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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시카고 지하에는 최소한 여섯 개 이상의 비밀 터널이 있는데
누가 왜 만들었으며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 시카고의 지하세계
Underworld In Chicago
날은 어두워지고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일행이 다른 멤버들과 합류했다. 워싱톤 파크의 구석에 쟈니 더 브레인을 중심으로 십여명 가량의 전사들이 모였다. 모두 전투복장으로 중무장을 했다. 매그놀리아도 그들 중 하나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수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그들의 대화 소리는 잘 들렸다.
공격한 놈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적, 무자비한, 폭력적인 애송이들...
그들이 말하는 상대는 바로 불개미파라고 알려진 MD13이라는 갱단이며, 조금 전, 로코 더 럭키맨에게 최신형 기관총을 선물하고 얻어낸 정보는 그들이 숨어 있는 본거지의 정확한 위치였다.
이제 공격만 남았는데 섣불리 공격하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쟈니의 의견과 지금 당장 박살내야 한다는 다수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감히 발렌타인SVDM에 도전하다니? 그냥 둘 수 없다. 아지트를 공격해서 완전히 짓밟아야 한다는 의견에 목소리가 고조되어가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가 우리 중에 스파이가 있다는 말을 했다. 글렌개리였다. 그는 나를 가리켰고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쏟아졌다.
“우리들 중에 처음 보는 얼굴은 바로 저 트럭 운전사야. 저놈이 왜 여기까지 따라왔겠어. 저 놈이 스니쳐Snitcher임이 확실해.”
“글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저 운전사는 오늘 화물을 가지고 온 사람인데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알았겠어?”
나는 어이가 없어서 변명할 말을 잃었다. 우연히 끼어들어 이런 일을 겪을 줄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거니와 내가 적의 스파이라는 것은 더 억울했다. 하지만 섣불리 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도리어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매그 말이 일리가 있어. 하지만 사람 속은 알 수 없지. 당분간 트럭 운전사는 우리와 함께 간다.”
쟈니 더 브레인이 상황을 결론지었다.
“모두 잘 들어, 웨스트 해리슨 스트리트에 있는 쿡 병원의 뒷문으로 21시 30분까지 집결한다. 전사들은 완전무장하라고 모두에게 전해라. 만일을 대비해서 이무지치에게 지원 요청을 했다. 그들은 약 한 시간 내 도착할 것이다. 이상!”
각자 자기 차량으로 돌아갔다.
“샘, 글렌, 매기! 울프와 함께 움직여!”
“안 돼! 나는 저 스니처랑 함께 가지 않을 거야! 개죽음당하기는 싫어.”
글렌개리가 나를 보며 자기의 두 눈을 가리켰다. 지켜볼 테니 허튼짓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이 상황을 빠져 나가야 하는데 일이 점점 꼬여간다. 아무래도 이러다가 오늘 총에 맞을 것 같은 불안함이 엄습했다. 매그놀리아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가 포함되었지만, 할 수 만 있다면 돈을 지불하고라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래도 기회를 봐야 할 것이다. 샘이 운전하다가 물었다.
“왜 하필 쿡 병원이 그들의 아지트지?”
매그놀리아도 궁금하다는 듯 동의했다.
“병원이라니 이상하지? 의사들인가?”
“의사가 아니라 모두 총 맞고 입원한 거겠지.”
샘의 조크에 모두가 웃었고 글렌개리가 평소와 다르게 정색한 말투로 대답했다.
“왜 몰랐어? 쿡 병원은 100년 전에 지은 9층짜리 건물로 오래되고 낡아서 1년 전에 폐쇄했지. 지금은 방치되어 폐건물이 되어 아무도 없어. 약쟁이들이나 노숙자들이 가끔 들어가 약 빨거나 숨어 지내는 곳이야. 빌딩이 워낙 커서 들어가면 미로 같아서 갱단이 임시로 아지트 삼기엔 최적인 셈이지.”
“글렌개리,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잘 알아?”
“어렸을 때 근방 주유소에서 일한 적이 있지.”
“흠 글렌개리 답지 않은데……. 비겁쟁이에 건달인 주제에 일을 하였다니…….”
셈이 그의 심기를 긁었지만 글렌개리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창밖만을 바라보았다. 의도적으로 대답을 피했다. 멀리서 봐도 쿡 병원은 금방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불빛이 하나도 없이 검은 그림자의 어마어마한 빌딩이 시카고의 밤하늘 아래 음산하게 서 있었다. 폐쇄되고 버려진 쿡 병원 빌딩. 곧 닥쳐올 총격전의 전쟁터 War Zone의 기운이 고요함을 깨트릴 것이다.
