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에 서 계시는 아리따운 아가씨 혹은 아주머니는 영화 상에서 큰 역할을 맡고 있지 않은 분이신데, 일단 사람의 시선을 끌고 봐야 하는 영화 포스터의 제작 관행 상 얼굴마담으로 채택된 조연급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주인공들은 저 여인네 뒤에서 빡세게 달음박질을 하고 계시는 남자분들이랍니다.
"이런 시대에 살아남아서 꿈을 꿀 수 있는 길은 도피뿐이다."라는 Henry Laborit의 경구로 시작되는 영화 <지중해>는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 그리스의 작은 섬으로 파견된 여덟 명의 이탈리아 해군들의 이야기입니다.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사령부에서는 조기치매라도 발병했는지 이들을 파견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되고, 명령에 죽고 사는 '군바리(절대 군인을 비하하는 의도로 쓴 단어가 아님을 밝분명히 밝힙니다)'인 것도 서러운데, '개무시'까지 당하는 신세가 된 비운의 주인공들은 그 섬에서 빼도 박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섬에서 보내는 하루 하루는 총알이 날아다니고 뼈와 살이 분리되는 전장과 너무나 다른 지상낙원이었던 것입니다.
고즈넉한 섬의 평화에 동화된 이들은 햇빛 찬란한 지중해 해변가에서 (제 버릇 개 못 주고) 축구도 하고, 섬 여인네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잊고 있던 자신의 소질도 살리며 국방의 의무를 보람차게 보냅니다. 그러던 그들에게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이들은 '본국 귀환이냐, 잔류냐, 그것이 문제로다!'하며 고민하게 되는데...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인생사, 가끔은 서로 어우러져 즐기며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며 인생이라고 역설하는 멋진 영화. 지중해 섬의 아름다운 풍광을 마음껏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1992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작.
2. 웰컴 투 동막골(2005)
박광현 감독
이탈리아에 <지중해>가 있다면 한국에서는 <웰컴 투 동막골>이 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강원도 정선 어딘가에 자리잡은 동막골에는 전쟁은커녕, 싸움도 모르고 사는 순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미 전투기가 그 마을에 추락하게 되고, 살짝 정신줄을 놓은 여인네 여일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 돌아다가 인민군 리수화 일행과 만나 그들을 마을로 데려 옵니다. 거기에 낙오된 국군 표현철 일행까지 동막골로 흘러들어오면서 평화롭기만 했던 마을은 일촉측발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념이 뭔지,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동막골의 신선한 분위기에 그들은 가랑비에 옷 젖듯 동화되지만, 동막골에 인민군 기지가 있다고 오인한 연합군은 이 마을을 집중 폭격하기로 결정하는데...
'마이 아파~' '자들하고 친구나?'라는 대사를 유행시킨 강혜정은 물론, 표현철 역의 신하균, 리수화 역의 정재영의 열연은, 물론 훗날 <천하장사 마돈나>로 일약 주목받게 된 류덕환의 풋풋한 연기까지 맛볼 수 있는 반전영화의 수작입니다. 비록 영화 초반과 후반은 긴장감이 넘치지만, 중반의 멧돼지 사냥이나 언덕비탈 미끄럼타기 등 산골에서만 가능한 순도 100%의 에피소드들은 보는 이를 즐겁고 편안하게 합니다.
3. 연풍연가(戀風戀歌: Love Wind, Love Song, 1998)
박대영 감독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로 시작하는 <제주도 푸른 밤>이라는 노래가 있을 정도로 국민 신혼여행지로 예나 지금이나 각광받고 있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드물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외입니다.
"저 외모에 컴플렉스 있어요."라는 망언으로 전 국민의 50%를 분노케 한 주인공 장동건과 지금은 CF를 제외하면 그 얼굴을 보기 힘든 고소영이 제주도 관광객과 여행 가이드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소박한 내용이지만, 질투와 시기를 불러일으키는 선남선녀 말고도 영화 내내 화면 가득 펼쳐지는 제주도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랍니다.
지금은 제 신랑이 된 남자친구와 막 연애를 시작했을 즈음, 처음으로 함께 극장에서 봤던 영화입니다. 뭐, 선정에 사심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영화 내내 펼쳐지는 제주도의 CF스러운 풍광만으로도 올 여름 휴가 대용으로 충분한 영화랍니다.
4.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5)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
지금은 자가용이나 비행기가 휴가의 이동수단으로 각광받지만, 한때 휴가 하면 기차가 대세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여기, 장동건과 고소영 부럽지 않은 또 한 쌍의 선남선녀가 있습니다. 이름하야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어쩜 이렇게 이름까지 네 글자로 딱딱 맞는지)!
<비포 선라이즈>는 이 두 남녀가 기차 여행 중 우연히 합석하게 되고, 통성명을 하고 말을 트다 눈이 맞고 눈이 맞고 보니, 마음도 맞고, 결국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 과정을 감정이입력 200%로 전달하는 어여쁜 러브스토리입니다. 20대를 거쳐온 사람이라면 대개 공감할 수 있는 드넓은 포부와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고민 등이 엄청난 양의, 그러나 절대 지루하지 않은 공감 300%의 대사와 함께 다채롭게 펼쳐지는 청춘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또한 비엔나라고 하면 줄줄이 비엔나밖에는 들어본 적 없는 가련한 중생들에게 '비엔나의 풍광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일러주는 때깔 좋은 풍경들이 이들의 눈부신 연애담을 더운 빛내주고 있는 영화입니다. 아~ 비엔나 가고 싶어라!
이 아름다운 커플은 9년 후, <비포 선셋>에서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재회하여 못다 푼 썰을 풀게 되니, 이 영화에 감동하신 분께서는 덤으로 <비포 선셋>도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줄리 델피의 멋진 노래가 대미를 장식하는 라스트 씬은 필견!
5. 러브 오브 시베리아(The Barber Of Siberia, Sibirskij Tsiryulnik, 1998)
니키타 미할코프 감독
이왕 기차에서 시작된 사랑을 이야기한 김에 또 한 편의 트레인 러브 스토리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번에는 좀 더 위쪽 지방으로 가볼까요?
그 이름도 썰렁한 <러브 오브 시베리아>. 그러나 영화는 결코 썰렁하지 않습니다. 물론 포스터의 '이 거대한 사랑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는 광고 문구에 1박 2일의 이승기 식으로 대답하자면, '물론 힘들겠죠~ 그렇지만 감당할 순 있겠죠!'입니다.
1885년 모스크바로 향하는 열차 안. 별로 예쁘지도 않으면서 예쁜 척 다 하는 미국 여인을 발견한 사관생도들. 유독 이 나라의 배우 최민식과 닮은 생도 안드레이 톨스토이는 이 여인과 동석하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비포 선라이즈>가 아닌, <비포 모스크바>를 찍게 됩니다. 국경을 초월한 사랑에 빠진 두 사람. 그러나 운명은 두 사람을 당연히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데...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광활한 모스크바의 침엽수림을 훑으며 시작하는 영화는 결국 침엽수림에서 끝을 맺습니다.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설원의 풍경과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의 선율, 사나이 울리는 러브스토리에 푹 빠져 있다 보면 어느새 여름의 더위를 깨끗이 잊고 계신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원제는 침엽수를 벌목하는 기계를 가리키는 '시베리아의 이발사'. 제목에 사랑을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에도 <러브 오브 시베리아>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런 시베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