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의 집은 농사를 짓는 집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농사가 주업이었지만
가끔 쌀을 도시로 내다 파는 도매업의 일을 하기도 할 정도로 수완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덕분에, 그리 넉넉하게 잘 산다고 할 정도는
못됐지만 아들들을 모두 고등학교까지 보낼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도 어린 시절을 가난으로 불편하게 보내지는 않았다.
고향과 어린 시절
평택은 미군부대가 있는 지역이었지만 기지촌의 분위기가 있는 곳은 미군부대
비행장 정문쪽 을뿐이었고, 평택읍내나 그가 살던 도두리는 비교적 평범한 읍내요
농촌이었다. 물론 미군부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들을 통해서 미군부대
물건들이 흘러 나오고, 또 학교를 오가는 길에 그 부근에서 많이 놀기도 했지만,
기지촌이나 미군부대에 대해서 특별히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거의 없다. 경기도의
맨끝인 평택 중에서도 그가 살던 마을은 맨끄트머리에 있어서, 그 마을 사람들은
말씨나 풍습도 경기도 보다는 충청도에 가깝고 장도 평택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충청남도 둔포에서는 장을 보러 다녔다. 끝도 없이 평야가 펼쳐져 있고 마을
한쪽에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갯벌이 있었고, 그리로 누런 황포돛을 단 새우젓
배가 들어오곤 했었다. 어린 시절 이러한 고향마을의 모습은 일종의 원형적
체험처럼 그의 작품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그의 집 뒷울타리밑에 피어 있던
꽃들, 그 울타리 너머 펼쳐진 들판, 그 너머에는 어린 그로서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물, 그 물 건너 시집간 동네 처녀, 그 처녀가 근친온다고 반가와하던 아주머니들
얼굴, 둔포리 장보러 가는 날 동네 아저씨들의 모습, 커다란 돛을 펄럭이며
들어오는 황포돛배등 어릴 적 고향마을의 아득한 체험들은 1950년대 후반의
삶이라기보다는, 현재의 그에게는, 마치 그 이전 시대의 삶까지 한꺼번에 체험한
것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으며, '전통'이라고 말할때 느껴지는 어떤 것을 형성하는
기본 체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본연의 가장 아름답고 정겨운 삶의 원형으로
그의 머리속에 남아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고향마을은 그 후 많이 달라졌다.
마을사람들은 샛벌을 개간해서 농토를 늘려갔고, 해마다 농토는 늘어가는 대신
갯벌은 줄어들었다. 지금은 아산만 간척으로 이전의 황포돛배는 구경조차할
수 없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갯벌개간은 상당히 진척되어 마을의
정경은 상당히 달라졌다. 새로 개간한 벌판은 소금기가 채 빠지지 않아 곡식이
제대로 자라지 못해 나무 한 그루없이 황량했으며, 봄이면 서해쪽에서 불어오는
심한 흙바람에 낮에도 해가 달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나마 이제는 다른 마을처럼,
가난때문에 이농하여 폐가가 되어버린 집들이 늘어가고 있고, 그 때 갯벌을
개간하면서 시작된 개간지를 둘러싼 땅분쟁은 몇십년을 두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국민학교 5학년때 처음 기타를, 중학교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다.
그는 농촌에서는 일찌기 기타를 만지기 시작했다. 국민학교 5학년때 미군부대를
다니던 큰 매형이 기타를 하나 구해 왔는데, 그것을 그와 세째형이 틈만 있으면
가지고 놀았다. 당시 그는 악보는 볼줄 몰랐고 한번 들은 노래는 기타로 선율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럭다가 본격적인 음악수업은 중학교때 바이올린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가 평택중학교를 다닐때 처음으로 학교에 현악반이 생겼고,
그의 기타솜씨를 눈여겨 보고 있던 네째형의 강력한 권유로 그는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다. 그 즈음 세째형이 마련한 서양 클래식음악 디스크를
매형집에서 들으면서 그 음악의 세계로 빠져 들어 갔다.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었으나, 현악반 담당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면서
현악반은 밴드부로 통합이 되어버렸고 써클분위기도 달라져 버렸다. 담배도
몰래 피우고 공부도 안하고 그 지역에서 기타치고 노래부르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70년, 71년 즈음이었던 그때 그들은 팝송과 함께 당시 유행하던 초기
포크송을 많이 불렀다. 현악반 활동을 하면서 바이올린으로 음악대학에 진학하려고
마음먹었던 그는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다니다가 첫해 대학진학을 포기하게
된다.