COOK HOSPITAL 쿡 병원
시카고의 밤하늘은 검푸른 빛이 난다. 고층빌딩이 많은 도심의 스카이라인에서 쏟아내는 불빛에 검은 미시간 호수의 표면에 반사된 달빛이 어우러져 극명한 대비를 이루기 때문이다.
불빛 하나 없는 병원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검푸른 빛은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1년의 넘도록 폐쇄된 병원은 주변의 상가들에 심한 여파를 끼쳤다. 대부분 가게를 문 닫게 하고 사람의 통행마저 한산한 거리로 변하게 했다. 따라서 거리는 텅 비었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쥐들의 움직임만이 유일한 생명체였다. 더구나 오늘같이 야심한 밤에는 유령의 도시처럼 음흉한 기운이 스며들어 머리칼을 곤두서게 하였다.
샘은 병원이 보이는 웨스트 해리슨 스트리트 동쪽 코너를 지난다음 으슥한 뒷골목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주차했다. 한 블록 거리에는 병원의 검은 그림자가 음산하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쟈니의 발렌타인 전사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들은 SVDM 마크가 새겨진 조끼를 입었고 무장했다. 그리고 또 한 무리의 용사들도 도착했다. 용사들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동여 맨 로코 더 럭키맨 루치아노의 갱 멤버들이었다. 닥터 JK는 전체 장면을 잡은 다음 각 전사 한명씩 촬영했다. 전사들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거나 손에 든 자동권총을 겨누며 멋있는 제스쳐를 과시했다.
“울프, 너도 가는 거냐?”
글렌개리가 실눈을 치뜨며 물었다.
“헬! 노!”
나는 펄쩍 뛰듯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지금 내 심장은 팔딱팔딱 잘 뛰고 있어. 그러니까 병원 갈 필요 없어. 그리고 아직 정기검진 할 때도 아냐.”
글렌개리가 입술을 한쪽으로 올리며 비웃었다. 내가 겁먹은 표정으로 정색하고 말했다.
“나는 총 쏠 줄도 모르고, 따라가 봐야 방해만 될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불을 보듯 뻔 한 데 진심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 이 거리를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자살행위지.”
이 말은 마치 도망가지 말라는 의미 같았다.
“혹시 필요하면 의자 밑엘 봐!”
매그놀리아가 말했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만,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 20여 명쯤 되는 무리는 도로 양옆으로 2 열로 나누어 병원을 향해 전진했다.
나홀로 남아 바라보는 적막한 거리는 완전한 어둠보다도 더 괴기스러웠다. 비릿한 바람이 불어와 거리에 널브러진 비닐 조각을 날리고 빈 깡통이 굴러가는 소리가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시카고는 바람의 도시라고 했다. 오늘 밤에는 단순한 바람이 아닌 피바람이 휘몰아칠 것이다. 건너편에 삐걱삐걱 소리가 나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사람이 가로등 그림자 속에 나타났다. 카트를 밀고 다니며 쓰레기통마다 뒤지더니 뭔가를 집어 카트에 담고 다시 삐걱거리며 길을 건넜다. 알루미늄 깡통을 찾아다니는 노숙자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다시 적막한 고요가 흐를 때 돌연 불빛이 나타났다. 불빛들은 아주 천천히 소리 없이 다가왔다. 나는 의자 사이로 몸을 숨기고 눈만 빠끔히 내놓고 거리를 살폈다. 한두 대가 아니었다. 일곱 여덟……. 대의 차량이 천천히 쿡 병원 쪽으로 접근했다. 쟈니와 로코의 멤버들이 사라진 그 길에서 멈추었다. 샘이 이 어두운 골목에 주차한 것은 나에게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곧이어 라이트가 꺼지고 수십 명의 검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쿡 병원을 향하여 신속하게 움직였다.
쟈니와 매그놀리아가 위험하다는 직감을 했다. 다시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이를 어째야 하나? 쟈니와 매그놀리아는 이 사실을 모르고 지금쯤 병원 안으로 들어갔을 텐데, 이걸 경고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미치자,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배낭을 들고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열어 밖으로 나왔다.
골목을 빠져나온 뒷길로 다음 사거리까지 온 다음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못하고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헉헉거리며 정신없이 달렸다. 운전만 했을 뿐 전혀 운동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순간이었다.
