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휘유! 아주 강경하게 말씀하시는군요.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 약속 따위는 하지 말
아야 한다, 누구한테 어떤 것도 약속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야긴가요?
너희들 대다수가 현재 사는 식대로의 삶이라면, 어떤 약속이든 그 약속 속에
는 거짓말이 심어져 있기 마련이다. 어떤 특정한 내일에, 너희가 뭔가를 놓고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하고 싶어할지를 지금 시점에서 알 수 있다고 하는 거
짓말이. 너희가 반응하는 존재로 사는 한 --너희 대다수가 그러하다--, 너희
는 이것을 알 수 없다. 오직 창조하는 존재로서 살 때, 그때서야 비로소 너희
약속에는 거짓말이 들어가지 않는다.
창조하는 존재는 뭔가를 놓고 미래의 어떤 순간에 자신이 어떻게 느낄지 알
수 있다. 창조하는 존재는 자신의 느낌을 체험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
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래를 창조할 수 있을 때까지, 너희는 자신의 미래를 예언할 수 없고,
자신의 미래를 '예언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에 관해 어떤 것도 진실되게 약
속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창조하고 예언하는 사람에게도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권
한과 권리는 있다. 변화는 모든 피조물의 기본권이다. 사실 그것은 '권리' 이
상이다.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지만 '변화'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기에.
변화는 그냥 존재한다.
변화인 것, 이것이 너희다.
너희는 이것을 '받을' 수 없다. 너희 자체가 이것이다.
그런데 너희 자체가 '변화'이고, '너희에 관해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 변
화이니, 너희는 '언제나 똑 같으리라고' 진실되게 약속할 수 없다.
우주에서 불변인 건 없다는 뜻인가요? 당신 말씀은, 그 모든 창조행위 속에서 불변
인 채로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까?
너희가 삶이라 부르는 과정은 재창조의 과정이다. 삶의 모든 것이 지금이라는
각각의 순간마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어떤
것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니, 완전히 동일하기는 불
가능하다. 하지만 동일함은 불가능해도 유사함은 그렇지 않다. 변화과정이 너
희가 예전에 경험한 것과 두드러지게 비슷한 판형을 만들어낸 결과가 유사함
이다.
창조행위가 높은 수준의 유사함에 이르렀을 때, 너희는 그것을 동일함이라 부
른다. 한정된 관점이라는 너희의 조야한 시야에서 볼 때는, 그게 맞다.
따라서 인간의 차원에서 보면 우주에는 거대한 불변성이 존재하는 듯이 보인
다. 다시 말해 상황들이 비슷해보이고, 비슷하게 행동하고, 비슷하게 반응하
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너희는 여기서 일관성을 본다.
이것은 물질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고찰하고 체험할 수 있는 틀을 너희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그럼에도 너희에게 말하노니, 물질과 비물질을 합친 삶 전체의 시야에서 본다
면, 불변성이라는 겉모습은 사라지고, 만사가 그것들의 '참모습', 즉 끊임없
이 변하는 모습 그대로로 체험될 것이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건, 그 변화들이 이따금 워낙 정교하고 워낙 미묘해서, 식별력
이 떨어지는 우리 시야에서 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그것들이 같아 '보인다
는' --때로는 완전히 똑같아 보인다는-- 거군요.
그렇다.
"똑같은 쌍둥이 같은 건 없다."
맞다. 너는 그것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변성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만큼, 우리 자신을 유
사한 형상으로 다시 재창조할 수도 있고요.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관계에서도 이렇게 할 수 있고요. 자신이 누군가란 차원에서,
또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는가란 차원에서 말입니다.
그렇다 -- 비록 너희 대다수는 이렇게 하기가 대단히 힘들겠지만.
우리가 방금 배웠듯이, 참된 불변성(겉모습의 불변성과 반대되는 것으로서)은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겉모습만의 동일성을 창조하려 해도 위대한
선각자가 있어야 한다.
