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견성(見性) 체험과 해석은 성경의 계시(啓示) 체험과 해석에 비해 얼마나 빈약한 체험과 해석인지를
견성(見性)이나 계시(啓示)는 초자연적인 진리로써 불교의 견성(見性) 체험과 해석은 성경의 계시(啓示) 체험과 해석에 비해 얼마나 빈약한 체험과 해석인지를 이제는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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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10. 12. 즉 인터넷 다음 어학사전「견성(見性)」:【1. 헛된 생각과 정신을 홀려 생각을 흐리게 하는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자기 본래의 천성을 깨우쳐 앎. 2. 자기가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을 깨달아 부처가 됨.】또 인터넷 다음 블로그「견성이란(원불교 사전)」:【선가(禪家)에서는 견성을 일대사라고 하여 수행의 제일의 목적으로 삼는다. 견성이란 말은 보리달마의 저작으로 알려진《혈맥론》에 처음 이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를 설명하기를 “만약 부처를 구하려거든 모름지기 성품을 보라(見性). 성(性)은 곧 부처이다.… 견성을 못하면… 생사윤회를 면치 못한다. 삼계에 고를 받아서 벗어날 기약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선 부처가 되려면 견성을 해야 한다. 견성을 못한 사람은 다른 선(善)의 행위가 있어도 선의 과보는 얻을 수 있지만, 삼계를 벗어나는 인(因)을 얻지 못했으므로 진정한 불도는 아니다. 참다운 불도는 진정한 자성을 보는 데 있다. 자기 마음이 부처이며 부처는 자기 마음이다. 달마는 마음 밖에 부처는 없다(自心是佛 佛是自心 心外無佛)라고 말했다. 부처를 구하려거든 견성하라. 만약 견성을 못하면 평생을 밖을 향하여 치달릴 뿐 부처를 구해도 얻지 못한다. 이 말은 선(禪)의 종지를 철저히 표현한 말이다.
특히 육조혜능에 이르러 이 견성이 근본사상이 되어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견성의 실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달마는《오성론》에서 마음이 텅 빈 것(心是空)을 아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를 본 것(見佛)이라고 말했다.】에서보면 견성(見性)이나 계시(啓示)는 초자연적인 진리로써 불교의 견성(見性) 체험과 해석은 성경의 계시(啓示) 체험과 해석에 비해 얼마나 빈약한 체험과 해석인지를 이제는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즉 그러니까 그리스도교는 계시(啓示)종교로써 구약 성서에도 계시(啓示)가 풍부하고 신약 성서에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장 30절 참조) 하고 또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장 28절 참조) 하고 말씀하셨듯이【계시(啓示)의 완성자이신】예수님께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우쳐주시는 대로 자세하게 다루어나가는 입장보다는 불교는 유한유(有限有), 무한유(無限有), 무루법(無漏法), 무위법(無爲法)을 말하면서도 삼위일체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잘 모르듯이 즉 그러니까 보리달마의 말처럼 가톨릭의 입장으로 바꾸어서 말한다면【참다운 불교는「그리스도교도는」진정한 자성을 보는 데 있다. 자기 마음이 부처이며「하느님(예수님)이며」부처는「하느님(예수님)은」자기 마음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얼마나 허술하고 어설픈 오류적인 말이겠습니까? 즉 그러니까 한마디로 불교의 견성(見性)의 결과는 허술하고 어설픈 오류로 항상 명백하게 드러나고 성서에서도 계시(啓示)자의 무오류성과 계시(啓示)를 보(받)는 자의 오류성의 차이가 항상 명백하게 드러나듯이.... 즉 그러니까 八正道의 법륜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이 번뇌하고 물질이 윤회하는 것이지 영혼이 계속 육도윤회하는 것은 아니듯이....(424페이지 참조) 즉 그러니까 번뇌가 다한 해탈한 사람은 완덕을 이룬 성인으로써 또 완덕을 이룬 성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대죄가 되는 큰 번뇌는 없겠지만 미세한 번뇌는 누구나 다 없앨 수는 없는 것이듯이....(인터넷 다음 어학사전「성불(成佛)」:【1. 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를 얻음. 2.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부처가 되다.】참조) 즉 그러니까 우리 가톨릭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각 권마다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계속 창조를 말씀하신 명확한 계시(啓示)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541-546페이지 참조) 즉 그러니까 부분적인 견성(見性)이나 부분적인 계시(啓示)로는 “윤회는 없다”고 피타고라스의 학설은 오류라고 종교들에 대해서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영혼이라는 것을 몰라서” 하고 “윤회는 없다. 