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綾陽君) 종(倧)이다.
그 인조 곁에는 아주 중요한 인물 김류(金瑬 1571~1648)가 있다.
능양군 종과 김류가 '그림 한 장'으로 맺어진 기이한 인연은 이렇다.
선조는 여러 손자들을 모아놓고 그림이나 글씨를 써서 바치게 했다.
이 때 인조 능양군 종은 말을 그렸다.
선조는 이 인조가 그린 말 그림을 이항복(李恒福)에게 하사했다.
이항복이 북천으로 귀양가면서, 김류와 같이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는 이 그림을 김류에게 주었다.
김류는 이 그림이 누가 그린 것인지를 모르고 자기 사랑방 벽에 걸어 놓았다.
어느 날 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밖에 나갔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길가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그때 웬 계집아이가 비가 멈출 때까지 잠시 사랑에 들라고
여러 차례 권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그 집 사랑방에 들어갔다.
마침 주인은 없었다. 그 방안을 둘러보니 벽에 그림 한 장이 걸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바로 인조 자신이 어렸을 때 조부인 선조 앞에서 그린 말 그림이 아닌가.
잠시 후 주인 김류가 들어왔기에 인조가 물었다.
"이 그림을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마침내 백사 이항복이 선조로부터 받은 것을 귀양살이 갈 때 다시 김류에게 준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잠시 후 안으로부터 진수성찬으로 차린 교자상이 나왔다.
어찌된 일이냐고 부인에게 물으니, 부인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간밤에 임금님이 집 앞에 와서 머무르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계집종이 이상하게도 점잖은 분이 비를 피해 집 처마 밑에 서 있다 하기에 나가 보니
과연 꿈에 본 바로 그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극진히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김류는 이항복이 인조의 그림을 자기에게 부탁한 뜻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로 김류는 능양군과 왕래하여 친분이 생렸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류·이귀·이시백·신경진·최명길 등이 모두 백사 이항복의 문인들이니 기이한 일이었다.

인조반정의 주역들이 모여 칼을 씻으며 '혁명'의 결의를 다진 세검정이다. 구한말 때 세검정의 사진이다.
김류는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서 순절한 김여물의 아들이다.
그는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처음 관직은 음직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1596년(선조 29년) 정시문과 을과로 급제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 시강원 사서와 부교리를 지낸 후, 외직(外職)으로 나가 강계부사를 역임하였다.
1614년 북인 정권 아래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로 승진되어 동지사,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620년 이귀 등과 반정을 꾀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1623년 다시 거의대장에 추대되어 이귀, 신경진, 이괄 등과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이 반정의 공로로 병조참판에 제수되고 곧 병조판서로 승진되어 대제학을 겸하는 동시에 승평부원군에 봉해져 인조반정의 공신이
되었다.
1623년(광해군 15년) 서인일파가 중심이 되어 능양군을 옹립한 정변을 일컬어 ‘인조반정’이라 한다.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第)와 숭명반청(崇明反淸)을 명분으로 서인들 중 김류와 이귀, 김자점, 이괄 등이 중심이 되어
정변을 추진하였다.1623년 3월 13일 밤에 이들은 병력 육칠백이 홍제원(弘濟院)에 모여 김류를 대장으로 삼았다.
능양군은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고양 연서역에 나아가 장단부사 이서의 병력 7백 명과 합류하여, 먼저 창의문(彰義門)을 돌파하고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광해군은 반군이 대궐에 들이 닥치자 피신하고 능양군은 보새(寶璽)를 거두어 경운궁에 유폐중인 대비 김씨에게 바치니, 대비는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새로운 왕으로 즉위시키는데, 이가 곧 인조이다.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된다.
대비 김씨는 광해군의 죄를 들어 처형하려 하였으나 새 왕의 간청으로 서인으로 폐하고 강화로 귀양보냈으며,
북인의 이이첨, 정인홍, 이위경 등 수십 명이 참형에 처해지고 2백 명이 유배되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의 김류와 이귀 등 33명은 세 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훈호를 받고, 각기 등위에 따라
관직을 내렸다.
반정 이듬해 반정 세력들간의 갈등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김류는 병조판서로 남행하는 인조를 호위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우찬성으로 관직이 옮겨졌고, 이듬해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가도에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찾아가 그의 횡포를 막고, 명나라 사신의 반송사가 되어 그들의 불만을 시문으로
회유하는 등 외교에도 수완을 보여 주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가 우리 군이 산성중심으로 방어체제를 구축한 것을 미리 알고 도성을 직접 공격해 오자
인조를 강화도로 모시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론이 엇갈린 가운데 적이 이미 서울 교외까지 진격해 오자 인조를 비롯한
군신은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되었다. 이듬해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주화파의 뜻에 따라 송파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1644년 심기원이 반역을 일으키자 신속하게 평정한 공으로 또 다시 영의정이 되어 영국공신 1등에 녹훈되고 순천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이해 여름에 소현세자가 죽자 세제(世弟)인 봉림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고 스스로 세자의 스승이 되었다.
1646년 소현세자빈 강씨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다가 사직한 뒤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김류는 임진왜란에 이어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었으며 연이어 이괄의 난, 이인거의 난, 유효립의 역모사건,
심기원의 반역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적 곡절 속에서 한 생을 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