선각자가 동일한 모습으로 자신을 보여주려면, 그는 모든 자연스런 경향을 넘
어서야 한다(변화하려는 경향이 자연스런 쪽임을 잊지 마라). 사실 그라도 모
든 순간에 똑같게 보여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똑같은 겉모습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할 만큼은 비슷하게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선각자'가 아니라도 항상 '똑같이' 자신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 그 사람의 행동과 외양이 원체 예측가능해서 목을 걸고 내기라도 할 수 있는 사
람들을 압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려면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한다.
선각자는 높은 수준의 유사성(너희가 '일관성'이라 부르는 것)을 '의도적으로'
창조하는 사람이지만, 그 제자는 굳이 그렇게 의도하지 않고서도 일관성을 창
조하는 사람이다.
특정 환경에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예컨대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어"라는 말 따위를 자주 하겠지만,
선각자라면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 사람의 반응이 탄복할 만한 결과 --그들이 칭찬받을 일-- 를 가져오
더라도, 그는 아마 "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사실 그건 저절로 된 거야.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라고 대꾸하겠지만,
선각자라면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선각자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아는' --완전히 말 그대로-- 사람이다.
그녀는 '왜' 그렇게 하는지도 안다.
반면에 깨달음의 차원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흔히 양쪽 다 모른다.
이게 약속을 지키기가 그렇게 힘든 이유입니까?
이건 한 가지 이유다. 내가 말했듯이, 너희가 자신의 미래를 예언할 수 있을
때까지, 너희는 어떤 것도 진실되게 약속할 수 없다.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기 힘든 두번째 이유는, 그들 자신과, 자신들이 행한 공
증(公證)이 충돌하게 된다는 데 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어떤 것을 놓고 발전시켜가는 진리가, 자신의 진리는 항상 그럴 것이
라고 그들이 말했던 그것과 다르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들은 깊은 갈등을 겪
는다. 어디에 따를 것인가? 내 진리에? 아니면 내 약속에?
조언을 해주신다면?
나는 전에 네게 이런 조언을 했다.
'남을 배신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배신하는 것 역시 배신이긴 마찬가지다. 그
것은 최고의 배신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도처에서 약속을 어기는 사태가 벌어져요! '무엇에' 대한 것이
든, 또 누구의 말이든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어떤 거든 간에 아무한테도 의지할
수 없을 거라구요!
호, 그래서 너는 지금까지 남들이 약속을 지키는 것에 의지해왔던 거냐? 그러
고 보면 네가 그렇게 괴로워한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지.
제가 괴로워했다고 누가 그럽디까?
그럼 너는 네가 '행복하던' 때에 세상을 보고 행동하는 방식이 그런 거란 얘
기냐?
좋습니다, 좋아요. 그래서 전 괴로워했습니다. 이따금요.
아니, 무척 많은 시간 동안. 너는 행복해야 할 온갖 '이유'를 다 갖고 있을
때도 자신이 괴로워하게 내버려두었다. 자신의 행복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
있을지 염려하면서!
그리고 네가 이런 염려까지 '해야' 했던 건, '자신의 행복을 붙잡고 있는 것'
을 남들이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에 주로 의지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약속을 지키길 기대할 권리, 적어도 '희망할' 권리조차 없단 말입니까?
왜 너는 그런 권리를 원하려는 거냐?
남이 네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는 그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거나,
혹은 같은 거지만, 그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때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네게 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혹은 무슨 이유에선가 그
냥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왜 너는 굳이 그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느냐?
너는 정말로 그녀가 지키고 싶어하지 않는 합의를 그녀가 지키길 바라느냐?
너는 정말로 그들이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일들을 하도록 사람들을 강제해야
한다고 느끼느냐?
왜 너는, 그게 무슨 일이든, 또 그게 누구든,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그 일
을 하도록 강제하길 바라느냐?
글쎄요. 그들이 하겠노라고 말한 것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게 놔둔다면, 나나 내
가족이 다치게 되리란 게 그 한 이유겠죠.
그러니까 상처를 피하기 위해서 상처를 입히려고 하는구나.
다른 사람더러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키라고 하는 게 어째서 그 사람을 상처 주는 건
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상처받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진해서 약속을 지켰을 테니까.
