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떡의 역사와 문화
우리나라는 신석기 시대 후기 경에 잡곡농사로 농업을 시작하였다. 초기 농작물은 피, 조, 기장, 수수, 콩, 팥 등이었으며 이후로 적지를 찾아 농업이 확장되고 진전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부족국가를 이루고, 농업을 주산업으로 한 환경에서 공동체적인 모습을 형성하고, 봄, 가을이면 영고, 무천, 동맹과 같은 부락제를 열고 군중이 모여 풍년을 빌고 추수를 감사하며 음식가무(飮食歌舞) 하면서 밤을 지새우는 농경의례를 가졌다. 이러한 농경의례에 의레 술과 떡이 차려졌다. 떡은 상고시대부터 명절음식, 통과의례음식, 생업의례음식, 무속의례음식, 선물용음식, 제사음식으로 쓰여졌으며 이러한 관습이 오늘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는 실정이며 밥을 대용할 수 있는 음식의 성격까지도 가지고 있다. 곡물요리 중에서 죽 다음으로 발달된 것이 떡으로 주식이었다. 그 후 밥이 주식이 되면서부터 의례음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떡은 한자로는 병(餠)이라고 표기한다. 떡은 조리 형태로 정의하면 "곡물의 분식 형태의 음식" 이라고 할 수 있다. 떡은 농경문화의 정착과 그 역사를 함께 하는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음식 중의 하나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떡은 별식이다. "밥 위에 떡"이라는 속담도 있는 것과 같이 밥보다 더 맛있는 별식이 떡이라는 뜻이다. 떡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각 종류별로 특색이 깊고, 재료의 배합, 향이나 맛의 첨가, 쌀가루에 물 내리기, 설탕물이나 꿀물 섞기 등 만드는 방법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떡은 특별 음식으로 우대를 받아왔으나 각종 의례의 간소화, 음식의 서구화, 식품공업의 발달로 과자류와 케이크에 밀려 전통 떡이 뒷자리로 물러서고 있는 실정이다.
2.떡이란? 대개 곡식가루를 반죽하여 찌거나 삶아 익힌 음식으로, 농경문화의 정착과 그 역사를 함께하는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 음식입니다. 떡은 간식이기도 하며, 계절적으로는 가을과 겨울에 많이 즐겨 먹었습니다. 가을엔, 추수가 끝나 곡식이 넉넉하고 농한기로 접어드는 시기이므로 "무시루떡" 같은 것을 많이 해 먹었고, 겨울에는 인절미를 말랑말랑하게 구워 꿀이나 조청 또는 홍시에 찍어 먹으며 겨울 정취를 만끽해왔습니다. 우리의 전통음식이 맛과 영양면에서 뛰어난 우수 식품으로 점차 세계적으로도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고 합니다..
3.떡의 어원과 역사
대부분의 학자들은 삼국이 성립되기 이전인 부족국가 시대부터 떡을 만들어 먹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대에 떡의 주재료가 되는 곡물이 생산되고 있었고, 떡을 만드는 데 필요한 갈판과 갈돌, 시루가 당시의 유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게 되며 사회가 안정되면서 쌀을 중심으로 한 농경이 더욱 발달하게 된다. 이 시기에 쌀을 주재료로 하는 떡이 더욱 일반화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시기에 전래된 불교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최고의 번성기를 맞게 된다. 육식을 멀리하는 불교문화는 차를 즐기는 음다(飮茶) 풍속의 유행과 함께 과정류, 떡류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권농 정책에 따른 양곡의 증산은 경제적 여유를 가져다주어 떡문화의 발전을 촉진하게 되면서 떡의 종류와 조리법이 매우 다양해진다.
조선시대는 농업기술과 조리가공법의 발달로 전반적인 식생활 문화가 향상된 시기이며, 떡의 종류와 맛도 더 한층 다양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곡물을 쪄 익혀 만들던 것을
다른 곡물과의 배합 및 과실, 꽃, 야생초, 약재 등의 첨가로 빛깔, 모양, 맛에 변화를 주었다. 조선 후기의 각종 요리 관련서들에는 매우 다양한 떡의 종류가 수록되어 있어 이러한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관혼상제의 풍습이 일반화되어 각종 의례와 크고 작은 잔치, 무의(巫儀) 등에 떡이 필수적으로 쓰였다. 또 고려시대로 이르러 명절식 및 시절식으로의 쓰임새도 증가하였다.
