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글이 늦었습니다. 그간 미뤄둔 일이 많아, 눈코 뜰새 없었는데 제대로 눈을 뜬 게 겨우 지금이네요.
써주신 글은 잘 읽었습니다. ‘디 워’ 논쟁에 이어서 독립적인 글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는 질님을 보면서 분발을 요청 받는 이들은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덕분에 불명료했거나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던 몇 가지 측면들을 좀 더 명확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만, 이를 이 자리에 모두다 촘촘하게 써내기는 아쉽게도 힘들 것 같습니다. 그 글은 다른 자리를 빌게 될 것 같은데, 여기서는 몇 가지 중요한 논점들에 대한 제 의견을 기술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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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궁극적 귀결, 그 이후
질님의 논리에 따르면 제가 글에서 제시한 ‘냉소적 현실주의’와 ‘국가/민족주의’라는 짝패는 잘못된 것이거나 불필요한 것입니다. 아니, 질님의 논리를 패러디하자면, 그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선행 판단의 “궁극적 귀결”이므로 이 문장 역시 잘못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질님에 따르면 그것은 무엇보다 ‘냉소적 현실주의’가 ‘국가/민족주의’의 “궁극적 귀결”이기 때문입니다. 둘은 제가 잘못 생각한 것처럼 “짝패”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냉소적 현실주의’가 질님의 예상처럼 국가의 “자기소멸”로 그렇게 쉽게 이어질런지, 저는 의문입니다. 논리와 현실의 거리는 대개 상당하니까요. 김훈이 의문을 표하는 ‘희망’이라는 것은 사실 그러한 종류의 ‘논리’와 겹쳐집니다. (국가라는 단위의 자살이 얼마나 어려운가, 혹은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자살’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라는 질문의 자못 추상적으로 들리신다면, 북한, 그리고 그와 더불어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과 같은 나라들과의 관계 속에서 ‘남한’의 (정치적) 자살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띠는 것인지, 그들이 그 자살을 ‘윤허’하긴 할 것인지 등등의 질문에 대한 상상은 보다 구체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냉소적 현실주의’가 “자기소멸”에 이를 가능성은 그것이 ‘국가/민족주의’로 이동할 가능성에비하면 한 마디로 ‘비현실적’일 뿐입니다. 대한민국이 전지구적 규모의 지정학적 로또 복권에 당첨되지 않는 한, 인질사태나 FTA 타결과정처럼 어떤 집단적 무기력감과 치욕, 그리고 울분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은 지금껏 그래왔듯 끊이지 않을 것인데, 그 때마다 ‘냉소적 현실주의’의 경향이 강화되긴 하겠지만, 그것은 ‘국가/민족주의’로의 이동을 더욱 가속화할 것입니다. 말 그대로의 자살은 ‘냉소적 현실주의자’에게 전혀 ‘현실주의’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거기에서 곧바로 다시 그 반대방향, 즉 ‘냉소적 현실주의’로 이루어지는 이동은 그 시기가 문제일 뿐 언제고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미국’이나 ‘독일’ 혹은 ‘프랑스’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민족주의, 한 마디로 ‘힘없는 민족주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시 ‘냉소적 현실주의’로, 아니 ‘그러니까’ ‘국가/민족주의’로, 라는 식의 진동운동이 유지됩니다.
김훈의 글은 엄청난 낙차의 전압과 서로 대립되는 감정을 내포하는, 거의 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반대되는 두 가지 이상의 문장들을 무심한 듯, 시치미를 떼고 칼로 자른 두부처럼 아무런 접속사 없이 붙여놓은 것이 특징이지만, 그의 진정한 탁월함(?)은 이렇게 해결할 수 없는 진동운동을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쿨”하게, 다시 말해 얼려버린다는 데에 있습니다. 언 발에 오줌을 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오줌 눈 발을 아예 얼려 버린다고나 할까요.