그래서 약속을 한 사람에게 그냥 그것을 지키라고 요구해서 '상처주지' 말고, 제
쪽에서 상처를 감수해야 한단 말입니까? 아니면 내 아이들이나 가족이 상처 입는
걸 지켜봐야 한단 말입니까?
너는 정말로 다른 사람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강요하면, 네가 상처 입지 않으
리라고 생각하느냐?
네게 말하노니, 남들에게 더 많은 해를 입힌 쪽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해왔던 사람들이 아니라, 말없이 집요한 삶을 살았던(즉 그들이 해
야 '한다'고 느꼈던 일을 한) 사람들이었다.
누군가에게 자유를 줄 때, 너희는 위험을 제거하지, 그것을 키우지 않는다.
그렇다, 누군가가 너희에게 한 약속이나 서약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놔두
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너희를 다치게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장기적
으로는 결코 너희를 해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남들에게 자유를 줄 때,
너희는 '자신에게' 자유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이제 너희는, 지
키고 싶어하지 않는 약속을 지키라고 남에게 강요할 때 어쩔 수 없이 따라나
오는 번민과 비애, 그리고 자기 위엄과 자기 가치의 손상에서 자유롭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그가 한 약속에 붙잡아두려 했던 사람이면 거의 누구나
발견하는 사실이지만, 해를 입히는 기간이 길수록 그 해악도 커지기 마련이다.
이런 견해가 사업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겁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야 세상이 어떻게
사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사업을 하는, 유일하게 분별 있는 방식이 이것이다.
지금 이 순간 너희 사회 전체에서 사업이 갖는 문제는, 그것이 힘에 근거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합법적인 힘(너희가 '법의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과 너무나
도 빈번하게 사용되는 물리적인 힘(너희가 세상의 '무력'이라 부르는 것)에.
너희는 아직 설득의 기술을 사용하는 법조차 배우지 못했다.
합법적인 힘 --법정을 통한 '법의 폭력'-- 이 아니라면, 우리가 무슨 수로 사업가
들에게 자신들의 계약조건을 이행하고 합의한 걸 지키라고 '설득합니까'?
너희 문화의 지금 윤리로는 아마 달리 방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 윤리
가 '바뀐다면', 사업체들 --같은 차원에서 개인들-- 이 합의를 깨지 못하게
하려고 너희가 지금 쓰고 있는 그 방식은 대단히 미개한 것으로 비칠 것이다.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지금 너희는 합의들을 확실하게 지키게 하려고 폭력을 쓰고 있다. 하지만 너
희의 문화 윤리가, 너희 모두가 '하나'라는 이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바뀔
때, 너희는 더 이상 폭력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봤자 자신을 해치는
것에 불과하니, 너희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왼손을 때리지 않을 것이다.
왼손이 당신 목을 조르더라도요?
그건 그 시점에서 또 하나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때가 되면 너희는 자신의 목
을 조르지 않게 될 것이고, 얼굴에게 분풀이하려고 코를 물어뜯는 일도 없을
것이며, 합의를 깨뜨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너희의 합의 자체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너희는 다른 사람이 가치 있는 뭔가를 너희에게 줘야지만, 비로소 자신이 가
진, 가치 있는 뭔가를 그에게 주기로 합의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냥 소위 답
례란 걸 받기 전까지는 너희가 뭔가를 주거나 나누는 걸 망설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너희는 자동으로 주고 나누게 될 것이니, 따라서 깨뜨릴 계약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왜냐하면 계약은 상품과 서비스의 교환과 관련된 것인 반면, 너희 삶
은 교환이 이루어지는가 아닌가에 '상관없이' 상품과 서비스를 주는 것과 관
련될 것이기에.
그럼에도 너희의 구원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이런 식의 일방적인 줌에서다. 왜
냐하면 너희는 신이 체험했던 것, 즉 남에게 준 것이 자신에게 주는 것이 됨
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에. 돌아가는 것은 돌아오기 마련이다.
네게서 비롯된 모든 일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일곱배로. 그러니 너희는 '되찾으려고'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너희는 오
직 '내주는' 것만 염려하면 된다. 삶은 최상질의 가짐이 아니라 최상질의 줌
을 창조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너희는 계속해서 잊고 있다(forgetting), 하지만 삶은 '갖기 위한 것(for ge-
tting)'이 아니라 '주기 위한 것(for giving)'이니 그렇게 하려면 남들을 용
서해야(forgiving) 한다. 특히나 너희가 '가지려 했던 것을 너희에게 주지 않
았던' 사람들을!