재수, 그리고 방황
72년 그는 서울에 있는 세째 형과 자취를 하면서 재수를 했다. 본격적으로
음대진학을 위해서 당시 을지로6가에 있었던 서울음대를 드나들면서 정식으로
레슨을 받았고, 아버지와 형님들은 없는 돈을 모아 그때로서는 거금인 30만원짜리
바이올린을 그에게 사주었다. 그러나 그는 공부에는 그리 열심이 못했다. 고등학교때부터
자신이 못생겼다는, 지금으로서는 우습기짝이 없는 위축감등으로 사춘기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고, 헤세와 이상에 심취했고, 잘 알지 못하면서도 쇼펜하우어를
읽었고, 항상 방황하고 죽음을 생각했다. 그는 레슨을 받으러 다니면서도 항상
바이올린 케이스안에는 니코틴과 DDT등을 섞어 자신이 조제한 독약을 넣고 다녀야
마음이 놓였다. 결국 그는 입시를 몇달 앞둔 그해 가을 10월 유신 발표방송을
들으면서 재수생활을 때려치우고 짐을 쌌다. 그날 결국 그가 도착한 곳은 밀양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온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무작정 차를
타고 밤에 대전에 도착해서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가 정한 곳이었다. 밀양에서
머슴살이 할 곳을 찾다가 그는 목욕탕 보일러에 불을 때는 화부롤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아무한테도 자신이 있는 곳을 알리지 않으려 하다가 자신과 가장
성격이 비숫하고 가출 경험도 있는 세째형만은 비밀을 보장해 줄 것 같아 연락을
했다. 그리고 그는 가출한지 20일만에 세째형에게 잡혀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그는 군에 입대할 때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집안일도 도우며 살았다. 물론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농사일에 몸이 고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사춘기적
방황이 채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견디다 답답함을 못 참겠으면,
갑자기 삭발을 해버리거나 집을 나오 돌아다녔다. 그는 거의 일년에 한번꼴로
가출을 했는데, 물론 치밀하게 준비를 한다거나 하지는 않았고, 어느날 갑자기
짐을 싸가지고 목적지도 없이 훌쩍 떠나곤 했다. 두번째 가출의 종착역은 울릉도였고,
세번째는 목포를 거쳐 제주도로 갔다. 이시기 그는 고은의 초기 시를 좋아하였고
허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후에 디스크로 발표한 초기의 노래들은
바로 이 시기, 재수를 시작하면서 짓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부터 발표를 하
생각이 있는게 아니었으므로, 그냥 일기나 시를 쓰는 것처럼 노래도 그렇게
쉽게 만들었고, 고향마을의 풍경과 방황하고 싶은 마음을 그저 솔직하게 노래로
털어 놓는 것은 그래도 그에겐 살맛나는 일이었다.
1975년 군에 입대하다.
이렇게 그는 계속 떠나고 싶어 했고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를 고향에서
확실히 떠나게 한 것은 군 입대였다. 그는 인천 부근 해안가와 고양경찰서 기동타격대에서
근무를 했다. 이제 비로소 그에게 고향은, 내가 살고 있는 고향, 떠나고 싶은
고향이 아니라,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고향이 되었다. 군대에 있으면서도 답답하면
가끔 삭발도 하고 노래도 지었다. 정문 근무 서면서 혹은 그냥 무료하게 앉아
있을때, 기타도 없이 그냥 노래들을 지었다. '서해에서'와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 '여드레 팔십리(목포의 노래)'등은
군대에 있을 때 만든 노래들이다.
1978년 6월 제대한 그는, 입대전부터 안면이 있었던 경음악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으로 서라벌 레코드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원래 스크랩이나 앨범정리등을
좋아했던 그는 자신이 만든 노래를 차곡차곡 모아 두었는데, 그 중 몇곡을 뽑아
취입을 한 것이다. 그의 첫 음반의 출반이 그해 11월이었으니까 제대하자마자
출반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은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첫음반은
반응이 좋았고, 음반사에서는 매달 생활비를 지급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돈
많이 벌어 부유하게 살고 싶은 욕심은 애초에 없었던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조촐한 자취방에서 살 수 있을 정도의 생활에 만족했다. 또한 1978년
그와 비숫한 처지의 신인 가수였던 박은옥과 만나 연애를 시작하였다. 원래
연애라는 것이 사람을 적잖이 괴롭히는 것이어서 약간의 갈등은 있었지만, 그런
갈등을 빼놓고서는 모든 것이 편안했다. 그의 삶에서 가장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시기였다. 1979년 MBC 신인가수상과 TBC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촛불')을
수상했다.
