도 없다. 선배들은 대체로 B코스행이다. 몇 년 간 산행을 쉬어 불안한 상태이고, 74세 고령을 감안해 무리하지 말까도 생각했지만, 처음 맘먹은 대로 한참 어린 후배들과 함께 발걸음 A코스를 택했다.
사전답사를 다녀온 20년 후배(42회 조병일, 이석순)가 산행깃발을 들자, 선두 뒤에 바짝 따라 붙었다. ‘엄홍길 숲길’로 들어서자, 산으로 향하는 길은 길길이 굽어졌다. 하얀 눈밭을 오르는 설산은 그대로 겨울왕국이다. 스틱으로 스키의 폴 대처럼 찍고 밀면서 걸음을 옮긴다. 미끄러운 눈길에도 탄탄하게 수고해주는 아이젠이 고맙다.
엄홍길 숲길1과 철쭉 쉼터, 다시 엄홍길 숲길2를 지나면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한 후배가 무거운 배낭을 벗어 달라며, 자신의 배낭도 무거울 텐데 메고 간다. 등짐을 내려놓으니 한결 가볍다. 히말라야 8,000m의 8좌를 완주했다는 전설의 엄홍길 산악인이 오른 산길이다. 그의 히말라야 산행 기운을 전해 받은 듯 힘이 주어진다.
어느새 정상 가까이에 다다르자, 20년 아래의 후배 둘만이 내 곁을 지켜주었다. 아마도 저마다 점심과 간식의 시간들을 곳곳에서 가졌으리라. 우리는 왕수리부엉이쉼터 데크에서 잠시 쉬었다. 후배들과 컵라면에 잼 바른 모닝빵과 과자들을 먹었다. 뜨거운 커피까지 목을 타고 내려가 몸속을 데워주니, 에너지는 새로 충전되었다.
가슴을 펴고 폐부 깊숙이 산정기를 채우며, 탁 트인 산하를 바라본다. 저 건너 멀리서 하얀 날개를 펴고 도는 새무리들이 대관령과 선자령의 풍력발전기는 아닐까. 칠팔 년 전 강릉 바우길 230km 전 17구간의 완주 풍경들이 자르르 펼쳐진다. 울트라바우길의 고루포기산, 옥녀봉, 닭목령에 올라서 본 건너편이 하마 이곳은 아닐까.
기운도 충전된 김에 속도를 내기로 했다. 완만한 길에서 빠르게 걷는 순간, 허벅지 무릎에서 뚝뚝 소리가 난다. 딱딱하게 굳은 알맹이 같은 게 만져진다. 무리한 걸까. 어떻게 하나. 여기서 멈추고 산악구조를 요청해야 하나? 고통에 잠식당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허벅지와 무릎에 핫팩으로 마사지하고, 다리들을 뻗고 오므리며 스트레칭을 가했다. 만져주고 달래어가며, 미안하다, 고맙다, 조금만 더 힘을 내달라 애원했다. 앞서 가던 후배들이 돌아볼 즈음엔 경직된 다리가 풀려갔다.
데크가 지그재그로 펼쳐진 정상가는 길엔 천년주목 길, 산목련 길, 발왕산 산약수 등 각종 테마 길들이 포진해있다. 하나하나 눈길을 주려니, 설국의 하산 눈길 걱정이 시간 부족을 알린다. 아쉬운 채로 스쳐지나갈 뿐이다. 그런 중에도 왕이 발현했다는 발왕산 산약수, ‘사랑수, 지헤수, 장수수’를 신령한 기운인양 받아마셨다.
평창올림픽의 영광스러운 평화봉 정상엔 케이블카 탑승장에서 내린 여행객, 스키어, 등산객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20분 이상을 기다린 끝에 정상석 인증샷을 남겼다.
이제 하행의 약속 시간은 1시간 40분밖에 없다. 6km 설산의 하산 길을 걸어서 갈 것인가, 케이블카로 안전하게 내려갈 것인가? 정상에 선 내가 나에게 물었다.
“도전이잖아. 살면서 때로 무리할 때도 있는 거잖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내라.” 확고한 소리를 들었다. 후배도 시간이 빠듯하지만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보자며 의기투합하였다. 우리 둘인 설국의 황홀한 풍경이며 고혹이 살아있는 주목들을 외면하자, 오직 시간 안에 안전하게 내려가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다짐했다.
푹푹 빠지는 눈밭 하산 길, 경사가 완만한 곳에선 거의 뛰었다. 어디서 그런 속도감이 붙었는지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다. 경사가 급한 하산 길, 눈밭 위로 살짝살짝 보이는 바윗돌과 나뭇가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가는 좁디좁은 비탈길이 반복적으로 찾아왔다. 아찔한 위험구간에선 겸허와 신중함이 미끄러짐을 잡아주었다. 발걸음은 급행 설국열차를 서행으로 교체해주었다. 끝까지 안전하게 하산하니, 스릴마저 통쾌했다. 해발 1,458m의 발왕산, 왕복 산행거리 14.8km를 6시간 만에 해낸 것이다. 두 팔 들어 외쳤다. “아직 살아있네, 살아있어! 도전은 성공이오!”
약속 시간보다 10분이 늦었다. 동문들은 기다려주었다. 진한 정에 감격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소머리국밥 뜨거운 연기에 가려 아무도 볼 수 없었겠지만, 나는 인생 3막을 혼자 살아갈 자신감 하나 얻고 감읍해 울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동문들과 나 스스로에게 선물한 빵빠레 아이스크림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진작가 33회 이윤형 후배가 담아주었음
*발왕산 여러 산행코스 중 우리는 왼쪽의 빨간 흐름선을 따랐음
* 깃발들고 선 42회 이석순 후배
*산행 시작에서 끝까지 함께 해준 42회 조병일 후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