이 “진동운동”이 “피몰리는” 종류의 것이라는 것은 그러나 그러한 냉동상태가 냉정한 추시계의 그것처럼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 그 진동운동을 어떤 “피 몰리는”, 혹은 누군가의 피를 거꾸로 솟게 하는 방식으로 단절시킬 일종의 리비도가 그 동안 누적될 것이라는 것,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피 몰리는” 방식으로 폭발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가리킵니다. (이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게 될 것입니다)
2. 허무주의, 그 이후
질님이 상상하시는 것과 가장 근접한 의미의 “자기소멸”을 굳이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김훈이 아니라 복거일, 특히 1997년 중국반환 이전의 영국령 홍콩 정도를 모델로 하는 그의 ‘영어공용화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의지를 포기한 태도,” 즉 “허무주의”에 불과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복거일의 '욕망'에 대한 논의는 시간/지면 상 전개하지 않겠습니다)
질님에 따르면 ‘냉소적 현실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분류는 양자가 “모두 일종의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한 사실 불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다 허무주의의 아바타들일뿐인데, 그런 현상 차원의 다양성에 저처럼 현혹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냉소적 현실주의’는 허무주의가, 혹은 질님의 정의를 빌면 “모든 의지를 포기한 태도”가 아닙니다. “모든 의지를 포기한 태도”란 질님이 지적하셨듯 말 그대로 “허무주의”일 뿐입니다. 그것을 질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 긍정하지 못하는 정신의 나약함”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만, 그러한 논리는 그러한 ‘순수한’ 허무주의에 대해 제가 ‘냉소적 현실주의’라고 부른 양태가 (애써) 유지하(려고 하)는 비교우위, 당연히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 ‘현실적’ 우월감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대개 자신만은 그러한 현실법칙에서 예외라는 일종의 ‘예외적 개인주의’와 겹쳐지는데 그것은 ‘국가/민족주의’가 그러한 (이들의) “나약함”에 대한 (마초적) 반작용으로 생겨나고 또 유지되는 것이라는 사실에도 눈을 감습니다.
‘냉소적 현실주의’와 ‘민족주의’ 양자 모두를 “일종의 허무주의”로 가뿐하게 “귀결”시키는 질님의 입장은 일종의 ‘철학적 환원주의(philosophical reductionism)’로 보이는데, 그것은 허무주의라는 ‘본질’이 아니라 ‘냉소적 현실주의’나 ‘국가/민족주의’라는 ‘현상(phenomenon)’ 아니 그것도 모자라 ‘부대현상(epi-phenomenon)’에만 둘러싸여 살아나가는 수많은 “가부장”들의 현실을 바깥에서 냉소할 뿐이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3. 개인주의의 아이러니 혹은 ‘냉소적 민족주의’
‘냉소적 현실주의’와 ‘민족주의의 진동운동’에 대해 김훈이 내놓은 대안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냉소적 민족주의(cynical nationalism)’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이 레떼르는 우리 모두는 궁극적으로 혼자 죽을 수밖에 없는 단독자 일뿐이라는 김훈의 믿음, 혹은 개인주의를 온전하게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섹스는 결과적으로 편애다”라는- 라깡/지젝주의자들이 솔깃해 할만한- 그의 전언은 이를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의 개인주의적 측면만을 전경화하는 관점은 김훈이 끊임없이 강조해온 국가 혹은 민족적인 것에 대한 강조 앞에서 못지않게 참담할 뿐입니다.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김훈을 ‘개인주의’와 ‘민족/국가주의’라는 틀 안에 가두어놓고 모순이니 궤변이라는 말을 붙이는 참으로 속 편한 일로 ‘발전’됩니다. 물론 이는 둘 중의 하나 만을 강조해 확대 해석하는 경우보다는 나아 보이지만 제 생각에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것은 김훈이 아니라 말하는 이 자신의 게으름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그러한 안이한 독해는 김훈의 개인주의가 자신을 동시대의 다른 허다한 것들과 구별 짓는 독특한 지점, 다시 말해 개인주의는 개인주의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그의 냉엄한 통찰을 잡아내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 다시 말해 개인주의는 개인주의 ‘개인’의 힘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Individualism cannot survive on its own, that is, individually), 그것은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현실적 아이러니를 김훈의 글들은 동시대의 그 어느 누구보다 예민하게 포착하고 형상화합니다.
바로 이 아이러니에 대한 통찰을 통해 그는 예를 들어 “있듯 없든 상관없다면 있어도 된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하나쯤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검은 꽃>, 306쪽)라는 식으로, 다시 말해 일종의 우스개처럼 “신대한”을 ‘건국’함으로써 오히려 국가/민족주의를 조롱하는 “쿨”한 김영하나 언어민족주의 혹은 파시즘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합리적 개인주의 혹은 자유주의를 부르짖는 고종석을 넘어, 아니 김훈 자신의 표현을 빌면 그들을 “챙겨서” 갑니다. 질님이 언급하신 것과 같은 종류의 “허무주의”를 돌파하는 김훈의 방식은 이것이며, 정확하게 이러한 의미에서 김훈은 ‘당대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라고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4. Post- IMF? Post 911!
