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숭동에 나가면 사람이 따로 있다. 그들은 연극에 미치거나 미쳐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걸음걸이, 표정, 어깨에 들쳐 맨 가방, 아무렇게나 걸친 의상, 헝클어진 머리, 허름한 신발이 동숭동 사람들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들이 있으므로 해서 동숭동은 늘 활기에 넘친다. 그중에 한 사람이 김혁수다. 그는 동숭동에서 자주 만나는 인물이다. 그만큼 그는 연극에 미쳐있는 사람중의 하나다. 그가 극단의 명칭을 바꾸어 새롭게 태어 나고자 꿈틀대고 있는 것이 심상치 않다. "봄 봄" "소나기" "동백꽃"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유정이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며 춘천의 실레마을에서 야학의 문을 열었던 <금병의숙>!
이제 김유정과 동향이며 일가친척 뻘이 된다는 김혁수씨가 <금병의숙>이란 이름으로 동숭동 연극정화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고 새롭게 문을 연다고하니 연극에 목마른 많은 후학들이 그 주변으로 많이 모여 들기를 기대한다. 또한 비록 짧은 인생이었지만 향토색 짙은 주옥 같은 작품을 남긴 김유정의 진솔한 인생과 예술세계 처럼 극단 금병의숙이 추구하는 연극방향 역시 한국적 토양에 뿌리 박은 새로운 연극예술의 추구에 그 목표를 두었으면 한다. 연극은 무대를 가로 지르는 그 짧은 순간 밖에는 생명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매우 높은 예술이다. 연극은 그 짧은 순간을 위해 모든 정열과 많은 시간을 던지는 것이다. 마치 불 속을 뚫고 들어가는 불나비 처럼!
극단<금병의숙>의 단원들은 젊다. 그들에겐 정열과 함께 많은 시간도 있다. 뜨거운 불 속에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드는 연극 정신에 새 물결을 일으켜 연극의 새 이랑을 만들어줄 것을 기대해 본다. 아울러 동숭동의 연극문화가 <금병의숙>의 새로운 연극운동으로 거듭 태어 나기를 함께 기대한다.
[페이지] 003
대표의 말
극단 금병의숙으로 새롭게 출발하며
* 사진
김혁수
대표, 작, 연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생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희극이요, 느끼는 사람에게는 비극이다'
난 이 말을 참 좋아 합니다.
아무리 내 자신이 돌이켜 봐도 비극적인 것만 떠오르기 때문일까요? 사실 내 지난 시간 중, 희극적인 시간은 뭐 별로 뾰족하게 떠오르는게 없습니다. 연극을 시작한 지도 벌써 십 칠년 이 되었습니다. 라면마저도 눈치껏 먹으며 어깨너머 연극을 배우던 그 시절, 서른 살이나 처먹은 놈이 주머니에 토큰하나 달랑 들고 아니 그 마저도 없어 명동에서 수유리 까지 터덜터덜 걸어가던 그 시절---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젊은날의 낭만이라고 접어둔 지 오랩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합니다.
몇 년전 극단 예군을 창단하고 극단 모드로 명칭 변경하고 또 극단 금병의숙으로 새롭게 태어나기까지 정말이지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돈 때문에 힘든건 둘째 문제였습니다. 적금을 해약하고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려대고 대출받고 그러고도 아직까지 빚쟁이로 남아있지만, 주머니에 토큰하나 없던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 까짓 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힘든 것은 사람,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에 대한 실망과 배신을 낭만이라는 이름의 추억으로 포장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느낀다는것, 참으로 힘들기만 합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인생을 느끼며 살아가렵니다. 그래서 극단 금병의숙으로 새롭게 선 것입니다. '인생을 느끼면 살기위해' 금병의숙이라는 야학을 차렸던 소설가 김유정 어른의 그 진솔한 가슴앓이를 안다면 지금까지의 내 지나간 시간은 투정 밖에 안될 것 같습니다. 그 진솔한 가슴앓이를 찾아가는 극단 금병의숙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004
무대 앞에서
* 사진
박병모
남자(아버지,연극배우,손님)
오이디푸스왕, 세일즈맨의 죽음 ,넛츠, 비, 사기꾼들 외 다수 출연
* 사진
정은영
지수
휘가로의 결혼, 차이나맨의 하루, 블루 사이공, 가도가도 황톳길, 무한지애 외 다수 출연
[페이지] 005
* 사진
이주호
민수
유혹, 동물원 이야기, 갈매기, 출구, 불감증은 병이 아니라구요? 외 다수 출연
* 사진
정수호
주영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 큐피트여 나에게도 화살을, 불감증은 병이 아니라고요? 외 다수 출연
[페이지] 006
* 사진
이길우
일본인
신춘 단막극제, 빈방 있습니까 외 출연
* 광고사진
[페이지] 007
무대 뒤에서
* 사진
무대미술. 손호성
* 사진
무대제작. 김종선
* 사진
음향. 신성우
* 사진
사진. 임성규
* 사진
조연출. 김익준
* 사진
후원회장. 이명훈
[페이지] 008
* 사진
조명. 김경수
* 사진
조명. 박미령
* 사진
분장. 김준영
* 사진
분장. 김숙자
* 사진
의상. 조경아
* 사진
마케팅. 김덕구
[페이지] 009
* 사진
총진행. 김학재
* 사진
홍보. 송영재
* 사진
홍보. 조경숙
* 사진
조명디자인. 신호
* 사진
섭외. 신상옥
* 사진
진행. 김선화
[페이지] 010
* 사진
이 세상에서 살아 숨쉬는 여자, 딸들이여! 어떤 충동을 느끼는가? 무슨 꿈을 꾸는가? 빛나는 드레스를 입고 싶은가.
아니면 신발짝을 얻어신고 팔자고친 신데렐라가 되고 싶은가, 이세상에서 살아 숨쉬는 남자, 아들들이여! 어떤 충동을 느끼는가? 무슨 꿈을 꾸는가? 한번쯤 성폭력을 하고 싶은가, 아니면 위장이 뒤집히도록 술 퍼 마신 후 '돈 가지고 나와' 하면 쪼르르 달려 나오는 그런 여자를 만나고 싶은가, 여기 한 착한 여자가 여기 한 나쁜 여자가 그리고 남자가 있다. 이들은 사랑(?)한다.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하지만 '더 이상 헤매지 말자' '겨레의 늠름한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 '조국을 지키는 보람찬 길'을 갈 수 없는 꼽추 아들. '군인아들을 낳지 못하고 자궁을 들어내는' 어머니. '어머니 대신 아버지에게 자궁을 빼앗기는 여자'딸. 이들의 잔혹한 러시안 룰렛 게임이 시작된다. 지금---
군인인 아버지 그는 항상 "겨레의 늠름한 아들로 태어나 조국을 지키는 보람찬 길에서 ---"를 외친다. 다시 말해서 아들, 군인, 그것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아들은 꼽추, 딸은 연극배우를 꿈꾸는 가녀린 소녀다.
아버지는 딸을 강하게 키운다. 아들처럼, 딸의 생일, 아버지는 생일축가 대신 군가를 가르키고 러시안 룰렛 게임을 한다. 아들 하나 더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하지만 그 희망은 아내의 자궁암 소식 속에 사라져 간다.
모든 것을 포기한 아버지 그의 육체와 정신은 파괴되고, 그러던 어느 날 , 미쳐버린 아버지는 어머니의 자궁을 드러내기 전에 아들을 낳아야한다는 비극적인 생각으로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그것은 딸의 자궁, 결과는 아버지의 강간이었다. 그때부터 잘못된 운명이 극중 극으로 펼쳐지는데---
[페이지] 011
후원인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후원회 명단
윤경아 김세경 조경선 권영부 윤희상 임선옥 류근헤
강재영 노수성 이상석 신성우 안 빈 유형하 조기원
이종현 이정수 김영태 장길표 박민희 김일권 이명훈
이일미 송용호 최일순 박용수 곽경희 최준용 김혜란
이란희 양태석 여길연 박경애 유근문 정용진 오정훈
이우근 황원성 정영란 강봉원 김혜경 홍학표 김영철
박호균 김형복 우영훈 유근호 김희건 오희창 이경표
배정선 남홍길 조병학 임공빈 남주희 진무진 조경숙
김영태 최정희 이화영 김지예 이종열 김형태 김준영
김진일 서주희 박은주 김기우 정영해 이원선
윤석주 하경섭 이맹철 최용기 조은예 신성선
후원인이 되시려면
·일반회원:40,000원(1년)
한번에 20,000원씩 6개월 단위로 지원해 주시면 됩니다.
·특별회원:50,000원(1년) 일시불로 지원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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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병의숙의 모든 공연의 초청장을 보내 드립니다.
·금병의숙에서 발행하는 모든 인쇄물(공연 프로그램 포함)을 보내 드립니다.
·기타 행사를 마련하여 후원인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 하고자 합니다.