이런 방향 전환은 너희 문화의 내력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다. 지금 너희 문화
에서는 소위 '성공'이란 걸 주로 자신이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로, 얼마나
많은 명예와 돈과 권력과 소유물들을 모았는가로 재지만, 새로운 문화에서는
'남들에게' 얼마나 많이 모으게 했는가로 '성공'이 재어질 것이다.
아이러니는, 남들에게 더 많이 모으게 할수록, 너희는 애쓰지 않고도 더 많이
모으리란 것이다. '약속된' 것을 서로에게 주라고 너희를 강요하는 어떤 '계
약'도, 어떤 '합의'도, 또 어떤 '거래'나 '협상'이나 소송이나 재판도 없이.
미래 경제에서 너희는 일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신의 성장을 위해서
일할 것이고, 그것이 너희의 이득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너희가 참된 자신의
더 크고 더 숭고한 해석으로 되어감에 따라 물질적인 의미에서의 '이익'도 너
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런 시절이 되면, 그들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했다'고 해서, 뭔가를 자신
에게 주도록 강요하려고 폭력을 쓰는 것이 너희에게는 대단히 미개해보일 것
이다. 다른 사람들이 합의를 지키지 않더라도, 너희는 그들이 그냥 자기 나름
의 길을 가고, 나름의 선택을 내리며, 자신에 대한 나름의 체험을 창조하도록
놔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너희에게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든 너희는 아쉬
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온 곳에 더 많이" 있고, 너희가 그것을 끌어
내는 출처(source)는 그들이 아니라 너희 자신임을 알게 될 것이기에.
우와. '알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목표지점에서 벗어난 것 같은데요. 이 모
든 논의는 제가 사랑에 대해 물었던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들이 그걸 한계
없이 표현해도 좋은지 물었던 것에서요. 그리고 그게 자유결혼의 문제로 이어졌구
요. 그런데 갑자기 여기 와서 우리는 목표지점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논의대상으로 삼았던 것들 모두가 관련이 있다. 이
것은 소위 계몽된, 혹은 고도로 진화된 사회들에 관한 네 질문으로 가기 위한
완벽한 도입부다. 고도로 진화된 사회들에는 '결혼'도, '사업'도, 또 같은 차
원에서 너희가 너희 사회를 붙들어두기 위해 창조했던 어떤 작의적인 사회 구
조물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 예, 얼마 안 가면 그 문제에 이르겠군요. 어쨌든 저는 지금 여기서 이 주제를
마무리하고 싶거든요. 당신은 여기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을 하셨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그 이야기들을 종합했을 때 나올 결론이, 사람들 대부분은 약
속을 지킬 수 없으니 약속을 하지도 마라인 듯합니다. 이건 결혼제도란 배에 커다
란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고 말 이야기군요.
나는 네가 쓴 '제도'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결혼한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
제도' 속에 있음을 체험한다.
맞아요, 그건 일종의 정신건강 제도나 형법제돕니다. 아니면 가장 가능성이 적지만,
더 큰 배움을 위한 제도거나요!
맞았다, 그거다. 그것이 바로 대다수 사람들이 결혼을 체험하는 방식이다.
저, 사실 전 당신이 농담을 하시길래 맞장구를 친 것뿐입니다. 사실 저로서는 '대
다수 사람들'이라고 단언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결혼제도를 아끼고 그것을 보호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아직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는 앞의 진술을 고수할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결혼으로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낸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이 자신들에게 저지르는 짓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세계의 이혼율 통계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결혼이 없어져야 한다는 건가요?
나는 그 문제에 아무런 선호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압니다, 알아요. 관찰할 뿐이란 거죠.
훌륭하다! 너희는 끊임없이 나를 선호를 가진 신으로 만들고 싶어하지만, 나
는 그렇지 않다. 이제 네가 그렇게 하길 그만두려 하니, 고맙구나.