그러나 19세기말 이후 진행된 급격한 사회변동은 떡의 역사마저 바꾸어 놓았다. 간식이자 별식거리 혹은 밥 대용식으로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왔던 떡은 서양에서 들어온 빵에 의해 점차 식단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또한 생활환경의 변화로 떡집이나 떡방앗간 같은 전문업소에 맡기는 경가 대부분이다. 이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지던 떡의 종류는 전문 업소에서 주로 생산되는 몇 가지로 축소되어 가는 형편이니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아직 중요한 행사나 제사 등에는 빠지지 않고 오르는 필수적인 음식이기도 하다.
4.생활속의 떡
** 정을 나누는 떡
우리 민족은 예부터 자기 집 식구만을 위하여 떡을 만들지 않았다. 천지 신명과 조상께 올리고, 또 이웃 친척 간에 서로 나누어 먹기 위해서 많은 양의 떡을 하는 여유를 보여 왔던 것이다. 우리말에 "반기를 나누어 도르다."는 말이 있고, 혹은 "반기살이"란 말이 있는데, 잔칫집에서 손님들이 돌아갈 때 음식을 사서 보내는 이런 풍속에서도 떡이 없는 반기살이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떡은 나누어 먹는 음식에서 가장 주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또"남의 떡에 설 쇤다."든가 "얻은 떡이 두레 반이다."라는 속담에서도 이러한 우리의 떡 문화의 한 단면을 엿볼 수가 있다.
** 재료 배합에서 합리적인 떡
떡은 말하자면 "별식"이다. 따라서 명절이나 잔치와 같은 특별한 때에는 떡이 음식의 왕이지만 언제나 밥처럼 일상식으로 떡을 먹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일 년에 여러 차례의 명절과 생일, 그리고 제사나 잔치때 떡을 만들어, 고른 영양소를 보충하고 맛으로 즐기는 합리적인 식품으로 발달시킨 것이다.
** 약이 되는 떡
우리 음식은 예부터 약식동원(藥食同源)의 조리법으로 발달해 왔다. 떡도 예외는 아니어서 건강 유지에 특히 도움을 주는 떡이 적잖게 개발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을 흔히 "약떡"이라 부른다. 약떡의 종류는 매우 많지만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예로 든다. 먼저 "구선왕도고(九仙王道羔0"라는 떡은, 멥쌀가루에 연육(蓮肉)·산약(山藥)·백복령(白茯笭)·의이인(薏苡仁)·맥아(麥芽)·백변두(白 豆)·능인(菱仁)·시상( 霜)등의 한약재를 섞어, 가루가 촉촉하도록 끓인 설탕물과 굴은 내려 찐 떡이다. 몸에 이로운 약재를 이용하여 일찍부터 떡을 만들어 평상시에 먹어 왔다는 것은 선조들의 대단한 지혜인 것이다.
5.통과의례
통과의례란 사람이 태어나서 생을 마칠때까지 반드시 거치게 되는 몇차례의 중요한 의례를 말한다. 이러한 의례에도 응당 떡이 빠지지 않았다. 이때 해먹는 떡에는 각기 의미를 부여하여 의례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켰고, 또 통과의례의 풍속이 떡의 풍속에 크게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통과의례와 관련된 떡 풍속들은 거개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절기 우리 조상들은 계절의 변화에 뒤질세라 사계절 24절기마다 그때그때 걸맞은 음식을 만들어 먹었고 그런 풍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떡은 그 중 가장 중요한 음식의 하나여서 일년 열두달 떡을 해먹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정조다례(正朝茶禮) 흰떡가래로 떡국을 끓여 먹었다. 설날은 천지 만물이 새로 시작되는 날인 만큼 엄숙하고 청결해야 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흰떡외에도 찹쌀, 차조, 기장, 차수수 등 찰곡식으로 만든 인절미와 거피팥, 콩가루, 검은깨, 잣가루 등으로 고물을 입힌 찰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상원(上元) 즉, 정월대보름에는 묵은 나물, 복쌈, 부럼, 귀밝이술 등과 함께 약식을 만들어 먹었다. 까마귀가 왕의 생명을 구해주어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까마귀가 좋아하는 대추로 까마귀 깃털색과 같은 약식을 만들어 먹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들이 먹게 되었다고 한다.
