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유는 이런 생각을 했다. 결혼을 하면 남자들은 다 가정에 충실하고 아이가 있으면
아빠로서 부모의 의무를 다할 거라고. 그리고 그렇게 믿었다. 적어도 돈 문제로 인해
자식을 내팽개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모든 아버지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가유는 남편에게 실망을 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시어머니가 가유가 해 온 혼수에 불만을 품고 시아버지에게 해야 할
베갯머리송사를 결혼을 해 한 가정의 남편이고 아버지가 된 자신의
아들에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유와 했던 말과 본가에 다녀왔을 때의 말이
달랐던 것이다. 가유와 시어머니가 했던 말을 저울질하다가 자신의 핏줄인
부모의 말을 따르는 게 손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계산을 한 것이다.
시어머니 마음에 들지 않는 호적에서 지우면 남이 되면 여자에게 생활비를
주는 것 보다는 자신의 부모에게 주는 것이 남는 것이라 생각했고 가유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핏줄인 아이가 성장하면서 필요한 비용에 대해서는 그저 어머니의 말만
잘 들으면 되겠지 하면서 신경쓰지 않았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부담스럽다고 아들로서 속 편하게 지내는 쪽을
택한 것이니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능한 사람인지, 가유는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는 남편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해가 거듭해 지나면서
가장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가유의 몫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더 이상 남편에게 기댈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날이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유는 월급에서 자신의 아들을 위해 적금을 들었고
생활비를 제대로 주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 자신의 월급이 주 수입이 되면서
같이 벌었어도 생활하기에 빠듯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시부모님에게 드릴 용돈이
없게 되었고 그래도 맞벌이를 하니까 돈 좀 생기겠지 하면서 용돈을 기대했던
시어머님은 기대가 무너지자 그 분풀이를 엉뚱한 방향으로 풀었다. 가유가 직장 동료하고
살림을 차려서 돈이 없고 그래서 시부모에게 용돈을 주지 않는 거라며 안그래도
의처증이 있는 남편의 심중에 불을 당겼다. 마치 기정 사실인 것처럼 만나는
친척들에게 말을 쏟아냈다.
시아버지에게 품었던 불만을 이제 가유 자신에게 돌리면서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은 아예 그것을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시어머니와 남편이 돌아가면서
가유의 친정 부모에게까지 온갖 말로 마음을 괴롭게 했다.
그 이후로 남편은 출근할 때 밥상도 받지 않고 상을 차려 거실로 내가는 순간
곧바로 약을 올리듯이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 모습은 가유가 차리는 밥상은
먹지 않겠다는 무언의 위협이었다. 일찍 나가는 날은 본가에 들려 시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먹고 나가는 날이었다. 그 순간부터 남편은 더 이상 남편도 아버지도
아니었다. 그저 한 집에서 생활하는 동거인에 불과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사용하는 방에 가유가 드나드는 것을 알게 되자 문을 잠그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가유는 그래도 남편 노릇은 하지 않더라도 아버지 역할은 하겠지 기대했다.
부모로서의 책임감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거라고. 적어도 본능은 그럴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