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아버지는 내게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하라고 권하셨다.
도저히 자식을 대학까지 보낼 자신이 없으셨을 뿐만 아니라 일곱 식구의 생계가 당장 문제가 되었으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공업고등학교에 가서 기술을 배워 취직하면 그게 제일이라고, 또다시 6.25같은 전쟁이 나서 서로 죽이고 죽더라도 빨갱이들도 기술자는 안 건드린다는 것이 아버지의 공고진학 권유의 이유였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대학 가기는 어려운 형편이고, 당시엔 부잣집 자식이나 되어야 대학 갈 수 있다고 여기던 때였으니까.
나는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원서를 내었다.
15명의 국비대여 장학생을 입시성적순으로 선발하였는데, 나는 입학성적이 좋았던지 이 15명에 포함되어 기술전공부라고 불리는 특별반에 편성되었다. 장학금은 1년에 만원이었는데 그 때 1기분 공납금이 2,000원을 조금 넘었으니, 이 국비대여 장학금은 1년 4기분 공납금을 내고 약간의 참고서를 사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금액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기억력과 글재주를 아끼시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는데, 그 아들을 인문학교에 보내지 못 하고 대학을 사실상 포기하고 공고에 보내기가 못내 안쓰러우셨고 후회스럽게 생각하여 가슴속에 늘 담고 계셨음을 나는 그 훗날에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1966년 3월, 우리 기술전공부는 국비대여장학생 15명과 함께 대구공업고등학교 입학생 중에서 성적순으로 선발된 상위 32명으로 편성되었다.
기술전공부의 한 주일 시간표는 온통 공장실습과 공업기술과목 -기계공작법, 기계재료, 재료역학, 기계제도, 원동기 같은 과목들- 으로 채워지고, 인문과목은 겨우 열 시간으로, 국어, 수학, 영어, 도덕, 과학, 국민윤리와 체육시간을 그 열 시간에 쪼개어서 수업을 받는 그야말로 말이 고등학교이지 직업훈련학교나 다름없는 교육과정으로 되어있었다. 1 주일에 3일(24시간)이 꼬박 실습시간이었다. 인문고등학교 친구들은 우릴 "땜쟁이"라고 불렀다.
실습날이 되면 우리는 기계실습공장에서 쇠톱과 줄로 쇠를 깎고, 함석판을 자르고 구부리고 납땜을 하여 물동이와 물뿌리개를 만들고, 나무를 자르고 대패질을 하고, 철판을 용접기로 지지는 따위의 실습으로 하루 온 종일 8 시간을 때워야 했다.
굵직한 철근토막을 잘라주면 그걸 며칠이고, 며칠이고 줄로 다듬어 가로 세로 1 센티미터, 길이 10 센티미터의 사각봉을 만들고 선생님은 그걸 직각자와 마이크로미터로 검사하여 얼마나 반듯하고 정확하게 만들었나를 채점했다.
상영이는 언젠가 온 종일 전기용접 실습을 하고 난 날 밤, 눈에 모래알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 한 고통으로 잠을 못 이루었고, 인석이는 어느 날 전기톱으로 나무를 켜다가 손가락 두 개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맹렬하게 돌아가는 전기톱은 인석이의 손가락 두 개를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고 인석이는 피가 뿜어져 나오는 손을 움켜쥐고 나뒹굴었다. 천석이는 손재주가 좋아 국제 기능올림픽에 나가 금메달도 땄다. 성호는 줄질도 잘 했지만 제도기와 먹물로 도면을 그리는 제도 솜씨가 좋았다.
2학년 때부터는 선반과 밀링, 보링머신 따위를 다루는 공작기계실습을 하였는데 기계의 숫자가 모자라다 보니 세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이 실습을 하는 동안 다른 두 팀은 자습을 해야 했는데, 이 자습시간은 장난시간이 되기가 일쑤였다.