여기서 우리는 결혼제도만 침몰시킨 게 아닙니다. 우린 종교도 침몰시켰다구요!
인류 전체가 신은 선호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했다면, 사실 종교는 존
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란 건 으레 자기 스스로 신의 선호에 대
한 진술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무런 선호도 갖지 않는다면, 그럼 종교는 사기겠군요.
음, 그건 너무 매몰찬 말이다. 나라면 그걸 허구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건 그
냥 너희가 만들어낸 것이다.
신은 우리가 결혼하는 쪽을 더 좋아하신다는 허구를 우리가 만들어낸 것처럼요?
그렇다. 나는 그 면에서 어느 쪽도 더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
너희는' 좋아한다.
왜요? 왜 우리는 결혼이 그렇게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결혼을 더 좋아할까요?
결혼은 너희의 사랑 체험 속에 '변함없음', 즉 영원성을 가져오기 위해, 너희
가 생각해낼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여자가 의지처(依支處)와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남자가 변함없는 섹스 이용권과 반려자를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하나의 사회규약이 만들어졌고, 거래가 이루어졌다. 네가내게 이것
을 주면 나는 네게 저것을 주겠노라는 거래가. 이 점에서 결혼은 사업과 흡사
했다. 그래서 계약이 맺어졌고, 쌍방 모두 그 계약을 강제할 필요가 있었기에,
결혼은 신과의 '신과의 약조'이니, 그 약조를 어기는 사람들은 신에게 벌을
받으리라고 이야기되었다.
나중에 가서 이것이 들어먹히지 않자, 너희는 그것을 강제하기 위해 인간의
법률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먹히지 않았다.
소위 신의 법도, 또 인간의 법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결혼서약을 깨뜨리는 걸
막지는 못했다.
어째서요?
통상 너희가 고안한 대로의 결혼서약들은 단 하나뿐인 중요 법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법칙 말입니까?
자연법.
하지만 생명이 통일, '하나됨'을 표현하는 건 자연의 순리입니다. 그게 바로 제가
이 대화들에서 얻고 있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결혼은 우리가 그것을 가장 아름답
게 표현하는 방법이고요. 당신도 아실 겁니다. "신이 함께 모은 것을 인간이 흐트
러뜨리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너희 대다수가 행하는 식의 결혼이 특별히 아름다운 건 아니다. 그것은 개개
인간 존재가 타고 나는 세 측면의 진실 중 두 측면을 침해한다.
다시 그 문제로 돌아가실 겁니까? 전 이제서야 제가 이야기를 추스려가기 시작했다
고 생각했는데요.
상관없다. 다시 한번 꼭대기부터 시작하다.
'너희'는 사랑이다.
사랑인 것은 무한하고 영원하고 자유롭다.
바로 이것이 너희고, 바로 이것이 너희의 '천성'이다. 너희는 날 때부터 무한
하고 영원하고 자유롭다.
따라서 너희의 천성을 침해하거나, 너희의 천성을 경시하는, 인위적인 모든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철학적, 경제적, 철학적 구조물 자체가 너희 자신에
게 가해지는 공격에 다름 아니니, 너희로서는 그것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너는 너희 나라를 탄생시킨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나에게 자
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가 아니었느냐?
그런데 너희는 너희 나라에서 그 자유를 포기했고, 너희 삶에서 그것을 포기
했다. 모두가 안전을 위해서라는 같은 이유에서.
'살아가는 것, 삶 자체를 너무나 두려워하는' 너희는,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
로 '너희 존재의 천성 자체를' 포기하고 말았다.
너희가 결혼이라고 부르는 그 제도는, 소위 정부라는 제도가 그러하듯, 안전
을 확보하려는 너희식 시도다. 사실 서로의 행동양식을 지배하기 위해 고안된,
인위적인 사회 구조물이라는 점에서 그 둘은 형태만 다른, 같은 것이다.
맙소사, 전 그걸 한번도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전 언제나 사랑의 궁극적인
선언이 결혼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너희가 상상하는 대로의 결혼이라면, 그렇다. 하지만 너희가 고안한 대로의
결혼이라면, 그렇지 않다. 너희가 고안한 대로의 결혼은 두려움의 궁극적인
선언이다.
