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총대! 여자도 입대!… 근데 왜 지금?[커버스토리] 여성 징병제 논란 재점화
입력 : 2021-05-01 04:02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여성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오래된 논쟁이 재점화하고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서 여성 징병제 도입 주장이 나오면서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주제가 다시 떠오른 양상이다. 최근 젠더 대립이 첨예해진 사회 분위기를 타고 갈등으로 번질 조짐도 보인다. 4·7 재보궐선거 결과에서 드러난 ‘이대남’(20대 남성)의 분노를 정치권이 이용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해석이 대체적이지만 일각에서는 병역자원 급감 등을 들어 “이제는 사회적 논의에 나서야 할 시점이 됐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다시 불붙은 여성 징병제, 군은 ‘거리두기’
최근 다시 여성 징병제를 꺼내든 건 대권 도전을 선언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그는 남녀 모두 40~100일간 군사훈련을 받게 하자는 내용의 ‘남녀평등복무제’를 지난 19일 제안했다. 저출산으로 인한 병력 감소에 대비하고 성평등을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같은 날 함께 등장한 ‘여성도 징병대상에 포함시켜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은 게재 4일 만에 정부 측 답변 조건인 20만명의 동의를 얻어냈다.
일단 군 안팎에서는 박 의원의 제안에 대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군 관계자는 30일 “40~100일 기초훈련으로는 기본적인 전투 능력조차 발휘할 수 없다”며 “실제로 적과 싸워서 이기는 부대를 만들어야 하는데 남녀평등을 위해 군대를 유지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군 내부에서는 “잊을 만하면 나타나 논쟁거리로 떠오르지만 곧 다시 사라지게 될 사안”이란 허무함마저도 감지된다.
국방부도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부승찬 대변인은 지난 20일 정례 브리핑에서 “병역제도를 포괄하는 개편은 안보 상황을 기초로 해야 한다”며 “군사적 효용성이나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통한 사회적 합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할 사안”이라고 선을 그었다. 여성 복무에 대한 논의는 ‘정치의 영역’에서 우선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치권에서조차 아직 숙의를 위한 공감대가 무르익지 않았다. 국회 국방위원회 여당 간사인 기동민 의원은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여성 징병제는 섣불리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직 찬반까지 나아간 사안도 아니며 이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 번쯤 토론해볼 필요는 있는 정도”라고 전했다.
당내엔 섣불리 ‘이대녀’(20대 여성)를 건드렸다간 역풍을 맞을 것이란 위기의식도 있다. 정의당 등에서는 여성 징병제가 아니라 모병제를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치권에서 여성 징병제를 먼저 꺼내 드는 것에 대한 비판도 이어진다. “남성들의 표심을 얻기 위한 선심성 정책”이라는 지적이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박 의원 주장에 대해 “실현 가능성이 없는 ‘립서비스’로 2030 표나 좀 얻어 보겠다는 포퓰리즘”이라고 본인 SNS에 적었다.
병역자원 급감 … 복무제도 전반 논의해야
여성 징병제 논의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1999년 헌법재판소가 군 가산점제에 위헌 결정을 내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 가산점제가 여성 차별로 작용한다는 판단이 내려진 이후 분노한 남성들은 징집 대상을 남성으로 규정한 병역법 제3조 제1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모두 ‘남성 징병은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기각 또는 각하)였다. 해당 항목이 위헌임을 확인해 달라는 헌법소원은 지금도 4건이나 계류돼 있을 만큼 ‘현재진행형’인 사안이다. 하지만 2014년 판결을 마지막으로 헌재는 “이미 심판을 거친 동일 사건에 대해서는 다시 심판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이후 사회가 급변했다. 예상보다 저출산,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병역자원이 급감했다. 당장 내년 병력이 50만명으로 감축됨에도 현역 병력 충원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여성 징병을 요구하는 이들은 남성에게만 군복무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한다. 10여년 전 헌법소원을 제기한 이들은 “남성만 징집하는 것은 성차별이며, 여성도 군복무를 이행할 수 있는 신체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남성은 병역의무 수행으로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취업 준비를 하지 못해 불이익이 매우 심대하다”고도 했다.
취업 시장에서의 어려움이 차별적 군복무에서 기인한다는 이 의견은 최근 20, 30대 남성들의 불만과도 일맥상통한다. 저성장 국면과 코로나19 고용 한파를 겪으면서 평등·공정에 민감해진 MZ세대에게는 복무기간 단축과 월급 인상보다 ‘군대 때문에 손해 본다’는 피해의식이 더 크다는 분석이다.
여성 징병제는 남성들만의 요구사항은 아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9년 7월 실시한 조사에서 여성 53.7%가 ‘여성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질문에 동의했다. 여성계 일각에서도 ‘성평등 차원에서 군복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들은 여성 징병제를 시행 중인 노르웨이, 스웨덴 등 해외 사례를 통해 “군대 내 여성의 증가와 역할 확대는 이들 국가에서도 올바른 정책 방향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전문가들은 징병제 논의가 정치나 성별 간 갈등 문제로 소모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대선을 1년 앞둔 이 시점에 본격적으로 뜻을 모아 현 복무제도 전반에 대한 개선 작업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여성 운동가 출신인 권인숙 민주당 의원은 “남성 중심의 징병제가 직장 내 성차별의 큰 근원”이라며 “이번 대선 국면에서 여성들의 의지, 모병제 준비 상태 등을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엘리 평화페미니즘연구소장은 “여성 복무는 성평등과는 별개로 다뤄야 할 문제”라며 “최근 논의가 반짝하고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남녀 갈등과 대립 양상이 아니라 국방·인구·복지·노동 차원으로 논의를 진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훈 기자 hunh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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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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