입학성적순으로 선발한 32명, 이 중 15명이 국비대여장학생인 기술전공부, 어느 녀석 하나 중학교까지는 내노라 하고 날리지 않던 놈이 없었던 이 수재들의 집단은 장난치는데도 수재들처럼 별난 놈들이 많았다. 그리고, 한창 이성에 호기심이 많던 때라 자습시간은 성교육 토론회, 허문영 음란소설 독후감 발표회, 음담패설에다가 은밀한 경험사례 발표회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여학교 인기투표도 하였다. 세칭 일류여고인 경북여고, 대구여고, 그리고 흰 줄 박힌 세라복 교복의 신명여고, 선화여상까지 칠판에 써놓고 인기투표를 하였는데 일등은 신명여고였다. 경북여고는 못 생긴 아이들이 공부만 열심히 하고, 어쩐지 신명여고 아이들이 교복도 멋있고 예쁜 애들도 제일 많은 것 같다는 것이었다.
"땜쟁이", "땜쟁이 학교"..., 우리도 우리를 그렇게 불렀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땜쟁이 양성학교의 학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로줄무늬를 넣은 경북여고 여학생을 보면 우리 땜쟁이는 주눅부터 들었다.
영어, 수학, 국어, 우리의 실력을 그 일류여고 여학생들이 알면 얼마나 비웃을까?
우리 기술전공부는 음악, 미술시간도 없었다.
기계공장에서 실습을 하다가 다른 교실에서 들려오는 "오, 수제너", "금발의 제니",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이상스레 흔들리는 노랫소리와 피아노 소리에 눈물이 핑 돌던 기억, 오!
기계공장에서 쇠를 깎으며 시커먼 기름을 만지다가 수업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찬바람 부는 수돗가에서 차가운 물과 거품도 나지 않는 빨래비누로 시린 손을 씻어야 했다.
나는 처음 석 달인가를 하숙하고 나서 학교 공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버지 봉급이 6,000원인가 7,000원쯤밖에 안 되었는데 나 혼자서 3,000원씩을 하숙집 아줌마에게 갖다주면서 하숙생 노릇을 도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는 기계공장 두 개와 전기과, 화학과, 건축과, 토목과, 방직과, 자동차과, 이렇게 여덟 개의 실습공장이 있었고 공장 안에는 꽤 값나가는 기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각 공장마다 두 명씩의 학생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상주 경비원인 셈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나면 우린 빈 공장 한구석에서 전기곤로에 냄비를 올려놓고 밥을 해먹었다.
침실이나 침대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우린 작업대 위에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잠을 잤다.
학교에는 모기가 참 많았다.
커다란 실습공장 천장에서부터 모기들이 공습 비행기편대의 소리를 내며 웅웅거렸다.
모기를 막으려고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지만 한여름 더위에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잠을 잔다는 건 불가능했다. 갑자기 화끈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잠을 깨면 수 십 마리의 모기들이 얼굴이며 팔뚝에서 회식을 즐기고 있었다. 얼굴이며 팔을 때리는 나의 손바닥은 시뻘건 모기들의 피, 아니 나의 피로 물들었다.
할 수 없이 모기를 피해 이불을 들고 학교마당으로 나가 콘크리트 의자 위에 꼬부리고 누워 잠을 잤다.
얼굴이며 팔뚝이 모기 물린 자국으로 엉망이 되었다. 비가 내릴 때 비를 맞으면 모기에게 물린 자국이 동그란 반점으로 다 드러나 보였다. 이 몇 달 동안 나는 평생 물릴 수 있는 모기 다 물린 셈이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여름방학 때까지만 실습공장에 기거하기로 하고 여름방학이 끝나자 가을부터는 신암동 측후소 뒤 6. 25 마을이라고도 하고 양아치마을이라고도 부르는 동네에 방을 얻어 영석이라고 하는 1년 선배와 함께 자취를 시작하였다.
흙벽돌로 지은 나지막한 집들이 늘어선 마을, 온 동네가 종이를 줍고 폐품을 수집하는 소위 양아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룬 마을, 물을 긷기 위하여 1 킬로미터를 오르내려야 하는 그 마을에서 나는 그 선배와 함께 거의 반년을 살았다.
내가 대구공고에 다니고 있을 때도 아버지는 한 동안 안동군의 시골에서 국민학교 교감 선생님과 양호교사를 겸하는 교직생활과 자취생활을 계속하고 계셨는데, 내가 2학년이 되던 해에 결국 사표를 내고 20여년 교편생활을 마감하셨다. 아직 45세밖에 되지 않던 젊은 나이에 말이다.
경찰관이 생활고를 비관하여 일가족자살을 하던 때였으니 교육공무원 봉급으로는 다섯 남매를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마치게 할 수 없겠다는 판단에서였으리라.
