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드라이버 출조 꾼들이 많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오너자동차 나들이가 일반화되기 전인 옛날엔 주말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은 으레 전문 출조점의 주말 낚시가이드를 이용했다.
낚시가게 주인들은 신문의 무상광고를 통해 주말출조 낚시회원들을 모집한 다음 그들로부터 거둬들인 회비를 모아 장거리 낚시를 나서곤 했다. 그러나 그들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수익도 나지 않을 정도의 어중간한 회원이 모아지면 곧잘 같은 낚시터로 향하는 다른 낚시점에서 모은 주말낚시 회원들과 한데 엎어 공동 출조를 하곤 했다.
장거리 원정 낚시의 경우에는 대절 차편, 선편 등의 이용료가 사람 수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고 한번 사용료가 정해져 있는 탓에 영세낚시 가게로선 적은 사람들을 모아 나설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다른 낚시점과 연합한 공동 출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애초부터 출조할 계획은 없이 신문의 모집광고가 공짜인 것을 악용하여 일단 무상광고를 통해 모은 사람을 상습적으로 다른 낚시가게로 넘겨주면서 일정의 커미션을 받는 낚시가게가 있었다. 이것을 일러 소위, ‘돼지장사’라 하여 영문 모르는 주말낚시꾼들은 종종 두당 얼마씩의 가격이 매겨져 다른 낚시점으로 팔려가곤 했다.
서비스는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경쟁적으로 주말회원을 모집하다 보니 회비가 경쟁적으로 싸져 자기 손님들도 극하한가로 모집한데다 다른 가게 손님들은 인수(?)받을 때, 이미 ‘돼지머리 수당’이 공제되어 지불되었기에 넘겨받은 다른 가게손님들 즉 ‘돼지’들은 애시 당초 찬밥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애꿎은 낚시꾼들만 푸대접을 받았고 이에 따라 곳곳에서 볼 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의에 불타오른 혈기 왕성한 시절의 낚시전문 기자로서 나는 이런 해괴한 짓거리를 그냥 두고 볼 리 만무했다.
르포형식의 기사로 통해, 애먼 낚시꾼을 ‘대가리’당 가격 매겨 팔아먹는 낚시가게 가이드를 고발한답시고 분기탱천, 마치 모조리 쓸어버리기라도 하듯 마구 두들겨 패는 논조의 기사를 취재, 보도한 적 있다.
그때 나에 의해 직격탄을 맞은 어느 가이드는, “백 기자, 먹고 살자고 한 일인데 우릴 마치 지렁이 밟듯 밟아 죽여 버리네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요.”라고 비명을 질러 대었다.
나는 내심, “짜식들 뭔 소리야? 낚시가게를 하면서 낚시장비나 팔지 누가 주말 낚시꾼을 상대로 인신 매매업을 하랬어?”라고 가가소소 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낚시기자를 거쳐, 낚시잡지 발행인을 거치면서 소위 우리나라 바다낚시 전문기자 1호, 국내 최초의 바다낚시 전문잡지사 발행인, 중앙무대를 석권한 최초의 지방잡지사 사장 등등 기세도 당당하게 설치고 다니면서 살아온 지 어언 30여 년. 문득 내가 이제 낚시 가이드가 되었다.
먹고 살자고 낚시가게를 차린 가이드가 아니라 우리 학교동기들, 즉 친구들의 풍요롭고 즐거운 여가생활을 돕기 위한 가이드가 되었다.
부산중고교 24회 우리 동기회 낚시회, 즉 청조 24낚시회의 총무 백종국이 된 것이다.
동기낚시회의 6월 정기출조를 나서게 되다
이번에는 4월의 저수지 시조회와 5월의 가족동반 저수지 붕어낚시 정기출조에 이은 동기가족초청 바다낚시 정기출조 행사이다.
청조 24낚시회의 연간 운영 스케줄은, 상반기에는 가능한 한 많은 동기와 가족들을 참여시켜 야유회적 성격을 지니는 행사위주로 운영하고 후반기에는 전문꾼들 중심의 본격 정통파낚시를 위한 전문출조를 하기로 원칙을 세워두고 있었다.
바다로 나가는 건 참 신나는 일이다.
굳이 낚시를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바다로만 나서면 나는 참 즐겁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바다에서 푸근한 감성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나는 유달리 바다를 좋아했다.
서대신동에서 나고, 서면에서 자란 유년 시절에도 틈만 나면 바다로 나갔던 것이 어느새 바다로 나가는 건 나에게 하나의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낚시기자를 지망했다. 젊은 날, 바쁜 직장생활을 할 때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게 바다에 대한 나의 애정은 깊어 갔다.
‘어지름 병이 지랄병이 된다.’했나?
바다를 좋아하던 것이 비롯되어 바다 낚시꾼이 되었고, 급기야 천직도 바다낚시전문 기자가 되고 말았다.
나는 신혼여행을 신혼여행답게 즐겁게 다녀오질 못했다.
결혼식 마치고 경부선 타고 서울로 가서 하룻밤 자고 바로 돌아왔다. 결혼 때,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 신혼여행을 못간 것이 두고두고 가슴의 병이되어 오다 세월이 흘러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들면서 새삼스런 신혼여행길에 올랐다.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해 온 아내에게 미안함을 털고자 다 큰 자식 앞세우고 아내와 한참 뒤늦은 신혼여행을 나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인생에 있어서 애초에 신혼여행 따위의 호사는 나의 복에 과한 것일까?
지난 2002년 11월 24일, 20주년 결혼기념일의 낚시여행지 추자군도의 때늦은 신혼여행길에서 청천의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나의 회사 33명의 직원 중 간부 4명만 남기고 나머지 29명이 집단 사표를 내고 경쟁회사를 차려 나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나마의 때늦은 신혼여행은 그 길로 풍비박산이 났었고 이후 나는 평생사업의 몰락의 수순을 밟게 되어 버렸다.
내가 만드는 잡지 월간 일요낚시에 게재한 본지 편집국장의 칼럼의 내용에 불만은 품은 모 낚싯대회사의 사장(가짜 부고 13회 선배)이 나의 부재중에 우리 회사 불만 세력을 포섭하여 일으킨 보복성 쿠데타가 일어났었고, 나는 영락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악을 써가며 회사유지를 위해 발버둥 친 노력도 허사인 체, 속절없이 기울던 회사는 그 길로 영영 폐업의 길로 접어들었고, 상심과, 탈진과, 허망의 세월을 살면서 급기야 건강마저 잃게 되고 내가 그렇게 즐기던 낚시마저도 거의 접어 버렸다. 그러나 솔직히 이야기하면 바다낚시를 나서기 위해 필연코 소요되는 어마어마한 경비, 즉 돈이 우선 없었기 때문이다.
졸지에 빚쟁이 한데 시달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고, 먹고 살기위해 해야 할 일도 딱히 없는 참이라 동기들과 어울려 노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러다 보니 동기회 일이나마 죽자 살자 하게 되고 결국 사업을 잘 할 때부터 시작한 총무, 반 총무 직으로 어언 10년을 동기회 일을 하게 되었고, 평생 배운 일이 잡지 만드는 일이었으니 이제는 동기신문이나 열심히 만들고 있던 중에 하나, 둘 나의 주특기인 낚시를 같이 즐기는 친구들이 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절로 동기낚시회가 만들어졌고 또한 절로 나는 동기낚시회의 총무가 되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과 같이 다시 그렇게 사랑하는 바다를 찾아 나서는 일은 너무나 즐겁고 참으로 신나는 일이다.
혼자 낚던 재미를 친구와 더불어 할 수 있으니 너무 즐겁고, 혼자 먹던 술과 횟거리를 좋은 벗들과 함께하니 너무나 즐거운 것이다. 더더구나 근 한평생을 더불어 우정을 나누던 친구들과 함께 낚시 여행을 떠나는 즐거움을 다른 그 무엇에 비길까?
게다가 궁한 형편에 바다낚시터로 못나가 안달이 나있던 나는 친구들 덕분에 그렇게도 가 보고 싶던 바다낚시터를 나서게 되었으니 동기낚시회의 일정을 짜는 동안 내내 즐거웠다.
그러나 바다낚시는, 특히 장거리 바다낚시는 숙련된 꾼들의 놀이이다.
즐기러 가서 선 낚시터, 즉 뭍과 물의 경계선은 곧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기도 하다.
한 발짝이라도 실수로 더 내딛으면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기로에 곧장 들어서고 마는 위험한 놀이터이다. 때문에 초보 낚시꾼을 데리고 더욱이 마누라나 아이들을 데리고 바다낚시터로 나서는 일은 그야말로 위험천만이다.
난 구명조끼나 갯바위신발 등의 안전장구를 갖추지 않고는 갯바위 근처에는 아예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숱한 글로써 낚시꾼들을 가르쳐 온 사람이다.
거의가 낚시초보자인 우리 동기낚시회원들을 데리고 게다가 바다의 위험을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들 까지 데리고 가야한다는 게 큰 부담이기만 했다.
6월의 정기출조지는 욕지도
어디서 어떻게 가족과 함께 즐길 것인가?
많은 고민이 따랐다. 가기 편하고, 경치 좋고, 먹거리도 풍성하여야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절대 안전한 바다낚시터는 어디인가?
나라 안 섬이란 섬은 모두 섭렵하며 살아온 터라 가볼 만한 곳이 한두 군데 일까마는 우리 동기들의 빠듯한 일정, 즉 연휴를 틈탄 1박 2일의 시간을 우선 고려하고 보니 갈 곳이 마땅찮다. 우선은 경상남도의 남해동부 바다의 섬들 중에서 골라야 했다.
