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명-낙영산 (643m-681m : 괴산)
*일 시 : 2005. 8. 14(일), 제40차rtnah산행(17명), 날씨(맑다)
*코 스 : 공림리-공림사-섬목골-미륵산성 안부-낙영산-거북,토끼바위-삼거리-북릉-651봉 -578봉-헬기장-안부-삼거리-도명산-낙영사-마애불-철다리-삼거리 우측길-학 소대-능소대-능운대,첨성대-화양제3교-만동묘-금사담-화양제2교-매표소-주차장
*소 시 : 오전 9시 25분 ~ 오후 2시 10분 → 총 8Km, 4시간 45분간 소요
낙영산(落影山)
낙영산이란 뜻은 ‘산의 그림자가 비추다, 혹은 그림자가 떨어지다’라는 뜻이다.
신라 진평왕 때 당 高祖가 세숫물을 받아 들여다보니 아름다운 풍광이 어른거렸다. 이상하게 여겨 신하를 불러 비친 풍광을 그리게 한 후 수백 장의 복사본을 만들어 각지에 사람을 파견해 찾도록 했다. 당나라 안에서는 그 풍광을 찾지 못하던 어느 날 동자승이 나타나 이산은 동방 신라국에 있다고 알려줘 신라에까지 사신을 보냈으나 신라에서도 찾지 못해 걱정하던 중 한 도승이 나타나 이곳의 위치를 알려주니 당 고조는 그 산을 낙영산이라 명명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산이다.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의 화양구곡 남쪽에 위치한 낙영산(740 m)은 동북쪽으로 가령산(642m)을 거느리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조봉산(684m) 줄기와 맞닿아 있다. 또한 북서쪽으로는 도명산(643 m)이 한눈에 보이고, 남쪽으로는 속리산의 산줄기를 마주한다. 대개 공림사-낙영산-도명산-화양구곡으로 코스를 잡아 도명산을 오르면서 거쳐 가는 것이 통례다. 속리산 주변의 산들이 수려한 것처럼 낙영산의 산줄기도 갖가지 형상의 기암들이 솟구쳐 있어 마치 선계(仙界)를 딛는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산이다.
높이 642m 도명산.
도명산(道明山)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구곡 남쪽에 위치해 화양동계곡을 남쪽에서 품고 있다. 이 산의 입구인 화양구곡으로 들어서면 맑은 계류가 잔잔히 흐르고 경천벽-운영담-읍궁암-금서당의 자연풍경과 어우러진 명산으로, 암서재-화양서원터-만동묘정비 등의 문화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예로부터 천하 절승지인 도명산은 산허리를 가르는 미끈한 화강암 암봉과 정상의 암봉이 수려하고, 분재처럼 박혀있는 아름드리 노거수들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다. 정상 동북편 아래에 위치한 삼존마애불(삼체불)이 볼거리다.
청안에서 부흥리로 넘어가는 해발 350m의 질마재는 낯익은 고개다.
그 동안 수차례 학생들 수련장소나, 속리산 방면 산행장소로 통과했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피서나 연휴로 인해 예상대로 회원들의 참여가 저조한 아침이다.
사담리 공림사 입구 사담천엔 이른 오전이지만 많은 피서객들로 盛市다.
괴산!
문자 그대로 <槐木>이 많다는 <槐山> 땅이다.
충북 괴산에는 유난히 고목이 많다. 수령 천 년을 넘긴 은행나무와 수백 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도처에서 깊은 숨을 내쉰다. 천수를 누리는 괴산 땅의 고목이 유난히 많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빼어나다는 왕소나무를 비롯해 읍내리 은행나무, 장연 오가리 느티나무 등 4그루 고목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청천면 삼송리의 소나무는 천연기념물 290호로 높이는 약 13m, 가슴 높이의 둘레가 5m에 이르는 거수(巨樹)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영목으로는 느티나무가 으뜸이다. 그중에서도 장연면 오가리의 느티나무는 정겨움과 신성함을 동시에 보여주어 더욱 값지다. 천연기념물 제382호인 오가리의 느티나무는 두 그루를 함께 이른다. 언덕에 있는 느티나무를 상괴목, 길 입구에 있는 것을 하괴목이라 부르며, 그중 상괴목은 키도 크고 잎이 무성해 마을 사람의 휴식 공간으로 많이 이용된다. 공림사 앞마당에서 천 년을 살아온 느티나무. 수백 년 수령의 느티나무 20여 그루와 함께 절을 온통 노랗게 물들인다.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현재 총 530여 점에 이른다. 식물을 비롯해 동물, 광물, 천연보호 구역 등으로 나뉜다. 전국 각지에 남아 있는 은행나무 중 총 19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소나무 17그루, 느티나무 13그루에 이른다.
이중 괴산에는 소나무 2그루, 느티나무 1그루, 은행나무 1그루 등 총 4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이외에도 망개나무 자생지, 미선나무 자생지 등도 괴산의 천연기념물이다.
오전 9시 19분.
사담리 마을회관 앞이다. 도로 건너편 80m 지점에 있다는 淸沼와 杏風石은 차창에 비칠 리 없었지만 길게 목을 빼고 찾아봤다. 용대천 물길이 사담리로 들어서는 바위협곡을 지나자마자 이룬 널찍한 沼다. 최근 인공적인 보를 막아 그 유속이 변경됐다지만 沼 아래 깔린 고운 모래가 沙潭里란 마을 이름을 낳았다는 얘기다. 그 청소 서쪽 솟금산 북동릉 말미 바위벽에 세조가 직접 예서체로 음각했다는 杏風石이 있다.