결혼이 너희를 사랑 속에서 무한하고 영원하고 자유롭게 해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그것은 사랑의 궁극적인 선언일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너희의 결혼은 자신의 사랑을 약속이나 보장의 수준으로 낮
추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결혼은 지금 '그런 것'이 '항상 그렇게 되도록' 보장하려는 노력이다. 이런
보장이 필요하지 않다면, 너희는 굳이 결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 보장을 어디에 써먹는가? 첫째, 안전을 확보하는 수단으로(너희 내
면의 것에서 안전을 확보하는 대신에).그리고 둘째로, 안전을 끝내 장담할 수
없을 때, 서로를 벌하기 위한 수단으로. 깨어진 결혼 약속은 거꾸로 이제 막
개시된 소송의 논거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너희는 결혼이 아주 쓸모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이 하나같이 잘
못된 이유들 때문이라 해도.
또한 결혼은 너희가 서로에게 지닌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갖지 않으리
란 보장을 확보하려는 너희식 시도다. 혹은 적어도 그런 감정들을 다른 사람
에게 절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으리란 보장을.
다시 말해 성적으로.
다시 말해 성적으로.
마지막으로 너희가 고안해낸 대로의 결혼은, "이 관계는 특별하다. 나는 이
관계를 다른 모든 관계보다 우선시하겠다"고 선언하는 방식이다.
그게 뭐가 잘못입니까?
아무것도. 그건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다. 잘하고 잘못하고는 존재하지 않는
다. 그것은 무엇이 너희에게 도움이 되는가의 문제다. 무엇이 자신을 '참된
자신'의 다음 번 숭고한 이미지로 재창조해주는가의 문제.
만일 "이 하나의 관계,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딱 하나의 관계만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특별하다"고 말하는 존재가 '참된 자신'이라면, 결혼이라는 너희의
고안물은 완벽하게 그렇게 보장해준다. 하지만 영적 선각자로 인정받고 있거
나 인정받았던 사람들 거의 다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건 흥미롭지 않느냐?
맞아요. 선각자들은 독신이기 때문이죠. 그 사람들은 섹스를 하지 않습니다.
아니다. 그것은 선각자들이 결혼이라는 너희의 지금 고안물이 끌어내려는 진
술 --그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에게 더 특별하다는 진술-- 을 진실
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각자는 이런 진술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도 하지 않는 진술이다.'
사실 너희가 지금 고안한 대로의 결혼서약은 대단히 신답지 못한 진술을 너희
가 하도록 만든다. 신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약속이 그것인데도, 너희는 이것
을 가장 성스러운 약속이라 느낀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역설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두려움을 정당화하기 위해 너희는 '너희하고 똑같이 행동하
는' 신을 상상해냈다. 그리하여 너희는 자신의 '선택받은 민족'에게 한 신의
'약속'이니, 신과 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맺어진 계
약이니를 운운한다.
너희는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한 방식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신이라는
발상을 참아내지 못하기에, 특정한 이유로 특정한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만들어낸다. 너희는 이 소설들을 종교라 일컫지만,
나는 그것들을 불경스럽다 칭할 것이다. 신이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
랑한다는 식의 모든 생각이 엉터리고, '너희더러 같은 것을' 진술하라고 요구
하는 모든 의식이 성사(聖事)가 아닌 신성모독이다.
아, 신이시여, 그만하십시오. '그만요!' 당신은 제가 지금껏 결혼에 대해 품었던
온갖 아름다운 생각들을 죽이고 있어! 신이 이런 이야기를 쓸 리가 없습니다. 신이
라면 종교와 결혼을 절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거라구요!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가 '고안해낸 방식의' 종교와 결혼
이다. 너는 이런 이야기가 가혹하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자신들의 두려움을 정당화하고, 서로에 대한 너희의 정신나간 대우를
합리화하려고, 신의 말을 저질로 만들었다.