[페이지] 012
극단에 대하여
1992년 1월 13일, 연극을 사랑하는 젊은 연극인들이 모였습니다. 각 극단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30대 초중반의 기획, 연출, 연기자들이 모여 폐쇄적이고 분파적인 기분의 보이지 않는 연극계의 울타리를 연극에 대한 애정으로 화합하고자 뜻을 같이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 무대를 통해 관객과 만나왔습니다. 말초적 상업극, 국적없는 연극, 질 낮은 재공연등이 흔히 보이는 현실 속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며 무대를 지켜 왔습니다. 흥행과는 관계없이 좋은 평을 받았던 "상어와 댄서" "외설 춘향전" "출구"등이 관객의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혼돈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극단 예군, 극단 모드라는 이름으로 그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제 극단 금병의숙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대표 김혁수와 동향이자 친척관계로서 예술세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소설가 김유정이 만든 야학, 금병의숙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강원도 춘천의 금병산에 있던 옳은 글방이라는 금병의숙은 이제 연극계의 의로운 연극방으로 자리잡고자 합니다.
지금의 연극계는 혼돈에 휩싸여 있습니다. 결코 예술이 아닌 외설행위를 상업극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합리화시켜 연극예술을 더럽히는 유치한 행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극단 금병의숙은 순수 연극만을 고집할 것입니다.
극단 금병의숙 가족들
김혁수/대표,희곡작가,연출가 신성우/음향,정동극장 주임
신상옥/배우 정용진/무대,미술
정연화/배우 서주희/배우
조경숙/배우 김원해/배우
이란희/배우 김지예/배우
이황의/배우 이길우/배우
[페이지] 013
금병의숙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금병의숙
금병의숙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937년, 29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한 소설가 김유정.
"봄봄" "동백꽃" "산골 나그네" "땡볕" "금따는 콩밭"등 향토색 짙은 주옥같은 작품은 남긴 소설가 김유정.
그는 1908년, 본관이 청풍인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에서 2남6녀 중 일곱째로 강원도 춘천군에서 태어났다.
병마와 가난 그리고 사랑의 아픔 속에서도 고향 춘천군의 실레마을에서 농촌 계몽운동을 펼쳤던 김유정.
금병의숙은 바로 그 당시 김유정이 만든 야학의 이름이다.
이를 극단 명칭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희곡작가이자 연출가인 대표 김혁수와 김유정의 작품세계라는 인연에 의해서이다.
어린 시절부터 김유정의 작품세계를 물론 그의 모든 것에 예술적 영향을 받은 김혁수.
이에 김유정의 진솔한 인생과 사랑 그리고 예술세계를 간직하고 새로운 예술 세계에 도전하는 극단 금병의숙이 되고자 한다.
[페이지] 014 * 원본 페이지 없음
[페이지] 015
희곡
검은 드레스
극단 금병의숙
이 작품 작가 및 극단의 승인없이 공연할 수 없습니다(02-938-8169)
[페이지] 016
등장인물
지수, 주영, 민수
남자(아버지 그리고 연극배우),
손님, 일본인, 목소리
무대
바닷가에 있는 허름한 다방과 극중 무대가 주공간이다. 극의 빠른 전환을 위해 과거 회상 및 기타 공간은 상징적인 무대미술과 걸맞는 조명으로 처리한다.
(※ 아버지는 상징적이어야 효과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손님, 일본인, 목소리등과 함께 일인다역을 하면된다. 그것을 하나의 '남자'로 상징표현한다.)
[페이지] 017
[장] 1장
어둠 속
규칙적으로 들리는 파도소리 뿐
[지수] (소리) 누,누구세요?
[목소리] 조용히 해.
[지수] (소리) 비켜요!
[목소리] 가만히 있어!
[지수] (소리) 싫어! 놔!
[목소리] 조용히 해!
[지수] (소리) 개새끼!
순간 빰을 때리는 소리 그리고 지수의 짧은 신음.
사이
파도소리와 함께 창문을 통해 천천히 밀려 들어오는 새벽빛.
그 빛을 통해 헝클어진 모습으로 소파 위에 누워있는 지수의 모습이 보인다. 담요를 덮은 채
잠시 후
멀리서 군가 소리 들려오면
과거로 돌아가는 분위기와 함께
무대 한 쪽에서 타이프를 치고 있는 민수의 모습이 보인다. 그 옆에는 하얀 드레스 한 벌
고통스럽게 창작에 몰두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흉칙스럽기까지 하다. 꼽추에 군복을 입은 모습
글이 잘 안써지는 듯, 몇 번이나 타이프를 치던 종이를 찢어 던진다.
[남자] (소리) 지수야!
각자의 공간에서 놀라는 지수와 민수
지수는 재빨리 일어나 군복을 입기 시작한다.
그런 지수의 모습을 다른 공간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민수
[남자] (소리) 지수야, 아버지 왔다!
[페이지] 018
군모를 눌러쓰는 지수
이때 들어오는 남자 (아버지)
[남자] 지수야, 생일 축하한다. 그리고 대학 합격도.
케익을 내미는 남자
하지만 망설이는 지수
[남자] 녀석---(케익에 초를 꽂으며) 초 열 여덟 개 맞지? 우리 지수, 이제 다 컷구나--- 대학생이라--- 지수야, 이리 오너라 축하의 노래를 불러야지.
쭈삣거리는 지수
[남자] 정지수 소위, 위치로!
지수, 케익 뒤에 선다.
[남자] 축가 시작한다. 축가는 "전우"
[지수] 아빠.
[남자] 아버지!
[지수] 아,버,지
[남자] 엄마는! 아프다. 너도 알잖아?
[지수] 네--- 그럼 오빠라도.
[남자] 나! 정인구 대령은 정지수 소위의 축가를 듣고 싶을 뿐이다. 알겠나?
[지수] --- 네.
[남자] 자, 축가를 불러라. 계속 불러라. 난 병원에 가서 네 엄마를 데려올 테니까. 미안하구나, 정 소위. 빨리 다녀오마.
나가려다가 미안한 듯.
[남자] 자, 나의 아들 정지수. 너의 생일을 축하한다.
[페이지] 019
군가 부를 준비 자세를 취하며 지수의 뒤에 서는 남자
역시 같은 자세를 취하는 지수
[남자] (허리를 좌우로 흔들며) 반동 간에 축가 한다. 축가는 전우, 축가 시작! 하나, 둘, 셋, 넷!
[남자 지수] 겨레의 늠름한 아들로 태어나 조국을 지키는 보람찬 길에서 우리는 젊음을 함께 사르며 깨끗이 피고질 무궁화 꽃이다---
뒤에서 어느 정도 같이 부르다가 흡족한 표정으로 나가는 남자.
남자가 나간 것을 느낀 지수, 일그러지는 표정과 함께 천천히 주저 앉는다.
지금까지의 모습을 훔쳐보던 민수, 하얀 드레스를 가슴에 안는다.
그리고 잠시 고통스러워 하다가 결심한 듯 지수의 방으로 향한다.
[지수] (느끼고) 오빠---
두리번 거리고 들어오는 민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애써 명랑한 표정을 짓는 지수.
[지수] 들어와, 오빠! (사이) 괜찮아. 아빠, 병원에 갔어.
[민수] 아버지!
[지수] 아버지.
[민수] 미안해. (사이) 어머니는 괜찮대니?
[지수] 모르겠어, 아버지가 갔으니까. (사이) 어? 그거 뭐야?
겸연쩍은 표정으로 드레스를 펼쳐 보이는 민수
[민수] 선물인데--- 맘에 드니?
[지수] (빼앗다시피 받아들고) 정말?
신이 나서 하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들어보는 지수.
한바퀴 돈다.
[페이지] 020
[지수] 오빠, 나 예뻐?
[민수] 그래, 군복보다 훨씬 좋다.
[지수] 나 매일 이런 옷 입고 싶어. 그런데 아버지는---
[민수] 그게 다 나 때문이야 . 내 몸이 이렇지만 않았어도---
[지수] 그런 말이 어디있어. 오빠가 동생한테.
[민수] 말만 오빠지. 내가 너한테 뭘 해 줄 수 있겠니? 죽기 전까지 너한테 한가지만이라도 해 줄 수 있다면 (사이) 지수야, 넌 소원이 뭐니? 여군?
[지수] 싫어. 그런 거.
[민수] 아버지는 그렇게 알고 있을텐데.
[지수] 그건 아버지 생각이지. 난 배우가 되고싶어.
[민수] 배우?
[지수] 그래. 배우가 되서 이런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하는거야. 오빠, 나 대학교 입학하는 대로 연극반에 들어갈 거야.
[민수] 여연극? 아버지가 알면.
[지수] 비밀. (사이) 어쨌든 난 꼭 배우가 될 거야. 참, 오빠가 나를 위해서 해줄 거 생각났다.
[민수] 뭔데?
[지수] 멋진 희곡을 쓰는 거야. 오빠 요즘 소설 쓰고 있지?
[민수] 어떻게?
[지수] 다 알아. (사이) 약속. 나를 위해서 그 소설을 희곡으로 고쳐서 연극 무대에 올리는 거야. 첫 날 관객은 오빠만 있으면 돼. 어때 , 멋있지?
[민수] 그래.
[지수] 약속한 거다?
결심의 표정을 짓는 민수
하지만 대답대신 초에 불을 붙인다.
[민수] 빨리 불어.
[지수] 자, 같이/ 하나 둘 세엣!
불고, 웃는 두 사람
[지수] 오빠, 축가 불러 줘야지.
[민수] 나, 노래 못하는데.
[페이지] 021
[지수] 같이 부르는거다. 시이작.
순간 민수는 "전우"를 지수는 "생일 축하합니다"를 부른다.
[지수] 오빠.
[민수] ---
[민수] (안스러운표정으로) 다시 시작.
지수 혼자서 "생일 축하합니다"를 시작한다.