세조께서 속리산으로 행차하던 중 이 마을을 지나다가 하룻밤을 유숙했다. 사담리 주변에 만개한 살구꽃 향기에 취해 세조가 밤새 잠을 설쳤다는 사연이 담긴 행풍석을 우측에 끼고 사담가든과 주유소가 있는 사담리 삼거리에서 공림사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公 林 寺 ↑>
공림사로 들어가는 삼거리에서 37번 도로를 따라 남쪽방면 약 4~500m 지점 사담마을에는 사담동천이 있고, 마을 뒷동산에는 망개나무자생지가 있다. 사담동천이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큰 바위에 사담동천(沙潭洞天)이란 암각을 했는데 洞天이란 산과 내(川)가 어우러진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뜻한다.
강화도의 ‘함허동천’도 같은 의미다. 이 마을은 통일신라 경문왕 때 자정국사가 세운 고찰과 괴산의 상징나무인 1010년 된 느티나무와 천연기념물 제266호인 망개나무가 서식지다.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사담리에 있는 망개나무 서식지로 면적은 1,116,046㎡(35만평)다.
이곳은 우리나라 희귀식물의 하나인 망개나무는 갈매나무과에 딸린 낙엽큰키나무로 일본의 남부지방과 중국의 중부지방에서 드물게 자라는 나무로 우리나라에도 천연 기념물 제 207호로 지정된 보은 속리산의 망개나무를 비롯하여 충주 월악산 계곡에 한 그루, 제천 지역에 한 그루 등 매우 드물게 서식하고 있다. 망개나무 낙엽 교목이며 높이는 15m 안팎으로 6월에 꽃이 피고 8~9월에 열매를 맺는다.
9시 25분.
공림사 계곡으로 나오고 들어가는 차량으로 뒤엉킨 사담리 주유소 앞 삼거리다. 간신이 좌회전, 500m 진입했다. 1995년 쯤 기억되는 낙영산 입구에서 희미한 당시의 흔적을 찾기란 처음부터 난감했다. 당 고조의 세숫대야에 비쳤다는 그 전설의 흔적을 찾으려는 시선만 부산할 뿐이다. 낙영산 등산로 안내판과 공림사를 가리킨 이정표가 반긴다.
<공림사 500m>
공림사 입구 대리석 기단에 사다리꼴 자연석에 새긴 낙영산 안내비다.
<청수에 비친 낙영산>
<낙영산은 산 전체가 깨끗하고 기묘한 바위로 이뤄져있고, 울창하게 골을 형성할 뿐 아니라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특히 바위틈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와 들꽃 톱풀은 뛰어난 생명력과 더불어 이곳의 경치를 아름답게 만든다. 험한 산기슭에는 천년고찰이 자리잡아 의미를 더해주고 있는 ‘충북의 자연환경 명소’ 중의 한 곳이다.
충북도지사, 괴산군수 >
9시 25분.
작은 주차장에서 하차, 좌측 계류를 건너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갔다.
<落 影 山 公 林 寺>
다포식 맞배지붕의 일주문을 지났다. 너른 주차장이 나온다.
이어 대형트럭 50여대 수용너비의 공림사 전용주차장은 마지막 염천 아래 자신의 몸을 태우는 황량한 사막 같다. 앞 편에 숲속에 은거한 아담한 공림사 전경이 눈에 들러왔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사찰이다. 背山臨水 낙영산과 좌청룡-우백호, 사담천이 임수이고 남산이 案山이란 생각이다.
공림사.
공림사는 법주사의 말사로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 861~874년) 때 낙영산 아래 자정선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자정법사가 법력이 있다는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여 경문왕이 그 인물됨을 알고 국사의 호칭과 공림사의 사명을 지어 액자를 하사했다고 전해지며 조선 중기에는 법주사보다 더 흥했으나 전란을 겪으면서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법주사 末寺로 절은 근래에 다시 지은 건축물이다.
임란 때 대웅전과 요사채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했고, 6.25때 공비들에 의해 그나마도 모두 燒失됐다. 현재의 건축물은 1972년에 건립한 관음전이 最古이고, 대웅전-산신각-삼신각-요사채-범종각-일주문 등은 1980년대 탄성스님에 의해 재건됐다고 한다.
경내에는 眞空堂 부도-대형맷돌(지름 1.5m)-수령 900년의 느티나무(둘레 8m로 괴산 보호수 제54호)-두꺼비바위와 공림사 사적비가 천년고찰 공림사의 옛 모습 일부를 대신하고 있다. 공림사 사적비는 조선 숙종 14년(1688)에 세운 것으로 경내의 요사채 동쪽 언덕 아래에 있는데 사각형 지대석 위에 복련(伏蓮)이 조각된 화강암 비좌(碑座)를 놓고 높이 177cm, 너비 90cm, 38.5cm의 대리석 비신(碑身)을 세우고, 팔작지붕 모양의 비관(碑冠)을 얹었다.
공림사 느티나무.
오래된 노거수들은 오랜 세월을 이어오는 동안 생존에의 끝없는 도전을 물리친 세월의 흔적을 고스라니 간직하고 있다. 우선 거대한 덩치가 땅과 이어지면서 비스듬히 뻗은 밑동 부근의 줄기와 노출된 뿌리에는 여러 가지 기괴한 모양의 고달픈 역사가 살아있다. 이렇게 상처가 아문 흔적들은 수없이 잘려나간 가지의 밑 부분이나 상처 등을 감싸느라 목리(木理)가 이리저리 비꼬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벌(burl)이라고도 부르는 이런 부분은 나무의 고통과는 달리 무늬 가 아름다우므로 고급가구재로서 비싸게 거래된다.
느티나무마다 얽힌 이야기가 많다. 잎이 푸르고 넓게 피면 그해에 풍년이 들고 반대로 잎이 모양이 좋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는 기상목으로서의 역할은 기본이다. 마을에서는 느티나무고목을 서낭나무로 숭배하거나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로 이용한다.
공림사 앞마당에서 천 년을 살아온 느티나무.