이곳들 중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장소의 첫째 조건은 가까운 거리에 절대적으로 안전한 낚시터가 있어야 한다는 것. 또한 도시서 살다 관광차 들어가는 우리 일행이 쾌적하게 편히 쉬고, 씻을 수 있는 설비가 갖춰진 숙박업소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대개의 섬들은 어딜 가나 물이 부족하기에 상수도 시설이 갖춰진 곳은 남해안에서는 육지와 연륙된 다리가 있는 큰 섬인 거제도나 남해도가 고작이다. 거제도와 남해도는 연륙된 섬이기에 이 계절의 연휴 때면 보나마나 북새통일 터.
그러고 보니 안성맞춤의 섬이 욕지도이다.
경남 통영시 욕지면이 행정명인 욕지도는 한때 상주인구가 1만 명에 달했던 면소재지인 큰 섬이다.
불경의 하나인 연화경에 있는, “이치의 처음과 끝을 알려거든 석가세존에게 여쭈어 봐라.”란 뜻의, “欲知頭眉 하려거든 問於世尊하라”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으로, 이웃한 동쪽의 연화도, 북쪽의 두미도, 서남쪽의 세존도 등과 함께 불교식 이름을 같이 얻은 섬이다.
선사시대 패총이 발견될 만큼 사람이 산지는 무척 오래된 섬이지만 조선조 수 백 년 동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 되었다. 궁중에서 녹용을 만들기 위해 주민들을 강제로 소거시키고 민간인의 출입을 금지시킨 가운데 사슴을 방목하여 키우기 위한 나라의 조처 때문이었다.
그래서 욕지도의 옛 이름은 사슴섬, 즉 녹도(鹿島)이다.
그러나 왕조가 힘을 잃고 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개항의 시기를 맞이하면서 비로소 민간인들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불규칙적인 십자형으로 생긴 섬의 구석구석에 만이 형성되어 어떤 바람이 불어도 피항이 가능한 천혜의 어항 조건을 갖추었기에 개항 초부터 욕지도 큰 번영을 누리게 된다. 부근의 황금어장에서 조업하던 고깃배들이 물을 얻기 위해 사시사철 드나들어 욕지도는 중요한 어업 전진기지 구실을 하면서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
욕지항은 밤낮없이 흥청 되었고, 풍어라도 드는 해에는 욕지도 강아지들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 할 만큼 어민들이 중심이 된 큰 마을이 생겨났다. 넉넉한 살림살이에다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도 상당해 아이들을 이곳서 초, 중학교를 공부를 시키고 육지로 보내 대학까지 공부시키는 가정이 꽤나 많다.
우리나라서 처음으로 고구마를 시험 재배한 곳답게 맛있는 고구마의 명산지로 유명하여 일찍부터 기름진 고성 쌀과 이 곳의 고구마를 바꾸어 먹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금도 이곳 고구마로 빚은 막걸리 맛은 일품이다.
또한 남해 한복판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데다 주변의 크고 작은 만의 수심이 워낙 깊어 일찍부터 군항으로 개발되었고 지금도 해군기지가 있다.
욕지도 산의 주봉인 해발 384m인 천황산은 이웃한 두미도의 천왕산과 그 웅자를 겨루고 있고, 날씨가 좋을 때는 멀리 지리산의 천황봉을 바라보며 서로 웅자를 겨룬다는 섬으로 지금은 남해의 다도해 조망을 겸한 등산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명산이다. 정상 부근에 군사시설이 있어 정해진 등산코스로 산타기를 해야 한다.
뜻밖에도 사람이 들어가 산지는 이제 불과 120년 정도로 일천해 지난 1985년도에야 비로소 입도(입도)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으니 수 백 년 동안이나 인적이 끊긴 가운데 자연림의 원시 숲이 그대로 고스란히 보존된 아름다운 섬이다.
요즘은 통영시의 여객선터미널과 산양면의 삼덕 항에서 하루 서너 차례 운항하는 정기객선으로 카페리가 취항하고 있다.
편리해진 교통 덕분에 여행객이나 차량의 진입이 수월해서 일찍이 해금강을 뺨치는 수려한 경관의 섬과 기암절벽을 보기위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다도해상의 보석 같은 섬이다. 특히 섬의 남쪽인 혼곡 일대에서 서쪽 끝인 양판그미 사이에 삼여를 끼고 펼쳐진 해안 절벽의 장관은 남해바다 어느 절경과도 비교를 거부할 만큼 빼어난 경관으로 오래전 당대의 명배우 고은아를 주연으로 한 ‘갯마을’이란 영화의 촬영장이 있을 정도로 절경의 해안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욕지도가 일반인에게 크게 알려진 것은 넘쳐나는 어자원으로 훌륭한 어항으로서 뿐만 아니라 남해 동부바다의 고급 바다낚시 어종의 집산지인 일급낚시터로 일찍부터 명성을 획득했다.
욕지도는 6월, 요즘 철이면 안 낚이는 바다 어종이 없다할 만큼 다종다양한 어종의 고기가 낚이는 훌륭한 낚시터이다. 참돔, 돌돔, 감성돔, 벵에돔, 농어, 능성어, 볼락 등등 바다낚시꾼이면 누구에게나 선망의 어종인 온갖 고급어종들이 다 낚인다.
어느 일본낚시꾼의 이야기
왜정시절, 일본국의 어느 수산 연구관이 어류 연구임무를 부여받아 욕지도서 살다 패전을 맞게 되자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그는 바다낚시꾼이었다.
욕지도서 근무하는 내내 욕지도의 힘센 물고기들의 우람찬 입질에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다가 갑자기 돌아가게 된 것.
일본이 패망하고 자기 나라로 쫓겨 가게 된 신분이었지만 자기만의 명 낚시터를 두고 차마 떠날 수가 없어 꺼이꺼이 울고만 있었다. 욕지도 같은 황금낚시터는 천혜의 낚시 파라다이스 자기나라인 일본에서도 없다고 하며 목을 놓아 울었단다.
그러나 어쩌랴? 패전국의 공무원 신분인 것을. 결국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뒤돌아 보고 또 돌아보고 하면서 귀국하게 되었다.
결국 자기가 낚시꾼으로써 욕지도 구석구석을 후벼 파고 다니면서 찾아낸 낚시터 정보를 팔아먹기로 했다. 자기와 친하게 지내던 현지인에게 돈을 받고 알려주고 가기로 했단다. 그냥 알려만 준 게 아니라 낚이는 어종의 인기나 포인트로서의 중요도에 따라 각 낚시터마다의 가치를 제 각기 가격을 매겨 팔고 갔다는 것.
즉 돌돔이나 참돔 등 고급어종이 잘 낚이는 훌륭한 포인트는 당시 돈으로 10전, 감성돔이나 벵에돔이 잘 낚이는 곳은 7전, 농어 포인트는 5전, 볼락 등 잡어가 잘 낚이는 곳은 3전 등으로 좋은 자리 즉 명 포인트를 알려주는 조건으로 임의로 매긴 가격으로 돈을 받고 포인트를 현지인에게 팔고 갔다는 것.
일면 남의 땅, 남의 나라 낚시 포인트서 실컷 손맛을 즐기고 간 것에 대해 오히려 우리가, 아니 현지민들이 자리 값을 받아야 마땅하고, 애초부터 우리 땅인 낚시터를 땅주인인 우리 나라 사람에게 돈을 받고 팔고 간 것이 어처구니가 없고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포인트를 찾기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 않고 또 스스로 찾아낸 포인트에 대한 보안유지를 위해 안간 힘을 써는 낚시꾼들의 일반적인 속성을 생각한다면 전혀 수긍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흔히 낚시꾼들은 자기가 낚시한 자리를 말끔히 물로 씻어내고 그것도 모자라 많은 낚시 짐들을 힘들게 다른 곳으로 옮겨가 마치 딴 곳에서 낚시한 척 시치미를 뚝 따는 경우가 많다. 철수할 때 배를 먼저타고 있는 다른 낚시꾼들에게 포인트를 들키지 않으려는 계산이다. 언제, 누구를 데려가도 아름다운 경관이 그대로 있어 같이 즐길 수 등산과는 달리 시시각각 이동하는 물고기들이 잘 모여드는 장소를 수고를 다해 찾아낸 낚시꾼들의 보편적인 심리를 고려해 보면 같은 낚시꾼의 입장에서 얼마간 이해가 되긴 한다.
아무튼 돈을 받고 자리를 팔고 간 건 아무리 국적을 초월한 낚시꾼의 입장에서 이해하더라도 너무 심한 이야기였지만 욕지도는 그만큼 돈을 주고 사더라도(포인트 정보를 귀띔 받아도) 아깝지 않은 명 낚시 포인트가 즐비하다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욕지도를 취재하면서, 이미 오래 전에 고인이 되었을 어떤 노인장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나는 신병기자 시절인 1984년 6월에 이 섬의 낚시터를 조선일보의 이우봉 기자와 함께 취재하고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월간낚시에 특집으로 보도한 적 있다. 또한 그 기사로 해서 나는 바다낚시 전문기자로써 하루아침에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기에 욕지도는 나에겐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을 갖게 해준 섬이기도 하다.
물어볼게 뭐 있나?
이쯤 되면 우리 동기 낚시회의 6월 정기 출조지는 당연히 욕지도이지.
그래 욕지도로 가자.
욕지도 어느 마을로 가지?
현지에는 근 20 여 년 동안이나 사겨 온 욕지항의 노련한 낚시관광 유람선 해성호 선장인 김순돌 씨가 있다. 순돌이 형님 집으로 갈까? 마침 민박집도 새로 잘 지어 마련했다고 들었는데…….
그러나 거긴 욕지항 한 복판의 번화가에 자리 잡고 있는 민박집인 탓에 낚시터는 한참 이동해 가야하고 또 오붓한 우리 동기들의 하룻밤놀이터로는 너무 북적거리는 곳이다.
예전에 참돔낚시를 하며 지나친 욕지도 고래머리 언덕의 언저리서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고래머리 식당이 생각났다.
