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28
언어→해석→다양성. 해석의 과정을 중시하는 동양학에서는 ‘역사’가 강조되게 마련이다. 옛것을 되씹어 시대적인 재해석을 하려면 옛 시대뿐만 아니라 현시대의 역사성을 반드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의학에 있어서도 의사학醫史學의 의미가 크니 경전經典 이해를 위해서는 그 경전經典이 쓰여진 시기의 역사적인 배경과 의자著者가 처한 시대상황을 먼저 알아야 한다.
예컨대 보토파補土派 이동원 선생의 비위론脾胃論을 연구하려면 금원시대金元時代의 역사성과 동원선생 개인의 인물특성 등 의사학醫史學 자료의 뒷받침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의사학醫史學의 뒷받침 없이 그냥 의서醫書 내용만 보다가는 저자著者가 주장하는 바를 오해할 수 있다.
식당에 가서 된장찌개를 시킬 때 ‘된장찌개’ 달라는 말 대신에 간단히 줄여 ‘된장’ 주세요 한다면 식당 종업원은 아무 혼란 없이 ‘된장’이라는 말을 듣고도 ‘된장찌개’를 내오지만 식사 후 식당 밖에서 “나 오늘 점심에 ‘된장’ 먹었어” 한다면 듣는 이에게 ‘된장찌개’보다는 ‘된장’ 자체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더욱이 ‘된장찌개'나 ’된장‘이 대중적 보편성을 가진 상황에서는 된장찌개 대신 된장이라 말해도 자연스럽게 된장찌개로 인식되어 지나 시대가 바뀌어 된장이 익숙하지 못한 상황에선 “나 오늘 된장 먹었다”라는 문장을 가지고 된장찌개를 연상해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 한의대 교육은 된장인지 찌개인지도 구별 못하는 어려움에 있는데 이는 의사학醫史學을 예과 때 가볍게 배우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한의학과 서양의학에서 의사학醫史學의 가치는 다르다. 새것이 나오면 바로 옛것이 되어 묻히는 서양의학에서의 의사학醫史學과 옛것을 재해석하여 새것을 만들어 내는 한의학에서의 의사학醫史學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현 한의대에선 서양의학 관점으로 의사학醫史學을 가볍게 취급하니 이런 환경에선 언어력과 해석력, 그리고 학문의 다양성을 기대할 수 없다.
의사학醫史學은 통과의례로 배우고 넘어가는 기초 교과과정이 아니라 한의대 전 교육과정 속에서 유기적으로 연구되어야할 중요한 학문이다. 예과와 본과로 분리해서 한의학을 기초분야와 임상분야로 나누는 형식, 기초분야엔 개론, 생리, 병리 등이, 임상분야엔 간계, 심계, 비계 등이 분류되는 형식은 서양의학을 연구하는 방법이지 고증考證을 중시하는 ‘해석’의 관점을 지닌 전통 동양학의 학습법이 아니다.
의사학醫史學을 바탕 삼아 금원시대의학金元時代醫學, 명대의학明代醫學, 청대의학淸代醫學 등으로 나누어 시대상황에 따른 해석차이를 분석하면서 교육해야 하는 바 교과서도 생리, 병리, 본초, 침구 등으로 분리해서 짜집기한 것이 아니라 원전原典자체를 온전하게 사용해야 한다. 즉 <경악전서><의학입문><동의보감> 등의 의서醫書를 가지고 커리큘럼을 ‘경악’, ‘입문’, ‘보감’ 등으로 정하여 각각 의서醫書의 전문가로부터 한 의서醫書를 통해 생리, 병리, 임상 등을 연결하는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교수 역시 서양식으로 분류된 파트별 박사가 아닌, 비록 한의사가 아닐지라도 어떤 한 의서醫書에 정통한 분을 모셔야 할 것이다. 한의대에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언어력과 해석력을 키우는 것은 이 방법밖에 없으나 언어와 해석, 그리고 다양성이 이미 상실된 현실에선 불가능한 꿈.
본인이 한의대 설립을 인생의 목표로 삼음은 이러한 꿈을 이루기 위함이다.
첫댓글 그 시대적 상황과 그 말을 하는 분이 의미하는 뉘앙스(어떤 말의 소리, 색조, 감정, 음조 등에서 기본적인 의미 이외에 문맥에 따라 달리 느껴지는 섬세한 의미 차이)를 알아야 스승들의 가르침을 그나마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항상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