수백 년 수령의 느티나무 20여 그루와 함께 사찰의 넉넉함을 몸으로 느끼며 느티나무 아래 돌의자에 앉으면 누구나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에 잠겨 철인의 입장에 선다. 산행에 바빠 곁눈질할 새 없이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여유가 아쉽다.
고목 앞에서면 두려움이 경외감과 신성함의 경지에 이른다. 그래서 조상들은 오래된 나무를 신목(神木)이라 여기고 치성을 드리며 지극 정성으로 나무를 가꾼다. 서양에서 월계수를 신목으로 한다면, 우리는 느티나무를 신목으로 받든다. 때로는 靈木과 貴木으로 받드는 느티나무는 고찰의 고주나 평주로 먼 과거를 담고 오늘을 살고 있다.
무릇 인간은 나무를 떠나선 살수 없다. 수백 년 아름 고목이 우리네 고단한 생존에 많은 위안과 휴식터를 주었는데, 그중 첫 손에 꼽는 나무가 바로 느티나무다. 그 느티나무의 고향인 괴산의 공림사를 지나는 지금이다.
9시 32분.
좌측의 참깨와 옥수수 밭, 우측에 고구마밭을 지나 공림사 입구에 섰다.
일행들은 공림사를 돌볼 시간도 없이 입구 좌측 오솔길로 들어섰다.
40m 직진하면 일반인 화장실과 해우소, 이정표가 나온다.
<도명산 2.7Km>
전방 40m 거리에 사담매표소가 있으나 매표원은 없다.
9시 34분.
사위질빵과 칡넝굴이 각종 교목을 감고 올라가는 섬목골 입구다.
마지막 생식을 위한 요란한 매미소리는 생존을 위한 절규다. 흡연금지의 안내팻말을 일별하며 오솔길이라 생각되는 완만한 오르막엔 자연석을 이용한 박석이 깔려있다. 이미 한 땀을 쏟은 지 오래다. 각종 리본들이 무수하게 나뭇가지에 걸려있다. 달맞이꽃-달개비, 며느리배꼽, 꽃며느리밥풀이 언뜻 보인다.
9시 41분.
<속리산 08-01, 043-832-4347, 043-119>
첫 번째 다목적 표지판이다. 바닥엔 도토리거우벌레가 자른 지엽들이 狼藉하다.
9시 47분.
공림사에서 약 15분 거리에서 만난 지계곡엔 병아리 오줌줄기같은 계류가 보인다.
도계하면 바로 통나무로 턱을 만든 계단길 오르막이다.
<속리산 08-02, 043-832-4347, 043-119>
계단은 차츰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낙영산을 올라가는 깔딱지점이지만 심각한 경사는 아니다. 계곡 오르막을 따라 올라서는 행보가 비록 땀에 젖었지만 상큼하기 비길 데 없다.
2분 후 만난 계류는 아예 乾川이다.
10시 01분.
절고개 사거리 갈림 안부에 올라섰다. 북쪽 도명산 방면에서 몰려드는 바람은 차라리 태풍이었다. 이렇게 통쾌-상쾌-흔쾌한 3쾌의 산바람은 산꾼이 아니면 그 진수를 모른다. 여름산행의 최대 시혜다. 낙영산 서늘 성터사거리 안부엔 이정표와 미륵산성 안내판이 서있다.
<공림사 1.3Km, 도명산 1.4Km>
<미륵산성 충청북도 유형문화제 제000호>
조봉산과 낙영산을 연결하는 미륵산성 석축은 낙영산 정상에서 동쪽 헬기장 방면으로 일부와 낙영산-도명산 사이 능선에 일부 남아있다. 자연성릉 부분까지 합한 전체길이 5.1Km, 석축부분만 3.7Km로 산성으로는 대규모다.
麗末에 축성한 전형적인 방어용 산성으로 자연석을 이용해 쌓았는데, 일명 도명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성안에는 다기의 건물터가 남아 있고, 화양계곡-사담계곡-도명계곡으로 문을 냈다. 홀어미를 서로 모시려는 남매가 있었다. 아들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고, 누이는 성을 쌓아 먼저 끝내는 사람이 어머니를 모실 수 있는 내기를 했다는 전설에 따라 ‘남매성’이라 부른다. 현대적 감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극한 효심의 전설 앞에 옷깃을 여미자.
북쪽으로 직진하면 도명산으로, 서쪽인 좌측은 조봉산 능선이, 동쪽인 우측이 낙영산 방향이다. 동쪽의 다소 가파른 암릉은 자연성곽(릉)이다. 후미를 맡은 최영복이사님과 정재근 감사님, 그리고 김윤중씨 부부 일행들이 바튼 호흡을 뱉으며 올라왔다. 모처럼 참여한 이희용씨의 까치발 행보가 시원하다.
10시 9분.
정상을 향한 오름이다. 패장과 궁궁이, 흰색 모싯대 개체가 보이는 오늘의 낙영산 주능선은 인색한 야생화 분포다. 대신 붉은 수피의 강송의 육감적인 아름다운 곡선을 흠향하는 분위기가 자못 즐겁다. 늘상 지껄이는 표현대로 마치 성숙한 여인의 裸身과 같다는 말에 뒤따르던 젊은 정영복씨가 빙그레 웃음으로 공감한다는 표시다. 곁눈질로 흘끔흘끔 훔쳐보는 은근한 재미를 즐기라는 충고(?)를 건넸다. 섬목계곡 일대가 한눈에 보이는 저만치에 정상이 걸려있다.
10시 22분.
1시간 만에 올라선 낙영산 정상이다.
<낙영산 684m, 1996.11.24 괴산군청 청산회>
<도명산 1.8Km, 공림사 1.8Km>
낙영산 정상은 나무에 가려 전망이 제로다. 낙영산은 정상을 두고 이곳과 서쪽 10분 거리의 681봉이냐를 두고 논란이다. 그러나 정상비는 전자의 높이에 박혀있다.