1980년 두번째 음반 출반, 결혼,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는 드디어 1980년 5월 박은옥과 결혼한다. 주위와 음반사에서는 너무
이르다고 충고했지만 그들은 결혼을 강행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르 계기로
그는 새로운 고민에 봉착한다. 그는 차츰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인기 연예인
노릇이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냥 노래만 부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쇼맨쉽도
길러야 하고 오락프로그램에도 나가야 했다. 그런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도대체 자신과는 너무도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면 할수록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불편하고 견디기 어려웠다. 그것은
그의 아내 박은옥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그런 방송출연을 그만둔다면 그들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1979년부터 준비를 하여 1980년
1월, 그러니까 결혼하기 몇 달전에 출반된 그의 두번째 음반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는 첫음반처럼 반응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첫음반보다
그의 특성은 잘 드러나 있는 노래들이 모아져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잘 팔리는
음반은 아니었다. 그의 음악세계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늘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었고 일기를 쓰듯이 노래를 만들었다. 단지 첫 음반은 그가
72년부터 모아두었던 노래들중 음반사가 보기에 인기를 얻을 만한, 몇 안되는
작품들을 뽑아 모은 것이었기 때문에 상업적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두번째 음반은 '촛불'이나 '사랑하고
싶소'와 같은 상업적 성공을 할 수 있는 작품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전체 작품중에서 '촛불'과 같은 사랑과
그리움의 노래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가 만들어둔 노래중 더 이상 '촛불'과
같은 사랑노래가 없었으며, 첫번째 음반에서 그의 재질을 인정한 음반사는 두번째
음반에서는 선곡등을 그에게 맡겨두었다. 결국 첫음반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았던
그의 본래의 모습이 두번째 음반에서는 드러난 셈이었고, 그것은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먼것이었다. 인기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당장 생계의 문제로 닥쳐왔다.
그가 별다른 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음반사도 경영이 어려워지자 지급이 중단되었다.
음반사가 그동안 대주던 생활비 지급이 중단되었다. 결혼까지 하고서 경제적
궁핍을 겪게 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만든 세번째 음반 '우네' 역시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음반의 앞면에 실린 '새벽길',
'우네', '비야 비야'등은
가야금, 피리, 해금드의 국악반주로, 뒷면에 실린 '나는
누구인고', '나그네'등은 양악 반주로 연주되어
있는 공들인 음반이었다. 특히 '에헤라 친구야'는
앞면에서는 국악으로, 뒷면에서는 양악으로 연주되어 있으며, 음반 '시인의
마을'에서는 양악으로 연주된 '여드레 팔십리'가
이 음반에는 국악으로 편곡, 연주되어 있어, 흥미있는 대비 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보기 드문 음반이다. 딸 새난슬이 태어나서 식구는 늘었는데,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포장마차를 할까, 뭐를 해서 먹고 살까, 별 생각을
다 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이 그를 매우 어지럽고 복잡한 고민으로
빠뜨렸다. 인기를 위해서 내키지 않는 노래를 만들 수는 없었고 갑자기 억울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길래 이렇게 살아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을 풀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민이 그렇게 시원스레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이야기, 현재에 대한 고민등이
뒤범벅되어 드러났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그 이전 시기에 비해서 삶과 사회에
가까와진 성숙함과 절실함을 보이고 있었다. 더 이상 사춘기식의 사치스런 고민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만들어져, 여덟번째 음반인 '무진 새 노래'에 실린, '그의
노래는', '얘기2', '실향가'등은
이 시기 그의 고민의 편린을 보여준다.
1984년 '떠나가는 배', 1985년 '북한강에서'
출반, '정태춘.박은옥의 얘기 노래마당'으로 활동을 재개
경제적 궁핍을 견디지 못해 너무도 불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한 지구 레코드에서
네번째 음반을 내게 되었다. 그것이 '떠나가는 배'였다. 이 음반은 잘 팔렸고
그의 경제적 궁핍은 어느 정도는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모든 고민을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는 그 이전의 몇년동안의 활동의 공백을 깨고
활동을 재개하는 것을 의미했다. 1985년 1월부터 시작하여 1987년 10월까지
계속된 '정태춘.박은옥의 얘기 노래마당'으로 그는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서울과 부산, 대구, 마산, 인천, 광주, 진주, 천안, 제주, 청주, 충주, 대전,
전주, 춘천, 원주, 울산등 거의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가졌다.
