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해시리즈 1-1강 >
여러분들 다 예수 믿지요? 그런데 막상 예수 믿는다는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실 거예요?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 기도하는 것? 성경 읽는 것? 아니면 세상 교회들같이 십일조 잘 하고 전도 많이 하는 거? 성화되고 착한 사람 되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또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예수를 믿는 사람 같습니까? 아니면 안 믿는 사람 같습니까? 다들 말이 없으신데...
우리가 흔히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데,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받는 조건이나 공식이 되어버리면 구원의 주체가 내가 되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내가 구원받고..그러다 보니 아침에는 믿는 것 같다가 저녁엔 안 믿는 것 같고 그런 거지요. 예수도 내가 선택한 예수가 되고 예수 믿는 것도 내가 믿는 내 믿음이 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가 됩니다. 세상 교회가 그리 가르치다 보니 흔히들 생각하기를 내가 없으면, 또 교회가 없으면 하나님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실제 신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개혁주의 신학이 그 수준이에요. 그래서 출발선부터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 중심이에요.
성경을 보면 그냥 예수 믿으라고 하지 않고 예수 앞에 ‘주’가 붙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또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라”(고후 13장)고 합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성경은 우리더러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인간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에요. 우리 안에 믿음 없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못 믿을 인간 보고 자꾸 믿으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결국 자기 최면 거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평생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 보면 예수가 누구신지 모르면서 자기가 마치 예수를 믿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자기기만에 빠집니다. 세뇌되는 거예요. 일루젼 종교 망상이죠.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이고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데, 예수 앞에 ‘주’가 붙게 되면 인간의 모든 주체성과 독립성과 가능성을 삭제합니다. 주는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뜻이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피조물임을 너무 자주 잊고 살잖아요. 주가 계시다는 사실을 자꾸 잊는단 말이죠. 다들 내가 주가 되어서 살아가는 인생이니까요. 주가 계심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가지신 분이 우리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게 아도나이에요
그래서 주라는 말은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단어입니다. 잘 안 쓰는 말이지요. 현대인 누가 자기 목숨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진 타자를 인정하겠습니까? 절대 하지 않죠. 얼마나 인권이 보장되고 민주화된 세상인데...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뜻이지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까지도 그분의 소관이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믿음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아니에요. 흔히 세상 교회에서 말하듯이 믿음을 관리하고 잘 키워서 큰 믿음을 가지라는 것은 사기지 성경엔 그런 믿음 없습니다. 믿음엔 크고 작은 믿음이 없어요 믿음이냐 믿음 아니냐만 있는 거에요
믿음을 얘기할 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예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이야기합니다. 단순히 우리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십자가 지신 분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세요.
(골로새서 1장)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세요. 요한복음 1장 1절에도 나오잖아요.
(요한복음 1장)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
시니라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란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예수님은 우리가 있기도 전,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성부 하나님과 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기 전 죄를 짓기도 전에 하나님과 하신 약속이 있었어요. 그게 십자가, 언약의 피입니다. (엡1:3-7) (엡1:10)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재통일 되는 그 일을 위해 피를 흘리러 이땅에 오신 것이지 우발적으로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주일학교 학생들과도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셔서 그냥 에덴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시면 되지 뭐 하러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고 뱀이 출현하고 우리가 그 범죄로 인해서 죽게 하셨느냐는 겁니다. 주일학교에서 이것을 물었더니 희야가 대답하길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고 해요. 우리 교회 주일학교 수준이 이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있기 전에, 세상이 있기 전에 약속이 먼저 있었습니다. 어떤 약속? 하나님과 같은 존재들로 하나님 나라를 채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으로 가득한 나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나라, 그분만으로 아무 부족함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영원토록 사는 존재들이 누구이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섬김과 희생으로 있게 되었는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죄와 사망이 있습니다.(로마서 5장) 그 약속이 먼저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 잘 믿고 교회 잘 다니고 착하게 살다가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이땅을 다녀가신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종교의 수준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분을 알게 되었다, 그분이 나의 주가 되심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 관계는 그분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예수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우리가 있기도 전에 이루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절대 취소되거나 변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미 이루어진 그 약속에 따라서 그분의 영이 자기 몸된 교회를 빈틈없이 돌보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3장)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게 구원의 현실이에요. 내가 예수를 열심히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 사랑이 없으면 어느 누구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중에 정말 나보다 내 새끼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분이 있습니까?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게 구원입니다. 요한1서에도 나오잖아요.