따라하라는 시늉에 따라하는 민수.
이때 "민수, 너 이놈!"하는 남자의 목소리.
황급히 도망가는 민수
하지만 들어오는 남자에게 잡힌다.
[남자] 이 자식. 누가 여기 들어오랬어!
민수를 두들겨 패는 남자
[민수] (무의식적으로)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지수] 아빠!
순간, 멈추고 지수를 노려보는 남자.
[지수] 아.버.지.
[남자] 당장, 그 옷을 버려라.
망설이는 지수
[남자] 어서!
옷을 빼앗는 남자
[남자] 차렷!
[페이지] 022
그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민수
[남자] 다시는, 다시는 이따위 옷을 입지 않는다. 알겠나?
[지수] 아, 아버지---
[남자] 알겠나! 정 소위! 왜 대답이 없나? 정지수 소위! 넌 딸이 아니야, 아들이야 아들! 이젠 어쩔 수 없다. 넌 아들이어야 한다. 아들이어야--- (고통스러워하며 하지만 빠르게) 지수야, 어차피 알게 될테니까--- 방금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퇴원이 아니라 장기 입원 준비하라고--- 암이란다. 암--- 네 엄마는, 엄마는 이제 여자로서 모든 것이 끝났다. 네 엄마는 이제 더 이상 내게 아들을 낳아줄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여자가 내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 여자는 지금까지 그랬다. 내게 아들 다운 아들을 안겨주지 못했어. 저 따위 병신 아들, 군인이 될 수 없는 녀석 하나와 드레스나 입으려는 계집 하나 만을 낳았을 뿐이야. 그래도 난 기다렸다. 아직 늦지 않았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정말 사내다운 사내를 내 품에 안겨 주겠지--- 그런데 다 끝났어. 다! 이 세상에 사나이로 태어나서 영광스러운 군인의 길을 살아온 내게 그 여자는 아무 것도 해주지 않은 채, 죽을 날 만을 기다리는 산송장이 되고 말았어. 아들은 낳을 수 없는 산송장! (사이) 정지수! 넌 지금부터 사나이다. 알겠나? 사나이!
[지수] 아,아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사이) 엄마!
지수, 뛰쳐 나가려는데
[남자] 서!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는 남자.
놀라서 멈칫 서는 지수 그리고 민수
[남자] 선물이다. 이제야 너에게 줄 수 있게 되었구나. 열 여덟--- 난 그때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었다. 사나이로 태어난 영광을 조국에 바치고 싶었다. 그래서 군인이 되었지. 대령 정인구. 난 꼭 장군이 될 것이다. 그것만이 너에게 물려줄 수 있는 영광일테니까. 자 받아라. 이 총은 내가 명예로운 맹호부대의 소위로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 조국으로부터 받은 총이다. 나의 2세에게 주고 싶어 간직했던 이 총--- 정 소위! 난 베트공 여섯 놈
[페이지] 023
을 잡았다. 정확히 머리통을 날려 버렸지. 타앙! 바로 이 총으로(총을 보이며) 먼저 한가지 할 일이 있다.
주머니에서 총알 하나를 꺼내는 남자.
[남자] 오늘 우리 셋은 사나이로서 약속을 하는 거다.
총알을 장전하고 탄창을 휙 돌리는 남자.
[남자] 둘 다 이리와 서거라.
겁에 질려 서는 지수, 그 뒤에 민수.
천천히 민수 뒤에 서는 남자.
[남자] 이 권총에는 진짜 총알이 하나 들어있다. 자, 지금부터 목숨을 걸고 맹세하자.
총구를 머리에 대는 남자.
공포와 함께 뒷눈질 하는 지수와 민수
[남자] 난 조국의 영광스러운 사나이다.
순간, 방아쇠를 당기는 남자.
격발되지 않는다.
[남자] 자, 다음 민수.
[민수] 아. 아버지---
[남자] 어서!
권총을 받아 머리에 대는 민수
[민수] 난 조국의---
[남자] 영광스러운 사나이다.
[민수] 영광스러운 사나이다.
[페이지] 024
방아쇠를 당기는 민수
격발되지 않는다.
[남자] 지수.
지수에게 손을 내미는 지수.
하지만 건네주지 않는 민수.
[남자] 뭐해!
민수에게 빼앗다시피 권총을 가져와 자신의 머리에 대는 지수
[지수] 난 조국의 영광스러운 사나이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민수] (권총을 빼앗으며) 안돼!
조명 빠르게 꺼지고
[장] 2장
[주영] 정,지,수,--- 내가 지수를 처음 만난 곳은, 흑산도 어느 다방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한편의 연극을 연출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참으로 커다란 절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절망의 이유는 단지 흥행의 실패 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연극무대가 지금 우리의 현실을 앞서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연극인의 한 사람으로서 예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그렇게 결심하고 길고 긴 여행의 길을 선
[페이지] 025
택했습니다. 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연극 소재를 찾아서--- 그렇게 떠돌아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바로 흑산도, 그렇고 그런 여자들의 종착역이라고 불리는 흑산도였습니다. 그 흑산도에 있는 허름한 다방 겸 술집, 그곳에서 스물 세 살의 정지수와 꼽추인 그녀의 오빠 정민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조명 넓게 퍼지면
'흑산도 다방' 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여행을 떠나요'라는 대중가요를 부르고 있는 지수
손님, 취한 채 지수 옆에서 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자연스럽게 한 쪽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영의 모습도 보이고,
지수의 노래 솜씨와 율동에 정신 나간 손님, 그저 흥겨울 뿐이다. 아주 작은 몸집 그리고 술에 취해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다리가 꼬인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노래 끝나면
[손님] (박수치며) 여행을 떠나요! 좋았어. 지수18번 좋다구요. 굳, 굳 베리 굳.
[지수] 많이 취했나봐요 그만 가시는 게.
[손님] 가자구? 좋지. 가자구. 오늘 밤 내가 끝내줄테니까.
[지수] 그게 아니구요. 저는 저대로, 손님은 손님대로.
[손님] 뭐? 손님? 내 이름. 손님 아니야. 나 손씨 아니라구. 장씨, 장부금. 흑산도에서 제일 잘 나가는 흑산도의 유지, 장부금이라니까. 몇번을 말해야 기억하겠어?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왜 좋은 이름을 놔두고 손, 손씨를 찾는 거냐구.
[지수] 미안해요, 사장 (인사하며) 그럼.
[손님] 지수, 도대체 나한테만 왜 이러는 거야? 다른 놈들은 한번에 그냥 거시기 거시가 까지 가면서 왜 나만--- 왜,왜?
[손님] (장난스럽게) 아아--- 그랬구나아--- 지수는 내가 나이많은 줄 아는구나 아--- 그래서 나한테 손님 손님하면서 샐쭉거렸구나. 그치, 에이 깍쟁이, 지수우--- 나, 나이 별로 안먹었어. 나 젊어. 젊은 오빠 몰라? 그게 바로 나야, 나 나 팔팔하다구 (팔을 걷어 올리며) 봐, 이 알통. (포즈를 취하며) 이두박근, 끙, 삼두박근, 끙---
어이가 없어 피식 웃는 지수.
[손님] 지수가 웃었어. 지금 웃었지? 자기 웃었어.
[지수] 다음에 정신 말짱할 때 다시 오세요 네? 손님.
[손님] 장부금! (정색을 하고) 정말 이럴꺼야? 내가 이집 매상 얼마나 올려줬는데---나 이런 얘기하기 싫어하는 사람인데--- 이 흑산도 다방에 딸린 식구들, 다 내가 먹여 살리는 거라구. 사실 커피 몇 잔 팔아서 먹고 살 수 있어? 영업 끝난 시간에 매일 같이 와서 양주 팔아주고, 노래 불러 주고, 팁 주고--- 더 이상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너 거기에 금테 둘렀냐? 왜 그렇게 비싸게 굴어. 그리고 그렇게 비싸? 비싸면 얼마야? 내가 줄게. 주면 되잖아. 얼마야? 얼마!
손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지수의 얼굴에 던진다.
이를 악물고 부르르 떠는 지수.
[손님] 자, 이제 말로 할 때 따라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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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려보는 지수
[손님] 나와! 씨팔!
순간, 자신의 옷을 풀어 제끼는 지수.
이때 들어오는 민수(손에는 대본이 들려있다)
[지수] 자, 가져, 가져!
[손님] 엉?
[지수] 가지란 말이야! 씨팔 놈아!
사이
[손님] 뭐?
손님, 지수에게 다가서는데
손님을 가로막는 민수
[손님] 이 새끼는 뭐야? 어? 꼽추 아냐? 재수없게, 비켜 이새끼야!
민수의 멱살을 잡는 손님 순간,
빠르게 다가가 손님의 얼굴을 주먹으로 강하게 때리는 주영.
고꾸라지는 손님.
[손님] (겁먹은 모습으로) 너, 너---
주영, 한발 다가서자.
[손님] 갈게, 가면 되잖아, 간다구.
황급히 도망가는 손님.
[지수] (안으며) 오빠!
[주영] 괜찮으십니까?
[페이지] 028
천천히 일어서는 민수
주영에게 말없이 인사하고
[민수] 가자. 지수야.
나가는 두 사람.
주영, 떨어진 대본을 주워들고 넘겨 보는데.
이때, 다시 들어오는 민수.
[민수] 주세요.
주영, 계속 넘겨 보는데
[민수] 그거, 제 겁니다.