병원의 뒷문에 도착했을 때 총소리가 들렸다. 이미 총격전은 한창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칠흑 같은 어둠이 덮쳐왔다. 즉시 배낭에서 헤드 랜턴을 꺼내 들고 주위를 살폈다. 쓰레기가 어지럽게 널린 지저분한 바닥, 낙서가 가득 그려진 벽, 천장에서 길게 창차처럼 쏟아져 내린 전선줄은 어둠 속에서 기괴하게 보였다. 나는 계단을 찾아 한 걸음씩 움직였다. 총소리가 끊겼다가 다시 들렸다. 소리로 보아 반대편 건물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 같았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에서 뛰어가는 발소리가 났다. 얼른 눈에 보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는 부서진 침대와 깨진 유리 조각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깨진 창문 사이로 어스름한 시카고 하늘의 구름이 보였다. 헤드랜턴을 끄고 벽에 기대고 몸을 숙였다. 서너 명의 뭉쳐서 복도를 달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쿵 문 닫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문을 열고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이번에 복도 끝에서 불빛이 어른거렸다.
점점 다가왔다. 그들은 양쪽의 문들을 열고 수색하며 오는 중이었다. 쟈니 일행이기를 속을 빌었다. 힐끗 본 불빛 속에서 눈에 익은 조끼가 보였다.
“쟈니! 매기!”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쳐 불렀다. 목소리가 크게 나오지 못했다. 동시에 불빛이 모두 나에게 쏟아졌다.
“누구냐?”
“나야! 울프.”
“얼굴을 보여 봐!”
고개를 문밖으로 내밀었다.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렸다. 플래시 라이트 하나가 성큼 다가왔다. 매그놀리아의 화난 얼굴이 비쳤다.
“왜, 여기에 온 거야?”
내가 본 검은 그림자들 이야기를 해 주자 쟈니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복도 끝으로 가서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돌아온 쟈니는 모두에게 지시했다.
“오늘 작전 중지한다. 당장 철수한다. 발렌타인 전사 모두에게 전해라!”
누군가가 반대했다.
“여기서 물러날 수 없어. 지금이 이놈들을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야! 아래층에서 봤잖아! 지금 우리가 우세해. 총 몇 방에 조무래기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갔잖아. 지금 바로 쫓아 올라가서 벌집으로 만들어 주자.”
“그래 까짓 남부 파든, 서부 파든, 불개미 놈들이라도 상관없어. 짓밟아버리자고, 깡그리 쓸어버리자.”
이때 빅 존이 적의 용사 한 명의 목덜미를 잡아 쥔 채 질질 끌며 나타났다.
“이 녀석이 수술실에 숨어 있기에 잡아 왔어.”
거칠게 발악을 하는 놈을 냅다 바닥에 팽개쳤다. 한 바퀴 굴러 떨어진 놈이 다시 벌떡 일어섰다. 제법 깡다구가 세 보였다.
“이놈, 털도 안 난 애송이잖아!”
불빛에 아직 소년티가 벗지 않은 어린애의 얼굴이 드러났다. 놈의 눈에 악의가 가득 넘쳤다. 글렌개리가 소년의 팔목을 잡아당기니 ‘6’자 문신이 드러났다.
“너 몇 살이냐?”
샘이 물었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녀석 머리통에 뭐가 들었는지 뚜껑을 열어봐야겠다.”
글렌개리가 잡고 있던 소년의 팔을 세게 비틀어 잡고 복도 한편에 방으로 밀고 들어갔다. 빅 존이 따라 들어갔다. 잠시 후, 글렌개리와 빅존이 돌아왔다.
“놈은? 죽여 버린 거야?”
“아니, 글렌이 놓아주었어.” 빅 존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글렌, 미쳤어? 이제 그놈이 우리에 대한 정보를 모두 보고할 텐데.”
“그럼, 어린애를 죽일 거야?”
“죽이지 않아도 다시는 손에 총을 들지 못하도록 팔목이라도 부러뜨려야지.”
“대신 그놈으로부터 저쪽에 대한 정보를 얻어냈어. 우리가 아래층에서 물리친 놈들 얼굴들 봤어? 모두 애들이었어. 기껏해야 열다섯 여섯……. 그 애들은 우리를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어.”
쟈니가 그들 사이에 섰다.
“이건 함정이다. 로코의 정보도 꼬마의 말과 같다. 지금 위층에는 사오십 명이 우릴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울프가 본 게 사실이면 길거리에 삼사십 명 모두 백 명에 가까운 숫자야. 우리 스무 명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아. 우리가 기관총을 몇 자루 더 갖고 있어도 위험해. 철수한다!”
