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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 무협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5천년 동양의 지혜와 문화를 꿰뚫는 것이다! 삼국지, 서유기, 수호지와 어깨를 견주는 격조 높은 중국문학의 원류!
2007년 일부 중국 중학교 교과서가 개편되면서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루쉰의 《아Q정전》이 빠지고 김용의 《천룡팔부》가 수록된 것이다! 16편의 작품을 쓰고 절필한 지 어언 30여 년. 하지만 김용은 여전히 각종 설문조사에서 루쉰과 함께 ‘중국의 문화 위상을 보여주는 최고의 인물’ 1, 2위를 다툰다. 김용 무협소설의 젖줄은 중국의 전설·시·역사, 그리고 유가, 불가, 도가를 아우르는 철학. 스스로 《명보》를 창간해 정치평론가로 활동한 김용은 수많은 역사서를 수차례 통독하여 쌓은 방대한 지식과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실제와 상상을 절묘하게 교직한다. 그의 열혈 독자들 가운데 지식인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조삼부곡》의 시대배경은 송ㆍ원ㆍ명에 걸치는 혼란스러운 왕조 교체기. 이는 소설의 극적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전란과 피난생활을 몸소 겪은 자신의 삶과 격동 그 자체였던 중국 근현대사를 반영한다. 그의 주인공들은 현실의 중력을 가뿐히 털어내고 강호,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그 상상의 공간 위를 날아오른다.
20세기 대표 중국고전, 일단 읽어라! 재미있다! 하지만 알고 읽으면 백배 재미있다!
옛 복장을 하고 있지만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이 현대적인 김용의 인물들(《사조영웅전》의 황약사, 《신조협려》의 양과와 소용녀, 정파와 사파 사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의로움을 구했던 《의천도룡기》의 장무기 등)은 기성체제에 순응하지 않으면서도 의義를 지키며 자유를 추구한다. 장대한 스케일과 힘이 넘치는 스토리 구성에 생기를 불어넣는 독특하고 다양한 캐릭터들에서 독자들은 의를 배우고 지혜와 용기를 깨친다. 고전은 방대한 지식과 인문학적 소양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김용의 매력적인 문장은 부드러우면서 우아하다. 수많은 평론가들이 김용 문장을 문어체 문장의 모범으로 꼽는다! 해외의 화교들이 중국어와 문화를 배울 때 김용 소설은 필수 교과서와도 같다. ‘중국인이 있는 곳에 김용의 소설이 있다’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사조삼부작의 완결판 의천도룡기! 강호라는 가상공간에 인간적 숨결과 고뇌를 불어넣다!
《의천도룡기》는 《사조삼부곡》의 완결판. 《사조영웅전》《신조협려》《의천도룡기》 3편으로 이루어진 《사조삼부곡》은 남송 시기부터 원을 거쳐 명의 건국 이전까지의 긴 역사적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대륙을 놓고 한족과 거란족, 몽고족 등 이민족 간에 치열한 대결이 펼쳐졌다. 남송, 금, 원 교체기 속에서 칭기즈칸, 쿠빌라이, 왕중양, 주원장 등의 역사적 실존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과 조화롭게 어울리며 김용 특유의 서사가 생성된다. 곧 박진감 넘치는 무협의 세계가 유교, 불교, 도교 사상 속에 깃들어 있고, 이것이 실제 역사와 맞물리며 참신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대만에서 천만 부 이상, 중국에서 1억 부 이상 판매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운 중국 대표작가 김용의 《의천도룡기》가 한국 최초의 정식 계약본으로 출간된다. 《의천도룡기》는 김용의 1961년작. 김용이 2003년과 2004년에 걸쳐 세심하게 고증을 거쳐 수정한 최종 3판본 《의천도룡기》는 김용이 직접 세심하게 고증을 거쳐 수정한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에 이어 작가 자신이 인정한 국내 유일의 김용 작품이다. 《의천도룡기》에서는 ‘의천검’과 ‘도룡도’의 행방을 둘러싼 무림 고수들의 혈투, 혼원벽력수 성곤에게 원수를 갚기 위한 금모사왕의 분투, 명교인들과 육대문파(소림, 무당, 아미, 곤륜, 공동, 화산) 간의 오래된 은원관계, 장무기가 조민, 주지약, 아소, 은리 등과 펼치는 로맨스 등의 큰 사건들과, 그 사건들을 이어주는 다양한 인물과 애끓는 사연이 서로 복잡하게 뒤얽히면서 강호를 수놓는다. 