모처럼 일행과 함께 기념사진을 담았다.
새벽 왕언니가 정감사님께 건넨 냉동시킨 과일과 반찬, 그리고 회원각자가 꺼낸 행동식이 선보이는 화려한 성찬이다. 정상에서 맞는 00000는 성적쾌감과 비교될 리 없다.
10시 38분.
정상에서 동릉을 타고 3분 거리에 위치한 전망장소로 이동했다.
노송들이 깊숙하게 뿌리를 내린 신선과 같이할 수 있는 그림같은 전망대다.
사담리 일원이 손금처럼 확연하고, 발밑에 깔린 공림사 전경이 빠짐없이 담았다.
북서방면으로는 도명산과 화양계곡이, 정북 방향은 학소대로 내리는 협곡과 암릉이, 동으로는 무영봉과 가령산이, 남동으로는 수안재-대왕봉-백악산 연릉 뒤로 대야산-청화산-조항산을 잇는 백두대간이 산파고를 이룬다.
10시 45분.
거북-토끼바위가 있는 암릉이다.
길쭉한 토끼의 두 귀가 달린 바위 모양이다.
준비한 셔터를 누르기에 바뿐 일행들이다.
동쪽으로 이동하는 수평능선이다. 고색창연한 석성에 묻은 이끼는 천년의 수명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10시 51분.
산성축대 끝머리 북쪽 도명산과 공림사 하산로가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 가장 현란한 조망장소인 헬기장에 올랐다. 발 빠른 일행 7명이 헬기장 동쪽 깊숙한 안부에 내려가 있다. 도명산을 향한 삼거리 지점을 놓친 그들의 Over walk다.
그들과 삼거리 갈림길에 합류한 시각은 11시 정각이었다.
머리가 벗겨질 작열하는 태양볕이 쬐는 너른 삼거리 갈림목 공터엔 건한 땅에 햇볕을 좋아하는 마타리 군집, 어수리, 도라지, 궁궁이, 원추리 개체가 맞아준다. 각종 버섯종류가 보이는 얕은 내리막 숲 터널 능선이다. 미륵산성을 이 능선을 따라 도명산 바로 아래 안부까지 연결되어 있다.
11시 10분.
651봉이다. 능선은 다시 깊숙한 내리막을 긋는다.
야생화를 볼 수 없다고 투덜대는 회원의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빈곤한 분포가 불만스럽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양색색의 버섯을 완상함이 최대한의 보상이었다. 삼거리 지점에서 이희용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측 내리막으로 꺾었다. 작은 안부에 내려섰다가 다시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어가는 능선이다.
11시 20분.
578봉 헬기장이다. 다소 뒤처진 후미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도명산 암봉이 저만치에 걸려있다.
8월 12일자 각 일간지에 실린 보도내용이다.
『개화(開花)호르몬 존재 한국학자 김민철 박사 꽃피는 메커니즘 규명
한국인 연구자가 식물이 꽃을 피우게 만드는 ‘개화(開花) 호르몬’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국내 박사 출신의 과학자가 꽃이 피도록 유도하는 새로운 작용 메커니즘을 밝혀내 세계적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식물은 낮의 길이를 비롯한 외부 환경에 따라 1년 중 특정 시기에 꽃을 피운다. 벚꽃은 낮의 길이가 길어지는 봄에, 벼는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가을에 꽃을 피운다. 낮의 길이 변화는 주로 식물의 잎에서 감지되지만 꽃은 줄기나 가지의 끝부분 ‘생장점’에서 핀다. 식물학자들은 이 사실에 근거해 잎에서 만들어진 가상물질이 생장점으로 이동해 꽃이 피도록 할 것이라고 추정했고 이 가상물질을 ‘개화호르몬’이라고 이름 붙였다.
독일 막스플랑크 발달생물학연구소 김민철(35) 연구원은 11일 “식물의 잎에서 낮의 길이가 짧아지거나 길어지는 것을 감지하면 ‘FT (flowering locus T)’라고 하는 단백질이 줄기나 가지 끝으로 분비돼 꽃을 피우게 한다는 것을 규명했다”고 밝혔다. FT 단백질이 생장점에 존재하는 FD 단백질과 결합해 생장점에서 꽃이 피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김 연구원은 “FT·FD 유전자들이 벼나 밀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이번 성과로 벼나 밀의 개화시기를 조절한다면 재배지역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호르몬의 분비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으면 계절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식물이 꽃을 피우게 할 수 있어 화훼농가 등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번 연구결과는 ‘사이언스’ 12일자에 발표됐다. 애기장대라는 식물을 대상으로 낮의 길이를 감지해 잎에서만 발현되는 FT 단백질이 개화호르몬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혀내 미국의 과학전문지 ‘사이언스’ 온라인판 12일자에 발표했다.
김 연구원은 경남 진주시 경상대에서 식물 면역체계의 새로운 경로를 밝히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논문은 2002년 3월 영국의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게재되기도 했다.』
유사한 내용의 결과는 이미 국내학자들의 논문도 몇 차례 접한바 있다.
인간의 손이 드디어 신의 손을 침범하는 게 아니가하는 의구심만 늘어난다.
인류의 복지와 관계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선은 아니라는 직관이다.
무릇 과학과 합리성이라는 점을 앞세운 인간두뇌의 한계가 어디까지일런가 모를 일이다.
11시 27분.
‘관람대’란 팻말이 서있는 봉우리에 올랐다.
3단석으로 쌓은 군사훈련장 산상 강의장소다.
저마다 이렇쿵 저렇쿵 관람대에 대한 느낌을 한마디씩 뱉는다.
11시 32분.