욕지도 서쪽 끝인 양판그미와 총바위 콧부리 사이의 낮은 언덕위에 그림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던 바로 그 집, 욕지도 울창한 산속에 방목되어 키워지던 약용흑염소의 전문 요리점이다. 그러나 팬션의 기능을 더하여 쾌적한 관광민박집 구실을 하고 있는 식당으로 더 유명한 바로 그 집이다.
행사 예정일인 6월 5일을 무려 보름이나 앞둔 5월 하순에 일찌감치 예약을 해 두었다.
그러나 예약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고민이 따랐다.
연휴가 든 일정이라 민박집 마다 예약이 밀려드는 형편이었고 우리 일행의 예약도 간신히 되는 참이었고, 또한 우선 몇 명이 참가하게 될지 모르는 행사를 위해 몇 개의 방을 잡아 두어야 할지도 문제였다. 참가 인원을 동기 10여 명에 가족들 포함 15~6명으로 추산하고 동기들은 모조리 한 방에 다 집어넣는다는 전제 아래 큰 방 하나를 잡은 다음, 가족들을 위한 방 하나를 따로 예약해 두었다.
그리고 곧장 참가 인원 모으기에 나섰다.
예약을 마친 즉시 동기들 모이는 자리마다 찾아다니면서 욕지도의 매력을 열심히 이야기 했다. 그러나 욕지도가 어디쯤 있는, 무슨 먹을거리가 있는 섬이냐는 질문을 받고 보면 정말이지 맥 빠지는 노릇이었다.
“경치는 해금강과는 비교가 되지 않토록 기가 막히고, 부인들에게 특히 좋은 야생 흑염소 전문 요리점이고, 샤워시설 다 되어 있고, 낚시발판이 안전한 방파제가 있고, 근처에 맛 좋은 참돔이 데꺽데꺽 낚이는 황금어장 코앞에 있고, 풍성한 횟거리는 지천에 늘렸고, 팬션 앞뒤로 펼쳐지는 경치는 신선들이 노는 곳이 따로 없고…….”
입에 침을 튀기며 참가회원 유치에 열을 올렸다.
마치 낚시점 가이드 총무가 주말 회원 수를 맞추기 위해 온갖 소리를 다 늘어놓는 것처럼 열심히 약(?)을 팔고 다녔다.
다행히 슬슬 참가동기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부산마라톤에 출전한 이사달 모임에 나가 한참 약장수 한 것이 주효해, 달리기 팀을 중심으로 참가희망자가 부쩍 늘어났다. ‘띵호와’였다. 이사달 팀과 우리 낚시회 오리지널 멤버들이 대거 참가하면 간단히 20 여 명을 모을 수가 있겠다. 신난다.
그럭저럭 선수단이 구성되겠기에 곧장 다음 문제들을 검토해야 했다.
우선 단체 바다낚시 여행은 어마어마한 경비가 따르는 행사이다.
이동과 관광을 위한 차편, 배편 등의 교통문제와 모두 즐길 수 있는 낚시장비와 미끼의 대량 확보, 야외 생활에서의 먹거리와 취사용구 확보 등등에서 상식을 초월하는 거금의 경비를 필요로 한다. 때문에 필요한 예산의 확보를 위해서는 당 한명의 참가자라도 더 모아야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참가자 수가 늘면 늘수록 인솔에 큰 어려움이 따르는 법이지만 풍성한 여행을 위해서는 그런 어려움이야 넉넉한 예산을 위해 당연히 각오했다.
이제 대규모 회원들의 이동, 즉 떼거리를 인솔하는 문제를 구석구석 짚어 보았다.
떼거리 낚시여행을 준비하다
우선 떼거리의 숙식도 문제이지만 많은 식구들의 이동을 위한 교통편이 큰 문제였다.
20여명의 참가회원이 확보되자 곧장 25인승 미니버스를 수배하였다. 그러나 황금계절의 황금연휴로 인해 버스의 이틀간 대절료는 대단했다. 물경 50만원. 단골 차량의 차주에게 부탁하여 승합차 두 대를 대신 수배해 보았으나 두 대의 이틀 대절료는 오히려 더 비싸 60만원을 달라고 한다. 빠듯한 회비에 대절 차량을 써는 것은 호사임에 분명하다는 결론이 났다. 어쩔 수 없이 각자의 차를 이용하기로 하고 대절차를 써는 것은 포기했다. 물론 조를 각각 편성, 꽉꽉 채워 차에 태우기로 했다. 그리고 차를 가지고 나서는 동기에겐 회비 삭감의 혜택을 주기로 했다. 우선 나의 차를 움직이고 우리 동기회의 자가용을 참가 인원의 수에 따라 더 증차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다음 문제는 원만한 낚시가 이루어지기 위한 준비.
모처럼 남해바다 한복판의 섬으로 찾아 들어가며 잔뜩 입맛을 돋울 모두에게 먹일 맛좋은 물고기를 낚기 위한 준비, 각종 장비와 낚아 낼 선수인 프로(?) 낚시꾼들의 대거확보, 그리고 만족할만한 포획 물고기의 수량 즉 풍성한 조과를 보장해 줄 미끼와 다량의 집어제 확보들이 문제였다.
전문꾼의 솜씨를 지닌 동기낚시꾼의 참가가 절실했다.
나라 안 낚시계서도 정상의 실력을 지닌 꾼으로 손꼽을 만한 이병문, 김수일, 이영웅, 구철모 동기들의 참가가 절대 필요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서울, 대구 거주 동기들이라 참가가 쉽지 않을 듯 했다. 다행히 김수일 동기가 연휴에 부부 동반한 낚시여행 일정을 고려 중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이영웅, 구철모 동기가 바쁜 시간을 쪼개어서라도 쾌히 참석하겠노라고 약속한다. 지난번 거제도 동기들 봄 소풍에서 상당한 헌신을 해 준 구철모 동기가 이번에도 자기 배를 가지고 나와 동기들에게 봉사하겠다며 지원해 주기로 해 큰 힘을 얻었다.
그러나 낚시꾼이어서 낚시터 상황에 익숙하면서도 야외생활의 달인인 설창효 동기, 알뜰 살림꾼 남정배, 일손 잘 거드는 장성태, 김지찬 동기들이 이미 잡혀 있는 다른 일정 탓으로 불참하게 되었다. 아이쿠, 보나마나 이번 여행은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를 다 해야 하는 고생길이 기획단계서부터 훤히 내다 보였다.
다음으로 풍성한 횟감을 낚기 위한 예산집행.
우선 고기를 불러 모으기 위한 다량의 집어제 구입. 꽤 비싼 집어제였지만 물고기 포획의 첩경인 집어제 구입에는 돈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참석인원에 따라 확보 가능한 예산의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예산을 집중 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따라 참석인원이 거의 확정된 행사 이틀 전, 부산의 최대 낚시도매상인 만어낚시로 가서 옛 낚시기자의 위력(?)으로 윽박지르고, 꼬셔가며 거의 원가에 가까운 싼 가격으로 10여만 원 어치의 파우다 집어제와 각종 소모품들을 구입했다. 그것도 가격은 비싸지만 효력이 확실한 일산 마루큐사 집어제들과 소위 ‘물고기 흥분제’로 통하는 비장의 엑기스도 따로 마련했다.
우선 주력 낚시대상 어종인 참돔용 집어제를 충분히 구입하고 다음으로 방파제서 만날 수 있는 벵에돔을 위한 집어제 파우더도 넉넉히 준비했다. 냉동미끼인 미끼용 크릴이나 품질용 크릴, 그리고 볼락낚시용 미끼인 각종 지렁이와 새우류는 출항지인 삼덕항 포구 낚시가게서 당일 현지에서 나중에 구입해야 선도가 유지된다.
참돔낚시는 한바다서 배를 띄워 놓고 물고기를 불러 모으기 위해 집어용 미끼를 쉴 새 없이 던져 넣어야 하기에 전체 예산이 빠듯하더라도 예산을 아낄 일은 아니었다. 맛있는 참돔 회를 학수고대하는 동기들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그리고 곧장 대형 마트로 가서 야외취사용 소도구들과 소주, 맥주, 가스 등을 챙겨 차의 트렁크에 실으니 넓은 대형승용차의 커다란 트렁크마저도 비좁다고 아우성이다. 간신히 다 챙겨 넣었다. 준비 끝~!
얏호~! 신난다.
이제 휘파람 휙휙 불며 낚시터로 달려가면 된다.
사람잡는 참가불가 통보
출발 하루 전.
출근하면서 휴대폰을 켜니 많은 친구들한테 전화가 걸려 와 있다.
뭔 전화들을 이렇게 많이들 걸었남?
하나하나 전화를 되걸었다.
아이쿠, 이 일을 어쩌나?
참가약속을 한 녀석들의 대거 불참한다는 통보이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은 있다고, 불참하는 사람들의 사연은 다들 제각기 명분과 이유가 있다. 그러나 단체가 움직이는 낚시여행을 그것도 행사에 임박하여 불참이라니?
낚시여행에 있어서 출발에 임박하여 참가예정자가 불참통보를 내는 것은 진행자에겐 치명적이다. 자칫 행사 전체의 진행이 마비되는 상태가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체 예산편성은 확보된 회원들의 참가비에 근거하여 편성, 집행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예산은 현지 민박비 예약송금, 용품과 장비 구입 등으로 이미 상당 부분 집행이 된 상태였다.
긴급히 우리 동기 낚시회장 박병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쿠, 이런 날벼락이 있나?
박병규 회장마저도 일본에 나가있는 아이가 귀국해 급히 서울로 가게 되어 불참한다고 한다. 그러나 박 회장은 경비문제가 발생하면 부족분을 충당하겠다며 행사 강행을 지시하고 나를 위로한다. 그리고 예약민박비로 송금이 된 회장의 사비는 경비 부족 시에 그대로 충당하라고 한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참가자의 참가비 총액은 이미 편성, 집행되고 있는 전체 예산의 손익분기점을 밑돌고 있는 참이었다.