김용은 〈구양진경〉을 통해 소림과 무당 사이의 연원관계를 구성하고, 의천검과 도룡도의 연원과 탄생을 〈구음진경〉과 〈무목유서〉의 행방과 연결시키고, 이로써 장무기를 곽정과 황용, 양과의 계승자로 만들면서 강호에 역사와 생명력을 부여한다. 100명에 이르는 인물들은 모두가 독특한 자신만의 성격과 사연을 갖는다는 점에서 김용의 탁월함은 더욱 빛난다. 이들은 강호라는 가상의 공간에 인간적 숨결과 고뇌를 불어넣어 그곳을 살아있는 삶의 공간으로 느끼게 한다. 김용을 신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렇게 거대한 역사와 소소한 삶의 문제를 세세하면서도 웅장하게, 그리고 유려하게 그려내는 그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반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안겨준 고전 중의 고전 《의천도룡기》는 소설뿐만 아니라 각종 영화와 드라마, 게임으로 만들어지며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 부록으로 곁들인 〈무림지존, 천하를 호령하다〉에는 무당산과 소림산에 대한 해설, 작품에 등장하는 혈도와 경맥 해설,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지도, 주요 등장인물, 김용 무협소설의 심리세계, 학자와 김용 마니아들의 서평 등이 실려 있어 독서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1권. 무림지도 도룡도 “무공비급 《구양진경》이 탄생시킨 무당파와 아미파, 그 시작은 한날한시였다!” 신조대협 양과를 찾아 소림사로 간 곽양. 그곳에서 그녀는 곤륜파 하족도와 소림파가 격돌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리고 소림파의 역적으로 몰린 각원대사, 장군보와 함께 도망치지만, 결국 각원대사가 목숨을 잃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곽양과 장군보는 각원대사가 열반에 들기 전에 읊은 《구양진경》 구절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고, 후에 이 두 사람은 이를 바탕으로 강호에 큰 문파를 만드는데……
2권. 빙화도에서 보낸 10년 “무림지존 도룡보도, 천하를 호령하니 따르지 않을 자 없도다!” 강호에는 도룡도를 얻는 이가 곧 무림지존이 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영웅들이 이 도룡도를 얻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워왔다. 결국 도룡도를 손에 넣은 쪽은 천응교였다. 그러나 금모사왕 사손이 강제로 도룡도를 빼앗고, 천응교의 은소소와 무당파의 장취산을 사로잡아 북극 빙화도로 도망가는데…… 과연 도룡도의 진짜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
3권. 접곡의선 “영웅이 되기 위한 험난한 여정! 길에 오르니 가는 곳마다 이리떼뿐…” 소년 장무기는 도룡도의 쟁탈전 때문에 부모님을 잃었다. 게다가 현명신장에 얻어맞아 불치병에 걸리고 만다. 그는 현명신장을 치료하기 위해 신의(神醫)로 널리 알려진 견사불구 호청우를 찾아간다. 하지만 호청우마저도 그의 병은 치료할 수 없었고, 그는 꼬마 양불회의 아버지를 찾아주기 위해 무작정 곤륜산으로 향하는데…… 소년 장무기는 어떻게 시련을 이겨내는가? 영웅으로 성장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4권. 구양진경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혼원벽력수 성곤! 과연 명교가 존재할 것이냐 멸망할 것이냐!” 장무기는 죽음에 임박한 순간, 운명과도 같이 《구양진경》을 만난다. 그는 《구양진경》을 수련하면서 점차 마음과 몸이 강해지는 걸 느낀다. 다시 강호로 나온 장무기는 명교를 무너뜨리고 세상의 지존이 되려는 혼원벽력수 성곤의 음모를 알아챈다. 이 음모를 세상 천하에 알리기 위해 명교를 구원하려는 장무기와 명문정파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데……
5권. 광명정 전투 “정의를 좇는 자, 소년에서 영웅으로 거듭나다!” 명교의 광명정을 공격하려는 육대 문파 진영과 맞닥뜨린 장무기는 자신의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이 공격을 중단시키려고 한다. 수많은 일류고수들과 맞서면서도 전혀 굴하지 않는 그는 더 이상 병에 허덕이는 소년 장무기가 아니었다. 이미 고수의 반열에 올라 있는 그는 명교를 구한 영웅으로 거듭났다. 영웅 장무기의 놀라운 활약상을 감상하라.