절고개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이은 코스와 만나는 안부다. 이 지점까지 미륵석성의 일부가 남아있고 산성안내판이 서있다. 우리 일행들로 호젓했던 낙영산 코스와 달리 이 지점부터는 많은 사람과 만나는 지점이다.
<공림사 ↔ 도명산>
지난 8월 11일자 보도에 파프리카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레드오션’(경쟁이 치열한 기존시장)을 탈출하는 농업의 ‘블루오션’(경쟁자가 없는 새로운 성장분야) 전략으로 전북 김제에서 2만평 땅에다 수박 농사를 짓던 조인기(44)씨 남매의 노력으로 빨강·주황·노랑의 예쁜 색깔 덕에 ‘채소류의 보석’이라 불리는, 피망 비슷한 채소 파프리카를 지난 7월 24일 마니산 종주산행 때 왕영주씨가 건네줘 접한 바 있다. 그냥 이름도 모르고 들라는 그네의 권고에 따라 먹었던 기억과, 지난 주 매봉산 산행 때 누군가 건네준 빨간 파프리카 하나가 배낭 안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보도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그 이름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보기엔 보잘것없던 파프리카가 국내에선 아직 낯설지만 일본에서는 한국산 파프리카 점유율이 70%에 육박할 만큼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는 얘기. 파프리카의 지난 3년간 수출액은 1억2900만 달러(약 1400억 원). 한류(韓流) 열풍을 탄 영화 수출액(3년간 1억400만 달러)을 능가한다는 효자채소라는데 흐뭇한 기분이다. 시름 많은 한국 농업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뉴질랜드 키위(감자처럼 생긴 과일)의 성공모델과 비슷한 전략이었다. 뉴질랜드 키위 농가는 ‘제스프리’라는 판매회사를 만들어 세계 시장을 겨냥함으로써 망하기 직전이던 키위 농업을 주력 수출품목으로 만들었다.
올 상반기 파프리카 수출은 작년 상반기보다 14.3% 증가했다. 연말까지는 수출액이 5000만 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다. 파프리카 한 품목이 영화 수십 편 수출한 몫을 거뜬히 해낸다. 기업 마인드로 무장하면 한국 농업도 막강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實例다.
우측으로 내려섰다
다시 숨찬 오름이다.
생강나무 군락지대인 수평 산사면을 잠시 지나면 다시 지그자그 오르막이다.
11시 40분.
좌측은 도명산 암봉 정상에, 우측은 학소대로 내려서는 삼거리갈림길이다.
<공림사 2.7km 도명산0.2km>
정상을 향해 가파르게 오르는 통나무계단과 철계단은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한적했던 낙영산 일대가 새삼 아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려든 인파를 비켜가며 통나무계단마다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신갈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개박달나무 아래 편한 지점은 선점한 산꾼들로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다.
<속리산 07-04, 043-832-4347, 043-119>
<첨성대 3.2Km, 학소대 2.8Km>
11시 50분.
도명산 정상이다.
정상은 巨巖들로 구성되어있다. 둥글고 좁은 바위정상을 오르고 내리는데 다소 불편했다.
바위정상에는 아무런 표식도 지표석도 보이지 않는다. 정상 서쪽지점에 오석으로 세운 표지석은 석판(이정표)과 석비(정상표지)가 T자로 놓여있다.
<화양3교 2.0Km ← (낙영산 2.2Km ↓) →학소대 1,8Km >
<도명산 해발 643m>
남쪽으로는 아름다운 낙영산과 능선 봉우리, 그리고 조봉산과 신산, 그 밑으로 도명산까지의 골짜기가 보이고 그 너머 백악산의 줄기가 잇는다. 그 끝에 속리산 정수리가 푸른빛이 꿈결처럼 다가선다. 서북쪽으로는 갈미봉과 줄기능선이, 동쪽으로는 가령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대야산-장성봉을 잇는 대간이 염천의 햇살에 녹아든다. 북쪽으로는 화양구곡들이 일목요연하고, 멀리 군자능선과 칠보산-악휘봉 줄기가 아련하다. 따가운 햇살을 피할 곳도 없었고, 게다가 무풍지대라 오래 머무를 입장이 아니다.
12시 정오.
삼거리 갈림길과 정상 중간 지점인 바위전망대에 내렸다. 일행 일부가 숨을 고르며 더위를 닦고 있었다. 일행들과 함께 정상과 학소대 갈림길 삼거리에 내렸다.
오랫동안 정상에 올라간 일행들이 내려오길 기다렸다.
12시 28분.
삼거리에서 지척인 낙영사 터 삼채불마애석불 앞에 섰다.
마애삼존불상이라 설명된 철판 설명문이 세워져 있고 큰바위에 흐릿하게 영상이 잡히는 삼체불의 표정도 각색이다.
<괴산도명산 마애 삼존불상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41호>
마애석불은 도명산 제1 경승지다.
麗初의 것으로 추정되며, 최고 30m나 되는 수직암벽에 고려시대 마애불상 3구로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 140호로 지정되어있다. 바위들은 몇 쪽으로 나누어져 있고 30여 미터 정도의 수직암벽에 부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이 마애불상은 화양 계곡의 남쪽에 솟은 도명산의 정상 가까이에 솟은 높이 약 20m, 폭 50m 가량의 커다란 바위에 2구의 불상이 새겨지고, 왼 편의 높이 10m의 작은 암벽에 1구의 불상이 새겨진 3구의 불상조각으로 ㄱ자로 꺾어진 암벽에 조각된 이 불상들은 장대할 뿐만 아니라 선각불상(線刻佛像)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본존불은 현재의 높이가 9.1m 정도이지만 깨어진 부분까지 감안한다면 15m가 넘는 대불(大佛)로 얼굴 부분만 2m나 된다.
