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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행선지 |
세부 일정 |
비 고 |
2017.01.18.06:00 |
현대증권 |
반포대교 남단 반포현대증권 앞 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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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0 |
현대증권 |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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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0 |
기흥휴게소 |
15분 휴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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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0 |
휴게소 |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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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5 |
여산휴게소 |
경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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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0 |
휴게소 |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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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0 |
숲정이성지 |
십자가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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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
성지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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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0 |
서천교 |
경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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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
전동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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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 |
성당 |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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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0 |
치명자산 |
도착,묘역 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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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
미사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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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
파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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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13:30 |
점심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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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0 |
성지 |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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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16:00 |
모악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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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 |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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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반포도착 |
식사 후, 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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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월. 참가 신청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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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루치아 |
김종식 파스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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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하시는 형제님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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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 체칠리아 |
김애경 벨린다 |
장은기데레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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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분프란치스카 |
김정자 아네스 |
An-severi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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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크리스티나 |
노병금 바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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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마틸다 |
박순옥 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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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옥희 잔다크 |
최정숙 스테파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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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희필로메나 |
서희정 마르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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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펠레지아 |
황정우 요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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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재 마틸다 |
이승분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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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숙 실비아 |
윤정숙 골롬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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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주 가톨릭 신학원이 위치해 있는 숲정이(윤호관)는 숲이 칙칙하게 우거져 숲머리라고도 하고 군 지휘소인 장대(將臺)가 있던 곳으로, 조선시대 천주교도들의 사형장이었다.1801년 12월 28일(양력 1802. 1. 31), 유항검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자부 이순이(루갈다), 조카 유중성(마태오) 등 유항검의 가족이 처음 참수되면서부터 이곳에는 순교자의 피가 마르지 않았다.1839년 5월 29일(4. 17)에는 1827(정해)년에 체포되어 13년간 옥고를 치룬 신태보(베드로), 이대권(베드로), 이일언(욥), 정태봉(바오로), 김대권 등 5명이 참수되었다. 1866년 12월 13일에는 소양면 신리골의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손선지(베드로), 한재권(요셉)과 성지동의 조화서(베드로), 이명서(베드로), 정원지(베드로) 이렇게 여섯 분이 치명하셨는데 이 여섯 분은 모두 1984년 5월 6일에 성인품에 올랐다.1867년에는 김사집(필립보)을 비롯한 수 명의 무명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치명하였다.이곳에 해성중. 고등학교 와 학교 체육관으로 사용되었던 윤호관이 있었는데 92년 2월 26일 해성중.고등학교가 삼천동으로 이전하고 현재는 숲정이 성지와 윤호관이 있으며 이건물에서는 현재 각종 행사및 교육의 장(전주 가톨릭 신학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관촌 슬치 어느 산속에서 발원하여 구이에서 발원한 삼천천과 합수되어 만경강까지 흐르는 전주천은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흐르는
1급 천으로 약 30km에 달한다. 이 천을 따라 걷다 보면 천주교와 관련된 역사가 고스란히 베어 있는 순교의 현장을 만날 수 있다.
서천교는 병인박해때 순교한 조윤호 성인의 순교터이다. 조윤호는 조화서 성인의 아들이며, 1839년에 치명한 조 안드레아의 손자로, 부친 조화서와 함께 완주 소양 성지동에 살다가 함께 잡혀와 부친이 참수된 지 열흘 뒤에 서천교에서 밧줄로 목이 졸려 순교했다.
그는 전주 감영 에서 부친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 을 지켰다. 부친이 형장으로 갈 때에는 서로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부자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부친이 참수된지 10일 뒤인 12월 23일(혹은 12월 18일, 12월 28일) 전주 서문 밖 서천교 형장에서 모진 매를 맞았지만, 죽지 않아 끝내는 밧줄로 목을 졸라 사형시켰다.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
전동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풍남문 밖, 현 전동성당 자리는 신해박해(1791)때,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웠던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곳이고, 또 ‘호남의 사도’로 불렸던 유항검과 그의 동료들이 신유박해(1801) 때 순교한 곳이기 때문이다.
전동본당의 초대 주임신부는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였다. 1889년 전주본당이 설립되고 보두네 신부가 부임했지만, 당시 전주에는 신자가 한 명도 없어 처음에는 완주 소양 대승리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891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고, 1908년에 성당 건축을 시작했으며 설계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했다. 보두네 신부를 통해 이곳에 성당이 건립된 일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보두네 신부 자신도 이곳이 순교터인 줄은 몰랐지만 순교자들의 피가 서려있을 법한 전주성 성벽의 돌과 흙으로 주춧돌을 세웠는데, 바로 그곳이 순교터였기 때문이다 전동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써 사적 제 288호 이고 사제관은 도지정 문화재 자료 178호이다
초록바위는 병인박해(1866)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남종삼의 큰아들 남명희와, 남종삼과 함께 순교한 홍봉주의 아들을 교수형으로 죽인 후 전주천으로 밀어넣어 수장시킨 곳이 남종삼이 처형되고 난 후 그의 부친 남상교와 큰아들 남명희는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를 한 감옥에 가두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14세였던 남명희는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남명희는 국법에 따라 성인(15세)이 되는 이듬해까지 처형을 연기하고 옥에 가두어 두었다. 그후 이듬해에 이곳 전주천 옆의 초록바위에서 교수형으로 죽인 다음 그 시신을 전주천에 수장 시켰다.남명희 집 안은 3대가 순교의 영광을 입었다.
치명자산에는 신유박해(1801)때 순교한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그의 가족 6명이 합장되어 있다. 이 중에는 다블뤼 주교가 “한국 순교자들의 보석”이라고 칭송한 동정부부 순교자 이순이와 유중철도 포함되어 있다. 유항검 가족은 처음에 초남이 근처 바우배기에 매장 되었다가 1914년 전주성당(현 전동성당)의 보두네 신부가 유해를 모셔와 현재 자리에 모셨다 보두네 신부가 해발 300여 미터의 산정에 순교자들을 모신 뜻은 순교자들의 순결한 신심과 고매한 덕을 높이 기리고, 순교자들이 전주를 수호해 주기를 기원함이었다. 이후 1993년 유항검의 유해 확인을 위한 시굴 작업을 진행하여 유항검과 그 가족 6명 모두의 유해를 확인한 후 재안장했다.순교자 묘 밑에는 1994년 건립된 기념성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성직자 묘지와 십자가의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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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찬미예수님!
이명자 가타리나 함께합니다.
새해! 은총과 자비를 통하여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샬롬
유마틸다 참석합니다
찬미예수님 환영합니다. ~~
한루치아 참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