“로코 부하들은 지금 어디에 있어?”
“벌써 빌딩을 빠져나갔어.”
“의리 없는 양아치들 같으니라고……. 비겁하게 자기들만 도망치다니.”
“휘익!”
계단을 감시하던 발렌타인 전사가 휘파람을 불었다.
“놈들이 온다!”
동시에 총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빗발치듯 쏟아지는 총탄은 상대가 수십 명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즉시 2열로 복도를 따라 반대편 계단으로 내려간다. 모두 뛰어!”
다급한 쟈니의 외침에 우르르 달려가기 시작했다. 1층 로비까지 정신없이 내려온 그들에게 또 다른 총탄 세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1층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기다리는 적들이 총알을 퍼부었다. 위아래에서 협공을 당해 1층 계단에 꼼짝없이 갇힌 쟈니와 전사들은 각자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피하느라고 허둥댔다.
“쟈니! 어떻게 좀 해봐! 우리 모두 전멸당하겠어!”
쟈니와 발렌타인 전사들은 산발적으로 반격을 할 뿐,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때 정문에서 요란한 기관총 소리가 나며 4개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사정없이 불을 뿜어내는 강력한 화력 앞에 로비에 갱들은 맥을 못 추었다. 검은 연미복 정장에 레이스가 달린 하얀 셔츠를 입고 이리저리 날렵하게 움직였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제비 꼬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이무지치!”
쟈니가 소리쳤다. 이무지치가 쟈니를 발견하고 우아한 미소로 엄지를 들어 보였다.
“모두 이곳을 빠져나가 링컨으로 집결한다!”
로비의 갱들이 이무지치의 공격으로 주춤한 사이에 쟈니와 전사들은 쿡 병원 뒷문으로 탈출했다. 나는 머리를 숙인 채 매그놀리아의 뒤를 따랐다. 뒤에서 산발적인 총탄이 날아왔다. 이제는 거리에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뒤에서 총성이 울리고 나는 몇 발자국 뛰기도 전에 등을 파고드는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순간적으로 죽음이라는 단어가 스쳤다. 등에서 뜨거운 불에 덴 것처럼 지독한 아픔이 온몸 구석구석 신경을 타고 찔러왔다. 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좁은 골목 바닥에 엎어졌다. 어느새 쟈니도 보이지 않고 다른 전사들도 흩어졌다. 이무지치의 기관총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집요하게 쫓아 오는 수십 명의 갱들이 있을 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불렀다. 매기와 글렌개리였다. 팔을 잡고 일으키는 매기를 따라 비틀거리며 걸었다. 셋은 함께 골목길을 정신없이 달렸다.
“조금만 더 가면 돼!”
글렌개리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어두운 골목길 사이로 달려갔다. 골목길이 끝나고 도착한 곳은 길이 없는 막다른 곳이었다. 전면에는 시커먼 강물이 가로막혀있고 건널 다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거야? 더 도망갈 곳이 없는데…….”
매그놀리아의 절망적인 목소리에도 글렌은 개의치 않고 서둘렀다.
“그냥 따라와!”
그는 콘크리트 강변을 따라가다가 튀어 나온 철 기둥을 잡고 서슴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3, 4미터쯤 되는 수직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철 손잡이가 벽에 박혀 있었다. 아래로 내려간 그의 모습이 돌연 시야에서 사라졌다. 물에 빠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그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강물을 내려 보고 있는데 벽에서 손이 불쑥 나와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철 손잡이를 잡고 내려가서 보니 커다란 하수구 구멍이 옆에 있었다. 허리를 숙여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하수구였다. 다행인 것은 그나마 하수구에는 물이 많이 흐르지 않았고 갱단들의 추격을 피해 일단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와 매그놀리아는 손으로 코를 막고 있는데 글렌은 허리를 구부린 채 손전등을 켜고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원형의 어둠 속으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잠시 후 그의 모습이 나타나 손전등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냄새가 시큼하고 쥐들이 다니는 이 하수구로 들어간다는 것은 전혀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다른 길은 없었다. 나는 헤드랜턴을 켰다. 주변이 밝아지자 두려움도 어느 정도 가셨다.
“흠 터널에 올 줄 알고 미리 준비했군.”