사이
[주영] 희곡이군요.
재빨리 나가는 민수.
나가는데
[주영] 나, 연극 연출가인데--- 좀 읽어봐도 될까요?
돌아서는 민수의 표정과 함께
조명 바뀌면
[민수] 그렇습니다. 나의 어설픈 희곡이 강주영이라는 연극연출가에 읽혀지게 된 것은 정말이지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한 나--- 소설을 쓰다가 내 동생 지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설프게나마 희곡을 썼던 나--- 내가 지수한테 해주고 싶었던 진정한 선물, 그 생일의 약속. 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어설픈 희곡을 읽은 강주영이라는 연출가가 연극으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난 정말이지 건방지게 말했습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제 여동생을 주인공으로 출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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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 주십시오. 제 여동생은 이런 데 있을 여자가 아닙니다. 제 여동생을 배우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 연출가는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잠시 나를 쳐다 보더군요. 물론 그럴 수 밖에 없겠죠. 잠시 후, 그 연출가는 말하더군요. 그럽시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한마디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흑산도 밀물에 실려 들어와 흑산도 바람따라. 춤추며 살아가던 내 동생 지수는 연극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지수가, 연극을 하기 위해 이곳 흑산도를 떠난 것입니다. 흑산도를---
[장] 3장
음악소리 들리고
흑산도 다방
술을 마시고 있는 주영과 민수
무대 위에서는 손님이 술에 취해 '여행을 떠나요'를 부르고 있다.
[손님] ---그 곳으로 여행을 떠나요오--- 지수야아---(사이) 야, 사장! 정지수 찾아와 정지수. 이 씨팔놈들아--- 내가 정지수 때문에 이 술집에 쏟아부운 돈이 얼마인데--- 정지수 어디로 빼돌렸어. 야, 사 장! 정지수 찾아오란 말이야. 안들려!
취한 것 같은 주영
[주영] 세 달 만이죠? 우리가 다시 이렇게 보는 게.
[민수]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지수는 잘 있나요?
[주영] 우선 술부터 마시자구요.
[민수] 지수는 잘 하나요? 공연이 얼마 안남았을텐데---
[주영] 그럼요,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민수] 다행이군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주영] 나한테요? 난 관객만 기다리면 되는 삼류연출가라구요, 삼류연출가의 작
[페이지] 030
품에 출연한 스타 정지수! 지수, 독기있던데요? 완전히 목숨 걸었어요. 가끔 지수의 눈빛을 보면 마치 사형장에서 총살을 기다리는 장군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그런 배우가 주인공인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민수] 착한 아이인데.
[주영] 아니, 그게 아니구요.
[민수] 그럼?
[주영] 민수씨 나 답답해 죽겠습니다. 민수씨의 좋은 희곡과 지수라는 좋은 배우를 만나 공연을 올리게 되었는데 왜 이럴까요?
[민수] 무슨 일이 있군요. 그렇죠?
[주영] 아뇨, 아뇨, 아니라니까요, 그저, 그저--- 지수를 보면 볼수록--- (갑자기 흥분하며) 민수씨, 지수가 이런 생활을 했들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닙니까? 아니 분명히 있어. 그렇죠? 그런데 지수는 숨기고 있어요. 아, 물론 나한테 시시콜콜히 말할 이유는 없지만--- 이상한건, 지수가 써 오는 부분 말입니다.
[미수] 지수가 써오다뇨?
[주영] 지수가 연습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연출님, 제가 대본을 조금 고쳐도 되나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아무렴. 여성 심리극인데 당연하지. 그 후부터 자주 대본을 고쳐 오더라구요. 그런데--- 그런데, 이상하다 이겁니다. 아니 이상하다는 표현보다는 뭔가 모를 매력? 하여튼 지수의 상상력에 놀랍니다. 지수가 직접 써서 이 연극에 삽입시킨 내용을 보면--- 뭔가 커다란 아픔이 있는 여자구나. 그렇지 않다면 이런 극단적인 상상력은--- 솔직히 무섭습니다. 지수가---
[민수] 지수가 너무 제 멋대로 한다는 말인가요?
[주영] 지수에 대해 알고 싶다 이 겁니다. 지수의 모든 것을.
[민수] 네?
[주영] 민수씨, 같이 갑시다.
[민수] 저보고 이 흑산도를 떠나라는 말입니까?
[주영] 지수에게는 민수씨가 필요합니다. 또 내게도.
[민수] 안됩니다. 난 그러 수 없습니다.
[주영] 왜죠? 옆에서 나와 지수를 도와주면 안됩니까?
[민수] 난, 난--- 오래 전에 약속했습니다. 내 자신과 그리고 지수와--- 지수를 위한 글을 써 주기로, 그리고 그 글이 연극무대에 올라갈 수 있도록. 그것이 내 소원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지수의 기억에서 지워져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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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지수는 이 못난 오빠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약속이 지켜진 이상. 난 지수 옆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정말이지 난 지수와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아, 내가 첫관객이 되어주겠다는 약속도 했었죠.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결코---
[주영] 갑시다. 지수 옆으로, 나와함께. 정지수한테!
이때 술에 취해 쓰러져 있던 손님,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든다.
[손님] 야, 너 정지수 알아? 정지수 아냐구! 너 방금 전에 분명히 정지수! 하고 소리 쳤잖아.
주영, 손님을 노려보는데
[주영] 어, 이 자식 봐라. 너 눈깔 힘 못빼? 너, 나 누군줄 알아? 눈깔 힘 빼!
순간, 벌떡 일어서는 주영
[민수] 앉으세요
[주영] (털썩 앉으며) 씨팔.
[손님] 뭐? 씨팔? 너 이 쌔끼 지금 어른한테 욕했지.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새끼가 어른한테 욕했어. (민수를 보고) 어? 그러고 보니. 너, 너! 그 때 그 놈들 맞지? 너희 놈들--- 나쁜 놈들이지? 불쌍한 여자 등처먹는 놈들. 너희같은 놈들 피디수첩에서 많이 봤어. 그것이 알고싶다. 경찰청 사람들에서도. 너, 임마. 혹시 정지수 기둥서방 아니야? 맞아. 너 정지수 팔아 먹었지? 어디다 팔아 먹었어? 어디야? 거제도? 울릉도? 소록도? 어느 섬이야!
[민수] (말리며) 그만 돌아가세요.
[손님] 손 치워! 더러운 손! 인신매매단의 그 더러운 손. 너, 너희들--- 그대로 있어. 야, 사장! 여기 인신매매단 있다! 사장, 사장! 이런 병신, 도망갔어. 무서워서? 하지만 난 안 무서워. 안무섭다구. (주머니를 뒤지며) 어딨지? 어디있더라? 여깃다 (핸드폰을 꺼내든다) 봤냐? 핸드폰. (다이얼을 누르며) 인신 매매단 신고는--- 일일이? 너희들 가만히 있어. 너희같은 놈들은 콩밥 먹어야 돼. (사이) 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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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비스! 으이그--- 이 놈의 아날로그 핸드폰은 매일 노 써비스야. 아날로그 좋다며 팔아 먹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뭐? 디지타알?
어이가 없이 웃는 주영
[손님] 너 웃었지? 웃었어. (권투선수 같은 폼으로) 꼼짝마. 나 파출소 갔다 올 때 까지 꼼짝마. 알겠어? 이 놈들아. 특히 너 (주영게게 다가가며) 너, (슬쩍 떨어져서 손가락으로 주영의 머리를 톡톡 치며) 너, 알았어. 임마?
주영, 벌떡 일어나 손님의 멱살을 잡는다.
[민수] 참으세요!
주영, 손님을 내팽개친다.
바닥에 쓰러지는 손님.
[손님] (황급히 기어나가며) 어이구--- 인신매매단이 사람 친다! 인신매매단이 사람 죽인다!
[민수] 그만 가죠.
[주영] (획 돌아서며) 민수씨.
[민수] 제발 그만 하세요.
[주영] 나, 나 말입니다--- 정지수를---
[민수]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수, 부탁합니다.
[주영] 내가 부탁하면 안됩니까?
[민수] 네?
[주영] 민수씨한테, 지수와 나를.
[민수] 그 말은?
사이
[주영] 왜, 그럼 안됩니까?
[민수] 그럼 지수를?
[주영] 네.
[민수] 정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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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 도와주십시오
[민수] 믿을 수가 없군요.
[주영] 나도 지금의 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난 지수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감싸주고 싶구요. 그게 사랑이겠죠? 하지만 지수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싸구려 동정이라고 생각하겠죠. 내가 두려운 게 바로 그겁니다. 동정이 아닌 사랑--- 아무래도 내가 지수를 사랑하나 봅니다.
조명, 천천히 꺼진다.
[장] 4장
연극무대
연극 연습 중이다.
무대 구석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이고
[지수] 탕! 그리고 무서운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열 여덟 아직 풋사랑을 동경하던 그 꿈 많던 소녀는 그 침묵의 시간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날 이후 그 소녀에게는 살아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인생이 주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죽음의 시간을 강요했죠. 그 죽음의 시간이란 바로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대생의 꿈을 빼앗아 버린 아버지. 그리고 그 죽음의 시간---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가출--- 하지만 난 그 간단한 방법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빠 때문이었습니다. 오빠, 불쌍한 오빠--- 만약 내가 가출하게 되면 오빠는 아버지의 그 엄청난 게임에 의해 희생될 지도 모른다는--- 내 생일에 있었던 그 무서운 게임--- 탕! 난 조국의 영광스런운 사나이다. 난 조국의 영광스러운 사나이다. 난 조국의 영광스러운 사나이다. 난 조국의 영광스러운 사나이다. 난 조국의 영광스러운 사나이다---
[주영] (소리)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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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밝아지면
주영, 대본을 들고 무대위로 올라온다.