6권. 명교의 비밀 “네 처녀와 한배 탔으니 풍랑에 시달린들 더 바랄 게 무엇이랴?” 명교의 숱한 영웅들 중에서 왜 광명우사자와 자삼용왕은 시종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들은 왜 정체를 숨기고 남몰래 활약했던 것일까? 속속 밝혀지는 두 사람의 비밀과 명교의 역사, 명교의 영웅들. 그리고 장무기와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네 명의 여성들.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7권. 의천검 도룡도를 잃고 “억울한 누명 하소연할 길 없으니 수심에 겨워 미칠 것만 같네” 무인도에 체류하던 장무기는 의천검과 도룡도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거미 아리가 죽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만 본다. 도대체 칼은 누가 가져갔고, 아리는 또 누가 죽였단 말인가? 분노에 치를 떨던 장무기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강호로 돌아온다. 그러나 곧 양부 사손이 행방불명된다. 장무기는 사손을 찾기 위해 강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데…… 이 모든 것을 저지른 진짜 범인은 누구인가?
8권. 도사 영웅대회 “무림지존 장무기, 천하영웅 가운데 어느 누가 그와 맞서랴!” 양부 사손을 구하기 위해 명교의 군웅들을 이끌고 소림사가 주최하는 영웅대회에 참석한 장무기는 그곳에서 의천검과 도룡도에 감춰져 있는 비밀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일을 계획한 혼원벽력수 성곤과 맞닥뜨리는데……
예전 《영웅문》과는 전혀 다른 결론! 신필 김용이 수정한 3판본의 결정판!
홍루몽의 홍학, 김용 무협의 김학, 중국의 지식인들과 대중을 한꺼번에 사로잡다! 김용의 소설 속엔 중국이라는 거대한 세계가 담겨 있다!
대만에서는 1980년대에 이미 김용의 문학세계를 연구하는 ‘김학(金學)’이 등장했다. 김용 소설이 중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80년. 이후 중국에서 출간된 그의 모든 작품이 1,000쇄를 훨씬 넘었다! 성서보다 더 많이 팔렸다는 모택동 어록의 기록을 가뿐히 갈아치운 것이다! 불과 20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에 김용의 소설은 중국 지식인과 대중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등소평은 김용을 직접 초대해 대접하고 김용의 최대 애독자임을 밝혔다. 베이징대 부총장 지혜생, 대만 총통 천수이벤, 홍콩 작가 예광도 김용의 애독자다. 전 세계 화교들은 중국의 언어와 문화를 배울 때 필수 교과서처럼 김용의 소설을 읽는다. 뒤늦게 중국 대륙에서도 ‘김용 소설 국제연구토론회’를 개최하면서 김용의 문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2000년 11월 중국에서 이뤄진 국제토론회는 단연 눈길을 끈다. 중국의 최고명문 베이징대가 주최한 토론회는 김용이 직접 참가한다는 소식들 듣고 몰려든 수천 명의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베이징 대학교수 및 중국 작가들은 “고아(高雅)와 통속(通俗)을 통틀어 문학작품이 이처럼 대단한 호응을 받은 것은 역사상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고, “김용의 무협소설은 원곡(元曲) 및 홍루몽의 뒤를 잇는 중국문학 최고의 금자탑”이라고 평했다. 1997년 남창항공대학 진묵(陳墨, 천모) 교수는 《김용 소설 감상》에서 “김용의 무협소설은 일반적인 무협소설과는 다르며, 중국의 통속문학사, 백화문학사(白話文學史), 중국문화사의 일대 기적”이라고 극찬한다. 1994년 왕일천은 《20세기 중국 문학대사 문고》를 편집하면서, 김용을 금세기를 대표하는 중국 소설가 서열 4위에 올려놓으며 중국 대륙에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오굉일 대만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 문학을 전공하면서 김용의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중국인의 세계관과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고 다양한 인간군상을 관찰할 수 있다.” 또 중국작가 예광倪匡은 “동서고금을 막론해 비교할 만한 소설이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중국문단, 아니 세계문단의 대협 김용은 누구인가!
