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에게 있어서 믿음은 어떻게 탄생할까?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일까?
또 믿음은 어떻게 성장할까?
이것에 대해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생각게도 하고 답도 주는 것 같습니다.
예외적인 사람 외에 믿음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생겨나고 성장하는데 바오로 사도와
오늘 축일을 지내는 두 성인의 관계가 바로 이런 관계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지난 설날 저희는 가족이 없거나 갈 곳이 없는 분들과 보냈는데
그중에는 탈북자들이 여럿 있었지요.
올해는 거의 모든 탈북자가 비신자여서 제상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며
강론 중에 북에서는 제사 때 조상들께 어떻게 제사를 지내는지 물었는데
북에서는 김일성만 믿을 뿐 조상도 신도 믿지 않는다고 하는 거였습니다.
그것은 사실로서 제가 북에 갔을 때도 여기저기 김일성을 신격화한 구호들,
예를 들어 “우리의 위대한 수령님은 영원히 살아계신다.”라는,
오직 신에게만 쓸 수 있는 구호가 돌에 새겨져 있곤 했지요.
제 생각에 사람은 다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지요.
무엇을 믿든 어떻게 믿든 믿고,
자기를 믿든 다른 사람을 믿든 믿고,
다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믿든 도둑놈으로 믿든 믿고,
하느님이 없다고 믿든 계신다고 믿든 다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있다고 믿지 않고 없다고 믿는 사람은 왜 그렇습니까?
스스로 믿음을 시작할 수 없으면 믿게 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다시 말해서 앞서 얘기한 탈북자처럼 신에 대해 한 번도 얘기들은 바 없는
사람에게는 믿음의 선배, 믿음의 전달자가 있어야 하는데,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탄생에는 믿음의 엄마, 믿음의 선각자, 믿음의 선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시고, 계시의 주님께서 탄생케 해주시는 거지만,
사도 바오로처럼 자기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 줄 알고 신나게 가다가 엎어지고,
눈이 먼 사람 그러나 그때 하늘에서 울리는 소리를 먼저 들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의 엄마, 믿음의 선각자, 믿음의 선배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말로 가르치기 전에 존재와 삶으로 가리킵니다.
가정에서는 엄마 아버지가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하느님을 가리키고,
교회에서는 성인 성녀들이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하느님을 가리키고,
세상에서는 믿는 이들 특히 수도자 성직자들이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하느님을 가리켜야 합니다.
그런 다음 이제 말로서 하느님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교리 교육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신앙 간증의 형태가 될 수도 있지만
행복한 사람의 힘이 있는 가르침 곧
바오로 사도처럼 확신에 찬 가르침이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이,
이제는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디모테오가 자기의 아들이라고 함은 믿음의 아들이라는 뜻이겠지만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먼저 디모테오에게 믿음을 심어줬고,
그 믿음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심어진 믿음을 성장케 한 것이 바로 자기라는 듯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확신에 차서 얘기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바오로 사도와 디모테오와 티토는 이런 면에서 참 부러운 관계입니다.
그래서 어제 바오로의 회심 축일에 이어 오늘 두 성인의 축일을 지내는 걸텐데
우리 안에서도 이런 관계가 형성되면 참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보는 오늘입니다.
첫댓글 주님 이 고운 손길에 축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