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 낙동면 야산에 걸린 노을은 나를 울게 한다./ 그 산과 노을을 고스란히 끌어 들여/ 붉게 흘러내리는 낙동강은 나를 울게 한다." 김선굉의 시 '풍경이 나를 울게 하네'의 한 구절이다. 그 '울음'이란 물론 풍경이 안겨주는 '감동'일 터이다.
울릉도, 그 섬의 풍경들이 나를 울게 한다. 흔히들 '울릉팔경'이라 하여 도동 모범(暮帆), 저동 어화(漁火), 장흥 망월(望月), 남양 야설(夜雪), 태하 낙조(落照), 추산 용수(湧水), 나리 금수(錦繡), 알봉 홍엽(紅葉)을 울릉도의 절경으로 꼽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나누는 것이 어쩌면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저동항 촛대바위, 도동과 사동의 해안 풍경, 통구미
거북바위, 남양의 사자바위, 웅포의 대풍령, 추산의 송곳바위, 공암과 삼선암, 관음도와 죽도…… 어느 것 하나 절경이 아닌 것이 없다. 기기묘묘한 형상의 화산암으로 이루진 산, 섬에서만 나는 온갖 풀과 나무들, 망망한 대해가 함께 어울려 빚어내는 풍경은 철마다 철에 걸맞는 절경을 이룬다. 그런 풍경들 앞에 서면 '울음'을 느끼기 전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무어라 표현해야 할 것 같은데, 적절한 말이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언어가 가난한 탓이기도 하지만, 그 풍경에 꼭 들어맞는 말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하기사 신의 언어, 조물주의 문법으로 이루어진 풍경을 보잘것없는 인간의 어법으로 어찌 살뜰히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표현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 채 풍경을 바라보면 드디어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울음을 느끼게 된다.
풍경이 주는 울음 속으로 빠져들다가 섬사람들을 생각하면 문득 가슴이 아려진다. 섬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 속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삼고(三高) 속을 살고 있다. 높은 산, 높은 파도, 높은 물가(物價) 속을 산다는 말이다. 바다 가운데 하나의 산으로 우뚝 솟은 섬에는 평지가 없다. 가파른 비탈에 몸을 붙이고 살아야 한다. 집도 비탈에 짓고 밭도 비탈에 일구면서 늘 가풀막과 함께 살아간다. 바다에 나아가면 언제나 험하고 높은 파도와 싸워야 한다. 때로는 생사를 걸어야 하는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오징어와 산나물을 말고 모든 것은 먼 물길을 건너 뭍에서 가져다 써야 하는 섬에는 물가가 엄청나게 비싸다. 날씨가 나빠 뱃길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귀해지는 생필품 때문에 애를 태워야 한다. 섬의 삼고(三高)는 삼고(三苦)가 되어 섬사람들의 삶을 고달프게 한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섬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 삶의 고단을 기도로 달래며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섬에는 교회가 많다. 섬의 인구 이백 명에 교회가 하나 꼴이다. 섬사람들의 그 순명(順命)이 나를 울게 한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결코 나약한 숙명론에 빠져 있지 않다. 일본이 우리의 바다와 독도를 넘본다는 소식이 들릴 때면 충천하는 분기로 일어선다. 바다와 독도는 섬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터일 뿐만 아니라,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소중한 우리의 영해, 우리의 영토임을 어떤 곳의 사람들보다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 모두들 투철하고 강인한 전사가 되어 사수의 의지를 불태운다. 그 의기(義氣)가 또한 나를 울게 한다.
이래저래 섬은 나를 울린다. 그 울음을 마음껏 울면서 나는 지금 섬을 살아가고 있다.
[대구일보 2007.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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