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물건이든 곁에 두고 쓰다보면 세월의 이끼가 묻어난다. 값이 나가지 않더라도,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피가 통한다는 느낌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것이 손끝에서 빠져나가면 온몸의 기운이 덩달아 쓸려 나가는 기분에 빠질 때도 있다. 옛 사람들은 이런 물건을 영물靈物이나 신물神物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더없이 편리하여도 마뜩하지 않을 때면 손때와 땀내가 배인 물건이 더욱 그리워진다.
물욕은 참으로 요상한 거이다. 거창하지도 않은 것에 집착을 갖는 경우가 매우 많다. 별난 사람일수록 물건을 아끼는 마음이 외골수가 되기도 한다. 평생 동안 사용해오던 붓이나 낡은 벼루를 후학에게 물려주거나 헤진 장삼을 수행승에게 물려 줄 때면 숨은 연유가 있기 마련이다. 분신삼기가 그것이다. 시어머니가 구박을 일삼던 며느리에게 반질거리는 장롱을 물려주는 마음 씀씀이도 따지고 보면 은근한 기대감이 있어서다.
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가 한다.
생각이 구식인 까닭인지 사소한 물건일수록 남달리 꼼꼼하게 챙기는 편이다. 연구실에서 사용하는 문방구류는 녹이 낀 양철통에 꽂아 두어야 성이 찬다. 수년 전에 구입한 테이프 재생기는 여전히 묵직한 체구를 보란 듯이 지켜내고 책장 선반 위에는 묵은 액자며 박스 등이 먼지를 마다하지 않고 오랜 절개를 지켜내고 있다. 하다못해 자동차 열쇠와 수첩은 직접 만든 10년생 앉은뱅이 탁자 위에 얹어두어야 마음이 푸근해진다. 친구들이 고물 전시장이라고 빈정거려도 손때 묻은 골동품을 거느리고 사는 재미를 흔들지 못한다.
이러한 온고지정에도 불구하고 매번 새 것으로 바뀌는 것이 하나 있다. 볼펜이다. 새것을 좋아하는 취향보다는 어쩔 수 없는 건망증 때문이다. 그것이 슈퍼 모델처럼 늘씬한 몸매를 뽐내면서 엄지와 검지 사이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으면 마치 미희를 곁에 둔 기분에 빠진다. 주인을 섬기는 요량도 과묵하기 이를 데 없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뾰족한 입으로 수다를 떨지만 한 번도 내 비밀을 흘린 적이 없다. 언젠가 한 권의 수필집을 우편으로 보내면서 끼워 붙인 짧은 사연을 적을 때도 측은하게 제 주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멈칫거리는 글의 실타래를 잡지 못해 시멘트 바닥에 던져 버려도 불평 한 마디 없이 내 광증을 지켜보기만 한다.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기꺼이 참아가는 유일한 말벗이고 단짝이 이것이다.
그런데 그 정성에 비하면 내가 기울이는 관심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몇 번이고 동족을 잃어버리기가 예사다. 강의실 탁자위에 두고 왔는지, 학교 사무실에 남겨 두었는지, 은행에 들렀을 때 내버려 두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엉겹결에 쓰레기통으로 쓸려가 버렸는지 알 길이 없다. 마지막 이별의 장소를 기억하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심지어 볼펜을 자꾸 잃어버리다 보면 안하던 짓을 하게 된다. 남의 것을 슬며시 주머니에 넣어오기도 하고, 그것마저 잃어버리면 재범을 저지르는 궁색한 처지에 빠지기도 한다. 헌데 그마저 놓쳐 버린다. 잠시나마 본전치기를 했다고 위로로 삼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건망증을 핑계로 변절을 가리는 행동일 뿐이다.
한 주 전에 볼펜을 다시 샀다. 학교 소비조합에서 다스 채로 구입한 볼펜이다. 그 중에 첫 번째 볼펜이 알맞게 닳아서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온돌방 같다. 이번만큼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잉크가 닳을 때까지 지니리라 다짐했다. 책상에서 일어날 때마다 왼쪽 가슴 부근을 한번씩 쳐보고 그래도 못미더워 두어 차례 만져 본 다음에 자리를 뜨기로 작정하였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운우의 정을 나눈 연인이나 10만원권 수표 한 장처럼 여기면 잃어버릴 확률이 줄어들 거라고 다짐을 했다. 또 그럴 것만 같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어떤 이유로 스쳐간 여러 사람들을 떠올린다. 돌이켜 보면 그들이 부족해서 내가 잊은 경우보다 내가 못난 탓에 그들이 떠난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시간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었을 때 예사롭게 받기만 했고, 그들이 속마음을 풀어내어도 나는 시계만 힐끔거리는 못난 짓을 하곤 했다. 학교 친구, 옛 직장 동료, 모임에서 만난 인생의 선배와 후배, 그리고 글을 통해 삶의 이야기를 나누던 분들……. 회자정리會者定離라지만 한 명 두 명씩 기억의 주름에서 잊혀져 버렸다.
잃어버린 볼펜은 되찾을 수 없다. 떠나 버린 사람들 중에는 영원히 만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자꾸만 생겨난다. 그리고 보면 만나고 떠나는 것이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작아서 더 아쉬운지, 볼펜을 잃어버린 빈 주머니가 더욱 헐렁해진 느낌이 든다. 어디 주머니가 그럴까. 마음이 허전하니 주머니가 헐렁한 것을.
그러니 허락만 된다면 지금 인연을 맺은 분들과의 교분이 오래 가면 좋겠다. 덤으로 안주머니에 꽂힌 볼펜도 이번만큼은 오래 머물러 있으면 더 없이 좋겠다.
(박양근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