계속해서 내 이름으로 서로를 제한하고, 서로를 해치고, '서로를 죽이기' 위
해 필요한 신의 말이라면, 너희는 그것이 어떤 말이라고 신더러 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그렇고 말고, 너희는 내 이름을 불러냈고, 내 깃발을 흔들었으며, 몇백 년 동
안 십자가를 너희 전쟁터로 끌고 다녔다. 하나같이 내가 다른 사람보다 한 사
람을 더 사랑한다는 증거로,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내가 '너희더러
그들을 죽이라고 요구하리란' 증거로.
하지만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사랑은 무한하고 내 사랑은 조건이 없다.
너희가 듣고 있을 수 없는 한 가지가 바로 이것이고, 너희가 참을 수 없는 한
진리가 바로 이것이며, 너희가 받아들일 수 없는 한 진술이 바로 이것이다.
결혼제도(너희가 고안해낸 대로의)뿐만 아니라, 너희의 종교제도와 정부제도
까지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마는 그 완전한 포용성 때문에.
너희는 배척에 근거한 문화를 창조했고, 배척하는 신이라는 '문화 신화'로 그
것을 지탱해왔다.
하지만 신의 문화는 포용에 근거하니, 신의 사랑은 모두를 포용하고, 신의 왕
국은 모두를 초대한다.
그리고 이 진리가 너희가 신성모독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너희가 삶에서 창조한 모든 것이 엉터리가 되는 것이니, 너
희는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의 모든 관습과 고안품들은, 그것들이 무한하고
영원하고 자유롭지 않은 그 정도만큼 엉터리다(false).
'옳고' '그르고' 따위가 없다면 어떻게 뭔가가 '엉터리'일 수 있습니까?
뭔가가 자신의 목적에 맞게 기능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정도만큼 엉터리다.
문이 열리고 닫히지 않을 때, 너희는 그 문을 '그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너
희는 그냥 그것의 설치나 작동이 엉터리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목
적에 이바지하지 않기 때문에.
너희가 삶에서, 너희 인간 사회에서 고안하는 것이 무엇이든, 인간이 되는 데
있어 너희의 목적에 기여하지 않는 것은 엉터리다. 그것은 엉터리 고안품이다.
그냥 다시 음미해보려고 물어보는 건데요. 인간이 되는 데 있어 우리의 목적이라뇨?
'자신이 참으로 누군지' 결정하고 선언하며, 창조하고 표현하며, 체험하고 성
취하는 것.
너희가 지금껏 '참된 자신'에 대해 가졌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가장 숭고한
해석으로 순간순간마다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이 되는 데 있어 너희의 목적이고, 바로 이것이 삶 전체의
목적이다.
그래서, 그게 우리를 어디에 남겨놓는 겁니까? 우리는 종교를 무너뜨렸고, 결혼을
제거했고, 정부를 고발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아무것도 무너뜨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제거하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고발하지 않았다. 너희가 창조해낸 고안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너희가
그것을 가지고 만들어내려 했던 것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그런 상황을 묘사한다고
해서 그 고안품을 무너뜨리거나 제거하거나 탄핵하는 건 아니다.
심판과 관찰의 차이를 잊지 않도록 하라.
저, 전 여기서 당신과 논쟁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하신 것 중 많은
부분이 '제게는' 상당 정도 심판으로 들렸거든요.
여기서 우리를 구속하는 건 말이 지닌 끔찍한 한계다. 실제로는 쓸 수 있는
말들이 워낙 적어서, 같은 말을 몇번이고 다시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들
이 언제나 같은 의미나 같은 종류의 생각을 전달하지 않을 때조차도.
너희는 바나나 스플리트(요리 - 옮긴이)를 '좋아한다(love)'고 말하지만, 그
것이 너희가 서로를 좋아한다(love)고 말할 때와 같은 의미가 아닌 건 분명하
다. 그러니 보다시피, 너희가 어떻게 느끼는지 묘사할 수 있는 말들이 너희
언어에는 거의 없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말해 말의 방식으로, 너와 교류하면서 나는 스스로가 그런
한계들을 체험하게 놔두었다. 따라서 이 용어들 중 일부를, '판단을 내릴 때
사용해왔던 너희로서는, 내가' 그것들을 '사용하면서'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결론을 쉽사리 내릴 수 있으리란 점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네게 장담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이 대화 전체에 걸
쳐, 나는 단지 어떻게 하면 너희가 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에 이를 수 있는지
말해주려고 해왔고, 또 너희 길을 막고 있는 게 뭔지, 다시 말해 너희가 그곳
에 가는 걸 막는 게 뭔지를 가능하다면 강한 충격을 주면서 묘사하려고 해왔다.