[지수] 오늘은 연습을 여기까지. 모두 수고했어요. 이제 공연이 며칠 안남았으니까 내일부터는 하루종일 연습하겠습니다.
[남자] (다가오며) 연출가님.
[주영] 왜?
[남자] 이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귀신에 홀렸다고나 할까요?
[주영] 무슨 소리야?
[남자] 이 연극, 내용이 뭔가--- 너무 한맺힌 사실주의라고나 할까? 이거 실제 상황이죠? 정지수--- 저 배우도 이 희곡 내용과 비슷한 과거가 있는 거 같다는 느낌! 가끔 정지수가 써온 대본을 연출가님이 삽입하던데--- 어때요? 제 예리한 관찰력? 어쨌든 분명한 건 연출가님이 이 희곡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러니까 비슷한 아픔을 갖고 있는 여배우를 찾아 헤맸고그 여배우가 바로 정지수라는 거죠. 그런데 이 희곡 원작자는 도대체 누굽니까?
[주영]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연기나 잘 하라고.
[남자] 그나저나 이번 작품은 관객 많이 들겠죠? 으시시한 사실주의 연극이니까. 이럴 때 비극이 히트해야 하는데. 요즘처럼 코메디 판을 칠 때 말이에요. 이번에 흥행에 성공해서 돈 벌면 다음에는 코메디 하자구요. 요즘 세상에는 코메디 해야 한다구요. 비극은 한번이면 돼요.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웃으려고만 하는데 어떻게 해요. 아, 물론 비극 좋아하는 관객도 있지만 그건 이번 작품을 꽉 채울 정도의 숫자고요, 코메디 관객은 무궁무진 하다구요 검은 드레스라. 돈은 벌 것 같아서 걱정은 안하는데--- 이번에 돈벌면 아예 연극 때려 치우고 콘서트나 제작 하세요. 원, 들어보지도 못한 것들이 가숩네 하고 판 치는 거 보면, 하긴 그 놈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어요. 돈 벌자고 하는 짓인데--- 실력도 없는 놈들 가수시켜 준다고 꼬시고 판내주는 제작자란 놈들이 죽일 놈들이지--- 방송국 피디란 놈들도 마찬가지구--- 아이구, 더 기막힌 건 그런 가수같지 않은 가수들을 떼지어 우르르 따라 다니는 그 불쌍하고 한심한 이 나라의 청소년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나라에 진정한 가수는 조용필로 끝난 것 같아요. (노래한다) 누가 연극을 순수하다 했는가아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손으로 막노동이나 할 거얼---
[주영] 노래연습 그만하고 연기연습이나 해라. 응?
[페이지] 035
[남자] 하려고 해도 뭐가 있어야죠. 저도 좀 움직이게 해주세요. 이게 뭡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꼼짝도 못하고 저 구석에 앉아서--- 조명은 어둡지--- 제 애인이 와서 봐도 출연했는지 조차 모르겠어요. 나원, 창피해서---
[주영] 헛소리 계속 할거야? 자, 내일을 위해 그만 퇴장!
궁시렁 거리면 나가는 남자.
주영과 지수의 시선 잠시 마주치고
주영, 머뭇거리다가 지수에게 다가선다.
[주영] --- 지수, 수고했어.
주영의 말투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는 듯, 어딘가 어색하고 퉁명스럽다.(시선도 피하며)
[지수] 할말이 없네요.
[주영] 무슨 뜻이지?
[지수] 오늘 연습. 엉망이죠?
[주영] 글쎄 --- 무슨 일 있나?
[지수] 아뇨---
[주영] 그래? (나가려하며) 그럼.
[지수] 저! 나한테 관심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영주] (약간은 당황하며) 관심?
[지수] 헷갈려요. 어떤 때는 나하네 관심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주영] 그, 그래? (사이) 어쨌든 너무 부담 갖지 말라구.
[지수] 하지만.
[주영]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거지?
[지수] 말씀하세요. 이 연극에서 제가 쓴 부분이 마음에 안들면
[주영] 어?
[지수] 너무 자극적이라든가, 현실과 안맞는다든가.
[주영] 아냐. 아주 좋아. 나도 이 연극을 좀 극단적으로 몰고 가고 싶었는데--- 내가 워낙 꽉 막힌 놈이라서. 그런데 지수가 써 넣은 부분이 내가 망설이던 부분이라 좋아. 사실 그게 현실 아니겠어? 언제까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고 숨기고 있겠어. 오히려 드러내 보여야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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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어떤 방법으로 해결책도 나올 수 있는 거고,
[지수] 연출님도 내 경험을 토대로 쓴 거라고 생각하세요?
[주영] 그거야--- 저 녀석이--- 지수가 너무 사실적으로 잘하니까---
[지수] 괜찮아요. 언젠가는 말할 기회가 있겠죠.
잠시 시선을 마주치고
[지수] --- 저.
[주영] ---?
[지수] 술 한잔 사주세요.
[주영] 마침 잘됐군.
[지수] 네?
[주영] 반가워할 사람이 있어서.
[지수] 저를요? 누가요?
사이
[주영] 가지.
휭하니 먼저 나가는 주영.
그 모습을 보는 지수의 표정과 함께
조명 꺼지고
[장] 5장
우산을 받쳐들고 객석을 향해 나란히 앉아있는 지수와 주영.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데.
[지수] 원래 그래요?
[주영] 뭐가?
[지수] 술 마시면 말이 없어져요?
[페이지] 037
[주영] 글쎄---
[지수] 무슨 말이든 해봐요.
[주영] 무슨---?
[지수] 재미있는 얘기요.
피식 웃는 주영
[지수] 왜 웃어요?
[주영] 아니,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지수] 그럼 그 얘기 해봐요. 지금 생각난 옛날 얘기.
[주영] 글쎄, 재미 없을 텐데.
[지수] 빨리요.
[주영] 별 얘기는 아니고,--- 오래 전에 만났던 여자친구가 그런 말을 하더라구. 재미 없어서 못만난다구--- 그땐 그말에 왜 그렇게 화가 나던지. 벌컥 소리를 질렀지. 유모어 책 사다가 만날 때마다 한 쪽씩 읽어주면 될꺼 아니야! (씁쓸하게 웃고) 아니면 코메디언이랑 살아라,
[지수]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주영] 헤어졌지 뭐.
[지수] 그깟 일로 헤어져요? 더구나 연출님같은 분이?
[주영] 나 같은 사람?
[지수] 선택도 쉽게 안하지만 포기도 쉽게 안하는 고지식한 사람?
[주영] (웃으며) 하지만 별 수 있어?
[지수] 지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말할 수 있으니 다행이네요.
[주영] 그러니까 나한테 어려운 거 요구하지마.
[지수] 좋아요, 그럼 무슨 얘기하죠?
[주영] 미안해.
[지수] 나, 미안해라는 단어 싫어해요.
[주영] --- 어쩌지? 재미없어서.
[지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나 남자가 헛소리나 조잘거리는 거 무지무지 싫어하는 여자예요. 이런 말이 있어요. 아시겠지만--- 인생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희극이요 인생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비극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예요. 난 인생을 느끼면 살고 싶어요. 물론 더 힘들 겠지만.
[주영] 그 말을 아는군.
[페이지] 038
끄덕이는 지수
사이
[지수] 우스워요.
[주영] 뭐가?
[지수] 지금까지 한 말이.
[주영] 왜?
[지수] 고상한 말 실컷 하면서 막상 연기는 안되니.
[주영] 그렇지 않아.
[지수] 피이- (사이) 우리 서로 흠집내기해요. 먼저 해보세요.
[주영] 무슨 흠?
[지수] 야, 지수 너 왜 그렇게 못하냐? 니가 배우야? 이렇게요.
[주영] 잘하는데 뭐.
[지수] 남들한테는 큰 소리도 잘치면서 저한테는 왜 그러는 거죠?
[주영] ---
[지수] 무슨 이유가 있죠?
[주영] 아, 아니.
[지수] --- 말해보세요.
[주영] 그, 그건---
[지수] 그건?
사이
[주영] 나, 나도 모르겠어. 지, 지수를.
시선 마주친 채
사이
[주영] (피식 웃으며) 무지하게 미워하나봐.
사이
[주영]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이었어. (차마 쳐다보지 못한 채) 나, 난 널 사랑한다. 지수야, 널 사랑해.
[페이지] 039
놀라는 지수 그리고 모욕당했다는 표정이 스친다.
이때 다가오는 민수
[민수] 지수야!
[지수] 오, 오빠!
[민수] 잘 있었니?
[지수] 어떻게 된 거야?
다정한 모습의 남매.
주영, 두 사람에게 우산을 넘겨주고 천천히 돌아서는데.
[민수] 주영씨.
[지수] 부르지마.
주영 고개를 떨구고 걸어간다.
사이
[민수] 무슨 일 있었니?
[지수] ---
[민수]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저렇게 보내면 되니.
