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낡은 서랍 속의 테이프" - ② 서지원 2집 <TEARS>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듣고 싶은 노래를 다운받을 수 있고, 심지어 카오디오에도 음악 파일이 들어 있는 USB를 꽂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대중 음악'이라는 장르가 너무 쉽게 소비되고, 너무 쉽게 만들어지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새로 나온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 하루 종일 라디오 앞에서 공테이프를 넣고 초조하게 기다리던 기억, 혹은 어렵게 산 테이프를 친구에게 빌려 줬다가 테이프가 늘어나 우울해 하던 시절이 그립진 않은가요?
이에 <히트 앤드 런>에서는 서랍 구석에 넣어 두었던 먼지 쌓인 카세트 테이프를 꺼냅니다. 이제는 그 테이프를 들을 수 있는 카세트조차 없지만, 추억 속 테이프들을 다시 보며 잠시 옛 추억에 빠져 보는 건 어떨까요?
이은주, 유니, 정다빈, 안재환, 최진실... 최근 몇 년 간 연예인들의 충격적인 죽음이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과거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1995년 11월, DEUX의 김성재가 솔로 앨범 <말하자면>의 첫 방송을 끝낸 후 변사체로 발견됐고, 1996년 1월에는 말이 필요없는 최고의 노래꾼, 김광석이 자살을 했다.
그리고, 김성재와 김광석의 죽음 사이에 또 한 명의 젊은 가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불과 스무살의 어린 나이에 삶을 포기해야만 했던 여린 청춘, 서지원이다.
'꽃미남' 서지원, '김원준 아류'가 아니었다!
90년대 초반, 시대를 대표했던 최고의 '꽃미남'은 단연 김원준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요계를 휩쓸고 간 1992년 말, <모두 잠든 후에>라는 자작곡을 들고 나온 김원준은 '터프가이' 신성우, 이덕진과는 달리 '부잣집 도련님'의 귀공자 스타일로 여성팬들을 매료시켰다.
이후 2집 <언제나>, 드라마 <창공> OST <세상은 나에게>, 3집 <너없는 동안>, <짧은 다짐> 등이 연속으로 히트를 하며 '김원준 전성시대'를 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가 성공하면 '아류'들이 쏟아지게 마련. 김원준의 성공으로 또 한 명의 '꽃미남 솔로가수' 박지원이 등장했다. 김원준이 모델로 활동하던 의류 광고를 이어받은 박지원은 경쾌한 댄스곡 <느낌만으로>를 들고 나왔지만, 김원준과 비슷한 경로를 통해 연예계로 진출한 박지원에게는 '리틀 김원준'의 이미지를 뛰어 넘을 만한 '느낌'이 부족했다.
그 즈음, 또 한 명의 '꽃미남 솔로가수'가 등장했다. 이름이 또 지원이다. 또 김원준의 '아류'가 등장했나 싶었다. 그러나 서지원은 김원준, 박지원과는 다른 '느낌'이 있었다.
조각같은 얼굴의 미남은 아니었지만, 귀엽고 여린 얼굴을 앞세워 여성팬들의 보호본능을 자극시켰다. 김원준이 여성팬들에게 '안기고 싶은 남자'였다면, 서지원은 '안아 주고 싶은 남자'였달까?
서지원의 데뷔곡 <또 다른 시작> 역시 오태호의 감성적인 가사와 서지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어우러진 명곡이었다. 특히 발라드에 맞춰 춤을 추는 서지원의 모습은 당시로선 꽤나 파격적이었다(서지원 전에는 유영진이 1993년에 <그대의 향기>라는 R&B를 부르며 춤을 췄다. 훗날 그는 SM엔터테인먼트의 '음악적 대부'가 된다).
서지원은 빠른 비트의 후속곡 <사랑 그리고 무관심>으로 잠시 활동한 후, 2집 앨범 준비에 들어 간다. 정재형, 윤일상, 오태호, 박선주 등 유명 뮤지션들이 서지원의 2집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공교롭게도 서지원이 등장하던 시기에 김원준은 4집 앨범 <넌 내꺼>를 선보였지만, 이전 앨범 만큼 큰 사랑을 받지 못했다. '넘버원 꽃미남'이 서지원에게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전곡이 타이틀, 명곡으로 도배된 서지원의 2집 앨범 <TEARS>
어느덧 1996년 새해가 밝았다. 서지원의 2집은 녹음과 후반 작업, 자켓 디자인까지 완벽하게 끝마친 채 발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서지원의 갑작스런 자살 소식이었다.
서지원은 1996년 1월 1일 "2집 앨범 녹음을 끝내고 활동을 앞둔 나는 더 이상 자신이 없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성재가 사망한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비록 서지원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2집 앨범 <TEARS>는 예정대로 발매됐다.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테이프를 구입했다. 앨범 자켓에는 "저를 기억해 주시고, 노래 많이 사랑해 주세요"라는 서지원의 마지막 메세지가 적혀 있었다.