김용의 일생은 중국 근현대사의 압축판(보도자료 말미에 김용의 삶의 개관이 실려 있음). 전란戰亂과 피란을 거쳐 마침내 홍콩에 정착하기까지 그는 숨가쁘게 시대와 함께 호흡했다. 1949년 중국대륙의 사회주의 정권 수립과 장개석의 몰락,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홍콩 반환, 중국의 대도약 등, 중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낮에는 무협소설을 쓰고 밤에는 정치사설을 썼다. 김용과 그의 작품들은 하나의 ‘현상’이자 ‘문화 키워드’가 되었다. 위로는 ‘김학金學’으로서 본격적으로 학문화되고, 아래로는 인터넷, 전자게임, 영화, TV연속극으로 이어지는 현대 문화의 큰 흐름을 주도한다. ‘김학’은 이제 문화현상의 측면에서 연구되고 있다. 20세기를 온전히 살아온 언론인이자 대중소설가가 이룩한 이 방대한 업적을 21세기 디지털 시대가 고스란히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김용의 작품이 가지는 문학사적 의미는 통속문학과 엄숙문학 사이의 경계와 영역을 허물어버림으로써 무협소설을 순수예술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은 1956년 신문 연재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독자층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단순한 재미 추구, 흥미 유발에 그치지 않고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까지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렇듯 김용의 작품은 중국의 전통문화와 근현대인의 인성과 심리가 내재된 문화 텍스트이다. 이는 중국 문학의 전통 형식을 보유하면서도 근현대적인 내용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는 ‘중국문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김용의 작품은 그야말로 중국문화 전반을 충분히 활용한 중국학의 입문서라 할 만하다. 실제의 역사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창작이 교묘하게 융합된 그의 작품 속에는, 상상력의 기반이 되는 부분 역시 중국의 전설이나 신앙, 시, 역사 등에서 연유한다. 교묘히 배합된 이러한 코드들을 해체하면 중국문화 입문서로 충분히 활용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의천도룡기》에는 ‘포대화상’이 나오는데 포대화상은 중국민간의 전설에 나오?중으로 우리로 치면 미륵불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포대화상에 대한 전설은 《의천도룡기》에 나오듯이 큰 자루를 짊어지고 다녔다고 해서 포대라 불렸다는 것이다. 포대는 중국어로 ‘부따이’라는 발음이 나는데 이는 다름 아닌 붓다를 가리킨다. 전설 속의 포대화상은 큰 자루를 메고 다니며 날씨를 점쳐줬다는데 소설 속에도 ‘건곤일기대’라는 자루를 메고 다니는 것으로 나온다. 곧 명교에 포대화상이 등장하는 것은 반원 세력 곧 명나라 건국세력에 민중불교세력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원나라 말기에 땅 속에서 미륵불이 나와서 민심이 이반하고 반란이 터진 일이 있었다. 김용은 곳곳에 이렇게 중국의 문화를 작품 속에 감쪽같이 녹여냈다. 뜻을 알고 보면 2배로 재미있는 것이 김용의 작품이다.
김용의 삶
격동의 중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하다 흔히 김용을 두고 ‘살아 있는 신화’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신화로 만들었을까? 누가 뭐라 하든 20세기 중반 이후 중국의 문학사, 신문사, 문화사를 말할 때 김용을 거론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김용은 중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경험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무협소설을 역사소설 내지 정통 문학의 대열에 올려 놓았으며, 20여 년 전부터는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해 왔다. 그가 성취한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자신의 인생 역정의 결정체다. 김용은 절강성 해녕현 원화진의 명문 사査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훗날 무협소설을 본격적으로 쓰면서 사용한 김용이란 필명은 그의 본명인 사량용査良鏞의 마지막 글자인 ‘용鏞’자를 둘로 나누어 만든 것이다. 그의 집안은 흔히 ‘해녕사가’라 하여 청나라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시인의 하나로 평가받는 사신행査愼行을 비롯해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그가 훗날 홍콩에서 ‘명인 중의 명인’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룬 성취 외에도 집안의 내력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열다섯 살 이전에 겪은 가장 강렬한 기억은 중국 현대시의 선구자인 김용의 사촌형 서지마徐志摩의 죽음이었다. 열 살 때 김용은 어머니와 함께 유해로 돌아온 서지마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 때의 인상이 오래도록 남았다고 회고한다. 아홉 살 때부터 무협소설과 탐정소설 들을 읽었고, 열네 살 때 고향 원화진을 떠나 가흥중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이 전시 체제로 돌입하면서 상해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학교는 기약 없는 피란길에 올랐고, 이 와중에 병중에 있던 어머니가 약을 구하지 못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듬해에는 고향집마저 일제에 의해 불타 버렸다. 이러한 고난의 세월 속에서도 그는 중국과 서양의 문화를 부지런히 공부했고, 영어에 남다른 실력을 보이기도 했다. 열일곱 살 때 훗날 그 자신과 동창들이 우스갯소리로 ‘김용 최초의 베스트셀러’라고 말하는 학습참고서를 출간하고, 중국 무협소설사의 선구로 평가받는 《규염객전》을 고증하기도 했으며, 열아홉 살 때는 여류시인 이청조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시련은 끊이지 않았다. 열여덟 살 때 훈육주임을 풍자한 글을 벽보를 통해 발표해 퇴학당했다가 교장과 동창의 도움으로 간신히 전학하여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으며, 열아홉 살 때도 역시 훈육주임에 반대하다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열아홉 살 때 〈동남일보〉에 글을 발표하여 언론과 인연을 맺었고, 스무 살 때 구주중학교(고등학교에 해당)를 졸업하고 〈동남일보〉에 〈천 사람 중 한 사람〉이란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스물한 살 때 중앙정치학교 외교과에 입학했다.
