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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金載圭]
양 력: 1926년 4월 17일 02:00 김재규
음/평: 1926년 3월 6일 02:00 남자
시 일 월 년
己 丙 壬 丙
丑 子 辰 寅
辛 庚 己 戊 丁 丙 乙 甲 癸 대운: 순행
丑 子 亥 戌 酉 申 未 午 巳
86 76 66 56 46 36 26 16 6.8
대운 시작: 6세 8월 16일
사망 나이: 55세 정유대운 경신년-교수형으로 처형됨.
1926. 4. 17. 경북 선산에서 출생 ~ 1980. 5. 24. 서울에서 사망.
군인 출신의 제8대 중앙정보부장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여 유신체제의 막을 내리게 한 인물
1945년 -- 9월 경북사범대학교 중등교원 양성소를 수료하고 대륜(大倫)중고교와 김천중학교의 교사로 재직.
1946년 -- 9월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육사 제2기로 그해 졸업·임관했다. 이승만(李承晩) 집권기에는 이종찬(李鍾贊) 계열의 장교로 인식되어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으나, 이종찬 장군의 도움으로 군에서의 위기를 여러 차례 극복했다.
1947년 -- 군생활을 시작한지 일 년 후인 47년 군ㆍ경 축구경기에서 군과 경찰 간의 마찰로 일어난 주먹다짐의 책임을 지고 군에서 물러난다.
1950년 -- 625 사변으로 소위로 복직함.
1952년 -- 육군대학 졸업,
1954년 -- 연대장 역임,
1957년 -- 육군대학 부학장을 지냄.
1960년 -- 419 혁명.
1961년 -- 5·16군사정변 이후 호남비료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1965년 -- 6·3사태 때에는 준장으로 계엄군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그 후 보안사령관·3군단장을 역임하고 전역했다.
1970년 -- 한양대학 대학원을 졸업함.
1973년 -- 3월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그 해 말 중앙정보부의 차장으로 임명됐다.
1974년 -- 9월 건설부(지금의 건설교통부)장관에 취임, 중동건설 수출을 적극 추진하는 일을 맡았다.
1975년 -- 긴급조치 9호 발동함.
1976년 -- 12월 제8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중앙정보부장 재직시는 유신체제가 그 스스로의 한계상황을 노출시키면서 와해되던 시기.
1979년 --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YH여성노동자를 강제 해산시킨 것도 그의 중앙정보부장 재직 중의 일이며, 학생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이 부산·마산 지역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을 때는 시민들의 항쟁이 가속화될 것으로 입장을 개진하기도 했다. 중앙정보부장 재직 말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뢰를 점차 잃었으며 경호실장 차지철과도 심각한 마찰을 야기했다.
1979년 -- 10월 26일 중앙정보부의 안가(安家)에서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과, 실질적인 제2인자로 권력을 행사해온 차지철을 살해하여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김재규는 재판과정과 사형집행 직전까지 '10·26민주회복국민혁명'을 시종일관 주장했음,
1980년 -- 1월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518 광주 사태로 정국이 시끄러운 와중인 5월 24일에 서울 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재규 전 중정부장의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희(76)와 외동딸(양딸) 김수영(51)이 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친동생인 김한규씨는 대전에서 건설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장남을 아들이 없던 재규 형님에게 양자로 입양시켰는데 양자간 날 아이가 앉은뱅이가 되어버렸다. 평소 신통한 법력을 갖고 있던 현불사 설송 큰스님을 급히 찾았고, 설송 큰스님의 기도로 아이가 다시 일어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고마움을 느꼈던 김한규씨는 법당을 하나 지어 감사인사에 대신했다.
동생 김한규씨는 형님이 중앙정보부장 시절에 사업관계로 물의가 있어 투서가 청와대로 들어가 박정희로부터 질책을 받고 김재규는 동생에게 당분간 사업에서 그만두라고 강요하여 사업을 그만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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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암살' 김재규 유족 '백억 대 재산'
부인 김영희, 방배동·청담동 등에 부동산 소유
김재범 기자.