(요한1서 4장)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 먼저 사랑, 끝까지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딴 길로 도망갈 궁리밖에 하지 않는데도 그 사랑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분을 이길 수가 없으니까... 그 상태를 믿음이라고 하고 구원이라고 합니다. 보통 구원 이야기 할 때 길 잃어버린 양들 이야기를 많이 하죠? 양들은 눈이 나빠서 길을 한 번 잘못 잡으면 그 길로밖에 가지를 못합니다. 계속 그길로 가버린단 말이에요. 그런데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데리고 오는데, 이것이 회개라고 하고 구원이라고 하잖아요. 잃어버린 드라크마 이야기도 그래요. 동전을 잃어버렸는데 동전이 주인을 찾아갈 수가 없죠? 이게 구원의 현실이에요.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 일방적인 사랑(긍휼)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기도 전에 그분이 우리를 먼저 아시고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굳이 아라비아 수로 십사만 사천이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십사만 사천(12지파 x 12제자 x 1000)에서 하나도 뺄 수도 더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구원은 인간들의 헌신이나 됨됨이나 어떤 협조와도 상관없다 그런 뜻이에요. 오늘날 교회 신학의 오류가 그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아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여기에서 ‘이처럼 사랑하사’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또 독생자는 외동아들의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을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시는 만큼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영생을 얻는 조건이 하나 나옵니다. 독생자를 주심만 아니라 그분을 믿는 자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분에 의해 찾아짐으로 생겨난 관계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피조물들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다.. 쉽게 말하면 피조물들에게 살해당하는.. 그래서 영생을 얻는.. 이런 것들을 어느 인간도 상상하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요청한 사실이 없어요. 우리 머리에서 나오는 것은 기껏해야 세상종교의 수준입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에서도 신이 죽어서 구원을 얻는 종교는 없단 말입니다. 종교란 모두 나의 있음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에요. 나의 구원 가능성에서부터 죽음을 극복한 영생불사를 찾아가는 겁니다. 그게 구도의 길이에요. 불교를 보면 내 안에 이미 신적인 존재의 가능성이 들어있어요. 불성이라고 하죠. 그것만 잘 깨닫고 개발하고 수행하면 다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거 기쁜 소식 아닙니까? 누구에게나 복음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가 않아요. 너희가 어떤 깨달음과 노력을 해도 구원이 없다..에서 시작을 합니다. 전적 불가능한 죄인에서 시작을 한다는 말이에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함으로 정녕 죽으리라의 저주가 계속 작동하고 있어요. 이 말은 세상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그럼 구원은 누가 받습니까? 구원은 예수만 받아요. 진짜 생명이 있는 그분이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세상에서 인간들에게 살해당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믿음을 보시고, 죽기까지 순종함을 보시고 삼일 만에 구원하신(사망을 이기고 살려내신) 거예요. 그럼 우리의 구원은 뭡니까? 우리의 구원은 내가 예수를 믿어서 받는 구원이 아니라 그분께 붙어서(연합되어) 살아난 구원입니다. 그 언약의 죽음이 나누어진 자들에게 부활의 생명도 나누어진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창세전에 이미 세워진 십자가, 그래서 바울은 그 십자가에 자신이 주와 함께 못 박혔다고 한 거란 말입니다. 모든 성도는 그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이에요 그리고 첫열매이신 주님의 부활에 함께 딸려 올라갔다고 합니다. 하늘로 옮겨졌다는 말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것을 십자가의 신비와 역설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만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리신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를 믿는 겁니다. 구원의 확신은 나의 체험이나 교회생활의 열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있다는 것이 그런 뜻이에요. 그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확정적인 게 없잖아요 그 약속이 믿어지는 게 구원의 확신이란 말입니다.