낭패다~!
주말 출조 회원들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 힘을 쓰던 낚시가게 가이드들의 피말리던 입술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하, 내가 영판 그 꼴이 되었구나.
먹고 살자고 발버둥친다던 그들의 울먹이던 목소리가 귓가에 선하다.
그러나 어쩌랴.
가야지~.
일단 회장의 원격지원 약속을 믿고, 욕지도란 남해 한복판의 낯선 섬으로, 처음 나서는 기대에 부풀어 있는 다른 참가자들을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이들을 인솔할 수밖에 없질 않나?
첩첩난간 욕지도로 가는 길
김부식 동기의 RV차량에 그의 부인, 딸과 김달수 동기의 부인, 아들 그리고 이자웅 동기를 편성 배치하고, 나의 차에 조재익, 전상태 동기를 태웠다. 그리고 늦게 들어 올 김용준 동기의 차에 그의 부인과 박경환 동기 부부가 타기로 했다. 서울서 이영웅 동기가 자기 차로 내려와 통영 현지서 합류하기로 했고, 대구의 구철모 동기가 주일예배를 마치고 통영으로 자기 차로 와서 통영 마리나 리조트에 계류되어 있는 낚싯배를 몰고 욕지도 현지에 합류하기로 하였다.
삼덕 항에서 우리 일행들의 승선이 예약되어 있는 욕지도행 카페리호인 금용호의 출발시각은 오후 2시 30분. 마산, 고성 경유, 통영까지는 우리들 승용차로 약 두 시간 반 소요되지만 현지서 출항 전에 가질 점심식사를 위해 이동시간을 넉넉히 4시간을 배정, 오전 10시에 출발했다.
출발지인 조재익 동기의 집을 나서 동래의 대형마트에서 다시 구입을 미뤄 둔 돼지고기 삼결살 등을 챙기고 나서는 참에 조경환 동기가 어디 있냐고 전화를 걸어온다. 부인의 동행 여부가 불확실해 참가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던 상황이어서 불참으로 보고 있던 참이었다.
만덕터널 입구에서 예의 호방한 웃음을 지으며 차에 오르는 조경환 동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단 한 명의 참가비마저도 아쉽던 참이 아니었던가? 뜻밖에도 살림을 보태줄 친구가 나타나니 아슬아슬하던 예산은 간단히 손익분기점을 넘기게 되었다.
조경환 동기의 합류로 기분을 완전히 바꾼 나는 신나게 악셀레이더를 밟았다.
간닷~!
낚시터로~~~~~!
출발부터 꼬이기 시작
고속도로 입구가 수상하다.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교통방송에서 남해안 고속도로가 엄청난 휴가차량으로 정체가 극심하단다. 함안 일대는 고속도로가 아예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고 까지 한다.
졸지에 비상이 걸렸다.
다른 차에 비상 연락을 취하면서 진해경유 마산행 코스로 들기 위해 차를 국도로 틀었다. 연휴 속의 국도 또한 만만찮다. 가는 곳마다 정체구간이 수시로 나타난다. 마산서 고성으로 드는 월영고개 부근에선 차가 아예 엉금엉금 기기 시작한다. 마산을 빠져 나가는 차, 들어오는 차들로 도로는 온통 쑥대밭이다.
알고 보니 통영서 철인 5종 경기인 바이에슬론 국제대회가 열리고 있단다. 오늘은 내국인 대회가 열리고 다음날은 외국인 대회가 연이어 열린단다.
아무리 연휴라지만 도로사정이 수상하다 했더니, 어쩐지.
“행사 날짜를 팔자로 잘 잡았네?” 친구들이 놀려댄다. 우씨~.
간신히 마산을 빠져나오고 보니 벌써 오후 1시를 넘어선다. 쾌속으로 고성을 거쳐 통영에 들어가더라도 도로사정을 감안 할 때 족히 한 시간 반, 점심을 거르더라도 승선 수속이나 현지 포구 낚시점에서 미끼 준비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얼추 두 시간 반 이 더 필요한 상황이다.
우리가 예약해 둔 오후 2시 30분에 출항하는 욕지행 금용호를 타는 것은 아예 불가능이다.
욕지도행 다음 선편은 다른 선사인 욕지수협의 카페리호인 욕지호. 욕지호 출항시각은 오후 4시. 추정 도착 시각이 오후 3시 반 경이니 그것마저도 빠듯하다.
전상태 동기가 바쁘게 금용호 예약을 취소하고 부랴부랴 욕지호에 승선예약을 한다. 급작스런 예약임에도 불구하고 마침 승용차 세대를 실을 여유가 있었던지 용케도 예약이 되었다.
우리 일행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끼니마저 거른 체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 삼덕 항에 도착하니 3시 30분. 벌써 욕지호는 승객들과 차량들을 싣고 있다.
서울서 내려온 이영웅 동기가 먼저 도착해 가까운 곳에서 오는 놈들이 더 늦다고 놀려 댄다. 얼른 김달수 동기에게 대신 승선수속을 해 달라 이르고 5분 거리의 낚시점으로 급하게 차를 몰았다. 냉동크릴과 지렁이 등 미끼들을 주섬주섬 챙겨 담고 부두로 돌아와 차를 승선시키니 곧 배가 뜬다.
에~혀, 진땀 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잊은 게 있다.
고기들을 먹을 때 필요한 상추, 마늘, 깻잎 등을 산다는 걸 잊었다. 욕지도 현지에 가서 사면된다는 둥 섬의 채소는 엄청 비싸다는 둥, 둥둥 타령 끝에 일정 관계로 후발대로 통영으로 들어오고 있던 김용준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같이 오고 있는 부인네들에게 부탁하여 통영서 야채를 구입해 달라고.
바삐 서두르면 꼭 사고가 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작으로 더 큰 사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당초 금용호를 탈 예정으로, 금용호 회사에 주문해둔 왕복 선표가 우리가 배를 욕지호로 바꾸면서 편도 표로 바꾸어 끊어 탄 것이다. 김달수 동기에게 바쁘게 선표구입 대행을 시키면서 내가 깜박한 것이다. 계획대로 금용호를 탔으면 예약이 당초 왕복으로 되어 있었으니 신경을 쓰나마나 왕복표를 탔을 것이나 다른 선사의 배편으로 바꾸면서 삐끗한 것이다.
이 조그만 실수가 다음날 행사전체의 차질을 몰고 오게 될 줄이야.
예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한꺼번에 마구 몰려나오는 휴일 귀환 길의 선표 구하기란..........
아흐, 끔찍한 일이다.
그것도 귀환 길의 고속도로 사정을 짐작해 볼 때, 가장 좋은 시간대인 현지 철수 낮 12시의 배표를 구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박경환 동기의 월요일 오후 스케줄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낮 12시배로 철수해 나와야만 했고.
욕지도로 향하는 배위서 오랜만에 해 보게 될 낚시에의 기대가 사뭇 큰 기대로 다가 온다. 시시각각 모양을 달리하며 다가왔다 멀어져 가는 올망졸망한 다도해의 섬들과 멀리 펼쳐진 망망대해를 보는 여행의 즐거움은 언제나 즐겁다. 모두들 들뜬 기분으로 갑판위서 흥겹게 떠들고 놀고 있다. 그러나 출발부터 이미 큰 실수를 하고 들어가는 나는 온 종일 돌아 올 선표 구하기에 온갖 묘안을 짜내기에 바빴다. 소위 ‘이벤트의 귀재’란 칭찬을 평소 많이 듣던 나였지만 바쁘게 허둥대는 데는 어쩔 수가 없이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나의 신중치 못함에 두고두고 곱씹으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믿는 게 인맥.
욕지도엔 내가 기자생활 할 때부터 돈독한 우정을 쌓아 온 욕지도의 ‘왕토박이’, 순돌이 형님이 계시니까 도착하자 말자 형님에게 달라붙어 통사정을 해 보는 수밖에.
낯선 섬나라 여행길을 총무 하나 믿고 따라나선 친구들 앞에 마냥 찡그리고 있을 수만 없는 법이다. 이내 분위기를 수습하고 친구들과 바다여행의 즐거움 속으로 빠져 들었다.
드디어 욕지도 도착하다
약 55분 걸렸나?
욕지항에 도착했다. 몰라보게 달라졌다.
배에서 차를 내리자 말자 쏜 살 같이 민박집을 향해 달렸다.
천황산 자락을 따라 산허리를 돌아가며 일주도로가 나 있고, 도로서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더 없이 푸르고 아름답다. 짙푸른 바다위로 초여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고 바다는 쏟아지는 햇살이 간지러운 듯 간간히 은린을 번쩍이며 가만가만 몸을 뒤척이고 있다.
하늘은 코발트빛으로 더 없이 싱그럽고, 천황산 자락 끝마다 푸르른 초록빛이 살아서 수런거리고 있고, 콧잔등에 맺힌 땀방울은 싸아한 해풍에 절로 사라진다.
그렇다. 바로 이 기분이야.
나의 삶, 깊은 내면 의식 깊은 곳에 침잠해 있던 바다로의 회귀본능이 스물 스물 살아 기어 나온다.
욕지도 남쪽 언덕배기 길 위로 곧장 광활한 바다가 펼쳐진다. 바로 태평양 한 가운데까지 막힘없이 툭 터진 남해바다이다. 혼곡 부근의 도로로 올라서니 바로 광주여(욕지도 남쪽의 조그만 돌섬)가 한눈에 들어온다.
광주여의 저 갯바위. 예전에는 돌섬 꼭대기에 조그만 해송이 청아하게도 홀로 서 있더니만 어느 몹쓸 바람이 쓸어 갔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광주여서 펼쳤던 대형 참돔과의 치열했던 격전이 20여 년 전의 일이건만 바로 엊그제 같이 또렷한 기억으로 되살아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해마다 묘하게도 한명씩 사람이 빠져 죽는다던 혼곡 계곡은 아직도 거무티티한 모습으로 으스스하게 왼쪽으로 보인다. 광주여와 감성돔의 명 포인트인 본 섬의 혼곡 일대 사이가 대형 참돔이 속출하는 명 포인트이다.
