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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큰 손실이지만, 단지 그 뿐이다.
- 조하르 두다예프의 죽음을 전하며 샤밀 바사예프가 한 말
1996년 4월 23일, 체첸 공영 방송국의 정규 방송 중에 한 남자가 난입해 들어온다. 샤밀 바사예프였다. 부데노프스키의 영웅으로 널리 알려진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방송국 사람들은 그에게 자리를 비켜줬고, 마이크를 넘겨받은 샤밀 바사예프는 놀라운 사실을 전했다.
"이틀 전, 우리의 대통령 조하르 두다예프가 전사하였다."
러시아는 이미 두다예프를 암살하기 위해 1996년 초부터 시도하였지만, 어려운 난관이 많았다. 그가 있는 곳은 체첸 서부의 게키 츄와 로시 츄 주변의 마을 중의 하나로 추정되었지만, 이 지역은 러시아의 정면 공세를 버티고 있던 서부의 체첸군 주요 거점과 가까운 곳이었다. 자연히 러시아의 공격에 대비한 체첸군의 증원이 용이하며, 인근 마을의 주민 한명한명이 잠재적인 체첸의 정보원이자 예비 병력이었다. 그렇다고 특수부대를 동원하여 기습한다는 것은 과거 1993년 10월의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미군 특수부대의 참사가 재현될 수 있었다.
A-50 베리에프 조기 경보기
유일한 해결책은 공군기를 통한 미사일 공격이었다. 그러나 전직 공군 소장 두다예프는 러시아 공군의 위험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하면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외부와의 연락이 필요할 때 이동 중인 차 안에서 휴대폰을 통해 극히 제한된 시간 동안 통화하였다. 러시아군은 그의 위치를 추적하려고 시도했지만 번번히 그 전에 통화가 끊어졌다. 1996년 들어서 무려 4번이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4월 21일, 두다예프는 지난 3월 말에 옐친이 제안한 평화 협정에 대해 러시아 하원 의원인 콘스탄틴 보로보이와 통화하고 있었다. 그의 통화가 러시아 공군에 추적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두다예프는 이동 중에도 여러번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걸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만 너무 많이 통화하고 말았다. A-50 베리에프 조기 경보기에서 위치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피격 직전의 두다예프
게키 츄 근처의 도로 상에 있는 것을 파악한 러시아 공군은 즉시 수호이 - 25 전투기를 투입하여 두 발의 레이저 유도 미사일을 날렸다. 두다예프는 현장에서 머리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를 호위하던 체첸군의 팔 속에서 숨을 거뒀다. 마지막에 그가 남긴 말은 "이 전쟁을 끝까지 계속하라" 였다.
샤밀 바사예프는 코란에 손을 얹고 이것이 사실임을 맹세하였고, 체첸 전국에 삼일 간의 애도를 선포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지만 사실로 받아들이고 애도를 표했다.
샤밀 바사예프
두다예프가 죽은 뒤, 체첸의 헌법에 따라 부통령 젤림한 얀다르비예프가 2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두다예프를 초대 대통령으로 만든 핵심 정치인 중 한명이었지만, 전쟁에 있어 군사적인 활동은 전무한 상태였다. 몇 명의 경호원을 제외하고는 휘하 사병도 없었다. 그래서 강력한 부대를 보유하는 핵심 지휘관들이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해석이 러시아에서는 지배적이었다.
그 예측은 보기좋게 어긋났으며, 가장 강력한 부대를 보유한 샤밀 바사예프와 참모총장 아슬란 마스하도프를 필두로 새로운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휘하에 들어가겠다는 결의를 하였다. 이유는 간단하였다. 두다예프가 정한 체첸 헌법이 다음 대통령으로 얀다르비예프를 정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기대와는 다르게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두다예프의 암살에도 불구하고 체첸은 얀다르비예프를 중심으로 다시 뭉칠 수 있었다.