젊은 시절의 꿈을 가슴에 묻고 언론사에 입성하다 김용이 멀리 중경까지 가서 중앙정치학교에 입학한 것은 경제적 사정 때문이었고, 외교과를 택한 것은 그의 꿈이 외교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교관이 되어 전 세계를 여행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 학교는 국민당에서 파견한 직업 학생들로 가득찬 기관학교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에 항의하다가 결국 스물두 살 때 퇴학당했다. 그 뒤 사촌형의 도움으로 중경 중앙도서관에서 일하면서 〈태평양 잡지〉를 만들었으나 1회로 중단되고 1946년 스물네 살 때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은 옛날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벌써 젊은 새어머니를 맞아들였고, 집안은 궁색했다. 그는 다시 고향을 떠나 항주로 가서 왕년에 인연을 맺었던 〈동남일보〉에서 영어 전보 번역일을 맡았다. 이 무렵 첫 아내를 만났다. 1947년 스물다섯 살 때 신문사를 사직하고 상해 동오대학 법학원에 들어가 국제법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 해 세계적으로 이름난 언론사인 상해 〈대공보〉에 취직해 전과 같이 국제 전보 번역일을 맡아, 반은 일하고 반은 공부하는 ‘반업반학’의 세월을 보냈다. 이듬해에 홍콩 〈대공보〉로 자리를 옮겨 같은 일을 하게 된다.
무협의 세계로 뛰어들다 1949년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 가고 대륙에는 마침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대공보〉는 좌경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1951년 아버지가 소위 ‘반동지주’로 몰려 총살당하는 사건이 터졌다(훗날 이 사건을 재조사하여 판결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중국 정부를 대표해 등소평이 정식으로 김용에게 사과했다). 서른 살을 전후해 요복란, 임환 등의 필명으로 영화평을 쓰면서 영화계와 친분을 맺기 시작했다. 〈절대가인〉이란 영화 극본으로 문화부가 주는 우수영화상을 받기도 했다. 1954년에는 직장 동료 양우생이 홍콩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무술 시합에 자극받아 〈신만보〉에 무협소설 《용호투경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가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상업적인 이유에서였다. 즉, 신문의 판매부수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친구 양우생의 행보도 자극이 되었다. 1955년 서른세 살 때 마침내 김용이란 필명으로 〈신만보〉에 《서검은구록》을 연재하면서 마침내 무협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어 1956년 1월 1일부터 홍콩신문 〈상보〉에 《벽혈검》을 연재했고, 1957년 그의 출세작이자 최초의 장편소설인 《사조영웅전》을 같은 신문에 1959년까지 연재했다. 이어서 1959년에는 《설산비호》를 발표했다. 이 사이 1956년에 주매와 두 번째 결혼을 했고, 영화평도 꾸준히 썼다. 1959년에는 급기야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사조영웅전》은 홍콩은 물론 동남아 화교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공전절후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심지어 태국의 화교 신문은 홍콩판 신문이 비행기를 통해 날아오길 기다리지 못하고 불법 전신시설을 이용하여 당일 연재된 소설을 타전 받아 신문사 문 앞에 붙여 놓을 정도였다. 김용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의 무협소설이 홍콩을 휩쓸었고 그의 명성도 더불어 오르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사회가 그런대로 안정을 찾을 무렵 사람들에게는 딱히 큰 오락거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협소설은 대중의 구미에 안성맞춤이었다. 혼란했던 시대상과 정치적 격변에 대한 불안감 등이 악을 통쾌하게 제거하는 협객들의 활약상이 대중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홍콩이라는 지역적 특성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때 김용은 갈수록 좌경화되는 〈대공보〉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959년 5월 20일 스스로 〈명보〉라는 일간지를 창간했다. 〈명보〉의 앞날은 불안했다. 1950년대에 창간된 언론사만 85군데나 되는 상황에서 빈약한 자본과 인력이 부족한 〈명보〉는 1년을 버티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명보〉의 위기를 극복하게 해준 원동력은 무협소설과 김용 자신이 직접 쓰는 정치 사설이었다. 무협소설의 연재는 상업적인 면에서, 정치 사설은 〈명보〉의 권위 수립에 큰 도움을 주었다. 