이게 복음인데, 이 복음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기분 나빠합니다. 그럼 여태까지 내가 믿은 믿음은 내 체험은 가짜냐는 거지요. 맞습니다 가짜예요. 내가 믿고 싶어서 믿은 예수는 다 가짜입니다. 내 체험 같은 거 평생 울겨먹다가 지옥 간다니까요 예수 모르면....그런 사람은 한번도 성령의 책망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동안 쌓아놓은 마일리지도 모두 가짜입니다. 아무리 마일리지 쌓아놔도 상급없어요 무슨 놈의 차등상급이 있어요? 하나님의 아들을 받았으면 다 받은 건데 더 무얼 더 받겠다는거냐고 이 악당들이...
조금 전에 읽은 요한복음 3장 16절도 얼핏 보면 영생을 얻는 조건이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의 구절을 보면
(요한복음 3장)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에 나오는 세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늘과 반대의 의미로서의 세상이 있고 죄에 가두어져서 멸망 받아야 하는 세상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잘못 읽게 되면 모든 세상이 구원 받을 대상으로 착각을 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재미있죠?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라고 해놓고 믿을 수 있는 조건이나 능력이 우리에게 없는데 그 이름을 믿지 아니하면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답이 없는 거죠.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이 어둠의 세상, 죄에 가두어진 세상에 빛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둠인 세상이 빛을 깨닫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빛을 오히려 미워하는 거에요 요한복음 1장의 내용과 같아요.
(요한복음 1장)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 세상에 빛이 왔는데 어둠이 빛을 알아보지 못했고 빛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다 죽어 있더라는 이야기예요. 죽은 세상에 유일하게 생명 있는 한 분이 오셨는데 결국 이 세상이 그분을 살해해버린 겁니다. 그빛이 있는 이상 세상은 어둠으로 폭로되니까 이게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세상에 남은 것은 심판밖에 없다는 말이에요.
(요한복음 3장)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말씀이에요. 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아신 자들, 하나님의 약속대로 살려내신 자들이 있는데 그들만 빛으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빛으로 나오는 행위가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이라고 하는 거에요. 시체가 자기들 스스로 일어나서 나오는 자들은 없다는 거예요. 빛이신 예수에 의해서, 길이신 예수에 의해서, 생명이신 그분에 의해서 찾아진 자들만 하나님께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그분을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신 한분 주 예수
이게 믿음이에요. 이걸 믿음 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셔놓고 우리더러 네가 나를 믿었구나 하고 여겨주시는 것이 믿음이에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으로 하여금 믿음의 행위를 하게 했다는 뜻이에요. 믿음으로 우리를 꽁꽁 묶어서 하나님의 목적지로 데리고 가시더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도, 그 길 위에서도 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반항하는 것밖에 없는데, 결국 나중에 보니 그곳에 가 있더라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에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분이 우리 손목을 끌고 가시는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조금씩 차츰 차츰 그분에 대해서 눈이 뜨여 가는 거예요. 두 이레 강아지만큼 나에게 주가 계심을 알아가는 겁니다. 나의 주가 되시는 그분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 그 이름 앞에 무릎꿇는 것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을 통틀어서 믿음 안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있는 믿음.. 그러나 이건 우리 본성에 거스르는 믿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더 커지고 강해지기를 원하고 더 높은 곳에 있기를 원하지 약해지거나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잖아요. 남들보다 우위에 있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심지어 교회도 다니고 있습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으려 합니다. 세상교회가 가르치는 고지론, 그런데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 마지막에서 말하기를 너희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살해 당하신 그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검증하라고 합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솔직히 그런 믿음 가지기 싫죠.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에게 맞아죽는 그런 믿음이 싫단 말이에요. 그분을 이용해서라도 세상 고지에 우뚝서는 게 믿음인 줄 알잖아요 교회서 그렇게들 배웠으니까..거기다 우리의 어떤 노력에도 예수님과 같은 믿음 안에 있을 방법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이 편지 마지막 부분에서 돌직구처럼 던진 이 말씀은 그냥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게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여러분에게 하는 말이에요. ◯◯야, 네가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를 믿고 있니?.. 아니면 다른 예수, 니가 믿고 싶은 예수를 믿고 있는 거야?...