체첸 2대 대통령 젤림한 얀다르비예프
그러나 러시아의 공세는 한층 더 가속이 붙었으며, 자신들이 이 전쟁에서 우위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려고 하였다. 두다예프가 암살되고 한달 뒤인 1996년 5월 22일, 드디어 '요새' 바무트가 함락되었다. 10킬로 떨어진 잉구세티야의 마을 유리창이 깨질 정도로 혹독했던 러시아 공군의 1주일이 넘는 폭격 속에서 마을의 모든 집이 파괴됬으며, 체첸군은 숲속으로 빠져나갔다. 이어서 스타리 아코이, 오레코보도 함락되었다. 스타리 아코이의 경우 최후의 순간 불과 40명의 체첸군이 버티다가, 18명이 전사한 뒤에 빠져나갔다고 한다. 러시아의 폭격으로 인해 도로 상에 파괴된 집의 잔해가 수북했다고 한다. 전쟁 시작 이후 15개월 만에 러시아는 서부의 평야지대의 최후 거점을 손에 넣었다.
1996년 5월 27일, 체첸 2대 대통령 젤림한 얀다르비예프가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체첸 보도 장관으로 강력한 선전 효과로 인해 러시아로부터 '체첸의 괴벨스'라는 별명을 얻은 모브라디 우두고프, 지난 3월의 그로즈니 공세에 참가했던 아흐마드 자카예프가 그를 수행하였다. 불과 소수의 경호원 만을 대동하고 얀다르비예프는 옐친이 지난 3월 말에 제안한 종전안에 대해 협상하기 위해 크레믈린에 나타났다. 전쟁 시작 이후 처음으로 양측 수장이 서로 얼굴을 맞대게 되었다.
옐친은 미리 준비되어 있는 자리로 앉기를 권했다. 모스크바에 줄곧 채류하던 친러시아 체첸 정부의 수장 도쿠 자브가예프의 맞은 편 자리였다. 옐친은 긴 탁자의 상석에 앉아서 이 둘이 자신의 좌우측에 위치하게 할 생각이었다. 마치 체첸 전쟁이 자브가예프와 얀다르비에프의 전쟁 - 친 러시아와 반 러시아 정부의 내전으로 보이게 하며 러시아 연방 대통령인 자신이 중재를 하는 상황으로 언론에 홍보하고 싶었던 것이다.
얀다르비예프는 옐친이 언제든 자신의 신병을 억류할 수 있음을 알았지만, 적진의 수도에 나타난 체첸 대통령으로서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대담하게 행동하였다. 우선 옐친이 권한 자리에 앉는 것을 거부하였다. 도쿠 자브가예프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와 마주볼 수는 없으며, 이 전쟁은 체첸과 러시아의 전쟁으로 자신은 보리스 옐친 러시아 연방 대통령과 대등한 협상 당사자라는 것이다. 옐친이 계속 앉기를 강권하였지만 얀다르비예프는 끝끝내 앉는 것을 거부하였고, 마침내 옐친이 자신의 상석에서 일어나 자브가예프가 앉던 자리에 앉아서 얀다르비에프와 마주봐야 했다.
회담장의 얀다르비예프. 옐친이 자리에 앉으라는 요구를 거절하였고, 결국 옐친은 자리를 옮겨 그와 마주보고 앉았다.
협상은 사실상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성토장이 되었다. 러시아로서는 두다예프를 제거하면 다음에는 비교적 상대하기 쉬운 사람을 마주치게 될거라 봤지만, 젤림한 얀다르비예프도 결코 그들에게 고분고분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서로 입씨름만 하다가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는 못했다. 중간에 모브라디 우두고프가 "현재 체첸에서 무슨 일이 벌이지는 지 알기는 하는가?" 라면서 체첸 전장에서 촬영된 처참한 상황을 비디오로 보여줬다. 그날의 회담은 소득없이 종료되었다.
애초에 대통령 연임을 위한 선거를 3주 남겨 둔 보리스 옐친으로서는 종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종전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중요하였다. 하루 뒤인 5월 28일, 러시아 수도에 체첸 대통령을 사실상 인질처럼 체류시킨 뒤 옐친은 체첸 북부 프라보베레즈나야로 향했다. 전쟁 이후 처음으로 체첸을 방문한 것이었다. 주민 거의 대부분이 코사크인이거나 반 두다예프 체첸인이었던 체첸 북부 마을의 러시아 군부대를 방문한 옐친은 병사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전쟁은 끝났다. 우리가 승리했다. 체첸은 다른 어느 곳이 아닌 러시아 연방 안에 있다." 4시간을 그곳에서 체류했던 옐친은 신속하게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
5월 28일 체첸의 러시아 군부대를 방문하는 보리스 옐친
체첸과 러시아의 협상은 좀 더 진행되었으며, 1996년 6월 10일 잉구세티야 나즈란에서 러시아 연방 민족 담당 장관 뱌체슬라브 미하일로프와 체첸 안전 보장 회의 수석 부의장의 자격으로 온 아슬란 마스하도프 (안전 보장 회의 의장은 원래 조하르 두다예프였다.)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핵심은 상호 교전 행위 중지와 러시아 군의 철수 (시한은 8월 말까지였다.), 도쿠 자브가예프의 체첸 의원 선거 연기였다.