창간과 더불어 《신조협려》가 연재되었고, 1961년부터 《의천도룡기》가 연재되었다. 이어 《백마소서풍》과 《원앙도》도 연재하면서, 〈명보〉는 발행부수 4만을 넘는 신문사로 성장했다. 1962년 대륙 내부의 정치 상황에 불안을 느끼고 홍콩으로 밀려드는 난민들의 행보를 보도한 것도 명성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김용이 끊임없이 정치 사설을 쓴 사실은 그가 현실에 대해 눈과 마음을 열어두고 있었음을 반증한다(70세 때 정식 퇴임하기까지 그는 약 35년 동안 2만 편에 달하는 사설과 정치 논설을 썼다). 그는 젊은 나이에 10년 넘게 언론계에 몸담았고 이 때 호정지 등과 같은 탁월한 언론인에게 깊은 영향과 감화를 받았다. 그의 무협소설 전반에 번득이고 있는 정의 수호에 대한 강한 신념과 실천 의지는 이런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명보〉의 기본정신으로 ‘공정과 선량’을 내세운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는 1959년 이후 약 35년 동안 실질적으로 〈명보〉를 이끌면서 이미지를 중립으로 자리매김했다.
낮에는 무협소설, 밤에는 정치사설 김용의 나이 40세를 전후로 〈명보〉는 약진의 시대를 맞이한다. 그는 여전히 소설과 정치사설을 병행했다(이를 두고 일부 평론가들은 낮에는 무협소설을 쓰고 밤에는 사설을 쓰는 이중적 모습이라고도 했다). 1963년 《연성결》을 〈동남아주간〉에, 같은 해 9월부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천룡팔부》를 〈명보〉에 연재했다. 1965년에는 《협객행》을 역시 〈명보〉에 연재했고, 1967년에는 《소오강호》를 집필해 나갔다. 1970년에는 석간 〈명보만보〉에 《월녀검》과 《삼십삼검객도》를 연재했다. 이어 1969년부터는 《녹정기》를 연재했다. 10여 년 동안 그는 〈명보월간〉(66년), 〈화인애보〉(67년), 〈명보주간〉(68년), 〈명보만보〉(69년)를 잇달아 창간해 사汰?크게 확장했다. 〈명보〉의 대대적인 약진에는 역시 그가 쓴 무협소설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국 및 국제정세와 관련해 김용이 쓴 중요한 정치사설, 특히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예견성 사설의 영향도 크다.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 중국의 핵무기 개발 등의 문제를 놓고 좌파 계열 신문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어 중국의 문화혁명 분위기를 예언하여 파장을 몰고 왔고, 등소평의 축출과 재기 등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미국과 베트남간의 전쟁 재개 시기도 정확하게 맞춰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언론이 되었다. 하지만 이 일련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좌파 신문들에게 많은 공격을 받았고, 문화혁명의 파장으로 1967년부터 불어닥친 홍콩 내부의 이른바 ‘67 폭풍’의 와중에서 암살 대상으로 지목되어 싱가폴로 피신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김용의 절필선언 1969년 10월 24일부터 연재를 시작했던 《녹정기》는 1972년 9월 23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 사이 김용은 그때까지 발표했던 자신의 무협소설들을 조금씩 수정했고, 《녹정기》의 연재가 끝나자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겠다며 절필을 선언해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절필 선언의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명보〉의 기반이 확고하게 다져졌음을 뜻한다. 더 이상 무협소설로 독자들을 유인할 필요가 없다는 사업적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녹정기》 자체를 두고 평론가와 독자들 사이에서 과연 이 작품을 김용이 직접 썼는가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녹정기》의 주인공 위소보는 다른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영웅도 협객도 아닌 권모술수로 똘똘 뭉친 다분히 정치적인 인물이다. 소재나 주제, 스토리 전개 등 모든 면에서 김용의 역량이 한계에 이르렀으며, 《녹정기》는 한계를 돌파하려는 마지막 몸부림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 이후 김용은 국제적 언론인으로서 세계 각지를 방문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입지를 더 굳혀나갔다. 1973년 기자 신분으로 대만을 방문하여 총통 후계자 장경국 등 정계 요인들을 만나 대담했다. 1960년 대만정부는 무협소설에 대한 전면 금지조치를 취했다. 당시 언론은 ‘괴이하도다, 장씨(장개석) 집단이 무협소설을 두려워하다니!’라는 사설을 발표해 정면 대응했다. 김용의 대만 방문은 그의 소설에 대한 해금 분위기를 무르익게 만들었고, 향후 ‘표면적 금지, 실질적 해금’이라는 묘한 과정을 거치다 1979년 전면 해금되었다. 