고린도교회는 온갖 은사가 다 나타났던 교회입니다. 그 은사 때문에 자기들끼리 당을 짓고 싸움질하고 그랬어요. ◯◯아, 너도 예수처럼 그렇게 실패한 인생을 살고 싶니?.. 너 예수 믿는다면서?.. 예수를 믿는다면서 왜 그분이 살다 가신 인생은 그렇게 싫어하니?.. 남들 보란 듯이 폼 나게 잘 나가는 인생 살고 싶고 건강하게 살고 싶고. 오래 오래 장수하다가 천국 가고 싶고 ..그래서 세상이 우리보고 개독교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저 인간들은 자기보다 욕심이 더 많다고...
그런데 예수는 너희가 나를 좇으려면 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게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예요. 한마디로 우리보고 세상에 맞아 죽으라는 얘깁니다. 세상에 사랑받으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예수 믿음 때문에, 예수와 한몸 된 교회라는 이유로 세상에서 박해 당하고 애통하면서 살다가 추방 당하는 게 믿음이고 천국의 복이란 말입니다. (마5:1-12) 유니언 크라이스트는 그렇게 예수님이 살다가신 삶에도 연합되는 게 유니언 크라이스트에요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 교회에 온갖 은사가 나타나고 그들이 별별 것으로 다 자랑을 하고 하는데 한가지 예수 십자가는 자랑을 하지 않는 거예요. 그렇게는 되기 싫다는 겁니다. 바울은 너희들이 죄인 주제에 뭐 그렇게 인생을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니.. 너희가 지금 예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구나.. 그래서 바울이 마지막으로 고린도교회에게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편지 말미에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던지고 있는 거예요. 축복기도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참 실례가 되는 말이지만, 어쩌면 너희가 버림 받은 자일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참 무서운 말이죠. 요즘 어떤 목사도 설교시간에 이런 무례한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고객 다 떨어지니까
말을 좀 바꾸어 해볼게요.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 것 맞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면서 왜 그렇게 잘난 사람들이 많아요? 강하고 똑똑하고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지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어디다 치워버리고 왜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세상 것들에 목매고 사시냐구요 왜 교회가 세상 정신과 다른 게 없습니까? 그러고도 예수 믿는 것 맞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솔직히 아차 하면 도망갈 비상구 하나씩은 만들어놓고 있잖아요.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사실은 예수도 믿고 돈도 믿고 예수도 믿고 세상도 믿고 예수도 믿고 교회도 믿고 예수도 믿고 목사도 믿고 특히 신학했다는 사람들 칼빈 믿지 예수 안믿는다 말이죠
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한 마디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교회가 세상과의 구별됨이 없이 똑같이 살더라.. 고린도교회야, 너희들이 진짜 예수 믿는 것이 맞니?.. 자신들의 믿음 없음에 대한 애통은 보이지 않고 도리어 바울의 사도됨에 대한 시비나 걸고 있더라는 겁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12장 부터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강한 어조로 질책을 하는 겁니다. 마지막 한 방(finish blow)... 너희가 복음을 안다고?.. 너희가 예수를 믿는다고?.. 너희가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한다고?.. (이때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기 때문에 그런 은사들이 교회에 나타났단 말이에요) 그런데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만만치 않아요. 바울이 이 편지를 쓴데는 이유가 있다는 말에요. 복음 알면 됐지.. 나도 예언하고 방언하고 하는데 바울 니가 뭔데 우리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냐?.. 그래서 바울이 노한 얼굴로 쓴 편지가 고린도후서예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사도바울이 편지 말미에 적어놓은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립니까? 내가 복음을 안다고 좀 방종하면서 사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까? 강 장로가 서울 모임 대전 모임 사람들 만나서 지금 한 자리 깔고 이야기하는 거 아니야?.. 예수 믿고 착하게 살라는 이야기인가?..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고린도후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삶의 지침서나 교훈집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착하게 살아서 구원에 탈락되지 않게 조심해라.. 교회에 충성하고 헌금 잘 하고 서로 싸우지 말고 목사 말에 순종하고 아름다운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나중에 내가 가서 너희를 혼내지 않을 거야.. 고린도후서 잘못 읽으면 이렇게 읽혀 집니다.