이러한 단언(assertion)을 주장(argument)으로 만들려면 그의 문체만을 떠받듦으로써 그를 미학 혹은 문학의 우리에 가두어 넣으려는 순(진한)문학주의나 이와 정반대의 방향에서 그를 단순한 보수 이데올로그로 팔아 넘기려는- 정치(精緻)하지도 정치(政治)적이지도 않은- 정치주의 양자와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김훈의 소설이 “포스트 IMF” 시대의 한국을 감싸 안고 있는 “정치적 무의식”을 건드린다는 최근호 <창비>에 실린 김영찬의 주장이 놓치고 있는 것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의 ‘냉소적 민족주의’가 ‘포스트 911’ 시대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 즉 그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지구화(globalization) 시대의 소설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과 정교한 분석으로 보입니다. <칼의 노래>에 비해 <현의 노래>와 <남한산성>이 모두 강력한 외세의 요구 앞에 선 개인 혹은 국가 단위의 대처 방식을 다루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지요. 질님께서는 특유의 현상학적 환원의 방식으로 잘라내길 권고-아니 ‘교시’(^^)-하셨습니다만 이런 의미에서 ‘탈레반 사태’는 김훈의 글이 형성하는 담론적 자장에 외재적(extrinsic)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intrinsic or immanent)인 사태입니다.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 죽어간 ‘개인’들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 ‘대한민국’의 위상과 그것의 역할에 대한 질문은 사실 ‘평화유지군’이라는 형태로 중화되긴 했지만 부시가 부드럽게 ‘권고’해 이루어진 ‘파병 사태’ 속에 이미 내재해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IMF 역시 ‘외세’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911을 통해 전면으로 부상한, 미국과 같은 구체적인 민족/국가가 전세계적으로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어떤 치욕과 분노의 감정이 거기에서는 상당히 불명확합니다. 그것은 파병과 그 안에 내재했던 잠재성의 현실화인 탈레반 사태가 보여주는 것처럼 후자에 보다 직접적인 차원의 죽음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해, ‘남’ 때문에, ‘쓸데 없이’ 끌려나가 죽었다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주는 ‘치욕’과 ‘분노’. 전자 역시 수많은 이들을 거리로 내몰고 궁극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후자에 비하면 IMF는 간접적이고 보다 추상적인 죽음의 작인(agent)일 뿐입지이요. (위에서 언급했던 “진동운동”이 탈레반 사태가 불러일으킨 것과 같은 치욕과 분노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은 물론 당연한 사실입니다)
이를 다른 방식으로 정식화하면, IMF가 순수하게 경제적이고 개인적인 측면에서의 ‘밥벌이’라는 문제를 전경화(foreground)했다면, 911은 군사적이고 국가적인 측면에서의 ‘밥벌이,’ 즉 생존 그 자체의 문제를 제기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계기를 통해 김훈은 제가 위에서 지적한 개인주의의 아이러니, 즉 국가(주의) 없(이)는 개인(주의) 없다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 즉 ‘냉소적 민족주의’를-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미학적 구성물로서 교직하며, 거기에서 그의 개인주의와 민족주의는 “따로 또 같이”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5. 약육강식의 세계 바깥은 없다
질님께서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벗어날 때 치욕은 사라집니다”라고 쓰셨습니다만, 아쉽게도 혹은 안타깝게도 치욕은 약육강식의 세계를 벗어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네 번째 문단 초반에서 “강자에게는 치욕이 없는 아닐까요?”라고 올바르게 물으셨던 질님은 그러나 후반에 가서 “부시도 나름대로 먹고 살려고 하는 짓 아니냐고 강자의 사정까지, 강자의 치욕까지 헤아려주는 일”을 모순적으로 언급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강자의 치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치욕은 전적으로 약자의 것이며 그것은 약육강식의 세계 ‘안’에서 강자가 될 때에만 사라집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질님은 세상이 “더 이상 강자와 약자가 없고 모두 다 약자로 같은 등급에 놓이게 될 때”에 대한 기대 혹은 희망을 피력하십니다. 이는 질님께서 말씀하신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환상”일 뿐입니다. 나아가 김훈이 주는 위안은 “기만적”이라고, “약육강식의 현실마저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쓰셨지만, 제가 보기에, 그리고 대중들의 반응을 고려하면 그렇지는 않은 듯싶습니다. 그의 ‘보편적 치욕론’은 약육강식의 세상에 대한 냉엄한, 매우 현실적인 이해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가 매우 약하다는 것, 약했다는 것, 살려면 기어야 한다는 것, 기어야 했다는 것, 나도 그랬고 하물며 한 나라의 임금이라는 인조도 그랬다는 것, 지금 그러고 있다고, 또 예전에 그랬다고, 그러니 너무 괘념치 말라고 얘기합니다. 그의 글들이 “어떤 치유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위안은 정확하게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현실적’인 것입니다.