부처님의 발끝 바위 밑 지점엔 맑은 석간수가 솟고 있다. 샘물 깊이가 만만찮다. 사계절 마르지 않는 샘물이라고 판단했다. 물 컵에 가득 떠서 마셨다. 물맛을 느낄 새 없이 바짝 타버린 입안과 내장이 서늘하다. 마애불이 만들어낸 聖水가 중생의 가슴에 남아 있는 갈등과 탐욕의 찌꺼기 일부라도 씻겨내는 기회라면 더없는 행운이리라.
부처님이 주는 샘물보시다. 한 치의 機心이 없는 虛心에 잠시 잠겼다.
학소대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 너른 공터에서 만난 딱총나무, 쪽동백나무의 명찰을 바라본 사람마다 한마디씩 거든다.
6월이면 수줍은 산 색시처럼 땅을 향해 만개한 숱한 흰 꽃의 쪽동백나무 총상화서가 환하게 다가든다. 잎이 커서 넙죽이나무, 머릿기름이 나온다하여 山아주까리나무라 불리는 쪽동백 기름을 바르면 머리의 이(虱)가 완전박멸할 정도로 효과가 크다.
쪽종백나무의 용도는 다양하다.
수피에서 나오는 액은 안식향 성분이 있어 방부제나 향료의 재료로 이용하고, 나이테가 안 보일 정도로 결이 곱고 속이 깨끗해 그림이나 글씨를 써넣는 화방도구로 사용한다. 쪽동백은 거꾸로 달린 鐘形의 열매가 때죽나무와 유사하다.
쪽동백은 잎 모양이 손바닥처럼 넓고 원형에 가깝고 뒷면에 털이 촘촘하고 총상꽃차례(원뿔모양)라면, 때죽나무는 잎이 타원형이고 뒷면 큰 잎맥에만 털이 있고 꽃은 2~5개씩 달린다. 쪽동백 흰 꽃이 동백꽃처럼 봉우리채로 장렬하게 낙화해 싸락눈처럼 바닥에 깔려있다. 눈물처럼 후두둑 떨어진 쪽동백꽃과 동백꽃과의 공통점을 생각한다면 말미에 ‘~동백’이라고 붙인 이유가 나변에 있는 게 아니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에 시간을 흘리는 대신 각자 작고 예뿐 마음을 담고 자리를 털었다.
<구영폭포 2.4km, 도명산 0.2km>
원목나무턱 계단을 따라 급경사 내림이다.
철계단과 철다리 잔도, 원목계단이 반복됐다. 당단풍 푸른 잎이 무성하다. 어른 손바닥 크기의 찰피나무 원형 잎새 하나를 땄다. 계단길이 끝나고 너른 내리막에 일행모두가 한 그룹이 되었다. 역으로 이 방향으로 도명산을 오른다면 꽤나 지루하고 힘이 들 코스라고 모두들 뱉는다. 계류소리가 들려오는 지점이다.
12시 54분.
삼거리에서 우측길로 이동했다.
<삼체불 1.5km, 학소대 1.1Km, 도명산 1,7 Km>
<속리산 07-02, 043-832-4347, 043-119>
수레길로 통하는 수평길이다.
우측 지계곡의 계류가 보이는 그대로 玉流다.
도명산 등산로에는 나무마다 이름표가 붙어있다.
딱총나무, 생강나무, 느릅나무, 신갈나무, 진달래, 노린재나무, 쪽동백, 소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노린재나무 등 많은 수종의 나무에 설명서를 달아 자연교육장으로도 일익이다.
오후 1시 4분.
<삼체불 2.5km>
<속리산 07-01, 043-832-4347, 043-119>
오후 1시 14분.
학소대 철다리에 들었다.
화양 제8곡, 자연의 모든 소리와 풍광을 한눈에 꿸 수 있는 곳에 학이 둥지를 틀었다는 학소대(鶴巢臺) 주변은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로 덮여있다.
화양9곡이란 조선 중기 때 이곳에 은거한 우암 송시열선생이 계곡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조선시대 지식인의 미적 유토피어인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화양9곡이란 이름을 남겼다. 9개의 명소에 각각의 이름을 지어 불렀다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소재의 절승지를 말한다. 계곡은 대야산에서 흘러내린 선유동계곡의 물과 합수를 이룬 송면리에서 달천과 합류하는 화양리까지의 5㎞ 구간에서 굽이굽이 선경이다.
무이산 (武夷山) 무이구곡을 두고 읊은 옛말이다.
山無水不秀 水無山不淸 산은 물이 없으면 수려하지 않고, 물은 산이 없으면 맑지 못하고
曲曲山回轉 峯峯水抱流 골짜기 골짜기마다 산이 돌아가고, 봉우리 봉우리마다 물이 감아 돈다.
九 曲(白雲巖)
八 曲(品字巖)
七 曲(三仰峯)
六 曲(響聲巖)
五 曲(更衣臺)
四 曲(大藏峯)
三 曲(小藏峯의 홍교판과 가학선관)
二 曲(玉女峯)
一 曲(大王峯)
화양구곡 제9곡인 ‘파천’은 우람한 넓은 반석이 계곡 가운데 깔려있어 신선들이 여기서 술잔을 나누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파천이다. 파천은 학소대와 자연학습원 중간에 위치해 우리의 행선에서 볼 수 없는 지점이다. 계류를 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찌감치 뛰어드는 일행도 있었다. 가능하면 주차장 가까운 곳에서 땀을 씻기로 하고 화양구곡과 평행하는 아스팔트 평지를 내려갔다.
풍수지리설에서는 일반적인 생각과 반대로 울뚝 솟은 산을 陰이라 하고, 내나 강처럼 오목한 부분을 陽이라한다. 음양이 적절하게 합치하는 화양구곡의 빼어난 지리는 아무리보아도 예사가 아니다. 차근차근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완상하는 구곡의 진수를 음미하고 천착하는 기회가 최대 시혜이며 보너스다.