중학교부터는 교육공무원 자녀에게는 면제되는 기성회비를 제하고도 1기분 공납금이 2,000원 정도 되었고, 다섯 남매의 공납금만도 석 달에 10,000원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퇴직금 24만원인가를 받으셨고 어머니의 참기름 가게 전세금과 합쳐 안동시 변두리 태화동 삼거리, 지금 안동지점과 얼마 안 되는 곳에 조그만 방이 딸린 가게를 얻어 "대신약국"이라는 간판을 내거셨다.
아버지는 시골국민학교를 전전하시면서 양호교사를 하신 의료전문가였지만 정식으로 약학대학을 나와 약사시험을 보시지도, 약사면허증을 갖고 있지도 않으셨기 때문에 면허증을 가진 약사 한 명을 따로 고용하고 그 약사면허증을 벽에 걸어놓고 영업을 하셨는데, 실제 약을 짓거나 파는 일은 아버지가 거의 다 하셨다.
그 때에는 아직 가게의 문 여는 시간이 따로 없는 시절이었고, 사람들이 아프면 병원에 가지 않고 약국문을 두드렸는데, 밤중이든 새벽이든 상관이 없었다. 동네약국이 1차 진료소였고 응급실이었던 시절, 아버지는 수없이 단잠을 깨셔야 했고, 새벽부터 밤중까지 약국을 지키셔야 했다.
어쨌든 아버지가 약국을 하시고부터는 먹고사는 일만큼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선배와 헤어져 양아치 마을을 떠나 철로변 마을로 내려왔다.
먼 친척 할머니가 살고 계신 사글세방의 옆방을 사글세로 얻어 이번에는 1년 후배와 함께 자취를 시작하였다.
쓸쓸할 때면 나는 방안에 드러누워 하모니카를 불었고, 가끔은 열차에 치어죽은 시체-머리칼이나 다리가 삐죽이 나온 채로 방치된-를 덮은 가마니 곁을 지나 대구선 철로를 걸었고, 수성천변을 따라 신도극장, 신성극장을 지나고 신천 다리를 건너 대구시내를 이유없이 방황하였다.
더러는 극장에서 "황야의 무법자"니 "황야의 은화 1불"이니, "돌아온 장고"같은 황야 씨리즈,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와 신성일의 짝으로 돌아가면서 나오는 문희, 고은아, 윤정희, 남정임 같은 예쁜 여배우들이 나오는 청춘영화도 더러는 보았다. 년소자 입장불가 영화를 볼 때는 교복 아닌 사복차림으로 극장에를 갔지만 훈육 선생님에게 들킬까봐 가슴을 조마조마 태우면서 영화를 보아야 했다.
어쩌다가 토요일에 집으로 가는 날은 나는 대구역으로 부지런히 걸어가서 저녁 여섯 시엔가 떠나는 청량리행 완행열차를 탔다.
대구역에서 차창 바깥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역구내 철로 위에는 시꺼먼 화차, 석탄차들과 증기기관차와 디젤기관차들이 서있기도 하고 이리저리 밀고 당기면서 쿵쾅거리기도 하였다.
화차에는 제작회사의 명판(Name Plate)가 붙어 있었다.
"신일본기계공작소, 1920년 제작, 자중 19톤, 하중 28톤...." 이런 내용의 명판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일본놈들은 벌써 50년 전에 이런 걸 다 만들어냈단 말이지. 그리고 전함과 비행기까지 만들어서 전쟁을 일으켰단 말이지...... 학교에서 선생님은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철로의 재료가 되는 경강(硬鋼)이나 객차, 화차에 쓰이는 가단주철(可鍛鑄鐵)을 아직도 못 만들어낸다고 하시던데......"
그때에 시내를 굴러다니던 택시들은 드럼통을 두들겨 차체를 만든 시발택시였다.
동촌, 반야월, 청천, 영천......
나는 이따금씩 안동까지 네 시간이나 걸리는 기차여행을 하면서 대구에서 안동까지의 모든 역 이름과 터널과 다리의 이름들을 다 외웠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맹호부대 용사들은"
"얼룩무늬 번쩍이며 청룡은 간다......"
그 해가 1967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월남전 파병으로 파월장병들이 기차를 타고 지나는 대구역으로 우리가 동원되어 태극기를 흔들며 환송을 하던 것이.