[지수] 개자식, 미친놈, 더러운 놈, 저 미친 놈이 나한테 원하는 게 뭔지 이제야 알겠어. 어쩐지 고상한 척하면서--- 뭐? 사랑? 사랑한다구?
사이
[지수]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달려가서 주먹이라도 휘둘러야하는 거 아니야?
[민수] 저 사람.
[지수] 저 놈! 그런 자식이 무슨 연출가야. 좀 다른 것 같았는데 이제보니 똑같은 속물이야.
[민수] 글쎄---
[지수] 뭐?
[민수] 달라.
[지수] 지금 뭐라고 했어?
[민수] 다른 것 같다고 했어.
[페이지] 040
[지수] 그래서?
[민수] 그냥 그렇다는 거야. 느낌이.
[지수] 그 느낌 틀렸어.
[민수] 그럴까?
[지수] 오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민수] 어쨌든 고마운 사람 아니니?
[지수] 그래. 고맙지, 갈 데까지 간 여자, 걸레같은 여자, 다 죽어가던 여자, 용서 할 수 없는 과거를 가진 여자, 미친 여자! 다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줬으니 얼마나 고마워. 게다가 아무래도 너한테 관심있는 것 같으니 감지덕지하고 잘해 봐라. 그 사람이 싫다고 하지만 않으면 매달려서라도 애 낳고 잘 살아라. 그러다 보면 모든 걸 잊을 수 있을 거다. 모든 건 꿈이었다고 생각해라. 하룻밤의 악몽. 됐어? 오빠가 하고 싶은 얘기, 맞지?
[민수] 너 정말 왜 이러니?
[지수] 오빠. 내가 왜 아직 죽지않고 살고 있는 줄 알아? 난 세상의 모든 남자들한테 복수할 거야. 솔직히 에이즈라도 걸렸으면 좋겠어. 그러면 더욱 확실하게 복수할 수 있을텐데.
[민수] 지수야!
[지수] --- 미안해 오빠. 하지만 이게 사실인 걸 어떻게 해. 세상 남자놈들은 다똑같아. 너 나할 것 없이. 맨정신에는 입바른 소리 좀 하다가 술만 취하면 진실한 척 누가 뭐래도 자기는 아닌 척하지. 이유는 단 하나. 자기 앞에 있는 여자를 갖기 위해서. 그럼 난 못이기는 척하고 아니 속아 주는 척하며 침대로 가고--- 그러면 사내들은 정신없니 달려들어, 자기들이 내 몸 위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다음 날 아침, 난 그 더러운 동물들을 쳐다보지. 그리고는 그 동물이 준 몇 푼의 돈을 주둥이에 쑤셔넣어. 그때 표정이 어떤줄 알아?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표정---
[민수] 제발 그만해.
[지수] 오빠도 알아야 돼. 난 알아. 오빠가 왜 이 못난 동생 주변을 맴도는지. 오빠는 날 이해시키고 싶겠지. 남자로서 아버지의 동료로서 내게 듣고 싶겠지. 아버지를 용서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포기해 오빠. 난 그렇게 살았어. 미친 년처럼.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면서. 하긴 손님한테 그러니 한 곳에 오래 있을 수가 있었겠어? 그래서 다른 술집으로 팔려가고, 또 팔려다니고, 그때 누군가가 그러더군. 이러다가 흑산도에 끌려가게 돼. 거기 가면 끝이야, 끝. 그런데 결국 흑산도까지 흘러갔고--- 그래서 난 내 인생이 그쯤에서 끝나는 줄 알았어. 그런데
[페이지] 041
연극에 출연하게 된 거야. 내 가슴속의 이 엄청난 이야기를 담은 연극무대에--- (사이) 우습지? 내가 배우라니.
[민수] 네 꿈이잖아. 이제 연극무대 위에서 모든 걸 다 떨쳐버려. 그리고 정말 좋은 배우가 되길 바란다.
[지수] 농담하지마. 난 그저 많은 사람들한테 내 얘기를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을 뿐이야. 일종의 복수지.
[민수] 정말 그 것뿐이니?
[지수] 그래.
[민수] 내 눈을 보고 말해. 정말이야?
대답하지 못하는 지수
[민수] 넌 누굴 복수할 자격이 없어. 네 인생 네가 선택한 거야.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네가 선택한 것일 뿐이야. 아버지가 준 돈 왜 안받았니? 그 돈만 있었어도 그따위 밑바닥 생활은.
[지수] 그만!
[민수] 내 말 들어!
[지수] 싫어! 아버지가 준 돈이라구? 돈? 세상에 자기 아버지한테 화대 받는 여자 봤어!
조명 꺼지고
[장] 6장
공연 중이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지수.
[지수] 세상에 어떻게 그런일이---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 했습니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 있어서는 안될 사건이 터진 그날 이후--- 모든 비난은 나를 향했습니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난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페이지] 042
아버지가 아닌 내가요.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난 자궁암 때문에 저 세상으로 떠날 날 만을 기다리고 있던 엄마한테 이 엄청난 일에 대해서 한마디로 하지 못한 채 떠났습니다. 내가 떠나던 날 엄마는 말했습니다. 어디가서 무엇을 하며 살더라도 다른 사람 가슴 아프게 하지마라. 그리고 엄마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마 엄마는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엄마의 병 때문에 치료비 때문에 집안이 기울었고--- 그것을 견디지 못한 딸이 떠나는 거라고--- 그래서인지 엄마는 하나 밖에 없는 딸에 대한 죄책감으로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게 아니에요. 엄마, 나 아버지라는 사람 때문에 떠나는 거에요--- 이 악몽을 가슴에 담은 채--- 내 소중한 노래를 부르며---
노래로 이어진다.
(노래. 이제는)
내일은 오늘과 다르리라고 그렇게 믿었답니다.
어젯밤 꾸었던 그 악몽이 어슴프레 지워질 때
내일은 오늘과 다르리라고 그렇게 믿었답니다
내일이 오면 잊고살았던 내이름 내추억이
새로운 희망으로 내작은 가슴에 안길거라고
하지만 알아요 오늘과 내일은 변하지않아
이제는 가렵니다. 잊혀진 이름을 지워버리고
내일은 오늘과 다르리라는 꿈도 버리고
조명, 천천히 어두워진다.
완전히 어두워지면
음악소리 작아지고
전체 조명 들어온다.
공연이 끝나고
꽃다발을 들고 들어오는 민수.
사이
지수, 들어오면
[지수] 오빠!
사이
[페이지] 043
[민수] 꼭 그래야만 했니?
[지수] 무슨, 말이야?
[민수] 이건 아니야, 이래서는 안돼. 어떻게 이런 얘기가 연극으로.
[지수] 미안해, 오빠. 마음대로 고쳐서.
[민수] 내가 쓴 대본, 고쳤다고 하는 말이 아니야. 어떻게 이럴수가 있니? 이렇게 모든 걸 그대로 다 들춰내 보여서---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야? 이게 네가 말한 복수니? 너 복수하고 싶어서 연극한 거니?
[지수] 오빠.
[민수] 그래, 복수하고 나니 어떠니? 시원하니?
[지수] 그래. 나 복수하고 싶었어. 모든 사람들한테 말하고 싶었어. 이 있을 수 없는 우리 남매의 이야기,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어. 세상의 모든 남자들한테. 남자, 너희들 그렇게 잘났니? 하고 소리치고 싶었어. 그래서 고쳤어. 오빠가 써준 대본, 싫었어. 하고 싶은 얘기도 다 못한 채 그저 우리 남매의 슬픈 이야기만--- 비겁해. 왜 우리가 비겁해야 돼? 우리가 뭘 잘못했어!
[민수] 우린 가족이야! 너, 나 그리고 아버지.
[지수] 아버지! 아버지! 제발 그만 할 수 없어? 나한테는 아버지가 아니야. 그저 더러운 한 남자일 뿐이라구!
순간, 들고있던 꽃다발을 떨어뜨리는 민수.
사이
나가는 민수
[지수] 오, 빠---
조명 꺼지고
[장] 7장
객석을 향해 나란히 앉아있는 지수와 민수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데
[페이지] 044
[지수] 미안해, 오빠.
사이
[지수] 오빠.
[민수] 그만두자. 그런 말 듣자고 네 얼굴 다시 보는 거 아니니까.
사이
[민수] 이제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쨌든 이제 시작했으니 부디 좋은 배우가 되길 바래. 무대 위에 선 네 모습, 예쁘더라.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무대 위에서 예쁜 이야기만 해. 내가 선물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지수] 왜 그래, 영영 이별하는 사람처럼.
사이
[민수] 나, 일본에 간다.
[지수] 뭐?
[민수] 어머니 모시고--- 얼마 못 사실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일본에 암 전문으로 유명한 병원이 있다니까--- 모든 거 정리하고 떠나기로 했어.
[지수] 언제?
[민수] 수속밟는 대로. 어쨌든 다행이다. 사실 너 때문에 미뤄왔는데--- 결과가 어떻게 되건 다신 안올거다. 너도 열심히 살아야 돼. 주영씨 너무 미워하지 말고. 그 사람.
[지수] 나도 갈 거야.
[민수] 무슨 소리야. 넌 공연 중이잖아. 그리고 앞으로.
[지수] 막 내렸어. 실패한 공연이니까. 오빠가 바라던 거잖아?
[민수] 안돼. 절대로 안돼.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지수] 나도 갈 거야.
[민수] 안된다니까!