아, 추억의 검등여
광주여 남쪽으로 검등여(여란 섬과는 달리 파도가 넘나들어 흙 한점 없이 돌부리 만 있는 조그만 돌섬을 말한다)가 날보고 반갑다고 아우성이다.
그래, 검등여야, 너무너무 반갑구나.
검등여는 나에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가진 곳이다. 그것도 끔찍한 악몽의 추억이.
어느 해인가?
검등여서 볼락낚시를 하다 돌풍을 만난 날 밤, 나를 구하러 온 낚싯배는 파도 때문에 갯바위 가로 배를 접안 시키지 못했다. 파도는 점점 높아지고. 어선이었던 그 낚싯배는 끝내 나를 태우려고 곡예 같은 위험한 접안을 끝없이 시도했었다.
그러나 배의 이물은 밀려드는 파도에 실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마구 치솟았다가 다시 파도에 쓸려나가면서 사정없이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를 계속했었다. 갯바위 가로 배를 바싹 붙이다가는 바로 거센 파도에 실려 배는 박살이 날 지경이었다. 배는 다가오다가 쓸려나가고, 또 쓸려나가기를 반복했고 파도는 점점 높아져 갔다.
장비는 배에서 던진 밧줄로 장비를 단단히 묶고 짐을 바다로 힘껏 던져 넣으면 배에서 끌어 올려 모두 옮겨 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몸은 도저히 실을 수가 없었다. 공포가 밀려 와 바다에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위험한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배를 탈 수가 없다고 발만 동동 굴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에라, 모르겠다하고 로프로 몸을 칭칭 감았다.
배는 저만치 물러가 나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마구 달려 바다로 점프하며 뛰어 들었고 그 순간 배는 전속으로 후진했다. 바다로 뛰어든 순간부터는 공포의 도가니였다. 무슨 바다가 그리도 깊은지 끝없이 가라 앉는 듯 했다. 얼마나 깊이 가라앉았는지 헤엄쳐 오르고 또 올라도 도저히 물 밖으로 몸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입고 있던 구명조끼의 부력도 맥을 못 써는 듯 했었다.
선장이 젖 먹던 힘을 다해 로프를 끌어당긴 덕분에 이윽고 배가 저만치 보였다. 그러나 멀리 있어도 한참이나 멀리 떠 있었다. 배도, 나도 빠른 중들물의 조류에 실려 굉장한 속도로 떠내려가고 있었고 나는 좀체 배위로 올려지지 못하고 있었다.
간신히 난간을 잡으면 힘이 부칠대로 부쳐 이내 미끄러져 다시 물에 빠지고, 파도는 자꾸만 나를 바다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흔들리는 고물을 안간힘은 다하며 잡고 있던 팔의 힘이 빠져 바다로 속절없이 떨어지기만 계속했다.
배는 순식간에 들물에 실려 검등여 서쪽에 있는 흑초 부근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선장은 위험한 암초인 흑초 위로 배가 떠밀리지 않게 하려고 사력을 다해 키를 잡고 있었다. 이윽고 선장은 배곁에서 배와 함께 떠내려가고 있던 내 곁으로 배를 붙여 갈고리로 나를 찍어 올리기를 서너 차례, 비로소 나는 배 위로 끌어 올려졌다. 나는 물에 뛰어 든 후 건져 올려지기 까지가 모두 순식간의 일이었지만 나중에 선장의 말로는 그 시간이 무려 30여 분이나 걸렸다고 했다.
잊을 수 없는 아찔한 순간으로 두고두고 기억나는 옛 일이다.
그 때 사투를 펼치며 내 목숨을 구해준 선장이 바로 내가 형님이라 부르는 해성호 선장 김순돌 님 이다,
어럽쇼?
간출여(물에 잠겼다 드러났다 하는 조그만 돌섬)였던 흑초에는 어느새 등대가 세워져 있다.
마치 백종국 구조 기념비처럼. 우하하핫~!
또 하나의 감성돔 명 포인트 삼여 부근의 도로로 올라서니 멀리 양판그미 아래로 보이는 갯바위가 새롭다. 한 여름의 땡볕 아래서 온도계가 섭씨 50도를 가리키던 갯바위 위에서의 촬영 기억이 되살아난다.
1994년도였나? 국내 최초의 50분짜리 바다낚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KBS-TV 취재팀과 폭염에 폭폭 삶기면서 작업했었던 곳. KBS-TV의 설상환 PD와 좀 더 좋은 그림을 만드느라 핏대 돋우며 싸우고 싸우던 곳이다.
마치 옛 고향에라도 돌아 온 기분인 양 욕지도 남쪽에 다시 오니 온갖 추억들이 간단없이 밀려온다.
욕지도에 낚시를 하기 위해 처음 찾았을 때인 1978년이나, 조선일보 취재차 왔던 1984이나 그 당시는 모두 낚싯배를 용선해 해안가 갯바위만을 찾아 돌아다녔었다. 그런 탓인지 지금 이렇게 일주도로를 이용해 천황산 허리서 내려다보는 남쪽해안의 절경을 보기는 처음이다. 배를 타고 지나치면서도 욕지도는 참 아름다운 섬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욕지도를 수 십 번이나 찾아 왔었던 나도 이곳이 진정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미처 몰랐다.
달리는 차창을 통해 해안가를 보던 동기들의 입에선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왔고, 다른 차에서 내려 민박지 펜션 입구에서 마주친 김부식 동기의 부인은 절경에 감탄해마지 않는 듯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최고라는 사인을 보내온다.
나의 친구들을 이곳으로 와 한껏 즐거워하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나 뿌듯하고, 또 그들을 데려온 것에 대해 새삼 큰 긍지를 느낄 수 있었다.
아, 역시 남해안 으뜸의 아름다운 지니고 있는 욕지도.
절경의 위치, 민박집 고래머리 식당 주변의 방파제들
고래머리 팬션(주인장 박춘길/055-642-2771)은 욕지도의 서쪽 고래머리치라고 불리 우는 콧부리 능선위에 있는 식당이다.
들어가는 입구에 왼쪽으로 바닷물을 퍼 올려 만든 해수 찜질방이 있고, 오른쪽으로 동시에 50여명이 수용 가능한 중앙식당이 있다. 길게 늘어 선 각 호실마다 독립된 가옥 구조를 가지고 있고, 방마다 취사시설과 욕실에 각각 딸려 있다. 자갈마당을 깔고 각 호실마다 투숙한 사람들이 야외 바비큐파티를 즐길 수 있도록 벤치와 숯불 화덕도 갖추고 있다. 주차공간이 넉넉하고 언덕위서 바닷가로 내려가는 오솔길 산책로를 잘 다듬어 놓았다.
무엇보다 이 곳의 큰 매력은 앞마당처럼 펼쳐진 남해의 푸르른 쪽빛 바다를 맘껏 조망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석양의 붉은 노을이라도 떨어지게 되면 이곳은 그야말로 동화속의 나라로 변하게 된다.
숙소에 우리 일행들은 여장을 풀고 저녁 7시까지 식사가 준비될 동안 나는 이영웅 동기와 부근에 있는 여러 방파제들을 둘러 봤다. 어두워지면 각 방파제의 낚시터로서의 조건을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일 가까운 북쪽의 덕동 방파제는 이미 연휴를 틈탄 많은 장기낚시꾼들이 먼저 들어와 차량들이 줄을 서서 주차하고 있었고, 텐트 등으로 야영장까지 설치해두고 낚시에 열중하고 있다.
접안시설이 되어 있는 오른쪽 방파제가 그럴 듯 해 보인다.
외항 쪽으로 테트라포드를 겹겹이 둘러쳐 놓았고 내항 쪽으론 시멘트로 물양장을 만들어 놓았지만 전문꾼들이 아닌 우리 동기들이 낚시를 하기에는 장소가 협소하고 위험해 보인다. 방파제 넘어 맞은편 갯바위 쪽은 내가 예전에 감성돔을 낚기 위해 붙어봤던 일급 감성돔 포인트였지만 갯바위 암벽을 타는 솜씨가 빼어난 전문꾼이 아니면 낚싯배로 진입하지 않는 한 접근이 어려운 곳이다.
왼쪽의 축광은 수심이 형편없이 낮다. 왼쪽으로 낮은 갯바위를 타고 깊숙이 들어가면 볼락이 나올 만한 자리가 몇 군데 보였으나 수심이 전반적으로 너무 낮을 뿐만 아니라 초보낚시꾼들의 도보로 해야 할 야간이동은 더욱 자신이 없다.
다시 일주도로로 올라와 언덕을 하나 넘으니 도동항이다.
도동항은 욕지도 서쪽방면에선 제일 큰 포구이다. 왼쪽 축광 쪽으로 많은 낚시꾼들이 몰려 있어 가 보니 수심은 좋으나 우리 단체가 한데 어우러지기에는 너무 산만하다.
다시 도로로 올라와 도동항의 오른쪽 방파제 쪽으로 들어가니 이미 휴가객들의 차량들이 몰려 있어 제법 긴 방파제 위로까지 차들로 꽉 차 있다.
욕지도의 교통편이 아무리 좋아졌고 사흘간의 황금연휴라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먼 한바다 섬의 외진 포구에까지 바글바글 많이 몰려들어 있을 줄이야.
징그러운 샛바람이 불고 있다
다시 일주도로를 타고 욕지도 북쪽 해안을 더듬어 보았다.
멀리 두미도의 우람찬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고, 그 앞으로 병풍의 우아한 동양화처럼 섬들이 펼쳐져 있다. 점점이 늘려있는 바깥 거칠이도와 안 거칠이도가 사이좋게 서 있고 그 옆으로 상, 하 노대도가 길게 드러누워 있다. 언제 보아도 정겨운 섬들이다.