오후 1시 19분.
제7곡, 용이 누운 모양의 와룡암(臥龍岩).
흘러가는 물소리와 바람소리는 이승의 소리가 아닌 천상의 소리다. 우리는 지금 천상을 딛고 있다. 화양구곡천변에 은사시 나무가 군집을 이룬다. 사시나무와 은백양나무가 교접한 은사시나무의 수피는 눈으로도 쉽게 구분되는 수종이다.
제6곡, 바위가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자태의 능운대(凌雲臺)와,
제5곡, 별을 관찰하리만치 바위를 층층이 쌓듯 우뚝 솟아있는 첨성대(瞻星臺)를 지났다.
‘愛己愛他’
최근 공개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친필휘호다.
자신을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는 의미다.
봄의 끝(5월31일)을 춘미(春尾)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렇다면 여름의 끝인 夏尾(?)인가?
오늘 하미에서 듣는 매미소리조차 盛夏와 달리 들린다. 온몸으로 땡볕을 받아들여 제 몸을 태우는 듯 울어대던 매미소리도 나른하게 풀려있다. 노쇠한 여름의 橫步가 질척거린다.
1시 30분.
화양 제3교를 지났다.
제4곡, 거울처럼 맑은 담 바닥에 반짝이는 금빛 모래가 널려 있다는 금사담(金沙潭)이다.
우암은 이곳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 높은 암반위에 암서재라는 정자를 지어 글을 읽고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주변의 노송이 어우러진 기막힌 풍광이다.
제3곡, 읍궁암(泣宮巖)으로서 송시열이 효종의 승하를 애도하며 새벽마다 엎드려 통곡했다는 희고 둥근 거대한 바위다. 요지마다 영업소와 피서객들의 물놀이로 아수라장이다.
화양서원 노정비 좌측에 만동묘 건축물이 들어서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유적지가 복원 중에 있다는 얘기대로 거의 완성단계에 들어선 느낌이다. 송시열의 문인인 권상하 등 유생들이 송시열 사후에 그를 祭享하는 사원을 전국 37곳에 세웠는데, 이곳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서원인 화양서원이 있던 자리다.
제2곡, 거울처럼 맑은 물에 구름 그림자가 비친다는 운영담(雲影潭)을 지났다.
1시 40분.
일행 10여명이 땀씻이 장소로 잡은 계류에 들었다.
물빛은 생각보다 흐렸지만 수온은 물놀이에 적당했다.
그렇게 20분을 흔적없이 보냈다.
오후 2시.
화양제2교를 건넜다.
이 지역 011휴대폰이 불통이다. 주차장에서 차량통행을 관리하는 젊은이의 016휴대폰으로 기사와 통화했다. 예서 약 5분 내외 거리에 예약한 정화식당이 있다는 전갈이다. 물놀이로 쳐진 최백호씨 일행을 기다렸다. 그들과 합류하여 계곡입구에 우뚝 솟은 바위가 하늘을 찌를듯하다는 제1곡 경천벽(擎天壁)을 지났다. 경천벽은 여름 숲이 덮여있었다.
2시 6분.
화양분소 매표소에 닿았다. 예서 식당은 지척의 거리다.
사담리 공림사 주차장을 출발, 공림사-섬목골-미륵산성 안부-낙영산-거북,토끼바위-삼거리-북릉-651봉-578봉-헬기장-안부-삼거리-도명산-낙영사-마애불-철다리-삼거리 우측길-학소대-능소대-능운대, 첨성대-화양제3교-만동묘-금사담-화양제2교-화양분소매표소를 통과해 주차장에 이르는 8Km 거리를 4시간 45분을 소비했다.
야박한 관광지식당에서의 어설픈 식사시간을 보냈다.
가능하다면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한이 있더라도 소읍이나 도시근방 식당을 선택하자는 의견이다. 현지를 떠나 귀로에 오른 시각은 오후 3시 18분이었다. 예상대로 고속도로는 철지난 관광지처럼 한산했다. 더도 덜도 말고 오늘만 같은 도로사정이라면 하는 간곡한 바람이다.
오후 6시 30분.
하천에 걸린 태양이다.
화곡역에 내린 소수일행들의 뒤풀이와 주석이 늦은 시간까지 이었다.
모처럼 정영복-김영선씨 두 소장파가 합석한 자리다.
정감사께서 컨디션조절에 실패했나보다. 표정이 맑지 못하다.
밤과 여름이 동시에 익어가는 비틀거리는 시간이다.
김병찬씨 휴대폰을 빌어 천안의 테니스대회에 참석했다는 최자영씨와의 통화도 있었다.
다음 자리로 옮긴 김병찬-김영주씨와의 주석이다.
뒤늦게 합석한 김제범-왕영주씨의 성격도 원만하다는 생각이다.
친지들과의 어울림과 술을 마다않는 그들의 정열이 도탑다.