[지수] 오빠!
[민수] 희망이 없어! 마지막이니까 모시고 가는 거야. 그리고 나도 이곳을 떠나고 싶고--- 지금까지 너를 위해 글을 쓰고 또 첫날 네 연극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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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너와의 약속, 다 지킨 거지? 이제부터 네 옆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도 아닌 연극이 있어. 그리고 주영씨도, 지수야, 어머니 말대로 우리 남의 가슴 아프게 하지 말자.
[지수] 그래서 나도 가겠단 말이야. 나 여기서 미쳐 죽는 꼴보고 싶어?
[민수] 지수야! 이제 다 끝났어. 언제까지 이럴 거니?
[지수] 언제까지? 언제까지라고 했어?
[민수] 그래. 이 바보야. 이제 다 끝났단 말이야. 아버지는.
[지수] 그 사람! 얘긴 하지마.
[민수] 들어야 돼.
[지수] 싫어!
[민수] 들어!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다 말했어.
[지수] 뭐?
사이
[민수] 지수야, 이제 다 끝났어. 정말 다 끝난 거야.
주저앉는 지수
[민수] 그래, 넌 용서 못하겠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니. 나 역시 그래. 다만 내가 너한테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한 건 너의 그 처절한 인생을 볼 수가 없어서--- 지수야, 희망도 없는 어머니를 왜 일본으로 모시고 가려는 줄 아니? (사이) 아버지가 자살했어. (사이) 어머니한테 모든 걸 털어놓은 그 날--- 그래, 난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너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널 보는 거니까---
[지수] 오빠.
[민수] 아무 말도 하지 마.
사이
[민수] 아버지의 말을 다 들은 어머니는 그대로 쓰러지셨어. 의사가 그러더라. 이젠 어머니를 보내드릴 준비를 해야할 거라고.--- 그래서 떠나는 거야. 우리 가족에게 한만 남긴 이 땅에서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싶지 않아서--- 어머니는 널 보고싶어 하지 않아. 아니 널 차마 볼 수가 없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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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어떻게 널 볼 수가 있겠니--- 네가 아버지 때문에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도 다 알게 되었는데. 그리고 지금의 넌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알고 있는데--- 나도 그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말 하지 않았어. 지수야--- 어머니를 편히 보내 드리자---
[지수] 엄마---
[민수] 너 기억나니? 우리가 어렸을 때--- 네 생일이었지. 하얀 드레스를 받아들고 케익 앞에 선 너---(민수, 지수의 뒤에 선다) 난 너를 위해 축가를 불렀지--- 축가를--- 겨레의 늠름한---
민수,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 곧 자신이 지수를 위해 배운 노래를 부른다.
서러움과 기쁨으로.
두 사람의 눈빛은 금방 눈물이라도 흐를 것만 같다
[민수]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지수의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 부르는 두 사람의 슬픈 모습과 함께
조명 바뀌면
[주영] 지수도 떠났습니다. 일본으로--- 자신의 어머니와 오빠가 떠난 후에. 지수는 떠나는 날 내게 말했습니다. 공연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 더 이상 연극배우가 될 수 없는 이유 그리고 내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는 이유를--- (사이) 그날 지수의 말 중 이런 말이 생각나는군요. "그날, 미안했어요. 선배님의 감정, 알아요. 거짓이 아니라는 거. 하지만 난 아니에요. 그럴 자격이 없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말했습니다. "저 바보 같죠?" 난 정신없이 말했습니다. (빠르게) 그래 넌 바보다. 같은 여자들한테 돌팔매질 당할 정도로 바보다. 넌 여성의식도 없니? 너의 현실을 떳떳하게 이겨낼 생각은 안하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여자로서 자신의 것을 찾아야 지. 바로 여기서.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사이) 지수는 살짝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더군요. 하지만 난 망설였습니다. 그러자 지수는 말했습니다. "선배님, 저의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제일 먼저 저한테 돌을 던질 거에요. 그러니 그저 아무 말 없이 보내 주세요. 웃으면서. 내 생각이 잘못된 걸까요? 아니에요. 만약 엄마라면 그냥 아무 말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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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손을 꼬옥 쥐어주실 거에요." 난 나도 모르게 지수의 두 손을 꼭 쥐었습니다. 지수는 말하더군요. "이젠 됐어요." 그리고 지수는 떠났습니다. 눈물을 참으려 애쓰는 내 모습을 보며---
[지수] (서툴게) 모시모시. 시쯔레이시마ㅆ아, 강고꾸징 정민수상 오네가이시마스. 강고꾸고 데끼루 히도 아리마생까? (여보세요. 한국인 정민수씨 좀 부탁합니다. 한국말 할 줄 아는 사람 없나요?)(사이) 네? 정민수씨가 떠났다구요? 엄마, 엄마는요? 네? 돌아가셨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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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소리 고조되며
순간, 지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는 일본인.
지수의 짧은 비명(하지만 그것은 차라리 포기한 모습이다) 소리와 함께.
빠르게 조명 꺼진다.
[장] 9장
조명 들어오면, 거리에 서있는 주영
[주영] 지수는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그녀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지수를 다시 만난 건 지수가 일본에서 돌아 온지 일년쯤 지나서였습니다. 당시 지수는 고향에 있었습니다. 혹시 올지 모르는 오빠를 기다리면--- 온통 희뿌연 군대 막사만 보이는 그 곳, 군화소리 군가소리만 들리는 그 속--- 지수의 고향에서--- 지수는 모든 것을 잊으려했습니다. 마음대로 소리치고 울지도 못한 채 가슴앓이만 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이) 내가 지수를 다시 만나게 된 건 우연이었습니다. 당시 난 다음 작품 준비를 위해 한동안 휴식기를 갖기로 하고 무전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수의 고향에 들리게 된 겁니다. 그저, 지수가 태어났고 살아왔던 지수의 고향 땅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하고싶은 말도 다 못한 채 울지도 못한 채 떠나 보내야만 했던 지수를---
조명 바뀌면서, 객석을 향해 나란히 서게되는 지수와 주영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데
[주영] 바람이 차군.
[지수] 이젠---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이
[주영] 얘기해줘서 고마워. 힘든 얘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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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주영] 우리 다시 시작하자. 나도 지수도.
[지수] 동정인가요?
[주영] 내가? 지금의 내가?
사이
[주영] 다시 막을 올리는 거야. 중단되었던 지수의 이야기를---
[지수] 두려워요.
[주영] 지수는 할 수 있어.
사이
[주영] 지수.
두 사람, 시선 마주치는데.
순간, 두 팔을 뻗어 빠르게 지수를 포옹하는 주영.
하지만 지수, 황급히 빠져나간다.
[지수] 안돼요. 난 자격이 없어요. 지난 시간동안.
[주영] 우리! 우리 둘만 생각하자. 지금부터는, 우리 둘만.
사이
천천히 두 팔로 지수의 어깨를 감싸고
가볍게 포옹하는 주영.
지수, 두 손으로 주영의 등을 느끼고.
주영은 한 손으로 지수의 머리를 감싸 안는다.
사이
주영, 두 손으로 지수의 뺨을 감싸고 그녀의 이마에 따뜻한 키스를 보낸다.
음악소리와 함께
조명, 천천히 어두워진다.
[페이지] 050
[장] 10장
음악소리 이어지고
공연 중이다.
구석에 앉아있는 남자.
들어오는 지수.
[남자] 미안하다.
[지수] 미안하다구요? (웃으며) 미안하다구요? 뭐가 미안하다는 거죠? 아버지가 딸한테.
[남자] 그만 하자.
[지수] 물론 그만해야겠죠. 그 더러운 동물 흉내를.
[남자] --- 네 통장에 돈 좀 입금했다. 그 돈이면 당분간 어디 가든 편히 쉴 수 있을 거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서 좀 쉬거라.
[지수] 쉬라구요? 숨어서? 내가 뭘 잘못했는데요?
[남자] 지수야!
[지수] 왜요? 죽이고 싶은가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내가요? 왜요. 진짜 죽어야 할 사람이 누군데요. 그건 바로, 당신이에요.!
잠시 침묵
[남자] : 미안하다.
사이
[지수] 다 끝났어요.
[남자] 하지만 난.
[지수] 아직도 무슨 변명이 남았나요?
[남자] 난 그저, 그저 네가 아들이기를 바랬다.
[지수] 그래서 군복을 입히며 키웠구요.
[남자] 미안하다. 그 날--- 기억하는구나. 아주 오래 전이었지. 열 여덟, 너의 생일---
지수 그래요. 그날--- 내 생일 케익을 군화발로 짓밟고 내게 군복을 입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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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그날 내 정신이 아니었다. 난 내 아들을 군인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 군인이 된다는 건 영예로운 일이다. 그런데 그런데 네 오빠는 군인은 커녕 사람 구실 조차할 수 없는 몸이고.
[지수] 오빠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했어요. 재능도 있구요.
[남자] 글쟁이 말이냐? 세상에 가장 별 볼 일 없는 놈들이 하는 짓이 바로 글쟁이다. 되도 않는 소리로 사람들의 생각을 속이는 글쟁이가 사나이로서 할 짓이란 말이냐? 사나이라면 사나이로 태어나게 해 준 이 조국을 위해 조국을 지키는 군인이 되어야한다. 그게 사나이가 갈 길이다. 그런데 너의 오빠는---
[지수]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딸에게 남자가 되기를 강요했나요?