중화절(中和節) 볏가릿대에서 벼이삭을 내려 커다란 송편을 빚은 후 노비들에게 자기 나이수대로 먹이는 풍습이 있었다. 새해 농사를 시작하는 마당에 수고를 아끼지 말라는 뜻에서 상전이 노비를 대접하는 것이다. 또 궁중에서는 왕이 재상과 신하들에게 자를 하사하였는데 이 역시 농사일에 힘쓰라는 뜻이었다.
삼짇날 만물이 활기를 띠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날로, 집안의 우환을 없애고 소원 성취를 비는 산제를 올렸다. 이날에는 화전놀이아 하여 찹쌀가루와 번철을 들고 야외로 나가 진달래꽃을 따가 그 자리에서 진달래화전을 만들어 먹었다.
한식날 어린쑥을 넣어 절편이나 쑥단자를 만들어 먹었으며,어린 느티싹을 넣은 느티떡을 해 먹거나 흔해진 장미꽃을 넣어 장미화전을 부쳐 먹었다. 혹은 석남잎으로 석남엽병을 만들기도 했다.
단오 단오차사를 거피팥시루떡을 만들어 지내고 앵두차사라 하여 앵두를 천신하기도 하였다. 떡으로는 수리취절편도 곧잘 해먹었으며, 햇쑥으로 버무리, 절편, 인절미를 만들어 쑥의 향취로 봄을 느끼는 떡을 해먹었다.
유두일 아침 일찍 밀국수, 떡, 외, 과일 등을 천신하고 떡을 만들어 논에 나가 농신께 풍년을 축원하였다. 절식으로는 상화병이나 밀전병을 즐겼고, 더위를 잊기 위한 음료수로 꿀물에 둥글게 빚은 흰떡을 넣은 수단을 만들어 먹었다.
칠석 올벼를 가묘에 천신하고 흰쌀로만 만든 백설기를 즐겼다. 삼복에는 깨찰떡, 밀설기, 주악, 증편을 많이 해먹었다.
한가위 햅쌀로 시루떡, 송편을 만들어 조상께 감사하며 제사를 지낸다. 이밖에 찰떡 곧 인절미도 만들어 먹었다.
중양절 추석제사 때 못 잡순 조상께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이날은 주로 국화주나 국화꽃잎을 띄운 향기로운 가양주와 함께 국화전을 만들어 먹었으며 또한 삶은 밤을 으깨어 찹쌀가루에 버무려 찐 밤떡도 즐겨 먹었다.
상달 당산제와 고사를 지내며 마을과 집안의 풍요를 빌었다. 고사를 지낼때는 백설기나 붉은팥시루떡을 만들었으며,상달 오일에는 팥시루떡을 시루째 마구간에 갖다 놓고 말이 병나지 않기를 빌었다.
동짓날 낮의 길이가 가장 짧아졌다가 다시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날은 특별히 떡을 만들지 않으나 찹쌀경단을 넣어 끓인 팥죽을 먹는 풍습이 있다.
섣달 골동반, 장김치등과 함께 팥소를 넣고 골무 모양으로 빚은 골무떡을 즐겨 먹는다.특히 섣달 그믐에는 온시루떡과 정화수를 떠놓고 고사를 지내고, 색색의 골무떡을 빚어 나누어 먹기도 한다.
6.떡의 풍속
떡과 관련된 일반 풍속으로는 먼저 액막이로 먼저 액막이로 떡을 만들어 돌리던 풍속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풍속은 어린이가 깊고 넓은 재래식 변소를 갔다가 간혹 밑으로 떨어져 변을 당하는 수가 있었는데, 이것을 변소의 '노일저대'신의 조화로 본 것에서 비롯되었다. 곧 어린이가 변소에 빠지는 것은 '노일저대'신이 배가 고파서 그리 된 것이므로, 변을 당한 어린이는 결국 죽게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런 때에는 무당을 데려와 넋을 들이고 '똥 떡'을 만들어 나누어 먹음으로써 액운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떡에 얽힌 풍속으로는 또 '떡 점'이라고 하여 떡이 쪄진 됨됨이로 점을 치는 풍속도 있었다. 떡 점은 대개 상원 날 하게 되는데, 먼저 한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각각 쌀을 가지고 와 모두 합하여 가루를 만든다. 이것을 제각기 자기 몫을 얻어 떡가루 밑에 자기 이름을 적인 종이를 깔고 한 시루에 찐다. 그러면 떡 전체가 다 잘 쪄지는 수도 있으나, '가끔 누구의 몫은 잘 익고, 누구의 몫인 설고' 하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 때 자기 떡이 설면 불길하고 잘 익으면 길하다고 믿었다. 떡이 설어서 불길한 사람은 떡을 먹지 않고 삼거리나 오거리 한복판에다 버리면 액을 면할 수 있다고 전한다.