그러나 이는 옐친의 1996년 6월 16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 직전에 발표된 것으로, 이 지루하고 인기없는 전쟁을 끝내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했다. 여기에 효과를 더하기 위해 옐친은 개각을 단행하였고, 자신을 이 전쟁으로 밀어넣었던 군부와 정계의 여러 강경파들이 좌천되었다. 그 중에는 그때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국방부 장관 파벨 그라쵸프도 있었다.
마침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국방부 장관 파벨 그라쵸프
이러한 조치들이 힘을 발휘했는 지 모르지만, 러시아 대통령 선거는 박빙의 접전 끝에 옐친의 승리로 끝났다. 6월 16일의 1차 선거에서 옐친과 공산당 제나디 주가노프는 각각 35프로, 32프로의 득표율로 1,2위를 하였다. 근소한 차이를 보인 두 후보 만을 대상으로 한 1996년 7월 3일의 선거는 53프로의 득표율로 옐친이 승리하였다. 옐친은 체첸전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던 지지율 속에서 간신히 자신의 또다른 4년 임기를 보장받았다.
더이상 국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러시아 정부는 체첸 전쟁의 최후의 쐐기를 박아넣으려고 하였다. 선거 1주일 뒤이 1996년 7월 11일, 체첸 주둔 러시아 군 사령관인 블라디미르 샤마노프 중장은 다음과 같이 공언하였다. "러시아 연방에 도전하는 도적들의 최후 거점은 말살될 것이다." 러시아군은 사령관의 공언을 뒷받침하기 위해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동부 산악지대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다르고에서 베노이 사이에 있는 대부분의 산간 마을들이 함락되거나 고립된 채 폭격 속에서 파괴되고 있었다.
체첸 산악지대를 공격하는 러시아군
체첸군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포로'가 아닌 '범죄자'로 간주되었으며 그에 맞는 대접을 받았다. 러시아 안전보장 이사회의 알렉산더 레베드의 대표와 회담을 갖기 위해 베데노 근처 메케티에 모였던 젤림한 얀다르비예프와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근처 산악지대에 헬기로 투입된 러시아 특수부대와 정규군에 의해 포위될 뻔 하였다. 체첸군은 러시아 중장의 대표와 회담을 갖기를 원하고 쇄도하는 러시아군을 향해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우린 레베드와 만나고 싶다. 3일만 시간을 주면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들은 척도 안했고 함정에 빠진 것을 알게 된 체첸군은 악전 고투 끝에 우루스 케르트의 능선을 통해 빠져나갔다.
이제 더 이상 협상은 없었다. 애초에 러시아는 체첸과 진지하게 종전에 대해 논의할 생각이 없었으며, 그들을 자신들과 대등한 당사자로 인정할 생각도 없었고, 하물며 체첸의 독립과 관련된 어떠한 신호도 주고 싶지 않았다. 과거 부데노프스키 협상을 이뤄냈던 러시아 체르노미딘 총리조차 이에 대해서는 확고한 입장이었다. 체첸군을 최후의 최후까지 추격하여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미 4년이란 임기가 보장된 러시아 정부로서는 더 이상 겉치례를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러시아의 공격으로 파괴된 체첸 마을
체첸군으로서는 두가지 선택을 해야 했다. 하나는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무력 속에 패배를 인정하고 굴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하나를 선택하였다. 대대적인 역습을 가하여 그들이 결코 굴복을 모르는 인간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은 3차 그로즈니 전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First_Chechen_War#3rd_Battle_of_Grozny
http://en.wikipedia.org/wiki/Dzhokhar_Dudayev
http://en.wikipedia.org/wiki/Zelimkhan_Yandarbiyev
http://www.amina.com/article/did_nsa.html
http://news.bbc.co.uk/2/hi/europe/325347.stm
http://www.geocities.com/CapeCanaveral/Lab/3910/a50.html
Ser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in
Paul Murphy의 The Wolves of Islam
후안 고이티솔로의 전쟁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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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jager님 덕분에 체첸사태에 대해 알아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째서 러시아가 체첸사태에 대해 그렇게 경기를 일으키는지 알겠습니다. 그럴만도 하군요. 그런 사태에 개입하거나 간섭하지 않은 미국도 함구하고 있고. 왠지 우리나라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저도 예전에 푸틴이 인터뷰에서 '체첸을 러시아의 통제 밖에 놔둘 경우에 우리는 연방 전체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고 했을 때 오버인가 싶었는 데 실제 그런 과민반응을 보일 정도의 오랜 역사가 있더군요.
