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 10권, 세종 2년 10월 11일 병오 3번째기사 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상왕이 명한 불경한 두 시녀 소비와 장미의 죄에 대해 대신과 논하다 임금이 환궁하여 원숙에게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 비록 크다 하겠으나, 집안 다스리는 것도 더 어려운 일이다. 공비(恭妃)의 성질이 투기하지 아니하며, 부왕(父王)도 평소에 이를 칭찬하셨다. 내가 즉위하고 나서 성비(誠妃)가 본궁(本宮)의 여종으로 이름이 소비(小婢)란 자를 뽑아서 시녀로 들이게 하여, 내가 앞에서 일을 시키다가 얼마 뒤에 다른 소임을 맡겼더니, 소비가 망령되게 생각하기를, 공비(恭妃)가 그렇게 한 것으로 알고, 분을 내어 언사에 드러나기까지 하였더니, 그 뒤 하루는 공비가 의복을 벗어 소비(小婢)에게 갈무려 두라고 했는데, 소비가 가만히 찢어 버렸다가 일이 발각되어 신문하니, 숨길 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 ‘갑자기 찢어 버릴 마음이 나므로 찢었다.’ 하기에, 곧 유사(有司)에 내려서 그 죄를 밝히려 하였으나, 그 때 마침 큰 가뭄[大旱]이 들었으므로, 매만 쳐서 성비전(誠妃殿)에게 돌려보냈더니, 어제 장미의 일로 인하여 부왕(父王)께 계주(啓奏)하니, 부왕 말씀이, ‘어찌 늦게 주상(奏上)하느냐. 네가 이것을 대신들과 의논하여 계(啓)하라.’ 하셨다. 또 전일에 가두어 둔 부귀(富貴)란 자는 죄를 범한 것이 다름이 아니라, 모후(母后)께서 계실 때에 유모의 아들 불정(佛丁)을 나에게 세수간 별감(洗水間別監)을 시키라 부탁하시고 얼마되지 않아 훙서(薨逝)하셨다. 내가 세수간 별감 중에 사고가 있는 자가 없는가를 물으니, 다 말하기를, ‘부귀가 이 소임에서 면하기를 원한다.’ 하므로, 곧 불정으로 대신케 하였다. 부귀가 동전(東殿)에 가서 사례한 것을 보면, 그 소임을 면할 마음이 현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놈은 내가 대군(大君)으로 있을 때부터 오랫동안 수종하였던 것인데, 이 때 와서 조금도 섭섭히 여기는 뜻이 없으므로 미워서 가두어 둔 것이니, 초사(招辭)는 받을 것 없고, 곧 매나 쳐서 고역(苦役)을 정하여 주면 될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유침(劉沈)의 범한 죄는 조금 가벼우나, 이미 선지(宣旨)를 받들어 놓아 주었으니, 하동(河東) 관노(官奴)로 정하여 보내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유정현·박은·이원·변계량이 의논하기를,
"장미와 소비 등의 범한 죄는 다 반역으로 논하여야 될 것이니, 마땅히 삼성 위관(三省委官)과 함께 국문하여 사형에 처하게 할 것입니다."
하고,
"유침도 또한 마땅히 죽여야 될 것이나, 성상의 하교가 이러하시니 감히 다시 계주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비(小婢) 등의 일은 말만 하여도 오히려 부끄러우니 삼성 위관을 번거롭게 할 것이 있겠는가. 영의정이 이미 도제조(都提調)가 되었으니, 괴로움을 잊고서 친히 국문하여 초사(招辭)를 받으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