떡으로 점을 치는 풍속은 팔월 한가윗날에도 있었다. 이 날은 송편을 많이 빚게 되는데, 송편이 빚어진 모양에 따라 미래의 장군이나 태어날 아기의 생김새를 점쳤던 것이다. 또, 송편을 씹어 속이 익었으면 아들, 설었으면 딸이라고 하는 등 태아의 성별을 점쳐 보기도 하였다.
통과 의례와 떡의 풍속 통과 의례란, 사람이 태어나서 생을 마칠 때까지 지나는 몇 고비의 의례를 말한다. 이들 의례에는 각각 규범화 된 의식이 있고 그 의식에는 음식이 따르기 마련인데, 가장 대표적인 음식의 하나가 바로 떡이다. 떡은 하늘과 조상에게 올리는 대표적 음식물이며, 각종 통과 의례는 민족과 사회와 가족의 규범적 행사 의례인 만큼, 그 풍속은 떡의 풍속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 삼칠일 아기가 태어난 지 21일째 되는 것을 축하하는 날이 삼칠일이다. 이 때가 되면 그 동안 아기에게 입혔던 쌀 깃이나 두렁이를 벗기고, 비로소 옷을 갖춰 입혀 몸을 자유롭게 해 준다. 또한, 대문에 달았던 금줄을 떼어 외부인의 출입을 허용하고 산실의 모든 금기도 철폐한다. 말하자면 이 날은 가족과 친지들로 하여금 찾아와서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고 산모의 노고를 치하하라는 뜻인 셈이다. 축하 음식으로는 흰쌀 밥에 고기를 넣고 끓인 미역국이 준비되고, 떡으로는 백설기가 준비된다. 이 날 만드는 백설기에는 신성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런데 삼칠일의 백설기는 아기와 산모를 속인의 세계와 섞지 않고 산신의 보호 아래 둔다는 의미에서, 집안에 모인 가족끼리만 나누어 먹고 대문 밖으로는 내보내지 않는 풍습이 있다.
◆ 백일 아기가 출생하여 백일이 되는 날을 축하하는 잔치이다.'백'이라는 숫자에는 완전·성숙 등의 관념이 있으므로 아기가 이 완성된 단계를 무사히 넘기게 되었음을 축하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날은 철저하게 어린이 중심으로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다. 그리하여 아기를 위한 백일상이 차려지고, 주변 사람들은 아기에게 필요한 선물을 가지고 가 백일을 무사히 넘긴 데 대한 경하와 함께 앞으로 건강하게 자라라는 의미의 축복을 한다. 백일상에는 흰밥과 고기를 넣고 끓인 미역국, 푸른색의 나물 등이 오르고, 떡으로는 백설기 붉은팥고물 찰수수경단 오색송편이 오른다. 이 때의 백설기는 삼칠일의 백설기와 같은 신성의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붉은 팥고물을 묻힌 찰수수경단은 아기로 하여금 액을 면하게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는 그 동안 산신의 보호 아래 두었던 아기를, 이 날을 기점으로 속계로 돌아가게 한다는 뜻도 된다. 이 밖에 오색송편은 평상시에 만드는 송편보다 작은 모양으로 예쁘게 5가지 색을 물들여 만드는데, 오색은 오행 오덕 오미와 같은 관념으로 '만물의 조화'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편, 백일떡은 삼칠일의 떡과 달리 되도록 여러 집으로 돌려 나누어 먹는다. 백일떡은 삼칠일의 떠ㄲ과 달리 되도록 여러 집으로 돌려 나누어 먹는다. 백일떡은 백 집과 나누어 먹어야 아기가 수명 장수하고, 또 큰 복도 받게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때문인지 백일떡을 받은 집에서는 빈 그릇을 그대로 보내지 않고 반드시 흰 무명실이나 흰쌀을 담아 보내는 풍속이 전해진다.