섬의 북쪽 해안에는 낚시터로 쓸만한 큰 방파제를 가진 포구가 딱히 없다. 그리고 샛바람이 바로 와 닿는데다가 숙소로부터도 너무 멀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다시 도동항 방파제를 정밀조사하기로 했다.
먼저 들어와 있던 낚시꾼들의 살림망을 살펴보니, 에게? 이게 뭔 일이람?
모조리 텅텅 비었다.
기상학 박사 이영웅 동기가, “샛바람엔 굶지 않는 어부가 있다더냐?”라고 일침이다.
샛바람이 불고 있었다. 사흘 샛바람에는 어부 밥상에 반찬이 없다는 말이 있다.
이영웅 동기의 이야기로는 이날은 국지적인 샛바람이고 밤중에 잠간 소강한 다음 내일은 전국적으로 샛바람의 영향권에 든단다.
이런 빌어먹을.
어부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상대로 하는 한 낚시꾼들도 기겁을 하기 마련인 샛바람이란 북동풍을 이르는 순 우리말이다.
바람은 고기압 쪽에서 저기압 쪽으로 공기가 이동하는 현상이고, 우리나라는 편서풍 기후대이니까 샛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 쪽으로 저기압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다. 샛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물속의 물고기들은 바람의 방향으로 먼저 기상악화가 시작될 것이란 걸 알고 먹이활동이나 나들이를 중단하고 모두 그들의 은신처에 들이박혀 꼼짝을 하지 않는다. 물고기들이 움직이지 않고 먹이활동을 하지 않으니 자연히 물고기를 잡기 위해 나선 어부나 낚시꾼들도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샛바람이 불고 있었다.
샛바람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먹성 좋은 새끼 돌돔만 한두 마리씩 살림망에 담겨들 있을 뿐이었다.
모처럼 먼 바다의 먼 섬을 찾아와 싱싱한 횟거리를 기대하고 있는 친구들과 그 가족들이 학수고대하고 있는 입맛을 무엇으로 대신해야 하나?
우리가 투숙한 고래머리 식당은 야생 흑염소 전문요리점.
보나마나 야생 흑염소 요리를 기대하고 있을 건 뻔 했다. 욕지도로 목적지를 정할 때부터 여성들의 건강식으로 야생 흑염소가 아주 좋다며 참가자들에게 흑염소 전문 요리에 대해 은근히 기대치를 갖도록 이야기를 흘리면서 참가자를 모았던 터.
그러나 막상 한 마리에 50만원이나 한다는 현지 식당의 이야기를 듣고는 흑염소 요리는 예산상 일찌감치 포기한 상태였었다. 만약에 우리 동기들 중 독지가가 있다면 협찬을 받아 당일 현지에서 알선해 볼 요량도 연구해 보았으나 그마저 불가능 했던 것이 흑염소요리는 최소한 사나흘 전에 주문을 해주어야 한단다. 야생 상태로 방목 중인 것을 미리 잡아 놓아서 먹기에 알맞도록 숙성시켜 놓아야 한다는 것. 더더구나 흑염소 요리는 겨울에 먹어야 제 맛이고 여름 흑염소는 노린내가 많아서 찾는 사람이 없기에 미리 잡아 놓는 것도 없단다. 이래저래 흑염소를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믿는 것은 만약을 대비해서 돼지고기 삼결살 4kg 뿐이었다.
그나마 조그만 횟거리 마저도 낚지 못하면 삼겹살로 대신해 볼 참으로 다행히 맛있는 부위로만 골라 비싼 것을 사왔었지만 그래도 멀리 욕지도 까지 와서 흔해빠진 삼결살이 웬 말이냐고 성화를 부릴 동기들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 왔다.
구철모 만세, 만만세!
오직 대구에서 오고 있던 구철모 동기만을 믿으며 조마조마 했다.
구철모 동기가 몰고 올 배를 프로 낚시꾼인 이영웅, 전상태 동기들이 타고나가 심야조업을 감행하면 설마 횟거리 몇 마리 정도야 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통영서 욕지도행 막배가 떠난 후에 도착한 김용준, 박경환 동기들 부부는 욕지도 현지의 낚시유람선 해성호를 전세 내어 실어와 저녁식사 전에 민박집서 우리들과 합류되었으나 구철모 동기가 아직도 도착하지 못했다.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교통대란 상태에 빠져 있던 생지옥을 간신히 뚫고 통영에 도착하였으나 그의 배가 계류되어 있는 마리나 리조트 계류장으로의 접근이 대회본부로부터 통제되고 있단다. 철인 5종 국제경기의 대회본부가 하필이면 마리나 리조트에 설치되어 일반 차량의 출입을 전면통제하고 있다는 것.
그러면 그의 배에 급유를 할 길이 없어진다. 그의 배는 조그만 어선을 개조한 것으로 휘발유용 고속 엔진을 사용하는 데 휘발유를 그의 차로 싣고 가서 급유를 해야 할 판인데 차량을 전면통제하고 있으니 낭패라고 구철모 동기한테서 전화가 날아왔다. 게다가 용케 급유를 하더라도 시간이 이미 너무 늦어 통영서 욕지도 까지 야간 항해를 해야 할 판이므로 우리와의 합류를 포기하고 대구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간단한 GPS항법 장치 하나만 달고 있는 그의 배는 거의 육안항해에 의존하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 심야항해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짓궂게 불고 있는 샛바람 탓에 빈작의 조황이 불 보듯 뻔한데 그나마 믿었던 그 마저 통영서 돌아간다니?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닐 수 없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대구로 철수를 하겠다는 그에게 어떻게 해 보라며 통사정을 하면서도 자칫 큰 위험에 이를 수도 있는 야간항해를 막무가내로 조를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포자기 상태서 이제 믿을 것은 욕지도 볼락들의 아량뿐이었다. 방파제 밤낚시에서 바닥을 박박 긁으며 훑는 악바리 낚시를 해보고 한편으로,
“욕지도 용왕님, 욕지도 볼락님, 이 불쌍한 총무를 살려 주세요.”하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저녁식사를 마치는 자리서 동기들에게 기상 등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조황에 대한 큰 기대치를 반쯤이나마 희석시킨 가운데 곧장 방파제로 출발했다. 방파제 볼락낚시를 하기 위해 북쪽의 도동항으로 옮겨 오니 벌써 사위가 캄캄하다.
방파제에는 아직도 많은 낚시꾼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으나 워낙 부진한 조황 탓으로 철수를 시작하는 낚시꾼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으스스 불어오는 샛바람이 아마추어 낚시꾼들을 ?i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또 다른 아마추어 낚시꾼들인 우리들 대식구가 밀고 들어갈 자리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낚싯대를 펴고 물에 찌를 담가 볼 수는 있겠다고 다소간 안도하는 참에 별안간 대구로 돌아간 줄 알았던 구철모 동기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갖은 연구 끝에 안간힘을 다하여 급유에 성공하고 야간항해를 감행하여 벌써 욕지도에 이르고 있다는 것.
으악? 구철모 만세다, 만 만세다~!
지난 번 봄 소풍 때도 풍성한 감성돔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더니 이날은 목숨을 건 야간항해로 또 우릴 놀라게 한다.
아, 이 무서운 동기애 봐라~!
참돔의 기대는 물 건너가고
방파제로 접안하고 있는 그를 모두가 박수와 환호로 뜨겁게 맞이했다.
신경 곤두서고 위험한 야간항해 끝에 우리와 만나기로 한 도동항으로 들어오면서 아니나 다를까, 얼기설기 늘려있는 어장 줄에 스크루가 걸려 이미 혼이 났단다. 그의 얼굴에 피로가 역력했다.
그는 방파제로 오르자 말자, 애써 피로를 감추면서 샛바람 속에 낚시를 해야 하는 우리를 먼저 걱정한다. 어떻게든 몇 마리라도 건져내 보자며 모두를 독려한다.
그러나 애초의 계획처럼 욕지도의 참돔 명 포인트인 남쪽 양판그미나 장덕이 쪽으로의 항해는 칠흑 같은 그믐밤 어둠 속에선 엄두도 못 낼 일이라며 포기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욕지도의 맛있는 자연산 도미 회를 먹겠다던 우리 모두의 희망은 안타깝게도 먼 나라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총무 놈’에게 속았단 힐난이 마구 날아오는 것만 같다.
참돔을 낚겠노라고 단단히 준비해 간 참돔낚시용 미끼, 크릴, 파우다, 엑기스는 모두 헛 공사가 되고 말았다. 개봉하지 않은 분말 집어제와 엑기스는 그나마 다음에 사용하면 될 일이었으나 생 미끼나 집어제용 냉동크릴은 가방에서 꺼내보지도 못하고 다음날 철수길 통영의 이름모를 낚시점에 몽땅 무상으로 기부하고 말아버리는 비극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흔히 바다낚시꾼이면 익히 겪어보는 이러한 꾼의 낭패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바람의 심술 탓이지만 모처럼, 아니 생애 처음으로 머나먼 욕지도 까지 귀한 시간을 쪼개어 찾아 온 우리 동기 낚시회원들에게 있어선 참으로 서운하고도 괘씸한, 그리고 낙심천만 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거리 원정 낚시를 나서면서 크릴, 새우, 홍합, 각종 지렁이 류 등 수십 만 원어치의 미끼를 싸들고 가는 도중 혹시 상하기라도 할까 싶어 금이야 옥이야 미끼를 소중히 갈무리해 가서도, 막상 낚시터에 도착하여 전혀 다른 미끼에만 물고기들이 낚이기만 하고 가져간 먹이에는 전혀 입질을 안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환장할 지경이 되면 눈물을 머금고 수십 만 원어치의 미끼는 고작 보조미끼로 전락 되던가 아니면 그냥 물 속에 쓸모없이 퍼 넣어버리고 만다.