대만 방문을 계기로 그는 껄끄러웠던 대만 당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호사다마 탄탄대로를 달리던 김용의 인생은 또 한 차례 큰 충격을 받고 휘청거린다. 1976년 54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함께 〈명보〉를 창간하고 사업을 반석에 올려놓는데 큰 역할을 했던 두 번째 아내 주매와 전격 이혼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어 부모의 이혼에 충격을 받은 탓인지 미국에 유학중이던 큰아들 사전협이 목을 매 자살하는 일이 터졌다. 예견된 이혼의 여파는 크지 않았지만, 아들의 죽음은 김용에게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불교에 심취하게 되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더욱 깊은 사색의 기회를 가졌다. 이혼과 큰아들의 죽음을 둘러싸고 수많은 억측들이 있었지만, 정작 김용 자신은 이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가정사로 큰 시련을 겪었지만 김용과 〈명보〉의 명성은 결코 시들 줄 몰랐다. 1979년 대만의 원경출판사가 정식 판권계약을 통해 《김용 작품집》을 출간하기 시작했고, 1980년에는 광주의 〈무림〉이란 잡지가 《사조영웅전》을 연재함으로써 대륙에 처음으로 그의 소설이 소개되었다. 이어 대만에서는 그의 무협소설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이른바 ‘김학金學’이 탄생했다. 소설가로서 김용의 명성이 중국 전역에서 치솟을 태세였다. 그즈음 김용은 1970년부터 시작했던 15부 36권에 달하는 《김용 작품집》 전체에 대한 수정을 끝냈다. 이 전대미문의 작업을 두고 어떤 이들은 입방아를 찧었지만 김용의 팬들은 이러한 노력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은퇴 이후의 삶 이제 김용의 눈은 자신을 낳아준 고국 대륙으로 향하고 있었다. 1981년 7월, 김용은 가족과 함께 인민대회당에서 등소평을 만났다. 1984년 다시 중국을 방문하여 호요방과 면담했고, 중국 당국은 이듬해 홍콩 반환과 관련하여 특별행정구 기본법 기초위원으로 그를 위촉했다. 1993년에는 베이징을 방문하여 강택민과 회견하기도 했다. 1988년 〈명보〉는 발행부수, 구독자수, 광고수입 등에서 홍콩 제3위의 언론사로 평가되었다. 1989년 〈명보〉 창간 30주년을 맞이하여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91년 주식회사에 상장되었고, 사업가 우품해가 실질적으로 명보그룹을 인수했다. 1994년 김용은 약속대로 〈명보〉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완전 은퇴했다. 이전부터 김용은 역사 연구를 하고 싶다는 심경을 자주 밝혔고, 실제로 모든 사업에서 물러나면서부터는 본격적인 연구에 몰입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대한 그의 열정은 남달랐고, 몇 차례 역사를 주제로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3년 동안은 네 차례에 걸쳐 세계적인 종교 사상가 이케다 다이사쿠와 대담을 가졌다. 1993년 이후에는 고향 땅에 관심을 보이면서 여러 차례 고향을 방문했다. 1994년 가흥의 고등전문과학교에 ‘김용도서관’을 지어주었고, 거금을 내서 ‘운송서사’라는 호화롭고 우아한 원림식 별장을 지어 항주시에 기증했다. 이에 항주시는 일제에 의해 파괴된 그의 옛집을 복원해주는 식으로 화답했다. 1999년 77세의 나이에 고향인 절강성 절강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어 인문학원 원장에 취임했다. 이후 그는 절강대학과 영국, 홍콩을 왕래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끝없는 화제와 논쟁의 한가운데서 김용에 대해서는 그 자신은 물론 그의 소설을 둘러싸고 지금까지도 논쟁이 끊이질 않고 있다. 먼저 정통 문학가들과 평론가들은 그의 무협소설이 정통 문학의 대열에 진입하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를 두고 그의 작품에 대해 적지 않은 비판과 비난을 퍼붓고 있다. 1994년 36권에 달하는 중국 대륙 삼련서점판 《김용 작품집》이 당당하게 선을 보인지 얼마 뒤 베이징 사범대학의 왕일천 교수 등은 《20세기 중국문학 대사문고》를 펴냈다. 말하자면 20세기 중국문학의 대가들의 작품을 낸 것인데 여기서 김용은 서열 4위에 올랐다. 이 때문에 중국 학계가 한바탕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논쟁의 요점은 통속문학 작가를 고상한 정통 문학의 전당에 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학계는 양 파로 나뉘어 치열하게 논쟁했고, 심지어는 김용의 소설을 ‘아편’에 비유하는 평론가도 있었다. 