바울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이용해서 세상 교회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고 있잖아요. 그래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런 행위 안하면 예수 잘 믿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흔히 보면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이 화를 낼 줄도 모르고 온화한 표정에 말도 부드럽게 하고 교회 일에 열심 하고 세상 사람들이 봐도 존경할 만한 모범적인 성화된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수 믿으니까 다르긴 다르구나, 참 믿음 좋네.. 세상도 그런 기독교인을 원하잖아요.
대표적으로 김수환 추기경 같은 사람 성철스님 같은 종교인들을 존경합니다. 손양원 목사처럼 자기 아들 죽인 원수를 아들 삼아서 사랑을 실천한 사람. 박사 학위 몇 개를 버리고 아프리카에 가서 원주민들과 함께 산 성자 슈바이처. 또 금식 기간 중에 누가 몰래 음식을 먹다가 들키자 자기도 금식을 깨고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성 프란치스코를 세상이 존경합니다. 또 장발장에 나오는 미리엘 주교 같은 사람을 존경해요. 밤에 찾아온 장발장을 재워줬더니 은식기를 훔쳐서 도망갔는데, 순사가 잡아 왔을 때 금촛대도 가져가라 했는데 왜 은식기만 가지고 갔느냐고... 이런 훌륭한 사람 정도는 되어야 예수를 믿는 게 아닙니까? 이런 사람을 본받아서 우리도 행함이 있는 믿음, 사랑이 있는 믿음을 가지자는 것이 세상 교회가 이야기하는 믿음입니다. 야고보서에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으니까.
강 장로가 드디어 그 말을 하려고 하는구나..복음 아는 것만 안 되고 머리만 커진 사람이 아닌 실천하는 기독인이 되자.. 오랜만에 만나니 다들 정신 상태가 해이해져서 방종하게 될까봐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가보다.. 하고 오해할 수 있는데 그런데 아까 읽은 고린도후서 말씀 다음 장(갈라디아서)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들이 기뻐하는 복음이 따로 있다고 이야기하지요?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을 좋게 하는 복음이지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좋은 복음은 사람이 좋아한다 안한다? 안하는 거에요 그게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조금 전에 예로 들었던 종교인들을 왜 좋아할까요? 이런 사람들은 죽었을 때 장례 행렬이 몇 킬로 이어졌다고 하잖아요.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오해해서 다른 복음, 곧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능성과 가치와 자존심을 챙겨주었기 때문에 좋아하고 존경하는 겁니다. 너희들도 착하게 살면 얼마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어.. 서로 도와주고 희생하고 양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예수 잘 믿는 거야..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을 원하신단다.. 예로 들었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이겁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인간을 위한 예수, 인간 구원을 위한 예수,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인본주의라고 해요. 휴머니즘... 이거 이야기 하면 안 좋아하는 사람 없이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야기하는 복음과 십자가는 다들 싫어합니다. 그래서 신학이란 이름으로 말씀에 손을 대는 거에요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는 복음으로 조작해버렸단 말입니다. 공개된 이단들만 그런 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세상 교회들이 바울이 그렇게 저주한 다른 복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에게 주신 거에요 저주받을 자는 반드시 저주받고 사랑받을 자는 끝까지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기록해 두신 책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개독교라고 욕을 먹는 이유도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입니다. 왜 예수를 믿는다면서 그 사람들처럼 청빈하게 살지 못하느냐는 거예요. 기껏 한다는 게 지하철 같은데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나 떠들고 스님 머리에 안수나 하고 하니까 너희들도 슈바이처처럼 법정처럼 큰그릇으로 살아보라는 겁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그런거니까요. 세상이 아는 예수 믿음은 이런 수준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슈바이처나 프란치스코 같은 사람들 다 존경합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요.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인간다움이란 거지요