'10·26사태'를 일으킨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해 수많은 논란과 추측은 진보와 보수라는 두 이념간 대립마저 가져왔다. 2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민주화 투사냐', '암살자냐'로 나뉘어 논란이 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가운데 최근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김계원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재규의 유족들이 연금을 받고 있다'고 말해 진위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유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취재결과 유족들은 1백억원이 훨씬 넘는 재산가로 생활하고 있었다.
김재규 전 중정부장의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희(76)와 외동딸 김수영(51)이 있다. 지난 1979년 10·26 이후 이들의 행방은 일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거나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정도의 '설'만이 전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김재규의 부인 김영희는 현재 서울 강남 일대에 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김재규의 사형 집행과 함께 재산이 몰수되었음에도 불구, 김영희가 1백억대(추정치)가 넘는 재산가로 생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외동딸인 김수영 역시 한 사립대학 학장의 부인으로 변신, 국내에 거주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26년 침묵의 담벼락'
김재규의 부인 김영희가 생활하고 있는 곳은 서울 강남 방배동의 A빌라. A빌라는 높은 담벼락 위에 촘촘히 놓인 감시 카메라는 물론, 경비원들이 24시간 정문을 지키고 서있는 등 철통경비를 자랑한다.
인근의 B부동산 관계자는 "한다하는 사람들만 모인 최고급 빌라다"며 A빌라를 소개했다. 이 관계자는 "15층 건물의 A빌라는 각 층별로 2세대가 거주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며 "한 세대 당 1백22평 규모의 최고급 빌라다"고 말했다. 현재 이 빌라의 매매가는 20억 원이 넘는다.
또한 이 관계자는 A빌라에 사는 사람들을 소개하며 "이 동네에서는 유명한 곳이다"고 말했다. 현재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인물은 지금은 정계를 은퇴한 전직 야당 총수 국내 최고 금융기업 중 하나인 C그룹 총수 비리재단으로 얼룩진 D대학의 이사장 등이다.
그 중 주목을 끄는 인물은 과거 육영수 여사가 저격될 당시 육 여사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E다. E는 육 여사 저격 당시 고위급을 지냈던 인물로 현재는 김영희와 이웃사촌으로 지내고 있다. 육영수 여사 저격 당시 E는 제 몸 피하기 바쁜 모습을 보여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당했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A빌라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김영희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부동산 업자 역시 김영희가 살고 있는 호수를 묻자 "한 할머니가 살고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 누군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김영희는 지난 2002년 2월 강남구 논현동의 집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 철저히 자신을 숨긴 채 살아온 듯 했다.
단골로 이용한다는 근처 C세탁소의 이 아무개(50·여)는 "참 곱게 늙은 노인네다 싶을 정도로 얌전한 사람이다"며 "일하는 아줌마와 운전기사랑 같이 살고 있다는 것만 알 뿐, 인사를 해도 잘 받지 않고 말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아무개 역시 김영희의 존재를 알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김재규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뒤 전 재산이 몰수되었던 김영희가 어떻게 이런 최고급 빌라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더구나 밝혀진 재산만도 1백억대가 훌쩍 넘는 규모여서 이에 대한 의문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고급빌라에 장학재단까지
지난 1979년 10·26 사태 때 김영희 나이는 50살이었다. 남편인 김재규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지만 가정생활은 그리 넉넉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여 년간 10·26과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취재를 해온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도 김재규에 대해 "김재규는 뇌물이나 청탁과는 거리가 멀다"며 "막대한 재산을 보유한 재력가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설사 알려진 바와는 달리 엄청난 재산을 소유했다고 해도 당시 신군부에 의해 모든 재산은 몰수된 상태다.
그렇다면 지금의 김영희가 소유한 재산인 1백50억대에 달하는 부동산에 대해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 김영희가 지난 2002년 2월에 매입한 A빌라의 경우 20억대를 호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2002년 4월경에 매입한 청담동의 4층 빌딩은 60억대이고, 같은 시기에 매입한 서초동의 7층 빌딩(소유주는 모 장학재단으로 돼있음. 그러나 실질적인 소유주는 김영희로 확인)도 70억대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전라남도 순천의 2층 짜리 상가건물(20억대)도 김영희의 소유로 되어 있다.