쓸쓸한 자취방,
일년 내내 덮고 자는 땀과 때로 찌들은 이불과 요, 그리고 앉은뱅이 책상. 어두컴컴한 자취방.
무언지 모를 그리움과 애달픔이 연두빛으로 내 가슴속으로 들어와 울고 있었다.
늦은 밤, 어디에선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노래소리에 괜히 눈물이 흘러나왔다.
누구에게선가 사랑 받고 누구인가를 찾아야 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그리움...
이미자, 문주란, 남진, 진송남, 최희준, 위키리, 패티김 같은 스타가수들은 빗물 흐르는 창가에서, 사랑을 잃어버리고, 님을 떠나보내고 바보처럼 울었고, 빗속을 하염없이 걸으며, 그리워 그리워서 못 살겠다고 울어대었고, 사랑은 천국이요, 지옥이며, 나는 그대의 그림자라고 또 흐느껴 대었다.
배호는 돌아가는 삼각지에서 흐느끼다가 안개 낀 장충단공원에서 영영 떠나 버렸고, 차중락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따라 또 그렇게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왜들 그렇게 울기만 했는지.....
"논 티 스코르 다르 디메.....", 날 잊지 말아라, "물망초" 곡조는 왜 그리도 어린 가슴을 헤집어 놓고, "비앙 케 스플레덴테 라노비아....., 사람들 틈에 숨어서 소리 없이 흐느껴 운다...", "그대 나를 버리고 어느 님의 품에 갔나..." 쥐어짜는 듯 흐느끼는 노랫소리는 왜 그리 나를 슬프게 했는지...
여섯 시에 일어나서 차가운 물에 시린 손을 호호 불면서 쌀을 씻고, 가게에 나가서 두부 한 모와 파 서너 뿌리를 사와서 된장과 함께 냄비에 넣고 국도 찌개도 아닌 것을 끓여서 아침식사를 하고 도시락에 밥을 담아 책가방에 넣어서 들고 학교에 가고...
바가지에 쌀을 담고, 물로 한 번 씻어내고, 손으로 한 번 문지르고 다시 물로 서너 번 씻고, 바가지와 조리를 양손에 잡고 타이밍을 잘 맞추면서 리드미컬하게 살랑살랑 흔들어 쌀을 일구어 솥에다 넣는다. 그리고 바가지 두 개를 양손에 잡고 흔들면서 이리 부었다 저리 부었다 하면서 돌을 골라내고(그 땐 쌀에 웬 돌이 그렇게 많았는지?) 솥에다 손을 넣고 손등까지 올라오도록 물을 붓고 화기를 조절해 가면서 밥이 타지 않도록 밥을 짓는 일에 나는 숙달된 요리사가 되었다.
더러는 연탄불이 꺼지기도 하여 차가운 방에서 잠을 깨고, 한 밤중에 불쏘시개와 번개탄으로 연기를 마셔가면서 부채질을 해가면서 연탄불을 다시 피워야 했고, 어떤 때는 연탄을 갈아넣고 나서 적당히 피어오르면 헝겊마개로 공기구멍을 적당히 막아주어야 하는 걸 잊어버려 연탄불이 훨훨 다 타버려 방이 지글지글 끓기도 하였다.
연탄개스로 일가족이 죽기도 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던 그 시절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행운일까?
편모슬하의 독자로 안동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한 해 선배 동철이 형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직후 첫발령지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말았는데....
가끔 칠성시장에 가서 10원에 어떤 때는 너댓 마리, 어떤 때는 열 마리까지 주던 꽁치를 사오면 한 동안은 참 풍성한 식탁이 보장되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 학교 게시판에 나붙은 대구시내 기업과 공장의 공고졸업생 모집광고를 보고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대구철공소 일당 90원", 무림제지 일당 100원", "제일모직 월 급여 4,000원", 지금도 눈에 선한 구인광고들의 내용이다. 그제야 직업훈련만을 받아온 공고졸업생의 진로가 우리의 눈에 보다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창동이와 함께 인생과 진로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학에 진학하자고 의기투합하였다. 그래, 부모님이 가난하다고 대학 갈 길 없냐, 돈 안 드는 사관학교나 해양대학을 가자, 둘은 그 때부터 학교의 실습시간과 공업과목시간의 수업을 거부하고 진학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한 달에 200원이나 되는 학원비를 내고 신암동에서 삼덕동까지 걸어서 학원에도 다녔지만 그러나, 기울어진 학력의 차이를 고3이 되어서 극복하기란 이미 글러버린 다음이었다.