이런 얄궂은 경험을 수없이 겪은 나였지만 이번의 경우는 참으로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오직, 반드시 횟감을 낚아내고야 말아야 한다는 절대적 사명아래 빠듯한 예산 아래 최대한 구입하여 간 그 많은 미끼들과 집어제를 한갓 무용지물로 만들고 말다니…….
아예 체념하고 낚싯대를 펴고 싶은 마음이 도통 나질 않아 동기들의 낚시 뒷바라지만 하고 있는데 아이쿠, 김부식 동기의 어린 딸이 볼락을 낚았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부리나케 달려 가보니 조그만 딸아이가 조그만 볼락을 한 마리 낚아들곤 마구 즐거워하고 있다. 곁에 선 김부식 동기의 부인도 소녀 같이 예쁜 얼굴로 함박웃음을 가득히 짓고 있다.
축하해주기가 바쁘게, 어?d쇼?
어린 소녀는 볼락의 입에서 바늘을 조심스레 뽑아내더니 바다 속으로 곱게 돌려보낸다.
캬~! 고운 소녀의 너무나 고운 행동에 박수가 절로 나온다.
고운 심성의 부모 아래 크는 고운 아이는 절로 고운 심성의 고운 짓만 골라 하는구나!
처음 낚은 고기를 곱게 바다에 방생한 뒤 용왕님이 감격하셨던지 연이어 김부식 동기의 딸은 두 마리나 더 낚아 내고 흥에 겨워 폴짝폴짝 뛰고, 구르고 난리다.
“아이쿠, 용왕님 감사합니다요. 저들을 저렇게 기쁘게 해 주시다니 감사 합니다요.” 마음속으로 난 수십 번이나 감사 기도를 하고 또 했다.
프로꾼 구철모 동기가 새끼우럭을 한 마리 걷어내자 박경환 동기도 중치 급 노래미 한 수를 낚아낸다. 큰 키에 어울리게 낚아낸 고기도 제일 길다. 그런데 사람의 온 몸을 칼로 째고, 헤집고, 깁고 하는 베테랑 의사인 그가 노래미 주둥이에 걸린 바늘을 뽑지 못해 끙끙거리고 있다. 폭소가 터져 나왔고.
열혈 낚시광이지만 불편한 몸으로 제대로 낚시를 배우지 못한 조재익 동기가,
“뭐 이렇게 예쁘고 작은 게 다 낚이나?”해서 가보니 쑤기미(쏨펭이과)란 물고기를 낚아내고 있다.
작고 알록달록한 어체 에다 강한 독이 있는 지느러미를 가진 위험한 물고기이다. 작고 예쁘다고 손으로 덥석 집었다가는 경치고 만다. 가시에 찔리는 순간 심장 약한 이는 바로 기절해 버릴 만큼 무서운 맹독을 가진 고기이다. 가시에 찔린 부위는 바로 퉁퉁 부어오르고, 찔린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큰 망치로 힘껏 얻어맞은 것처럼 격렬한 통증이 따라오게 하는 무서운 물고기이다. 작지만 아주 무서운 물고기이다. 지그시 발로 밟고 조심스레 바늘을 뽑아주니 조재익 동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차 속에서 기다리던 부인네들의 지루함이 엿보일 무렵인 밤 11시경, 철수를 결정했다.
잠시 샛바람이 소강상태인 겨를을 이용해 간신히 몇 마리 건졌지만 더 이상은 기대해 볼 상황이 아니었다.
모두 허무한 마음이 들었는지 맥 풀린 모습이다. 이곳 낚시를 기획하고 가이드를 해 온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팬션으로 돌아오자 말자 부인네들은 바로 숙소로 휑하니 들어가 버린다. 물론 이슥한 밤중이고 피곤해 씻기가 바빴겠지만 모두들 얼마나 서운했을까?
가시방석에 올라앉은 기분이 따로 없었다.
역시 믿을 건 삼겹살 뿐
실컷 헛물 켠 동기들은 모두들 팬션 앞 화덕 판으로 몰려 앉아 숯불과, 가스버너 양쪽으로 몰려 앉아 돼지고기를 구워 대고, 고기가 익혀 나오자마자 마치 화풀이나 하듯 애꿎은 삼결살만 마구 씹으며 화풀이를 해 댄다. 지글지글 굽히자마자 마구 먹어 치우기 시작한 것.
총무는 날씨에 속았다고 변명하기에 바빴고, 일행들은 총무에게 속았다며 떫은 표정이고, 부인들은 남편에게 속았다고 무언의 항의로 조용히 숙소로 들어가 버렸다. 고기가 익어 갈 무렵 부인들을 정중히 초청해 봐도 벌써 잠옷들로 갈아입고 남성 접근금지를 선포해 버렸다. 이불 밑에서 구시렁거리는 부인들의 불만이 귓가에 마구 들리는 듯 했다.
아, 다시 못할 낚시회 총무 노릇이다.
원수 같은 샛바람이여~.
서먹하던 분위기는 때마침 박경환 동기가 가져 온 최고급 브랜드의 고급양주 두 병의 뚜껑이 열리자 비로소 슬금슬금 풀리기 시작했다. 고급스런 향의 술잔이 두어 바퀴 돌자 언제 모두들 삐졌느냐는 듯 분위기는 금새 달아올랐고 왁자하게 떠들고 노는, 어린 시절 우리들의 소풍 그 분위기 그대로 화사하게 피어올랐다.
계속 좌불안석이던 총무는 새벽 2시까지 연신 독한 위스키를 들이켰다. 새벽 4시에 김용준과 함께 벵에돔낚시를 나서자는 약속도 까마득히 잊은 채,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로 요란하게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떨어져 버렸다.
“낚시터서 새벽에 자빠져 자는 녀석들과는 결코 같이 낚시를 다니지 않는다.” 라며 낚시꾼의 새벽 물때의 중요성을 누누이 갈파하던 백종국은 그렇게 스스로 깊고 깊은 새벽잠에 빠져 들었다.
근 10여 년 동안이나 벼르고 벼르며 낚시터로 오고 싶어 했던 김용준, 나라 안 정상급 바다낚시 테크니션이라는 백종국과 같이 낚시를 한번 해 보는 게 소원이라던 김용준은 밤늦게까지 마시고도 낚시하고픈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꼭두새벽부터 설 잠을 떨치고 일어나 앉았다. 백종국 이가 일어 날 때를 기다리며. 혼수상태인 양 골아 떨어진 백종국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흔들어 깨우고 또 깨워도 코만 골고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김용준 이가 이를 오독오독 갈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전 날 밤, 술자리를 파하고 정박해 둔 배로 돌아가 잠을 자야한다는 구철모 동기를 방파제까지 취중운전으로 데려다 주고 돌아오다가 술에 너무 취한 나머지 팬션 입구를 못 찾아 한참이나 헤매고 돌아 다녔던 탓으로 나는 깊은 잠에 골아 떨어졌었다. 새벽에 친구들이 그렇게나 한참이나 깨우고 있어도 일어나지 못하고 종내 욕지도의 귀신들에게 홀려 시달리는 꿈속에 빠져 있었다.
낚시터서 늦잠자다
느지막이 잠깨어보니 벌써 아침 7시 경. 초하 6월의 아침 해는 눈부시게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젯밤 방파제 낚시에서나 기대한 새벽 낚시마저 제대로 못해 본 김용준 동기는 아쉬움을 떨치고 어느새 통영으로 떠날 채비를 마치고 있었다. 갑작스런 누군가의 부음을 받고 급히 서울로 가게 된 것. 아침 8시, 첫배로 통영으로 돌아가야만 서울로 가서 문상을 마치고 저녁 늦게 부산으로 되돌아 올 수 있다는 것.
부리나케 세수를 하고 김용준 동기부부를 차를 태우고 욕지 항으로 나와 그들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곧장 욕지 항에서 우리 본진의 철수를 위한 선표 구입 작전에 들어갔다. 어제 욕지도로 들어오면서 다른 배로 갈아탄 탓에 사라진 우리들 3대의 차량들의 귀환승선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연휴 마지막 날의 욕지도 에서의 통영으로의 예약 없는 귀환승선표 구하기. 표가 있을 리 만무다.
욕지도 터줏대감들을 총동원해 양 쪽 선사 관계자를 만나 사정을 해 봤다.
먹혀들지를 않는다. 혹시 예약을 취소하는 표가 나오면 우리를 대기 순서 1번으로 올려놓았다가 태워 주겠단다. 그러나 연휴 마지막 날에 예약을 취소할 귀환차량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양쪽 선사 관계자나 현지의 지인들이나 모두 한결같이 차량을 한 대도 아니고 세 대나 가져오면서, 귀환표 예약도 없이 들어오는 멍청한 총무가 어디 있냐고 힐난이다. 들어 올 때 한번 삐끗한 것이 나를 천하의 엉터리 총무로 만들고 말았다.
찍소리도 못하고 제발 배만 태워 달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현지의 끗발(?) 막강한 분이 급기야 나서 두 대의 차량 승선권은 우선 확보 해 주었다. 활어수송용 물차자리를 대체해 우리 차량을 집어넣었단다. 단 두 대만.
그럼 나머지 한대는 어떡하나? 그건 출항 할 때 보잔다.
그것도 한 대 정도는 더러 예약취소가 흔히 있기도 한다는 극히 불확실한 단서를 달면서. 단 출항시간 훨씬 전에 미리 와 대기하고 있으란다.
이런 빌어먹을.
그러면 느긋이 욕지도 관광을 즐겨보자던 귀환일의 오전 스케줄은 몽땅 도로 아미타불 아닌가?