'종교'와 관련해서, 너희가 가고 싶다고 말하는 곳은 진실로 신을 알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곳이지만, 나는 너희 종교들이 너희를 그리로 데려가지
못하는 걸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너희 종교들은 신을 '위대한 수수께끼'로 만들었고, 너희가 신을 사랑하지 못
하도록, 두려워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종교들은 너희 행실을 거의 바꾸지 못했다. 너희는 아직도 서로를 죽이
고, 서로를 비난하며, 서로를 '잘못된' 걸로 만들고 있다. 사실 너희더러 그
렇게 하도록 부추겨온 것이 너희 '종교들'이다.
그러니 종교와 관련해서 나는 단지, 너희는 종교가 너희를 저리로 데려다줬으
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종교는 너희를 다른 데로 데려가고 있음을 관찰할 뿐
이다.
이제 너희는 '결혼'이 너희를 영원한 지복(至福)의 땅, 혹은 적어도 어느 정
도 적당한 수준의 평화와 안전과 행복으로 데려가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종
교와 마찬가지로 결혼이라는 너희의 발명품도 처음 출발할 때는, 너희가 처음
그것을 체험할 때는, 그런 대로 이런 소망을 잘 처리하는 편이다. 하지만 결
혼 역시 종교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그 체험 속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점
점 더 너희를 너희가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바로 그곳으로 데려간다.
결혼한 사람 거의 절반이 이혼으로 자신들의 결혼을 해체했고, 결혼한 채로
남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절망적일 정도로 불행하다.
'지극히 복된 결합'이 너희를 쓰라림과 분노와 회한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
것이 너희를 처절한 비극의 자리로 데려가는 경우 역시 적지 않다.
너희는 너희 '정부들이' 평화와 자유와 국내 질서를 보장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나는 너희가 고안해낸 대로의 정부들은 전혀 이렇게 하지 못함을
관찰한다. 오히려 너희 정부들은 너희를 전쟁과, 점점 확대되어가는 자유의
부족, 그리고 국내 폭동과 사변으로 데려간다.
너희가 사람들에게 똑같은 기회를 제공하는 과제를 감당하지 못한 건 말할 것
도 없고, 사람들을 그냥 건강하게 먹이고 활기차게 유지하는 정도의 기본적인
문제들도 해결하지 못했다.
몇만 명이 몇 개국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는 음식들을 날마다 버리는 이
행성에서, 날마다 몇백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너희는 남는 밥을 '가진 자'에서 '못 가진 자'로 전해주는 가장 간단한 과제
조차 처리하지 못한다 --너희가 자원을 좀 더 평등하게 나누길 과연 원하기나
하는가라는 논쟁을 해결하지 못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이것들은 판단이 아니다.' 이것들은 너희 사회를 '관찰하면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 음악 - 첫날처럼(Comme Au Premier Jour) - 앙드레 가뇽 (Andre Gagn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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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신의 관찰이 너무나 '옳다'고 '판단'하고 있는 내가 있습니다.
예..
'자신이 참으로 누군지' 결정하고 선언하며, 창조하고 표현하며, 체험하고 성취하는 것. 너희가 지금껏 '참된 자신'에 대해 가졌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가장 숭고한 해석으로 순간순간마다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이 되는 데 있어 너희의 목적이고, 바로 이것이 삶 전체의 목적이다. 감사합니다. 나의 삶의 목적으로 분명히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몇만 명이 몇 개국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는 음식들을 날마다 버리는 이
행성에서, 날마다 몇백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너희는 남는 밥을 '가진 자'에서 '못 가진 자'로 전해주는 가장 간단한 과제
조차 처리하지 못한다.....................
부끄럽네요.
목적에 부합되지 않게 작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엉터리'다....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