"그래, 올해 대학 못 가면 내년에 가지", 새벽에 일어나 연탄불에 밥을 지어 김치나 무말랭이 같은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에 갔다가, 수업을 마치면 십리길이나 되는 삼덕동으로 부지런히 달려가서 학원공부를 하고 밤 열 한 시나 되어 돌아와 연탄불 갈고 쓰러져 자던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코피를 쏟기 시작하였고, 하늘과 세상이 노란빛으로 바뀌면서 나를 태우고 둥실둥실, 빙그르르 떠나는 때가 종종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창 왕성하게 자라던 키가 딱 멈추어버린 것도 이 때였다.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온 수척한 아들을 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절초풍하셨다.
나는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대학을 가겠노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오자, 선생님께서는 한국전력주식회사가 공고와 공업전문학교 졸업예정자를 모집한다면서 평균성적이 80점을 넘는 사람만 원서를 낼 수 있다고 하셨다.
사실, 한국전력 입사를 목표로 공부하고 준비해온 녀석들이 우리 반에는 많았었다.
그러나 나와 창동이는 3학년이 되고서 공장실습과 전공과목을 포기하고 있었고 한국전력이 신입사원을 뽑든 말든 관심도 두지 말고 오로지 대학을 목표로 하자고 다짐을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 날엔가, 아버지께서 학교에 불쑥 찾아오셨고 담임선생님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내게 한국전력 입사시험을 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대학진학을 고집하는 나에게 일단 한국전력에 시험이라도 보라고, 대학은 그 다음에라도 준비해서 갈 수 있지 않느냐고 달래다시피 하셨고, 나는 또다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불과 1주일도 남기지 않은 시험을 위하여 벼락치기 공부를 시작하였다.
일 주일 동안 그 동안 처박아 두었던 기계공작, 재료역학, 기계재료 등 전공과목 책을 꺼내놓고 모조리 읽는 것이었다. 나는 이 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포장에 올빼미가 그려진 잠 안 오는 약을 사서 먹어 보았는데 잠을 견디는데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지만 위장을 몹시 상하였던지 배가 오랫동안 아팠다.
그리고 9월 십 몇 일엔가 부산에 내려가서 입사시험을 보았는데, 공고졸업생과 공전졸업생 구분 없이 같은 문제를 놓고 시험을 보았고, 기계과의 경쟁률은 13대 1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막상 합격자발표 때, 한전입사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해온 여러 급우들의 이름 대신 미안하게도 내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끼여있었다.
영남지역에서는 공고, 공전 모두 합하여 기계분야에 13명만이 선발되었는데, 이 13명에 우리 반이 무려 다섯 명, 그리고 서울지역에서 한 명의 합격자를 내었었다.
합격자들은 10월초에 서울에 소집되어 면접과 신체검사를 받았고, 난생처음 서울 간 촌놈이 서울역과 청량리역에서 추석전날 귀성전쟁에 휩쓸려 곤욕을 치렀다.
결국 나는 함께 대학에 진학하자던 창동이와의 약속을 깨뜨린 것이다.
그러나, 창동이는 그 해에 예비고사에 붙고 용하게도 해양대학에까지 뚫었다.
1968년 이 해는 또 사건이 많았던 해였다. 1월 21일에는 김신조 북괴군 일당이 휴전선 철조망을 뚫고 청와대 뒤까지 내려와 총격전을 벌였고, 가을엔 울진, 삼척에 120명이나 되는 무장공비가 내려왔다.
푸에블로어호가 북한에 나포 당하고, 군용기가 격추 당하고, 58함인가 해군함정이 원산 근방에서 북한의 해안포에 격침당하던 때도 그 무렵이었다.
내가 한전시험에 합격한 다음 영덕군 지품면 기사동 골짜기에 있는 외가에 가서 외조부님께 인사를 드리고 안동으로 돌아오던 날이 바로 울진,영덕 무장공비가 내려온 날이었다.
내가 탄 시외버스에는 검문소에서마다 군인과 경찰이 올라왔고 젊은 사람들을 조사를 해야겠다고 끌고 내려갔다. 혹시 나도 끌려 내려가는 게 아닌가 하고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얼굴이 하얘서였는지 나에게는 신분증을 보자고도 않는 것이었다.