A면 첫 번째 곡 <내 눈물 모아>부터 B면 마지막 곡 <애국가>까지. 서지원의 2집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나는 '슬픔'보다는 '분노'가 앞섰다. 왜 이런 명반을 만들어 놓고 자신이 없다며 자살을 한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베이시스' 정재형의 애절한 멜로디 라인이 돋보이는 <내 눈물 모아>는 이미 플라이투더스카이, 배슬기, 레이지본 등의 후배 가수들이 리메이크했을 정도로 명곡이다. 이 노래를 만든 정재형 역시 자신의 첫 번째 솔로 앨범에서 이 노래를 다시 불렀다.
강수지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오태호 작사,작곡의 <I MISS YOU> 역시 드라마 같은 가사가 돋보이는 불후의 명곡이다. 담백하게 슬픔을 표현한 강수지와는 달리, 서지원은 지금까지 들려 준 적 없는 폭발적인 창법으로 '두려움이 앞선 미안함'을 노래했다. 두 히트곡 외에도 서지원 2집에는 숨겨진 명곡들이 수두룩하다.
댄스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터보의 <회상>, 이승철의 <인연>, 김범수의 <보고싶다> 등 애절한 발라드 명곡들도 다수 만든 윤일상의 작품 <첫 눈이 오는날>은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을 연상케 하는 첫사랑의 설렘을 윤일상의 부드러운 멜로디에 실어 서지원 특유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들려 준다.
지금도 눈이 오는 날이면, 라디오에서 종종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아마 서지원이 살아서 이 곡을 제대로 홍보했다면, 지금쯤 Mr.2의 <하얀 겨울>에 버금가는 '겨울 노래 명곡'이 됐을지도 모른다.
<76-70=♡>은 가수 박선주(최근 마약복용 혐의를 받았다)와 부른 듀엣곡으로 연상·연하 커플의 슬픔을 다룬 노래다. 지난 2005년, 디바가 이 곡을 리메이크했다.
그 밖에 <갈등>, <미아더스의 손> 등 말랑말랑한 '윤일상표 댄스곡'도 서브 타이틀로 손색이 없고, 서지원이 직접 가사를 붙인 <이별만은 아름답도록> 역시 <내 눈물 모아>와 <I MISS YOU>에 버금가는 발라드 넘버.
이렇듯 서지원의 두 번째 앨범은 '전곡의 타이틀화'를 표방한 듯, 시작부터 끝까지 명곡들로 채워져 있다. 이런 명반을 만들어 놓고 불안해서 자살을 하다니... 우울증이 이래서 무서운가 보다.
매년 1월 1일마다 생각나는 스무 살 청년, 서지원
비록 가요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부를 가수는 없었지만, 서지원의 두 번째 앨범은 <내 눈물 모아>와 <I MISS YOU>가 동시에 사랑을 받으며 그를 아쉬워하는 팬들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서지원의 2집이 큰 사랑을 받으면서 같은 해 연말 비공개 곡을 모은 3집 <Made in heaven>이 출시됐고, 1998년에는 베스트 앨범이 발매되기도 했다. 그만큼 서지원과 그의 노래를 아끼고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만약 서지원이 1996년의 첫 날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분명히 <내 눈물 모아>를 뛰어 넘는 주옥같은 명곡들을 대거 남겼을 것이다. 아, '만능 엔터테이너'의 기질을 살려 연기자가 됐을려나?
그것도 아니면, 연예계를 떠나 어떤 아이의 아버지, 어떤 사람의 남편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사실은, 어떤 사람이 되어 있건, 세상에 존재조차 하지 않는 지금보다는 행복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서지원이 세상을 떠날 때 나는 고2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 어느덧 30대가 됐지만, 서지원의 나이는 스무 살에서 멈춰 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나보다 2년이나 빨리 태어난 서지원이 이제는 막내 동생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매년 희망 가득 찬 새해가 밝을 때마다, 나는 모두가 들떠 있는 1월 1일에 세상을 버릴 만큼 두려움에 떨었던 스무 살의 어린 동생, 서지원이 그리워진다.
※ <내 낡은 서랍 속의 테이프>는 매주 금요일에 업데이트됩니다. 다음주(11월21일)에는 '터보 2집'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
출처:
http://blog.ohmynews.com/hitandrun/231617
첫댓글 덕진님 이름이 또 나옵니다. 찾아 보세요.ㅎ (순전히 이덕진님 이름이 보여서 가져온 글입니다.;;)
앙.. 검색왕 방장님~! 덕진님 이름 보니까 신선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