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대파밭에서 [장석주]
한겨울 대파가 땅에 뿌리를 묻고 자란다.
대파의 슬픔을 이해할 수가 없으니,
오늘 아침 가슴팍에 주홍 무늬가 있는 새는
공중을 날고, 대파 앞에 서서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이 있다. 내 얘기를 들어봐요.
일생 동안 밥만 축냈어요. 아무도 내게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요, 사람을 죽인 적은 없어요.
아시겠어요? 진흙길은 피의 홍수로
넘쳐나는데, 나는 그저 스쳐지나왔어요.
분류와 명명은 활발했지만 고요한 시대는
쉽게 오지 않아요. 대파밭에는 대파가 새파랗고
바보가 죽고 새로운 바보가 와서 시끄럽다.
서리 내린 겨울 아침 대파밭에서 대파가
새파랗게 자라는 일은 기적이다.
저 새파란 대파 앞에서 우는 자가
성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문학동네, 2019
* 설에 형집을 다녀왔다.
형은 목회자로 이천에서 오래 목회하다가 올 초에 서천으로 교회를 옮겼다.
설을 빙자해서 형집으로 갔는데 교회안에 사택이 있다.
1902년에 시작된 교회니 무척 오래된 교회다.
그럼에도 이층으로 된 그 번듯한 교회는 신자들이 모두 노인들 뿐이다.
그래서 이층이 원래 본당인데 계단으로 오르기 힘들어 지금은 일층에서 예배를 드린다.
시골교회가 이제 봄 여름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된거다.
모든 신자들이 고령으로 인생의 겨울임에도 믿음을 지키고 있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교회에는 조그만 밭이 있어 대파가 새파랗게 자라고 있다. 이 한겨울에!
마치 겨울을 보내고 있는 노신자들이 믿음만은 새파랗다며, 꿋꿋이 서있는 대파가 대변하는 것 같다.
일생 동안 밥만 축낸 건 아니고 자식들 키워 도회지로 보내고 믿음으로 교회를 지켰으니
비록 겨울이지만 마음만은 봄이고 여름인 것이다.
화양연화는 갔어도 새파란 대파처럼 꼿꼿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