*교통 :
-승용차
1) 중부고속국도 증평IC-510번 지방도(증평 방향)-증평-592번 지방도(부흥 방향)
-청안면부흥리4거리(직진)-37번국도-청천3거리-금평3거리에서 좌회전, 32번지방도
-화양구곡입구 화양교-화양매표소
2)중부고속국도 증평IC-510번 지방도(증평 방향)-증평-592번 지방도(부흥방향)-청안 면부흥리4거리(직진)-37번국도-청천3거리-32번지방도(보은/상주방향)-사담리주유소
3)도로안내 : 중부고속도로 증평 I.C -> 증평읍내 -> 592번 지방도로(청안면 방면)
-> 질마재 -> 부흥사거리 -> 금평삼거리 (좌회전) -> 화양1교 ->
화양동 종합주차장 (증평에서 40∼50분 소요)
-대중교통 :
서울동서울터미널~괴산행 1일 14회 운행 (괴산~사담, 사덤~괴산 1일 각각6회 운행)
괴산시외버스 터미널 043-834-3351
청주시외버스터미널(TEL:043-235-8842∼3)~송면행 15분 간격 직행버스 이용,
충북자연학습원 앞 하차
청주/괴산~청전행 버스이용-청천-사담리(1일 5회 운행 시내버스, 사담리 공림사입구하차
1. 청주시외버스터미널
1)송면행(화양동계곡입구 경유) 첫차:07:20,막차:19:30
2)사담리→청천행 시내버스(13:20분,16:40분,19:10분)
3)청천→청주행 시외버스(13:45분,14:45분,15:25분,16:55분,17:10분,19:00분)
4)청천→동서울(09:15분,13:25분)
2. 현지교통 : 1) 서울 → 청주(고속버스(1일 35회) 1시간40분소요
2) 청주 → 청천 직행버스(1일 13회) 50분소요
3) 청주 → 화양동 직행버스(1일 26회) 1시간 10분소요
4) 청천 → 화양동 시내버스(일 7회) 15분소요
*숙식
-화양분소
능운대휴게소 (043-832-1426), 80명까지 민박 수용 가능. 매운탕, 파전, 도토리묵, 동동주
금성민박 (043-832-4351)
청화식당 (-832-4310), 도원가든(-832-4484,) 매화식당 (-832-4566)
운영상회 (-832-4365), 청주식당 (-832-4581), 개미식당(-832-4282)
-사담리
사담가든(043-833-6611), 사담식당(-833-0825), 어울마당(-833-1257),
사담관광농원(-833-9934), 행풍석방면 민박집(-833-0825)
현지숙박 : (민박안내) 청천농협 (043-832-4095)
레이크힐스 호텔속리산 043-542-5281~8 132실 내속리면
속리산 유스타운 043-540-7777 128실 내속리면
속리산 흥운 유스호스텔 043-542-5798-9 52실 내속리면
속리산 로얄호텔 043-543-3700,368 43실 내속리면
속리산 아람 호텔 043-543-3791∼2 60실 내속리면
속리산 은하장 043-543-6611 25실 내속리면
속리산 하얀장 043-543-6336 15실 내속리면
*기타 :
화양구곡(화양동계곡) (충북 괴산군)
관 리 청 : 속리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화양분소(043-832-4347)
홈페이지 : 괴산군 홈페이지 goesan.chungbuk.kr
입장료 : 개인 어른(1,300), 청소년(600), 어린이(300) / 단체 - 청소년(500), 어린이(250)
도로안내 : 중부고속도로 증평 I.C -> 증평읍내 -> 592번 지방도로(청안면 방면)
-> 질마재 -> 부흥사거리 -> 금평삼거리 (좌회전) -> 화양1교 ->
화양동 종합주차장 (증평에서 40∼50분 소요)
정보제공자 : 1) 367-800 충북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125.
괴산군청 경제관광과(043-830-3228)
2) 367-840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277번지
국립공원관리공단 속리산 관리사무소 화양동 분소(043-832-4347)
(작성기준일 2004년 10월 18일)
................
이규태코너] 아리랑 뿌리이설 : 2005.08.14
아리랑은 한국의 통시대(通時代) 통공간(通空間)을 수렴하는 노래로 한국적 정서의 원형질이요 공통분모다. 그 많은 아리랑은 두 개의 기본정서가 조화돼 이루어진 데에 예외가 없다.
떠나있거나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데 떠나가야 하고 떠나 살아야 하는 이탈애수(離脫哀愁)요 굳이 떠나가려거든 발병이 나라는 둥 이탈에 수반된 저항애수(抵抗哀愁)가 그것이다. 곧 오순도순 살고 싶은 강한 정착 정서와 갖은 외압으로 떠나살지 않을 수 없게 한 데 대한 저항 정서의 복합이 아리랑으로 구현된 것이다.
한데 그 아리랑의 말뿌리에 대한 정설이 없다. 없는 만큼 이설도 많다. 그 유력한 이설을 들추어본다. 중국 동북지방의 제국(帝國)이던 금나라의 ‘금사(金史)’에 보면 거란족이나 여진족들의 향관(鄕貫)을 표시할때 모(某) 산(山) 사람이라 했음으로 미루어 산은 본관이요 바로 고향이었다.
산의 여진말은 아린(阿隣) 또는 아리라다. 한국말이나 여진말 퉁구스말 터키말은 우랄·알타이어족으로 형제말들이며 여진말의 아린은 터키말의 알리 알린 알리라, 퉁구스말의 아리라와 뜻이 같다. 곧 아리랑은 고려시대 이래 한반도에 귀화해 살았던 거란족·여진족이 그들이 떠나 살아야했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망향의 노래였을 것이라는 설이다.
귀화한 이들은 노래와 춤으로 업을 삼았고 이들의 가무풍(歌舞風)이 상류사회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의 분산 정착촌과 아리랑의 고장이 무관하지 않다는 설도 이를 뒤받침한다. 일본 전통가요인 발놀림 답가(踏歌)의 후렴의 ‘아라레요’도 북방민족들이 한반도에 전수시킨 무당춤이라는 설도 있어 북방 샤머니즘 문화와 아리랑의 고리를 가늠하게 한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한국과 러시아 학자들이 바이칼 호수변 시베리아 소수민족촌에서 유라시아 학술포럼을 열고 있는데 시베리아 남부지방에서 쓰이는 아리랑과 쓰리랑이라는 말이 고대 북방 샤머니즘에서 영혼을 맞이하고 그 이별의 슬픔을 참는다는 뜻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한다. 곧 시베리아 샤머니즘 문화권에 속하는 한반도인지라 그 무당문화가 이탈애수와 저항애수가 복합된 아리랑으로 결실됐다는 것이다. 아리랑 어원설에 보다 접근된 발굴인지라 적고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