◆ 돌 생후 일 주년이 되는 날을 돌이라 하며 돌상을 차려 축하한다. 돌상에는 아기를 위해 새로 마련한 밥그릇과 국그릇에 흰밥과 미역국을 담아 놓고 푸른 나물과 과일 등도 준비한다. 떡은 백일 때와 마찬가지로 백설기·붉은 팥고물 찰수수경단·오색송편을 준비하고, 집안에 따라서는 대추·밤 등을 섞은 설기떡을 만들기도 한다. 이들 음식들과 함께 돌상에는 쌀·흰 타래실·책·종이·붓·활과 화살(돌쟁이가 여자일 경우는 활과 화살 대신 가위·바늘·자를 놓음)등을 놓고 돌쟁이로 하여금 마음대로 집도록 하는 의식이 행해진다. 이를 '돌잡힌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어린이의 장래를 점쳐 보기도 한다. 또, 돌에 수수경단을 꼭 해 먹이는 것이 풍속으로 전해 내려오는데, 그래야 낙상하지 않고 건강하게 자란다고 한다. 사이까지도 어른이 넘어지면, "돌 때 수수경단을 못 얻어먹었는가."라고 놀리는 풍습이 남아 있다. 돌에는 이와 같이 대대적인 잔치를 베풀지만, 해마다 오는 생일에는 조촐한 생일상을 차려 집안 식구들끼리 그 날을 기념한다. 이 때에도 생일떡은 반드시 만들며, 특히 10살 이전까지는 붉은팥고물 찰수수경단을 빠뜨리지 않는다.
◆ 책 례 이 의례는 지금은 사라진 풍속 가운데 하나인데, 아이가 서당에 다니면서 책을 한 권씩 땔 때마다 행하던 의례이다. 책례 의식은 어려운 책을 끝냈다는 축하와 격려의 뜻으로, 다른 음식과 함께 떡을 푸짐하게 만들어서 선생님과 친지들이 함께 나누었다. 이 때 책례 음식으로 만들던 떡은 백일이나 돌 때와 같은 작은 모양의 오색 송편이었다.
◆ 혼 례 혼례는 남녀가 부부의 인연을 맺는 일생 일대의 중요한 의식으로, 예전에는 육례라고 하여 여섯 단계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혼례와 관련된 떡으로는 우선 납폐의식에서 혼서와 채단이 담긴 함을 받기 위하여 신부집에서 만드는 봉채떡이 있다. 이 떡은 흔히 '봉치떡'이라고도 하는데, 찹쌀 3되와 붉은팥 1되로 시루에 2켜만 안쳐 윗켜 중앙에 대추 7개를 둥글게 모아 놓고 함이 들어올 시간에 맞추어 찐 찹쌀 시루떡이다. 이 때 주재료를 찹쌀로 하는 것은 부부의 금실이 찰떡처럼 담겨 있다. 또한, 7개의 대추는 아들 7형제를 상징하며, 떡을 2켜로 하는 것은 부부 한 쌍을 뜻한다. 함이 들어올 시간이 가까워지면, 신부집에서는 대청에 북향으로 자리를 편 다음 상을 놓고 상 위의 붉은색의 보를 덮은 뒤 그 위에 떡을 시루째 놓고 기다린다. 그러다가 함이 도착하면 함을 시루 위에 놓고 북쪽을 향해 두 번 절을 한 다음 함을 연다. 혼례식에 반드시 만드는 떡으로는 또 달떡과 색떡이 있다. 이 떡들은 혼례를 행하는 의례상 곧 동뢰상에 올리는 것이다. 동뢰상 맨 앞줄에 대추·밤·조과를 각각 두 그릇씩 배설한 다음 그 뒷줄에 황색 대두 두 그릇, 붉은팥 두 그릇, 달떡 21개씩 두 그릇을 놓고, 색편으로 암수 한 쌍의 닭모양을 만들어 수탉은 동쪽에, 암탉은 서쪽에 각각 배설한다. 이 때 만드는 달떡은 둥글게 빚은 흰절편으로, 보름달처럼 밝게 비추이고 둥글게 채우며 잘 살도록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고, 색편은 여러 가지 색물을 들여 만든 절편인데, 이것으로 만든 암수 한 쌍의 닭은 부부를 의미한다.