글렌개리가 다시 내 신경을 건드렸다. 대꾸하기 싫어 잠자코 걸었다 글렌이 앞장서고 메기 그리고 내가 그 뒤를 따라 한참을 들어갔다. 허리를 구부리고 걷는 매그놀리아의 엉덩이가 바로 코앞에 보였다. 좀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다.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총 맞은 등에 아픔도 감각을 잃었는지 참을 만했다. 터널이 삼거리에 이르자 그는 거침없이 오른쪽으로 돌았다. 이제는 하수구가 제법 커서 허리를 펴도 충분했다. 다시 한참을 가면서 글렌개리는 벽을 유심히 살피더니 철문을 찾아냈다.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그곳은 별천지였다. 지하 하수구에 이렇게 큰 석실 같은 곳이 있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더러운 하수구가 아니었다. 오래전에 벽을 돌로 촘촘히 쌓아 만든 비밀스러운 밀실 같았다.
“어떻게 이런 곳이 있지?”
매그놀리아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3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시카고 지하에는 최소한 여섯 개 이상의 비밀 터널이 있는데 누가 왜 만들었으며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글렌개리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 순간만큼은 빈정거리는 모습과는 달라보였다.
"내가 아는 것은 워터타워와 하수구가 서로 연결되어있고 상업적 목적으로 물건을 이동할 수 있게 만든 터널이 있었고 100년 전에 마약과 밀주를 운반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는 사실 정도뿐이야.”
글렌은 말을 마치자마자 뒤돌아 서서 나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누구를 위해 일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움찔거리며 내가 뒤로 물러섰다. 매그놀리아가 총을 뽑아 그의 머리를 향했다.
“글렌! 뭐하는 짓이야 총 거둬!”
글렌개리는 매그놀리아의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고 여전히 나를 노려보았다.
“자, 울프! 너의 정체를 밝혀라.”
그의 질문에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의심을 하는 것은 그의 자유지만, 전혀 아무 관계없이 이 총격전에 얽혀 든 것도 분하고 억울한데 그는 자꾸 나를 몰아세우고 있다. 이 답답함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글렌! 그는 트럭 드라이버야!”
“그렇지, 그냥 트럭 드라이버지. 그런데 우연히 오늘같이 가장 큰 전투가 있는 날, 늦게 도착해서 자연스럽게 우리와 합류했어. 쿡 병원에서는 놈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미리 알았고. 지금도 봐. 헤드랜턴을 배낭에 준비해 갖고 다니는 트럭운전사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시카고에 처음 온다는 것은 말짱 거짓말이야! 분명 버그를 감추고 있을 거야. 누군가가 우리들의 이 대화를 엿듣고 녹음하고 있을지도 몰라. GPS 위치 추적기라도 있겠지.”
“글렌개리, 사람을 잘못 봤어! 그건 오해야.”
“매그놀리아! 사태를 똑바로 봐! 울프는 너를 이용하는 거야!”
“아냐!”
“뭔가 있어 경찰의 끄나풀이든지 아니면 페데랄 소속인지도 몰라. 아니면 쟈니 더 브레인을 노리는 놈들과 한패일 수도 있어. 나중에 후회하지 마!”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니니까 곧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지금 부정을 하면 의심만 더 커질 것이다.
“울프, 여기서 나가면 즉시 떠나는 것이 오래 사는 길이야”
글렌개리는 충고 같은 경고를 날리며 총을 거두어 조끼 속에 넣었다.
“그렇게 할 테니 걱정 마. 내가 원하는 바다. 아무튼 나는 이런 무자비한 총격전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나는 항변하듯 대답했다. 빨리 트럭으로 돌아가서 시카고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어디로 가든 두 번 다시 시카고에 오지 않겠다. 나는 총이 무섭다.
워터 타워 빌딩은 시카고 시내 한복판에 있는 빌딩으로 오래전에 지은 석조건물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역사적인 건물로 보존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늦은 밤, 아무도 없어야 할 워터 타워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세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들은 재빠르게 큰길을 건너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울프, 다시는 나와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
글렌개리가 말을 남기고 먼저 가로등 불 빛사이로 가버리고 매그놀리아와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따라와! 일단 상처부터 봐야 하니까.”
그녀가 앞장섰다. 나는 힘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시카고의 밤, 이제 총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내 머릿속에는 죽음의 공포가 뇌세포 하나하나에 박혀 있다. 치열한 전쟁터 같은 갱들의 총격전에 얽혀들다니, 오늘 밤 나는 살아서 시카고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메그와 둘만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런데 어디를 가는 걸까?’
3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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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카고 하면 오바마가 졸업한 명문 시카고 대학이 떠오르는데....
왠지 으스스 하니 납량특집 같네 ㅎ
시카고 폭동 뉴스를 보며.....
"역시 시카고스럽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