그럼 고린도후서 13장이 말하는 믿음 안이라는 말이 무엇일까요? 믿음 안에 있다는 말이 과연 그런 말일까? 사도가 하는 말은 슈바이처처럼, 프란치스코처럼, 김수환추기경처럼 그렇게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슈바이처는 마지막까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정했거든요. 그리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지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니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세상이 먼저 예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안에 있는 너희들도 미워하는 게 당연한거야 그러니까 세상이 그렇게 존경하고 좋아하면 그게 이상한거다 자신을 돌아보고 믿음 안에 있는지 시험해봐야 해
사도는 그래서 너희는 그 믿음 안에 있는가..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세상이 살해해서 추방해버린 그 예수를 믿는 그 믿음 안에 있는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과의 약속에만 끝까지 충성하신 예수 그 믿음 안에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세상의 눈치 안보고 세상의 임금 삼으려는 자들과 함께 하지 않으신 예수 세상 모든 영광을 줄 수 있다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예수를 니들이 아는가를 묻는 거에요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들이 살기 좋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들로 채워진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뜻이며 믿음의 목적지라는 말입니다.(골1:13) 그렇게 세상 종교인들이 아는 믿음과 아들들의 믿음은 방향성부터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 안에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겸손하고 낮아진 모습으로 착하고 청빈하게 살 수는 있습니다. 요즈음 기독교 서점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이 무엇인지 아세요? 도대체 기독교 서점인지 불교 서점인지 알수가 없는데... 나를 비우고 나를 내려놓는 마음공부 열심히해서 자유롭게 살자고... 아니면 복받는 비결 응답받는 기도 이런 것들이 베스트셀러라니까요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할 만한 그런 이야기들. 그래야 잘 팔리니까. 그런 기독교는 없어요 없단 말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시작하자마자 복음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말하길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예수를 만 난 후에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로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분과의 단독적인 만남, 그분과의 사귐의 시간이 없이 복음 안다고 나대는 것은 수상한 거란 말이에요. 요즘 보면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김성수 목사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분 설교 좀 들었다고 책 좀 읽었다고 발음도 안되는 원어 지껄이면서 온갖 사이트란 사이트는 다 돌아다니면서 가르치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 있지요 어떤데는 대놓고 그래요 우린 김성수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고, 그걸 자랑처럼 떠든다니까요... 김 목사님이 직접 목회를 했던 서울서머나 보세요 아직도 동영상 틀어놓고 예배드리잖아요 그게 예밴지 동호회 모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들었으면 예수 믿는 사람이 나와야 할 것 아니냐 말입니다. 성령이 다스리시는 교회라면 성령의 은사로 말씀을 증거하고 나누는 성도들이 나와야 하는데 이제까지 김성수가 전한 복음 제대로 알고 증언하는 인간을 보질 못했어요. 온갖 귀신들이 모여서 정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나 하고 있으니 이게 서머나인지 사단의 회당인지 아예 김성수 욕보이려고 모인 놈들 같애...아니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가 어떤 분인지는 알고 믿어야 할 게 아닙니까? 다들 김성수는 아는데 예수는 몰라, 김성수가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친 그 예수와 십자가는 어디다 치워버리고 이 악당들이...한마디로 김 목사님이 세상 교회 비판해주고 그러니까 그게 좋아서 설교를 즐겨 들은거지 김성수가 전한 복음을 알아들은 게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김성수와 같은 믿음 안에 있지 않으면 영원히 갈라서게 되는 거에요 원수란 말입니다. 아무리 지금은 김성수 최고~그래도 김성수와 다른 곳에서 영원을 보내야 한단 말입니다. 김성수가 전한 그 예수 십자가 모르면....