각 건물의 가격은 건물 인근 부동산 관계자들이 평가한 최소치의 금액으로 26년간 철저히 세상의 눈을 피해 살아온 70대 노인의 재산치고는 규모가 엄청나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모든 재산이 지난 2002년 2월부터 4월까지 불과 2개월만에 매입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확인된 바는 없지만 김영희가 실질적인 소유주로 되어 있는 D장학재단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지난 1996년 김영희가 설립한 D장학재단은 극빈층 자녀들을 대상으로 장학금 지급과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사업에 중점을 두고 운영되는 비영리 재단이다. 게다가 사회사업 부문에서는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학재단 내에서도 김영희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이 곳에 근무하는 한 직원은 "재단 설립자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다. 현재 미국인 이사장과 재단 직원 4명이 근무한다"고 말했다. 미국인 이사장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이 직원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확인 결과 미국인 이사장이라는 사람은 다름 아닌 김재규의 외동딸 김수영이었다. 즉, 어머니 김영희가 설립한 재단에 딸인 김수영이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것인데, 재단 관계자들은 두 모녀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는 얘기인 셈이다.
결국 의문을 높이는 김재규 유족의 재산형성 과정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한 축에 D재단이 있다는 점은 확실한 듯 보인다. 이러한 의구심들을 풀기 위해 인터뷰 요청을 시도했지만 김영희와 김수영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의문으로 둘러싸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유족들. 이들이 간직한 10·26의 진실과 숨겨진 이야기가 언제쯤이면 세상에 드러날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다.
2005/10/27 [03:33] ⓒ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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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외무장관을 했던 이동원씨의 회고저서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해의 배후에는 박대통령과 카터의 갈등으로 인해 미국 CIA가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김재규와 차지철의 오랜 감정대립으로 인한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재규의 박대통령 시해 배경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김재규는 무척 불운한 사람이다. 그는 결혼 20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어 양녀로 생의 위안을 삼아야 했다. 한데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도 있지만 그것은 그에게 만큼은 불운의 씨였다.
자식으로 인해 인간은 늙어 갈수록 주춤하는 삶을 살게 마련이거늘 그는 자식이 없음으로 해서 충동을 억누를 자제력을 키우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욱」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박대통령 곁에서 권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김재규와 차지철 둘뿐. 때문에 김재규는 악역을 맡을 운명을 지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김재규는 당시 「정서불안」까지 겹쳐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였다. 한 가지 일관된 게 있다면 박대통령에 대한 충성뿐,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위장선동세력이 주장하는, 「10. 26」의 김재규가 민주인사가 될 수 없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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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1.18. 계엄군법회의에서 김정섭은 YH사건과 김재규와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진술했다.
“1979.8.9. 10:00시경, YH회사 200여명이 회사내 문제를 해결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에 집결하여 농성을 벌임으로서 발단이 됐습니다. 8.10.10:00경, 김계원과 김재규가 강재해산을 결의했습니다. 사람들이 투신을 하면 그물망, 메트레스 등의 안잔장구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숫자가 부족함으로 며칠간 연기하자는 실무자들의 건의가 있었지만 김재규 부장의 강행 지시로 안전대책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8.11.02:00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 해산한 적이 있습니다.”
이어서 김정섭은 김재규가 학생, 근로자, 종교인 모두에 대해 박대통령보다 더 강경한 긴급조치10호를 건의했다가 대통령에 의해 거절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1979. 8월 중순 경, YH사건의 후유증과 도시산업선교회 및 카톨릭 농민회의 들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한 청와대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 때 김재규 부장은 ‘긴급조치 9호는 칼날이 무딥니다. 아주 강한 10호를 주십시오’라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10월 하순경, CPX기간 중 B-1방카에서 같은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때에도 김재규 부장은 ‘각하, 긴급조치 10호를 주십시오. 그래야 정국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하고 건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각하는 ‘학생, 근로자, 종교인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 정국수습이 되겠느냐, 당분간 9호를 가지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해 보시오’라고 지시하셨고, 그 후 10호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1979.11.9. 계엄군법회의에서 있었던 김계원의 진술과 일치한다.