하긴 나는 얼굴이 유난히 희었다.
어머니는 아무리 까만 교복 입은 아이들이 많이 있어도 그 속에서 날 찾아내는 건 금방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가장 눈에 띄는, 환하게 빛나는 하얀 얼굴만 찾으면 그게 나라는 것이었다.
나중, 내가 군대에 가서 6주간 신병훈련을 받을 때였는데 6주가 거의 끝난 무렵 대위인 중대장이 나를 가리키면서 "이 봐, 자네는 훈련을 받은 거야, 안 받은 거야?" 할 정도였다.
햇빛 아래에서 고된 훈련을 받아 모두들 깜둥이가 되었는데 나 혼자서 하얀 얼굴로 광채를 발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난 무슨 사내가 계집애처럼 그리 희냐는 소리를 듣기 싫어 한여름 햇볕 아래에서 피부를 태워보려고 애도 써 보았는데, 수없이 물집이 생기고 껍질이 벗겨지는 곤욕만 치른 채, 구릿빛으로 빛나는 피부를 얻는데는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도 1968년 12월 5일이었고, 대학입시에 앞서 예비고사를 치르게 된 것도 그 해부터였다.
그런 그 해에 창동이 녀석이 예비고사를 통과하고 해양대학까지 뚫은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공고졸업생에게 있어서, 특히 3 년 동안 직업훈련만을 받다시피 하여 중학교 졸업실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던 우리에게는 당시 전국적으로 1만 3천 여명밖에 안 되던 대학입학정원의 1.5배인 2만 명 정도를 선발하는 예비고사부터가 결코 쉽지 않은 관문이라는 것을, 나는 2년 후 내가 예비고사에 응시하고 대학에 들어갈 때에 알게 되었다.
1969년 1월 23일, 우리는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졸업식은 우리 기계과 교실 앞에 있는 함석판으로 지붕만 씌워놓은 강당에서 치러졌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대구로 내려오셔서 내게 꽃다발을 안겨주고 색종이 테이프를 어깨에 감아 주시면서 축하해 주셨고 흑백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우리 기술전공부 졸업생 32명은 이날 저녁, 대구시내의 한 중국집에 모여 짜장면과 배갈로 졸업자축연을 열고, 어머니가 동인동 로타리에서 옷가게를 하시는 태석이 녀석의 집에 몰려가서 막걸리를 마시며, 웃다가 부둥켜안고 울다가 노래를 부르며 밤을 꼬박 새웠다.
대한민국에서 봉급이 제일 많다는 한전에 들어가게 된 나 같은 녀석들은 행운아들이었다. 유공에 들어간 녀석이 하나 있었고, 무슨 은행 보이라실에 취직된 녀석도 있었고, 무림제지, 제일모직, 대구철공소, 그리고 서울의 삼양라면, 원진레이욘......, 이런 회사들이 우리반 아이들의 취직된 직장의 이름들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취업조차 안 된 녀석들도 많이 있었다. 수석으로 입학하였으나 무슨 병인지 기운이 빠지고 몸이 바짝바짝 여위어 취직은커녕, 졸업도 겨우 하게 된 남기, 취업이 뜻대로 안 되어 낙제를 자청, 한 해를 더 다니게 된 도일이와 찬이, 이 녀석들을 부둥켜안고 우리는 또 서럽게 울었다.
"니는 좋겠다. 좋은 회사 취직해서.."
"야, 같이 졸업하면 좋겠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노?"
"서울 가면 어디에나 들어갈 수 있잖겠나?"
"야 씨발, 공고 나온 땜쟁이 공돌이 언 놈이 알아주노?"
누구라 할 것 없이 끌어안고 푸념을 하다가,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르다가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를 부르다가, 막걸리를 부어라 마셔라 부어넣곤 널부러졌다가.......
그렇게 우리 서른 두 명은 몸부림하듯이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악을 쓰면서 3년 동안의 급우생활을 마치는 이별의 잔치를 치렀다.
생각해보면, 국가시책 공업입국에 발맞추어 신설된 공업고등학교의 "기술전공부"라는 특별반과 "국비대여 장학생"이라는 미명이 우리 부모들의 찌들은 가난과 합작하여 만들어낸 게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 때 비로소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