[남자] 난 널 단 한번도 딸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넌 아들이야, 아들. 그래서 군복을 입혔고 그렇게 키웠다, 널. 하지만 커가면서 넌 그런 내 생각을 정면으로 거부하기 시작했어.
[지수] 당연하죠.
[남자] 난 네 엄마한테 말했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사랑하는 당신이 내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난 네 엄마를 사랑했다. 난 네 엄마 외에는 그 어떤 여자도 쳐다보지 않았다. 남들은 말했다. 이 세상에 정인구 대령의 아들을 낳아줄 여자는 많아! 더러운 놈들--- 그 놈들은 사나이가 아니다. 사나이라면 한 여자만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 더러운 놈들은 인간은 커녕 개 돼지만도 못한 놈들이다. 난 그렇게 너의 엄마만을 사랑했다--- 내게 필요한 건 사랑하는 내 아내가 낳아준 내 아들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네 엄마가 몹쓸 병에 걸리고 말았지. 자궁암---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냐. 의사는 말했다. 조만간 자궁을 드러내야 한다고. 자궁을 드러낸다구? 그렇게 되면--- 난 인정할 수 없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을 술로 다스리던 난 폐인이 되고 말았고,---. 아니 미친 놈 소리까지 듣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 결국 난 그토록 달고 싶었던 별을 달지 못한 채 군에서 쫓겨나야 했다. 이거 아닌데, 이건 내 인생이 아닌데--- 이렇게 쓰러질 수는 없었다. 육군 대령 정인구가 이렇게 쓰러질 수는 없었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 아들을--- 이미 폐인이 된 나였지만---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생각만은 살아 있었다. 그래서--- 이미 폐인이 되어버린 난--- 조국의 아들인 난--- 어느 날 네 엄마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보고 미친놈이라고 해도 좋다. 난 네 엄마의 자궁을 드러내기 전에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단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나중에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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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그날 밤, 네 엄마의 방에 있었던 여자는 네 엄마가 아니고--- 바로 너, 내 딸이었다---
흐느끼는 지수
[남자] 내가, 잘,못,했,다---
자신의 품에 간직하고 있던 지수의 드레스를 꺼내며
[남자] 이제 네게 돌려줄 때가 되었구나.
사이
[남자] 잘못했다--- 하지만 하지만 부디 네가 이해해 주길 바란다. 너무 큰 실수였지만--- 난 너의 아버지 아니니? 난 널 사랑한다.
[지수] (순간 귀를 틀어막으며) 악!
[남자] 지수야!
[지수] (미친 듯이) 널 사랑한다. 널 사랑한다.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널 사랑한다. 널 사랑한다. 널 사랑한다.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난 너의 아버지 아니니. 난 너의 아버지 아니니.
[남자] 지수야!
[지수] 지수야. 널 사랑한다. 널 사랑한다. 널 사랑한다. 지수야. 널 사랑한다---
미친 듯이 반복하는 지수
[지수]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널 사랑한다. 널 사랑한다. 지수야 널 사랑한다. 지수야 널 사랑한다. 지수야 널 사랑한다. 그리고 안았습니다. 널 사랑한다. 그리고 안았습니다. 널 사랑한다. 지수야.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그 딸을 그 딸을--- 강간했습니다!
기절하는 지수
조명 꺼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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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소리 들리고
조명 천천히 들어오면
몸을 일으키는 지수
[지수] (노래.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이토록 깊은 어둠 속에서
사랑은 시작되고 별은 빛나는데
칼을 쓰면 칼집이 헤어지고
영혼은 가슴을 도려내니
때로는 심장도 쉬어야하고
사랑에도 휴식이 있어야하네
밤은 사랑을 위해 있고
그 밤이 빠르게 사라진다해도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아련히 흐르는 달빛 사이를 (바이런의 시)
노래 끝나면
조명, 천천히 어두워지고
다른 한쪽에 조명 들어오면
실패한 공연-.
대본을 떨어뜨리는 주영
멍한 시선으로 박수를 치고 있다.
힘없이 슬픔에 잠긴 채.
조명 바뀌고.
[민수] 다음 날 지수는 떠났습니다. 물론 주영씨는 한동안 떠난 지수를 찾아 헤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주영씨가 폐인이 되지 않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던 주영씨는 어는 날 훌쩍 사람들의 곁에서 떠나가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난 알 수 있습니다. 주영씨는 지수의 과거를 다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니 깨닫게 된 겁니다. 지수가 직접 대본을 고쳐가며 출연했던 그 연극이 허구가 아닌 사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수의 과거라는 사실을--- 어찌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떠난 거구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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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그 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그렇게 끝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수와 주영씨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잊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까--- 어느 날,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주영씨가 지수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미 폐인이 되어버린 지수 앞에--- 이제 다 끝나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분명히 다 끝났는데--- (사이) 난 조국의 영광스러운 사나이다.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는 민수
총알 하나를 장전하고
탄창을 휙 돌린다
사이
총구를 자신의 머리에 대는데
[장] 11장
파도소리 들리고
어둠 속
단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새벽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빛을 통해 소파에 누워있는 지수와 구석에 서있는 주영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담요를 덮은 지수
잠시 후
지수, 정신을 차린 듯 재빨리 몸을 일으켜 두리번거린다.
당혹스러운 듯, 하지만 곧 냉정해지며.
[지수] (사이) 불을 켜 주세요.
이때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함께
구석에 앉아있는 주영의 모습이 보인다.
[지수]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테니 불을 켜 달라구요. 난 어두운 건 싫어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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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하겠다구요. 이젠 지겨워요! 이따위 유치한 짓. 그러니 제발 나 좀 그냥 놔둬요. 다시는 날 살려주지 말란 말이에요! 알겠어? 이 더러운 자식아!
[주영] 지수---
사이
놀라는 지수
[지수] 당, 당신--- 누, 누구죠?
주영, 천천히 일어나 불을 켠다.
주영을 보고 놀라는 지수
잠시 침묵
[지수] 어, 어떻게 여, 여길---
[주영] 오랜만이군. 오 년 만인가?
[지수] 어떻게 알았냐구요.
[주영] 모르겠어. 다만 분명한 건 지수가 여기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너무 늦었지만. 왜 몰랐을까? 우리가 처음 만났고 우리 연극의 무대가 되었던 흑산도를---
[지수] 돌아가세요.
잠시 침묵
주영, 지수에게 다가가 원고뭉치를 내민다.
[지수] 뭐, 죠?
[주영] 읽어봐.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지수] 왜! 가만 놔두지 않았어요, 왜! 바다 속으로 뛰어든 나를--- 도대체 이제 와서 뭘 읽어보라는 거죠? 뭔가 착각하고 있나본데. 여긴 흑산도에요, 흑산도, 나 같은 여자들한테 흑산도가 무얼 뜻하는 지 모르세요? (사이) 알려드릴까요?
옷을 벗으려하는 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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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 지수---안돼---
[지수] (냉정하게) 돌아가세요. 결국--- 나의 아픔이 당신에게까지 큰 아픔으로 주고 말았군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결코 당신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다른 사람 가슴 아프게 하면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마저도 지키지 못하고 마는군요--- 됐어요. 이젠 다 끝났어요.
[주영] 지수! 이건 현실이야.
[지수] 그래요 현실이에요. 현실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거에요! 다 끝난 현실!
[주영] 그게 자살이었나? 죽음밖에 없냐구.
[지수] (단호하게) 네. 그러니까 가만 놔두세요. 다시 바닷 속으로 뛰어 들어가더라도---
[주영] 지수!
[지수] 안녕히 가세요. 고마웠어요. 그리고.--- 미안해요.
[주영] 안돼. 그럴 수 없어. 이게 지수가 찾던 건가? 그토록 가슴 아파하며 진실하게 찾던 게, 그 결론이 이건가? 그럴 수 없어. 다시 시작하는 거야. 이 희곡을 읽어봐. 그리고 시작하자. 지난 일 모두 잊어버리고. 지수! 그게 지수가 갈 길이야! 우리가 갈 길.
[지수] 안돼요! 안 된다구요! 다 필요 없어요! (원고를 집어들며) 이게 뭐죠? 이게 다 뭐냐구요. 이따위 것들을 가지고 뭘 어떻게 하자는 거에요! 다시 시작하자구요? 그게 우리가 갈 길이라구요? 싫어요, 싫다구요.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죠? 다시 시작하자구요? 또요? 또다시 시작하자구요?
[주영] 지수!
하지만 원고뭉치를 격렬하게 집어던지기 시작하는 지수.
흩날리는 종이들.
[지수] 싫어! 싫어! 이 따위 게 우리를 다시 시작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천만에요. 싫어요! 싫어! 다, 다, 다 싫다구요!
쓰러지는 지수.
흐느끼는데
사이
그대로 서있던 주영,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바닥에서 지수의 드레스를 주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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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어깨에 걸쳐준다.
[지수] (생각에 빠지며) 오빠---미안해요. 꼬옥 입고, 이 드레스를 입고 무대 위에 서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젠 죽음의 드레스가 되고 말았어요--- 오빠, 나도 갈 거에요---
지수, 천천히 고개를 드는데
음악소리 들리기 시작하고.
지수, 결코 주영을 돌아보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바다'라는 마지막 목적지,
가야할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
[지수] 나--- 갈 거에요--- 썰물에 실려 바람에 실려--- 갈 거에요--- 갈 거에요---