그러나 두 가지 생명이 있다.” 하고 영혼에 대해서 마음과 생각에 대해서 이성과 기억과 의지에 대해서도【계시(啓示)의 완성자이신】예수님께서 자세하게 말씀해주셨듯이(영성시집 ‘182. 윤회사상은 어디까지나 사상일 뿐....’ 편 180-188페이지, ‘201. 천지 창조론과 참된 계약(현재)의 종교’ 편 272-278페이지, ‘206. 불교와 계시종교의 차이점「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완성」’ 편 298-314페이지, ‘207. 문득 구원(道)의 화두(경지)를 깨달았습니다’ 편 320-324페이지, ‘208.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①”’ 편 343-347페이지, ‘215.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왜 창조하셨는지를....「신비적 혼인」’ 편 398-408페이지 참조) 즉 그러니까 우리 인간 편에서 진리를 추리하고 궁구하고 자세하게 깨닫고 다루어나가는 입장이 더 어렵듯이 즉 인터넷 다음 어학사전에서 ‘통달’을 검색해보면【통달(通達) : 1. (사람이 지식이나 숙련이 필요한 어떤 일에)익히 알고 있어 막힘이 없다】하였듯이 통달도 초보(부분)적인 통달을 가지고 진리통달 이라고 마냥 떠들 수많은 없는 것이듯이.... 즉 그러니까 진리통달의 은혜를【곱비신부님 메시지 책, 그리스도의 시 책, 루이사 피카레타 책】등 진리통달의 은혜를 가톨릭교회에만 주시는 이유도 깨달아야 하겠지만....(영성시집 ‘202. 제2의 성령강림 시대를 깨달음’ 편 287-290페이지, ‘207. 문득 구원(道)의 화두(경지)를 깨달았습니다’ 편 329-335페이지 참조) 즉 그러니까 계시(啓示)의 완성이라고 해도 교리적으로가 아니라면 알아듣기가 쉽지 않듯이 즉【계시(啓示)의 완성자이신】예수님의 완성된 계시(啓示)라고 하더라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묵시록의 봉인된 신비로운 계획인 초자연적인 계시(啓示)진리의 내용들은 성령의 감도를 받아 점진적으로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 견성(見性)이나 계시(啓示)를 지금 시대에도 비추어보고 해석의 문제에 있어서도 중대한 오류가 없도록 神(하느님)의 본질에 대해서 다루어나가는 것이듯이....(영성시집 ‘206. 불교와 계시종교의 차이점「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완성」’ 편 309-312페이지 참조) 즉 진리를 아무리 깨달은 부처님이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완성시킨 성서의 계시(啓示)진리는 잘 모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즉 초대교회 때부터 형성된 권한을 갖춘 사도단과 성모님과 성령의 활동이 지금 시대에도 살아 있어야 성서 풀이가 오류가 없이 바르게 해석되듯이 청봉스님처럼 성서를 임으로 해석한다면 지금도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는 같은 뜻으로써....《《《영성시집 ‘211. 그 짐승의 숫자인 666①’ 편 372페이지「15. 666은 그 배수로 서기 1332년을 가리킨다. 역사상 이 시기에 ‘거짓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을 근본적으로 공격함으로써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직 과학과 이성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철학자들을 통해, 인간 이성을 진리에 대한 유일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점차로 (퍼지게) 되었고, 현세기까지 이어진 큰 철학적 오류가 거기서 발생한 것이다. 이성을 진리에 대한 유일한 (판단) 기준으로 (여기며) 그 중요성을 과장한 나머지,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의 파괴라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과연 프로테스탄트적 개혁은 그것과 아울러 신적 ‘계시’의 원천인 (교회의) ‘전승’을 배척하였고 ‘성서’만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렇게 수용된 성서마저 (단지) 이성으로 해석되는 (운명을) 겪어야 했고, 교계제도적 교회 - 그리스도께서 신앙의 보고(寶庫)를 보존하도록 맡기신 교회 - 의 진정한 ‘교도권’ 역시 완강한 배척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누구나 ‘성서’를 읽고 자신 식으로 자유롭게 해석하며 이해하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이 파괴되었다. (이와 같이) 역사상 이 시기에 ‘거짓 그리스도’가 한 일이 바로 교회 분열이었다.」와【「베드로 후서 1장 20-21절」】참조》》》즉 그러니까「신적 ‘계시’의 원천인 (교회의) ‘전승’」,「신앙의 보고(寶庫)를 보존하도록 맡기신 교회 - 의 진정한 ‘교도권’」이 무엇인지 깨달아야지 성서의 예언을 임의로 해석한다면 그것이 진리통달이 되겠습니까?(영성시집 ‘193. 천주 성부님’ 편 235-236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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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시집 ‘216. “하나는 하나요 둘은 둘이다「견성(見性)과 계시(啓示)」③”’ 편 440-444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