6. 운명과 자연 혹은 (부)자유와 도덕
운명과 도덕에 대한 질님의 문제제기는 정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가라타니나 주판치치, 그 이전에는 지젝, 라깡, 칸트, 스피노자, 결국에는- 서구철학자들의 고질적인 버릇처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올라가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기했던 고전적인 문제설정인데, 제가 “네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는 전언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도덕을 언급했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김훈이 운명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적지 않은 글들이 질님처럼 김훈에게서 (보수적) 운명론자 혹은 허무주의자의 모습을 읽어내고 있기도 하구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레떼르는 김훈에겐 너무 헐거운 기성품이 아닐까요? 좀 더 그에게 꼭 맞는 수제품은 없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김훈을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과 구분 짓는 두 번째,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운명을 제가 언급한 의미에서 ‘자연’화하는 데에서 생겨나는데 도덕은 바로 이 작업을 통해서 양립가능해집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 대신 저는 시간과 지면 관계상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를 읽은 살리에리’라는 ‘속기’를 통해 지적하려 했는데, 아마 프로야구 감독이 덕아웃에서 보내는 기이한 수신호 정도로 읽혔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그러나 김훈의 스피노자적인 결정론적 문제설정 속에서는 여전히 자유가, 다시 말해 도덕이 유의미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먼저 스피노자주의자로서의 김훈은 “스스로 그러한 것의 힘”을 믿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또한 “스스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주의자로서의 김훈은 그러한 ‘자연’이 결국 힘 관계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운신의 폭을 넓힙니다. 가장 ‘확실한’ 예언이라는 예수의 재림조차 그 때와 장소를 아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성경이 단언하고 있다면, 결국 스피노자가 얘기했듯 우리의 무지가 자유 그 자체라면, 도덕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김훈은 그 자유가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힘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과 자신과 사실 실질적인 관계는 없는 ‘한국인들’-이 모짜르트가 아니라 살리에리라는 것을 뼈저리게 상기합니다. 아니, 상기하려 하지 않아도 세상이 상기시켜 주겠지요. 그러나 살리에리 안에서 죽지 않는 것, 그것은 다시 마키아벨리이며, 그 둘 사이의 갈등과 긴장이 그를 ‘냉소적 현실주의’와 ‘국가/민족주의’ 그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요동치게, “피몰리”게 “진동”하게 합니다. 다시 스피노자를 따르자면, 그 진동의 끝 어딘가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예정되었던 자리, 더 이상 치욕이 필요 없는 자리를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7. 희망, 어떤 희망?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희망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셨던 질님의 지적은 저 역시 별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의 글은 김훈을 옹호하거나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그를 명확히 기술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사랑하라, 희망 없이”라고 김훈이 권유하는 이유는 그것이 대개 “헛된” 것이거나 “어설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밥벌이의 지겨움>, 241쪽) 어떤 의미에서 김훈은 “희망 없이 사랑하기”라는 그의 바램이 별로 희망적이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질님이 자신 있게 단언하신 것처럼-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과연 ‘어떤 희망’을 사랑해야 하는가, 혹은 할 수 있는가가 될 것입니다. 어설픈 “극좌”파나 민주노동당, 혹은 녹색당원의 그것이 아닌, 제2, 제3의 “제3의 길”이 아닌 그 무엇으로서의 희망. (이들이 왜 제대로 된 의미의 희망이, 아니 그 내부의 인물들에게 조차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후마니타스, 2007)이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질문이 그 말의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라는 것은, 밥 (잘) 먹여 주겠다는 이가 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 현 상황에서 더욱더 명약관화해 보입니다. 이 문제가 ‘우리’의 단기 과제라는 것, 그것이 김훈이 ‘당대의’ 소설가이자 문장가로 남아있는 가장 명확한 이유입니다.
첫댓글 오늘 아침 써핑 중 우연히 이러한 '냉소적 민족주의'의 (답답한) '당대'성을 시사하는 칼럼을 하나 읽게되었습니다. 흥미로운 (필연적?) 우연이라 생각해 스크랩 방에 옮겨놓았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