이 밖에도 혼례 때에는 초례를 행한 신랑에게 신부집에서, 현구고례를 행한 신부에게 시부모가 각각 상을 내리게 되는데, 이 때에도 여러 가지 떡을 하게 된다. 큰 상은 혼례 때뿐 아니라 회갑이나 희년등 경사스러운둔 날에 축하의 뜻으로 어른께 올리는 상이다.
한편, 신부집에서 사돈집으로 보내는 이바지 음식에도 떡은 빠지지 않았다. 이 때에는 대개 인절미와 절편을 만들어 동구리에 듬뿍 담아 보냈다.
◆ 회갑 혼례를 치루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살아가다 나이 61세에 이르게 되면 회갑을 맞는다. 회갑은 자기가 태어난 해로 돌아왔다는 뜻으로 '환갑'이라고도 하고, '화갑'이라고도 한다. 회갑연을 위해 마련되는 상차림은 큰상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높이 고여서 담아 놓으며, 한국의 상차림 중에ㅐ서ㅕ 가장 화려하고 성대하다. 혼례와 희수연 등에도 이러한 큰 상이 차려진다. 큰상차림은 지방이나 가문 또는 계절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 과정류·사탕류·생실과·건과·떡·편육·저냐 등을 30~70cm높이의 원통형으로 괴어 색상을 맞추어 배열한다. 이들 여러 음식 중에서도 떡은 특히 중요시되어 흔히 갖은편이라 일컫는 백편·꿀편·승검초편을 만든다. 만든 편은 직사각형으로 크게 썰어 직사각형의 편틀에다 차곡차곡 높이 괸 다음에 예쁘게 만든 화전이나 잘게 빚어 지진 주악, 각종 고물을 묻힌 단자 웃기로 얹는다. 또한 인절미 등도 만들어 층층이 높이 괸 다음 주악·부꾸미·단자 등을 웃기로 얹어 아름답게 꾸민다. 이 밖에 예전에?? 색떡이라고 하여 절편에 물감을 입혀 빚어 나무에 꽃이 핀 모양으로 만든 모조화를 장식하기도 했다. 한편 큰상에 높이 괴었던 푸짐한 떡들은 잔치가 끝난 다음 서로 나누어 먹는다.
◆ 제례
사람이 한세상 살다 운명하게 되면 고인을 추모하는데, 이 때 자손들이 올리는 의식이 제례이다. 이 때에도 조과·포(육포·어포)·면식·반·저냐·나물 등과 함께 떡을 하게 된다. 제례상에 올리는 떡은 편류(녹두고물편·꿀편·거피팥고물편·흑임자고물편)로 제례 전날 미리 쌀을 담그고, 편에 고물로 얹을 녹두와 팥, 그리고 흑임자를 물에 불려 거피해 둔다. 제사 당일날 새벽 일찍 담가 두었던 쌀을 가루로 빻아 둔 고물을 얹어 가며 켜켜로 안쳐 찐다. 정성스럽게 찐 떡은 여러 개 포개어 고이고, 그 위에 웃기로 주악이나 단자를 얹는다. 한편, 제례상에 진설하는 떡은 그 종류라든가 고임새가 지방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다. 예컨대, 강원도에서는 시루떡이나 절편을 하고, 충청도에서는 떡을 고일 때 지푸라기로 치수를 겨냥하면서 밑에서부터 시루떡·흰떡·인절미·증편·화전·주악의 순으로 쌓아올린다. 또한 제주도에서는 떡과 조과를 섞어 가며 괴어 올리는데, 그 순서는 시루떡·솔변·은절미·중박괴·약괴·절변이다. 이 밖에 평안도에서는 백설기를 크게 만들어 괴고, 함경도에서는 조찰떡(차좁쌀을 쪄서 떡구유에 넣고 찐 떡),시루떡(차좁쌀가루와 다른 잡곡 가루를 섞어 쪄서 묵함지에 넣고 잘 주물러 질기게 만든 떡),자바귀(찰떡을 쳐서 밀대로 얇게 밀어 썰어서 번철에 구운 다음 물엿을 바른 떡)등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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