역시 러시아 무대포 정신이 투철하네여..
대국이라 그런 감이 큰 것 같기도요;;
다음화가 정말 기대되네요. 최근 알바니아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는데, 알바니아와 체첸은 무척이나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바니아도 오스만 투르크의 오랜 지배에서 해방되었죠.
러시아와 체첸의 끝없는 싸움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되겠군요
언젠가는 저 긴 투쟁에도 나름의 결론이 나지 않을까... 싶고 그러기를 바랍니다.
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결코 신사적이진 않군요. 만일 주가노프가 이끄는 공산당이 러시아 대선에서 승리했다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공산당도 결코 고삐를 늦추지는 않았을 거라 보지만, 정확한 것은 당시 주가노프의 공약을 보지 못해서 모르겠습니다.
몸에 소름돋아..
어떤 부분에서요?
러시아라는 나라와 강대국. 어찌보면 인간의 추악한 모습들을 모아놓으듯한, 입시 준비하며 한창 사춘기를 보낼때 저런일들 이 또 댜른 지구 한편에서 일어나고 있다니 참 놀라울 따름이네요.
대국이 소국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 안좋은 부분을 모두 종합해둔 것 같습니다.
일일히 답변해주시고 어흑 ..감동..ㅎㅎ
타국을 제멋대로 침략해서 점령해 놓고나서 그들의 정부와 독립군을 도적이라고 부르다니. 정말 오만하고 뻔뻔하네요. 거의 왜놈들과 동급입니다. 왜놈들도 우리 독립군을 보고 도적이라고 불렀고, 우리 의병들을 잇기라고 불렀죠.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어디서나 비슷한 놈들인가 봅니다. 인류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짓밟지 않고, 서로 협력하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도대체 언제쯤에서야 가능할까요?
러시아는 자신들이 '정규군'과 상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반란군' '도적떼'를 상대하는 것이며 정식 체첸 정부는 자신들이 인정한 친러시아 자브가예프 정부라고 언론에 지속적으로 홍보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정말이지 러시아와 채첸의 악연은 상상할수도 없을만큼 엄청나군요! (아예 처음부터 다시 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끝이 아닙니다;;
러시아가 오랜만에 상황이 좋네요. 다만 무언가 꼬이는 이 느낌은...
과연 체첸이 당하고만 있을까요?
러시아가 케발리는게 왠지 더 맛있을거 같다는..ㅋㅋ
어디까지나 체첸은 독립이라는 이름아래 계속싸울것같습니다.
저도 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요
체첸의 진정한 독립을 간절히 바랍니다 고만 철수해라 러시아...
러시아가 체첸을 장악하려는 의지도 엄청나게 강합니다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답이 업ㅂ는 동네 =_=);;;
사실 그 말이 정답인 듯
개인적으로 러시아빠이지만 러시아의 대국스러운 장단점을 보여주는 아주 극단적인 예는 WW2와 체젠전쟁인듯 합니다 ㅡ.ㅡ;
사실 이 전쟁에 있어서 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가능한 객관적으로 다루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쉽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바사예프와 마스하도프가 체첸군을 실질적으로 리드하고 있군요... 옐친의 선거전략에 이용된 체첸인이 용케 함정을 빠져 나와서 다행이네요... 그 과정에서 과거 우크라이나를 속이고 점령했던 스탈린의 속임수가 상기됩니다... 다음편에서 체첸인의 새로운 반격을 기대해 봅니다...
굽힐 줄 모르는 체첸인의 저항에 소름이 끼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