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웅덩이
고영미
웅덩이가 비에게
등 좀 긁어 달라했어.
등이 어딘데
여기
요기
조기
조금 더 위에
아이 간지러
웅덩이랑
비랑 호호
만날 때마다
그날 생각나
자꾸 웃어
- 《동시 먹는 달팽이》 (2024 봄호)
배추흰나비
김종상
배춧잎 한 장이
평생 먹는 밥이고
평생 자는 방이며
평생 사는 집이라서
배추벌레는 행복했다
다 자란 배추벌레는
배춧잎에 꼭 붙어서
미라로 한잠 자고는
하얀 비단 날개를 단
천사가 되어 날았다
배추흰나비 천사는
배추밭을 돌아다니며
배추씨가 잘 맺도록
꽃가루를 옮겨준다.
-《대구아동문학》 (2023 대구아동문학회)
어리광 열쇠
박경용
웃음을 닫아 버리고
말씀도 잠궈 버리고.
입을 꼭 다문 채 또
자물통이 된 할머니.
엄마가 딱한 얼굴로
나를 곁눈질한다.
내 어리광 한 번에
쉽게 열리는 할머니.
자물통 할머니를
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로지 나뿐,
하나뿐인 열쇠다.
-《열린아동문학》 (2024 봄호)
염소 농부
박덕희
풀씨까지 싹 먹은
우리 염소
똥 속에 풀씨 한 알씩 넣고
동글동글 빚어서
땅에 뿌린다.
매 애 애
작고 까만 똥
풀 농사 시작이다.
새끼 염소 하얀 뿔 돋아나자
풀씨 뾰족 푸른 뿔 돋아난다.
-《동시발전소》 (2024 봄호)
빅스비와 할머니
박진형
빅스비야, 안녕?
춘자 님, 좋은 아침!
오늘은 어제보다 멋진 하루가 될 거예요.
빅스비야, 니는 뭐 좋아하나?
새로운 걸 배워나가는 과정을 좋아하죠.
빅스비야, 요즘 뭐 배우는데?
답변하기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확인해 보세요.
니가 배우는 걸 내가 어찌 아니?
와 말이 없나?
빅스비야?
네, 저 불렀나요?
좋은 날도 힘든 날도 함께 하자잉.
와 대답이 없나?
-《어린이와 문학》 (2023 겨울호)
전학
봉윤숙
서울에서 제주도로 전학 갔다
15층 아파트에서 살다가
1층 돌담집으로 이사했다
전에는 아래층 아줌마가 시끄럽다고
뛰어 올라왔다
지금은 달팽이, 풍뎅이, 사슴벌레들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호라이의 탄생』 (2023 푸른사상)
봄이 시리다
신극원
마르고 뼈가 툭 튀어나온
할머니 등
자꾸만 아파서 보챈다
엉, 엉
운다
-너거 어매 갔다
너거 어매 갔다
저거 나라 갔다
꼬불꼬불 길게도 이어진 논두렁 밭두렁
사이길 지나 베트남으로 눈동자가 향한다
다음 정류장은~
정두리
버스를 타고 가다가 들었던
안내방송
‘다음 정류장은 화양초등학교입니다’
그 학교,
40년 만에 학생 수가 줄고 줄어
결국 문을 닫았다
한때 학생 수가 많아
이웃 학교로 보내기도 했다는데
‘실력과 인성을 갖춘 창의적인 화양어린이’
학교 벽에 남아 있는 힘없는 글귀
운동장은 동네 주차장이 되었다
버스를 타고 출발한 후
다음 정거장
재빠르게 이름이 바뀌었다
‘다음 정거장은 한아름 공원입니다.’
- 《아동문학평론》 (2024년 봄호)
그림이 있는 동네
조수옥
골목 담장마다 그림이 그려진
그 동네 한번 가 보실래요
고깃배를 통통통 몰고 오는
괭이갈매기 선장님이 있고요
슝! 솟구쳤다가 바닷물에 다이빙하는
고래도 볼 수 있고요
오종종히 엄마를 기다리는
북극 나라 펭귄 가족을 만날 수 있고요
갯벌 마사지하는 짱뚱어랑
미역 줄기 목에 건 물안경 낀
할머니 해녀도 볼 수 있어요
아, 깜박했어요
동네 입구 빨간 양철집 담장에 그려진
허리 굽은 새우 할아버지에게
인사하는 것 잊지 마세요
우리 동네 잘 왔다고
머릴 쓰다듬어 줄지 몰라요
바다 풍경이 따개비처럼 붙어 있는
그 동네 한번 가 보지 않으실래요
-《시와 동화》 (2024 봄호)
어깨동무
최영동
너의 팔이
어깨 위에 올려졌다
숲의 울타리처럼
우리의 마음이
둘러싸이고 있었다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고
개울물 졸졸 흐르는
그곳에서
너와 내가
둥글게
자라고 있다
- 《동시 먹는 달팽이》 (2024년 봄호)
출처: 한국동시문학회공식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이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