그러니까 복음은 사람의 교훈이나 가르침으로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훌륭한 스승, 그러니까 초대교회로 말하자면 예수님이 인정하신 열 두 사도라도 그들에게 배워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말년에 로마 감옥에서 그랬잖아요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떠났다고
믿음은 사람에 의해 전수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의 편지에서 아주 대못을 박아놓은 거에요 “오직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어느 누구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믿음은 주가 되신 분과 나와의 단독적인 관계에요. 그 관계에는 어느 누구도 중간에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과의 사귐이 구원이고 사귐의 내용이 믿음입니다.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주가 되신 분과의 관계의 종교예요. 어떤 사람 때문에 한 동안 깨달음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성경을 깨달아서 진리가 되고 말씀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깨달음의 종교는 불교지 기독교가 아니에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주가 되신 한 분, 하나님과의 약속을 성취하신 그 예수와의 관계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해요. 다른 말로 용서 사랑 은혜 소망 생명 하나님 나라 성경의 어떤 단어도 그 관계의 언어란 말입니다. 한분 예수에요 그분이 믿음이에요. 사람의 이름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지 목사 이름이 아닙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가 너희들이 열심히 배우고 깨닫고 사람을 좇아가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고 시작을 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3장 다음이 갈라디아서인데 고린도후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하는 이야기가 달라서는 안 되잖아요.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잘못하면 루터처럼 성경에서 야고보서를 빼자고 하는 말이 나오게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같은 이야기예요.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는 하나의 창으로만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창,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와 십자가라는 창입니다. 성경은 어디를 읽어도 예수와 십자가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렇게 읽을 눈이 인간에게 없다는 게 문제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니들 그 눈 빼야 지옥 안 간다고 하신 거에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만 성경의 세계는 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 해체되고 새 피조물로 지어지는 과정이 믿음 안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실제화입니다. 고후 4장에서 바울이 말한 그 죽음과 삶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내 구원을 위한 경전으로 읽게 되면 성경 전체가 예수는 안 보이고 내가 쟁취해야 할 구원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부터 올바르게 정의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성경은 나를 위한 행위의 책, 나의 자아실현을 위한 책, 내 인생 성공을 위한 교훈집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들이 성경을 모두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 구원, 내 성공, 내 행복 내 교회 내 천국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것을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세상을 죄 아래에 가둔 것이 성경이란 말입니다. 세상 자체를 부정하고 있어요 성경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으로 읽지 못하면 죄 아래에 갇힙니다. 앞서 말한 나의 구원을 위한 책, 나의 성공을 위한 책,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책으로 읽는 것이 내어버려 두심 곧 심판 아래에 가두어진 상태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세상 교회가 복음을 모르고 헛소리를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믿음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니까요
성령 받은 성도가 성경을 읽게 되면, 즉 성경을 올바로 읽게 되면 가장 먼저 자신의 구원 불가능을 알게 됩니다. 믿음이 주어지면 나의 믿음 없음부터 드러난단 말에요 이사야 말로 하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인 거죠. 이것이 바로 성경을 통해서, 또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자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리면 믿음은 예수 안이에요 믿음은 곧 예수란 말입니다. 갈2:20처럼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책이 아니에요. 그럼 누구에게 주신 책입니까? 창세전부터 하나님께 아신바 된 사람들, 즉 피로사신 교회에게 주신 책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경은 아무나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며 아주 위헌한 책이에요 예수도 아무나 믿을 수 있는 예수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 교회들이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 뭔가 하면 건드리지 말아야 할 말씀을 건드린 것, 불러서는 안 되는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새벽부터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면 주여 삼창부터 하는데, 주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주를 부르고 있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그런데 주의 이름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부르든지 할 게 아닙니까? 내용도 모르면서 불러요. 그게 저주를 부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교회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더럽히는 모임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심판이 거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도록 내어버려 두심이 바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반드시 그렇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어둠의 용도로 있어야 합니다. 제가 처음 시작할 때 고린도 교인들을 보고 바울이 마지막으로 Finish Blow를 날린 게 무어라고 했습니까? 너희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세상과 똑같이 살고 있냐는 것이었죠? 그럼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세상보다 더 착하게 살라는 말은 아니잖아요. 그럼 너희들이 예수를 잘못 믿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건 너희들이 믿는 예수가 내가 전한 예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는 분명히 너희에게 그런 예수를 전한 적이 없는데 너희들은 내가 잠시 떠난 사이에 벌써 다른 예수를 믿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너희는 그 믿음 안에 있는가, 그 예수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합니다. 예수 잘 믿어야 돼.. 그래야 너희들이 구원받는 거야.. 이 뜻이 아니란 말이에요. 믿음 안에 있는 자들에게 보낸 편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에서도 편지 말미에 축복의 말 대신 저주를 전하고 있어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바울은 교회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오직 복음의 진리에 있는 거에요 “내가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못 박히신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하였노라“
믿음 안에 있다는 말은 너희들이 열심히 애쓰고 노력해서 그 믿음 안에 있도록, 그 믿음 밖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들 가운데도 반드시 주님의 열심으로 말씀의 일하심에 따라서 갈라짐이 있을 텐데 그런 일이 있더라도 놀라지 말아라.. 그리고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은 주께서 끝까지 사랑하셔서 진리의 죽음을 살아내게 하실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10분 쉬고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