이어서 김재규의 범행동기를 물었을 때, 김정섭은 이렇게 대답했다.
“부산 계엄사태로 부산에 다녀온 김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산에 가보니 300만 시민 중 70% 이상은 유신에 호의적이더라. 시가와 항만이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30% 이하의 반대세력은 행정기관이 잘만 선도하면 회복될 것 같더라.’ 김재규는 소영웅주의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으로 그를 따를 사람 별로 없을 것입니다.”
1979.11.9. 계엄군법회의에서 김계원은 위 김정섭의 진술을 뒷받침해주는 진술을 하였으나 좀 더 자세했다.
“1979.8.10. 10:00경 YH 노무자 200여명이 신민당 당사에 집결, 계속취업을 요구했습니다. 배후에는 도시산업선교회가 있었고, 장차 노동계와 종교계가 합세, 강력한 대정부 투쟁 세력으로 진전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수습대책을 논하기 위해 8.10.10:00경 청와대 제 사무실에서 김재규, 유혁인 정무1수석, 고건 정무2수석, 김정섭 등이 모여 논의를 했습니다. 중론이 나왔는데 그것은 보사부장관이나 노동청장이 신민당사에 가서 해명과 시책을 설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재규는 정부 고위 관리가 신민당사에 가서 사과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전례가 될 것이다. 금일 중으로 경찰을 투입해 강제해산을 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그날 야간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해산을 시킨 바 있습니다. 긴급조치 10호에 대한 김계원의 진술은 위 김정섭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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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경책으로 박대통령에게 질책 받던 김재규가 민주인사라니 )
- 김정렴 전 비서실장 증언
1979년 8월 9일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 때 구자춘 내무장관과 신현확 보사부 장관의 대처방안은 경찰은 외곽경비만 하고 시간을 가지고 대화로써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김재규 정부부장이 두 소관장관과 상의도 없이 야밤에 치안본부장에게 직접 강제해산을 명령함으로써 투신자살의 불상사가 발생, 민심에 일대 충격을 주었을 뿐아니라 국내 정국을 극한적 경색상태로 몰아넣었다.
그 후 시국대책회의에서도 가끔 박 대통령으로부터 ‘강경조치만 쓰면 시국이 조용해지느냐’ 하고 공개적으로 질책을 당한 김재규가 박 대통령 시해사건 공판에서 마치 민주인사 인 것같이 언행을 할 줄은 나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외에도 김재규는 회의석상에서 박 대통령으로부터 그의 강경책 건의나 업무상의 실수에 대해 여러 차례 공개적 질타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 저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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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관씨 책에 나오는 옛날 사주들 중 병자일 기축시의 사주들.>
1. 기축시, 병자일, 을축월, 계묘년, -- 1,2대운은 출신가문(관가출신)이 좋아 호의호식, 3대운/임술대운-파재-파란이 많았음, 이후 출사함, 4대운/신유운에 국법을 어기고 극형을 당함,
2. 기축시, 병자일, 을축월, 갑진년, -- 묘대운에 과거에 합격, 무진/기대운에 부진, 사대운에 다시순탄, 경오대운에 법을 어겨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
첫댓글 이 사주는.... 김재규의 친척이 확인했다는 자료로 정확하다고 봄... 백영관씨 책에 나오는 옛날 사주에도 병자일 기축시 자료를 보아도 신빙성이 있음....(병자일 기축시면 무조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은 아님...오해하지 마시길... )
정말 김재규씨가... 유신의 심장을 쏘고... 민주화를 위하고 국민을 위했다면... 유족들이 저렇게 살면 안되는디.... 저러면 누가 민주 투사라고 믿을까???... 유족의 행태를 보면... 평소 김재규씨가 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만합니다... 떠떳하게 밝힌 것은 밝히고... 살아야지... 유족들이 죄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