간신히 두 대 나마 태워준다는데 감지덕지하고 차량 세 대분의 승선비를 미리 지불해 놓고 황급히 숙소로 돌아 와 보니 아뿔싸, 어젯밤 돼지고기 파티에 불참한 아이들이 새벽같이 일어나 배고프다고 아우성이다. 선표를 구하느라 항구서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겨 그들을 깜박 잊고 있었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김달수, 김부식 동기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총무에 대한 분노를 삭이고 있는 게 역력히 보인다.
“우리 새끼들 굶겨 죽일거얏?”
아이구, 총무 팔자야.
어젯밤 식당 아주머니와 아침 식사 시간을 정할 때, 어른들 생각만 하고 느지막하게 아침식사를 10시께나 약속해 둔 것이 애꿎은 아이들을 굶기고 있었던 것이다.
부랴부랴 버너며 코펠이랑 끄집어내어 라면을 끓여 놓으니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마저 다 달라붙어 해장국물이네, 뭐네 하며 한 젓가락씩 거든다.
먹고 나선 한 친구의 뜻밖의 제안이 생뚱맞게 튀어 나놨다.
통영에 졸복 매운탕이 끝내주는 음식점이 있다나 뭐라나? 이에 군침이 동한 동기들은 이구동성으로 깔딱 요구를 라면으로 이미 하였으니 이곳서의 아침식사는 취소하고 통영으로 나가 통영 명물 졸복 매운탕을 아침 삼아 점심으로 먹자고 한다.
식당 아주머니에게 아침식사 취소를 타진하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바로 ‘방방’ 뛰고 난리다. 무려 17인분의 아귀매운탕을 이미 다 끓였는데 그 많은 밥과 탕을 어떻게 할 거냐는 것. 만만한 게 총무라고 아줌마의 서슬 퍼런 눈총은 비수처럼 총무의 얼굴로 사정없이 꽂혀 왔다.
모두들 우리의 결정이 상식과 예의에 벗아 난 것을 인지하는 데 큰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 부산고 출신들 아닌가?
얼른 꽁지를 내리고 조용히,
“아주머니 말씀이 맞네욤, 그냥 여기서 아침을 먹고 갈게효~.”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간신히 답했다.
먹지 않으려던 현지 아침식사의 아귀매운탕이 꽤 맛이 있다.
안 먹고 나왔으면 큰일 날 뻔 한 듯 모두들 잘도 먹어 치운다.
돌아갈 선표가 없다
아름답디 아름다운 바다를 낀 욕지도 남쪽 해안도로를 타고 욕지항으로 나오면서 모두들 가져온 각자의 카메라로 영화촬영(?)에 바쁘다. 누구는 신혼부부처럼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누구는 영화배우처럼 액션을 곁들인 폼을 잡기도 한다.
빨리 와서 ‘승선스탠바이’를 하라던 매표소 직원의 당부가 자꾸 떠오르는데, 제대로 된 추억거리를 만들지 못한 친구들은 아쉬운 대로 욕지도 남쪽해안의 기암괴석이 만든 절경을 배경으로 열심히 촬영하느라 자꾸 어정거리고 있었다.
조마조마한 총무의 안타까움은 끝도 없는 긴 한숨이 되어 쉴 새 없이 한바다로 날아가고 있었다.
욕지항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1시쯤. 금용호의 출항은 12시.
다행히 선사는 그들이 약속한 두 대의 차량은 간단히 실어 준다. 그러나 나머지 한대의 승선 허가는 도저히 해주질 않는다.
원래의 계획은 이날 아침, 유람선을 탄 관광항해 스케줄이 들어 있었다.
어제 저녁 통영에 늦게 도착한 김용준 일행을 15만원 대절비로 욕지도로 싣고 온 해성호 김순돌 선장이 우리 일행들이 카페리를 타고 떠나기 전에 자기배로 남쪽 해안 일대를 돌며 유람선관광을 시켜주려 했던 것. 나와의 오랜 친분에 고려해 비싼 대절료를 지불 받았던 것이 도통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우리 일행들을 욕지도 남쪽 해안절벽 관광의 즐거움을 김순돌 형님의 낚시유람선을 잠간 빌려 하겠다던 나의 마지막 기대마저도 여지없이 허사가 되었다. 마지막 한대의 차량 승선을 위해 나뿐만 아니라 김순돌 형님마저 터미널에서 꽁꽁 묶여 꼼짝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었다.
여객선사 간부들을 만난다던가, 운송안전 담당관들인 현지 파출소를 찾아가 통사정도 해보고, 현지의 두 여객선사의 간부들을 찾아가 조르기를 하는 가운데 어느덧 출항 20분전, 마지막 카운트에 몰리고 말았다.
도저히 방법이 없다란 절망적인 답만 계속 듣고 있던 중에도 예약준비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무능한 총무에 대한 힐난은 가는 곳마다 계속 터져 나왔다.
하필이면 바이에슬론 국제대회가 우리들의 여정과 겹쳐 통영일대에 무지막지한 교통대란을 일으킬 줄이야 도무지 누가 알았단 말인가? 나의 변명은 아랑곳 않고 가는 곳마다 귀찮은 불공정 부탁인, ‘사바사바’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날 사정없이 쥐어박기만 했다.
에~~혀.
출항 10분 전.
차를 실어야 한다는 우리들의 간절한 희망과는 달리 애초에 예약했던 차량들은 한 대도 빠짐없이 속속 도착하여, 신나게 카페리 안으로 들어가 자리 잡고 있다. 이영웅 동기의 차 한대만 터미널 카페리 입구에 홀로 서 있었다. 난 그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결국 못 태우는가? 입술이 바싹바싹 타 들어갔다.
그러는 참에 현지 파출소 소장이 김순돌 형님과 함께 나타나더니 관광차량 수요가 급증하는 연휴에는 배편을 증편해야 할 것 아니냐고 선사 관계자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그러고는 각 차량들의 카페리 속의 적재 상태를 곰곰이 챙겨보더니 외톨이가 되어있던 나머지 한 대의 우리 차량을 승선시키라고 허가한다.
아흑, 고마운 경찰관!
드디어 차량 탑재!
총무는 아무나 하나?
출발 10분전이었다. 난 비로소 조바심치던 가슴을 쓸어 내렸다.
김순돌 형님이 나를 보내며 쓴 미소를 짓는다.
“내가 욕지도의 ‘대빵’이던 시절은 다 옛날이야기야. 내 말 한마디면 안되는 게 없었는데. 예약문화가 정착되면서 끗발은 이제 아무 소용도 없다네. 종국아, 우리 오랜만에 만나 이렇게 정신없이 헤어지는구나. 섭섭하게 생각지 말고 조용히 다시 한번 들어 오거라, 그때 양껏 물고기도 잡고 ‘고메(고구마)’ 막걸리 한 잔 하자꾸나. 자네가 거는 족족 다 터트려버린 그 대형 참돔 포인트 알제? 그 자리 아직도 아무도 몰라, 내가 여태 안 팔아먹었다니까. 너하고 살짝 가서 한 번 손 풀이 왕창 해 보자구, 알것제?”
수고는 당신이 하고도 애써 나를 달래며 전송한다.
그의 구수한 인정이 손끝에 오래도록 남아 전해졌다.
이제 이곳 욕지도에 또 하나의 얄궂은 추억만을 남기고 떠나는 구나.
통영으로 귀환하는 뱃전에서 비로소 끝나가는 우리 동기낚시회의 6월 정기출조 행사의 대강의 스케줄이 마감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순식간에 팔다리에서 온 힘이 그냥 쑥 빠져나가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물끄러미 멀어져 가는 욕지도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어야만 했다. 김부식 동기가 와서 풀죽은 나를 위로 한다.
“수고 했다. 총무는 아무나 하나?”
전상태 동기가 극찬에 극찬을 거듭하던 통영시장 입구의 졸복 매운탕을 미식가들인 우리 동기들이 외면하기가 만무했다. 끝내 전상태 동기의 인솔로 찾아 들어갔고.
옛날 유람선 터미널 입구의 수정식당. 낚시꾼들의 영원한 천적(바늘에 잘 걸리지도 않으면서 낚시미끼만 똑똑 따 먹고 낚싯줄을 꾹꾹 씹어 절단 낸다)인 맹독의 졸복으로 요리한 졸복 매운탕. 과연 그의 극찬만큼 시원하고 맛이 있었다.
예산상 점심식대는 각자의 부담으로 하였기에 별도의 공식예산을 편성하진 않았다. 현지의 식대에서 조금 절감된 게 남아 있었으나 졸복 매운탕 경비에는 빠듯해 은근히 걱정하던 참에 뜻밖에도 김달수 동기가 중식대 전액을 부담하고 나섰다. 감사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이번 낚시여행 전부에서 많은 실망을 느낀 게 어찌 한 두 사람 이었겠나만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욕지도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끝내 총무의 노고를 위로해주던 많은 동기들. 그들에게 난 별 내실없고 실수투성이 여행을 이끈 총무로써 부끄럽기 짝이 없는 기억만 남을 따름이다.
‘낚시여행의 최대의 조과, 즉 성과는 가정으로의 안전한 귀환’이라고 낚시기자 시절 무수히 말한 적이 있었다.
낚시의 문외한들인 우리 동기들은 아무도 뜻 모를 이 말만 혼자서 되뇌고, 또 되 뇌이면서 씁쓸함에 젖어 돌아와 홀로 우리 동기들이 함께 즐긴 야영 장비들은 씻고, 낚시장비들을 닦고 있는 중이다. (2005.6.13)
첫댓글 몇차례 나눠 올리지 고개가 아프다....ㅎㅎㅎㅎ
현장감 넘치는 글 솜씨! 재미있고 극적인 단편 소설 한편 보는 기분이다.
왕년의 유명한 꾼이자 백종국기자의 글쏨씨는 아직도 죽지 않았네! 생생한 사실감으로 정말 잘 읽었다. 가기전의 타오르는 가슴과 가고 올때의 애끓는 가슴이 다르다는것을 낚시하면서 느낄수 있는거지! 그래! 총무란 아무나 하는것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