공연의 규모는 크지 않았으며 대개 소극장이었다. 거의 3년에 걸친 소극장 공연은
그의 활도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이제까지 방송이나 음반으로만 대중을 만나왔기
때문에 대중과의 만남은 항상 간접적이었던 것에 비해 이 공연은 전국 각지의
관객들과 만나 아주 가깝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고 대주으이
반응을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자리를 통해 음반이나
방송에서는 할 수 었었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구와 미국 지향의 음악문화
풍토, 방송 체계 자체의 문제, 전통문화의 문제등 평소 그가 단편적으로나마
뚝심있게 생각했던 문제들에 대해 비교적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또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머릿속에서만 엉켜있던 문제들을 하나씩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또한 그 동안 심의에 걸려 음반으로는 발표할 수
없었던 '인사동'과 같은 노래들도 공연을 통해
부를 수 있었다. 이 '얘기 노래 마당'과 함께 '시인의 마을'이라는 책 출간을
함께 준비하였고, '얘기 노래 마당'이 막 시작했을때인 85년 3월에 성음사에서
출간하였다. 이 책에는 여태까지 그가 지었던 원래의 가사와 악보가 거의 다
실려 있다. 그 중에는 이전에 음반으로 발표된 작품도 있지만 미발표작도 상당수이고,
책출간후에 음반으로 발표된 노래들도 실려있다. 그로서는 '얘기 노래 마당'과
함께 여태까지 자신이 해왔던 작업들을 정리하고 되새기며 객관화시켜 보는
기회였다. '얘기 노래 마당'을 하면서 두 개의 음반을 만들었다. 85년에 제
5집인 '북한강에서'를 출반하였고, 87년에는 '정태춘.박은옥 발췌곡집'으로
그동안 발표되었던 작품중에서 잘 알려진 노래들만을 모은 음반이었다. 그의
활동은 한동안의 침체를 극복하고 완전히 본 퀘도에 오른 셈이었다.
1988년 '정태춘.박은옥 무진 새 노래' 출반과 새로운 경향의 창작 시작
3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가 '얘기 노래 마당'을 하고 있었던 3년
동안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결국 민중의 힘으로 87년
6월 투쟁이 일어났고 제5공화국이 무너졌다. 이러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사회와 정치를 보는 의식에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그도 이러한 사회의 변화속에서
자신의 고민들을 보다 구체화하고 해결하기 시작했다. 88년에 출간한 제 6집
음반 '정태춘.박은옥 무진 새 노래'에서는 그동안 심의를 의식하여 발표하기
힘들었던 몇편의 노래들이 실렸고, 신작인 '아가야 가자'가 실렸다. 그로서는
이러한 작품들이 그 이전에 만들어 놓았던 작품을 다듬어 발표한 것이었으며,
단지 6월 투쟁으로 가시화되었던 민중의 힘이 공연윤리위원회로 하여금 일시적이고
부분적으로나마 심의 기준을 완화하지 않으면 안되게 함으로써 비로소 음반으로의
발표가 가능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이러한 것은 상당한
변화로 받아들여졌고, 실제로 이 음반의 출반을 계기로 작품 창작이나 활동의
새로운 변화를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87년 이후에 창작한 '다시
가는 노래', '권주가', '아가야
가자', '버섯구름의 노래', '어허
배달나라 광영이여'는 이전 작품에 비해 보다 뚜렷하게 사회적 현실에 대한
형상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국악이 가지고 있는 힘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87년 이후에 만들어진 새로운 경향의 노래들은 공연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는 이전의 대중가요 공연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진 노래극 대본에 의해 진행되는 동연으로서 모래와 사설, 슬라이드등의
구성으로 일관된 주제의식을 관철시키고 있는 공연이다. 특히 비나리식의 사설과
국악반주, 그리고 마지막의 20여개의 북을 사용하여 한국적 힘의 정서를 형상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고 그것이 이 작품의 주제와 맞아 떨어지고 있어, 다른 대중가요
공연과는 내용이나 형식, 정서의 질에 있어서 현격하게 다른 공연이었다. 88년
12월 부산을 출발하여 89년 3월 서울, 진주, 대구, 광주등지에서 공연된 이작품은,
'얘기 노래 마당'과 제6집 음반을 통해 부분적으로 대중에게 드러내 보였던
그의 변화된 모습을 가장 뚜렷이 확인시킬 수 있는 계기였다고 하 수 있다.
그의 변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88년 청계피복노조 주최의 집회에 참가하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여, 그는 이제 대중집회의 단골 손님이 되었다. 그는 작은
소극장과 폐쇄된 스튜디오에서가 아니라 대학운동장에서, 대학로에서, 노동자
집회장에서, 즉 탁 트인 광장에서 고무신 신은 차림으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의 감수성은 이제 내적으로 침잠하는 듯하는 폐쇄적 자기고백적 정서를 성큼
넘어서서 탁 트인 광장에 모인 집단화된 대중의 아우성 같은 정서를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는데에 이르게 되었고, 둔탁하고 거친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고
힘 있고 사람들을 집단화시키는 한국북의 소리를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었다.
80년대초반 그의 고민과 방황은 이렇게 사회의식과 한국적 힘의 정서를 받아들이면서,
보다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속에서 나름대로의 해결의 방향을 찾은 셈이다. 물론
그 역시 인정하듯 이러한 해결은 완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결의 시작이고
새로운 차원의 고민의 출발이라는 편이 옳을 듯하다. 우리나라 대중가요 사상
전무하다고 할 만큼 특이한 변화과정을 겪어온 정태춘, 그가 앞으로 얼마나
치열하게 살며 발전할 것인지는 바로 우리 대중가요의 가능성을 점치는 하나의
시금석의 구실을 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첫댓글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