그러나 그해 김용은 베이징 대학에서 명예교수 직위를 받았으며, 특별 강연에서는 중국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1997년에는 그의 역사논문이라 할 수 있는 〈악비와 진회〉를 둘러싸고 김용의 역사 연구 수준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1998년에는 김용의 무협소설에 간단한 평을 덧붙인 《평점본김용무협소설전집》이 문화예술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 그런데 1999년 김용은 이 전집, 특히 자신의 작품에 대한 논평에 대해 ‘초등학생도 그 정도는 쓰겠다’며 강한 불만을 토론했다. 이 때문에 출판사, 논평에 참여한 학자들과 법적 소송까지 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소동은 2001년까지 3년을 끌다가 남경에서 쌍방이 화해함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그 여파는 여전히 남아 있다. 20세기를 앞둔 마지막 해에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며 왕삭이란 젊은 소설가가 김용을 비난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김용의 소설을 가요 부문의 사대천왕, 영화계의 성룡, 대만 여류작가 경요의 TV 드라마에 비유하면서 이들을 싸잡아 ‘사대속四大俗’으로 비하했다. ‘사대속’이란 얼핏 네 분야의 ‘통속’이란 말로 들리지만 왕삭의 구체적인 발언을 보면, 김용의 소설을 말 그대로 ‘속물’이라 지칭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그는 신상모독 발언도 서슴지 않았으며, 소설과 관련해서는 김용의 소설을 제대로 읽지 않았음은 물론 읽다가 던져버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으로 김용의 무협소설이 스토리 전개가 상투적이고 우연이 너무 많으며 문체도 낡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용은 왕삭의 지적을 되받아 자신의 소설이 갖는 한계를 인정하는 한편 자신과 성룡 등을 ‘사대도적’이나 ‘사대독소’ 따위로 부르지 않은 것은 왕삭 선생이 많이 봐준 것이라며 점잖게 응수했다. 이 논쟁은 인터넷상으로까지 비화되어 말 그대로 중국 전역을 들끓게 만들었다. 왕삭은 김용의 열성 팬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언행에 대해 사과함으로써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문학 평론가 오량은 “왕삭이 김용을 비판한 것은 사실 김용 마니아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었다. 김용 본인은 전혀 상관없으며 어쩌면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 그 둘은 사실 한 통속으로 둘 다 위소보와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라고 신랄하게 풍자했다. 1999년 중국 중앙TV가 김용의 《소오강호》를 연속극으로 만든다고 발표했다. 김용은 단돈 1원으로 판권계약을 해서 주변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2001년에는 《사조영웅전》 중 일부를 중학교 교과서에 싣는 문제를 놓고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신화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반세기 가까이 뉴스의 초점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언론을 비롯한 각종 매체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 자신이 언론인으로서 언론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藪?그는 매체를 충분히 이용할 줄 안다. 혹자는 김용을 두고 복잡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홍콩에서 100위 안에 드는 갑부이며, 평생 2만 편 이상의 정치 사설과 평론을 쓴 언론인이며, 판매부수 1억 부를 훨씬 넘는 무협소설을 쓴 작가다. 세 번의 결혼과 자녀의 자살, 수차례에 걸친 판권시비, 숱한 명예박사학위와 교수의 지위 그리고 훈장 및 작위 등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김용의 신화는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다. 김용은 낮에는 무협소설가 김용, 밤에는 신문의 사설과 정치 평론을 주로 쓰는 언론인 사량용이라는 두 얼굴로 40년 이상을 살아왔다. 그는 이 두 방면에서 모두 남다른 성공을 거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두고 ‘살아 있는 신화’라 부른다. 그리고 2년전 80대의 나이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유학길에 올라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그는 ‘배우는 데 여든 나이가 대수랴’며 끝없는 만학의 열정을 보이고 있다. 그의 생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지만 그의 신화는 그의 사후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와 그의 작품은 벌써 21세기를 주도하는 하나의 문화 키워드가 되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