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에 나간 자리
아내가 소예배실에 캐모마일을 뒀다.
엷은 국화 향속에서 은은한 사과 향 나는 허브 차였다.
향긋한 아침을 입고 우려 마시려는 순간 카톡이 울렸다.
‘할아버지, 범진이 오늘 공연하는데 청소년 수련관으로 1시까지 오실래요? 할머니도요.’
‘헐~ 무슨 공연! 왜? 이제 연락 한 겨.. 챙겨 갈게 기다려..’
‘피아노 공연이요’ ‘그래 알았다.’
주말에 생각이 앞서 눈부신 햇살 아래 화원을 찾았다.
푹푹 찌는 감자 솥 더위라 생화 구하기 어려웠다.
세 번째 꽃집 냉장고에서 찾았다.
주인이 사용처를 물었다.
격에 맞춰 예쁘고 시들지 않게 만들어 줬다.
자전거 페달을 신나게 밟았다.
쏠티뮤직 스튜디오 하우스 콘서트였다.
썰렁한 공연장에 냉기가 돌았다.
방학 중이라 어렵게 마련한 연주회였다.
순서지에 손자 이름과 곡명만 또렷이 보였다.
손자 피아노 연주!(엘 자파테아도 El zapateado)
제일 크고 경쾌하게 들렸다.
우리 부부를 바보로 만들어 큰 박수를 보냈다.
꽃다발 준비한 학부형이 없어 멋쩍게 축하하며 건넸다.
공연장 나서며 스프링을 발굽에 심었다.
자랑할 곳 찾아 달리고 싶지만 자부에게 보낸 사진이 전부였다.
‘범진이 피아노 콘서트 너무 멋지네요~’
어스름한 시간 부음(訃音) 카톡이 떴다.
임 집사님 빙모 상이었다.
개척 초기 인도해 세운 집사였다.
오래전 교회를 옮겨 갔지만 형제로 지냈다.
늘 안부 묻고 경조사를 챙겨 마음은 하나였다.
당시 백혈병 앓은 강명자 자매 위해 깨끗한 혈소판을 내놓았다.
병무청 옆에서 해물 탕으로 몸보신한 일은 추억이었다.
자매 부친 초청에 낙안읍성 과수원 나들이도 즐겼다.
성탄 이브 날 전대병원 복도에서 새벽 송을 불렀다.
소방서, 파출소.. 물불 가리지 않고 함께 다녔다.
필리핀 선교사님 다녀간 후 선교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여섯이 어우러져 본인 부담으로 안티폴로 현장을 방문하고 왔다.
그 뿌리가 오만에 선교사 파송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때 다단계 회사 자매와 교제한 사실을 알았다.
처제에게 부탁한 중매 성사로 중앙장로교회 찬양대원과 가정을 이뤘다.
북성 중 건너편 골목 상하 방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큰 딸 낳아 나산 크레프로 생필품 사러 다닌 일 어제 같았다.
졸업반이라고 엄마가 기억에 없는 말을 꺼냈다.
‘목사님! 딸 결혼 주례 약속 지키실 거지요?’
알뜰살뜰히 행복을 팔았다.
주일학교 교사, 찬양 지휘자로 잘 섬기려다 우리와 헤어짐이 아쉬웠다.
막내 돌잔치 때가 생각났다.
선교사님 이름과 같고 사위 생일 같은 날, 잊혀 지지 않았다.
새순교회 목사님 돌 설교 길었지만 당돌하게 자란 믿음의 대장부였다.
손위 형은 영등포 노숙인과 쪽방 촌 무료 급식 대부로 알려졌다.
어머니 기도의 열매요,
부친 생전에 질병으로 날갯짓한 섬사람 돌본 영향이 컸다.
어려운 살림에 기도로 자녀들을 키워내셨다.
형제 우애가 남다른 명문 가문이었다.
장애로 불편한 큰 형님을 물었다.
여전히 섬에서 천사처럼 사셨다.
지대한 형제간의 보살핌이었다.
그 어머니가 목포에 입원할 때 심방을 갔다.
평생 기도한 손을 잡았다.
별세 소식에 장지까지 따랐다.
동네 사람들이 길모퉁이에 앉아 자기 설움에 울었다.
어린 시절 상여 나갈 때 봤던 관경이었다.
양지바른 산기슭 밭에 매장하였다.
여러 해, 임 집사님 가정에서 추도 예배를 드렸다.
형제자매와 쌓은 친분에 안동 누님 댁에서 천마를 보내왔다.
광명 여동생은 내 딸 결혼에 축의금을 냈다.
세월이 흘러도 아름다운 관계의 흔적이었다.
추억거리를 넘어 답을 썼다.
‘집사님, 귀한 장모님 떠나보내셨네요.
장례 일정,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위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길 기도할게요. 힘내세요.
내일 예배 후 문상할게요.’
‘네, 목사님 상주가 불신자라 조문만 해 달라 하네요.’
‘그래요, 집사님!’
아내와 매월동 천지 장례식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앞서 가신 분들이 스쳤다.
자녀들 소속 큰 교회들 조화와 근조기가 눈에 띄었다.
빈소에서 기도한 순간 잘못 찾았다는 착각에 식은땀이 났다.
조문 자들의 문전성시에 나중 집사님 얼굴 보고 바로 알았다.
식탁에 앉아 지난 삶을 나눴다.
‘장모님 앞에 큰처남, 미혼인 작은 처남, 삼각동 처형이 먼저 갔어요.
큰 처남은 영암 계곡에서 술 마시고 다이빙하다 전신마비되었지요.
처남 댁이 아이들 두고 나가는 바람에 장모님 고생 많았어요.
막내 처제가 모시다 낙상하여 고관절 골절상을 입었어요.
기독병원 3개월 입원 중에 운명하셨네요.’
삼각동 처형 별세 소식은 가슴을 헤집었다.
한동안 살폈는데 우울증을 이기지 못함 같았다.
아들 다섯 살백이가 홍어를 기가 막히게 먹어 물었다.
‘저기 안내 본 조카! 공무원 되었어요.’
그를 불러 세웠더니 ‘맞아요!’로 맞장구쳤다.
임 집사님 뵐 때 잊을 수 없는 분이 계신다.
정 집사님! 작은 아들이 순간 실수로 담 안에 갇혔다.
브로커 잘못 만나 끌려다녔다.
신양파크 커피숍에서 불량자로 여기고 끊었다.
피해자 형부 통해 합의 끌어내 출소의 기쁨을 맛봤다.
온 가족이 교회 나왔다.
연대 졸업한 딸은 내 중학교 후배와 가정을 이뤘다.
작은 딸은 우리 교회서 결혼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장남은 교회 자매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문제는 사행성 투자에 성도들을 끌었다.
‘요즘 누가 손에 물 적셔 돈 버나요?
투자하면 매일 이자 들어온대요.’
결국, 임 집사님 카드로 1천만 원 빼서 날렸다.
25년 전 일, 그 후 큰아들 교회 개척 때 만났지만 할 말이 없었다.
‘사모님 치마 입지 않는다?’는 쓴소리만 되살아났다.
2024. 8. 31 서당골 생명샘 발행인 광주신광교회 이상래 목사 010 4793 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